미우라 기요히로
1. 개요
미우라 기요히로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투수로서 활약했다. 벳푸 쓰루미가오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7년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하여 1975년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1962년 17승을 거두며 전성기를 맞았고, 1965년에는 최우수 평균 자책점 타이틀을 획득했다. 1973년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로 이적 후 1975년 은퇴했으며, 통산 132승을 기록했다. 은퇴 후에는 코치로 활동했으며, 2016년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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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수명 | 미우라 기요히로 |
|---|---|
| 원어명 | Kiyohiro Miura |
| 일본어 표기 | title: 미우라 기요히로 alphabet-type: 로마자 alphabet: Kiyohiro Miura kana: みうら きよひろ kanji: 三浦 清弘 ko-s: 미우라 기요히로 ko-t: 미우라 키요히로 |
| 출생일 | 1938년 9월 2일 |
| 사망일 | 2016년 3월 27일 (향년 77세) |
| 국적 | 일본 |
| 출신지 | 오이타현 벳푸시 |
| 신장 | 180 |
| 체중 | 82 |
| 수비 위치 | 투수 |
| 투구 | 우투 |
| 타석 | 우타 |
| 고등학교 | 오이타현립 벳푸쓰루미오카 고등학교 |
|---|---|
| 프로 입단 연도 | 1957년 |
| 첫 출장 | 1957년 7월 29일 |
| 마지막 경기 | 1975년 9월 18일 |
| 선수 경력 | 난카이 호크스 (1957 ~ 1972)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 (1973 ~ 1975) |
| 코치 경력 |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스 (197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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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 선수 -
송재박
송재박은 일본과 한국 프로 야구에서 선수와 코치로 활동하며, 일본에서는 세이부 라이온스와 요코하마 다이요 훼일스에서, 한국에서는 OB 베어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고, 은퇴 후 두산 베어스 코치로 활동하며 우수 코치상을 수상했다. -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 선수 -
가토 하지메
가토 하지메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 출신으로, 투수로서 19년간 활동하며 신인왕 수상, 노히트 노런 달성 등의 활약을 펼쳤으며, 은퇴 후에는 야구 해설가와 지도자로 활동하다가 직장암으로 사망했다. -
1938년 출생 -
백낙청
백낙청은 대한민국의 영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 사회운동가로서, 《창작과비평》 창간, D. H. 로런스 연구, 유신 정권 비판, 남북 화해와 통일 운동 참여, 민족 문학론과 분단 극복론 주창 등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
1938년 출생 -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는 경제학자이자 정치인으로, 페루 중앙준비은행 총재, 에너지광산부 장관, 경제재정부 장관, 총리 등을 역임했으며, 2016년 대선에서 당선되었으나 오데브레히트 스캔들로 인해 2018년에 사임했다. -
2016년 사망 -
신영복
신영복은 대한민국의 경제학자, 사회운동가, 대학교수, 저술가로서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수감 생활 중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집필하여 반향을 일으켰고, 출소 후 관계론을 중심으로 사상을 발전시키며 독특한 서체로 민중과 소통했으며,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
2016년 사망 -
낸시 레이건
낸시 레이건은 배우로 활동하다 로널드 레이건과 결혼하여 캘리포니아 주지사 부인과 영부인으로 활동하며 백악관 개조, 패션, 마약 퇴치 캠페인을 주도했고 남편의 정치 활동에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2016년에 사망했다.
2. 선수 경력
벳푸 쓰루미가오카 고교 시절 1956년 하계 고시엔 대회(제38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고, 프로에서는 난카이 호크스와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에서 뛰며 최우수 평균 자책점 타이틀을 획득했다.
2.1. 고교 시절
벳푸 쓰루미가오카 고등학교 시절 에이스 투수로 활약하며 1956년 하계 고시엔 대회(제38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다. 1차전에서 아시카가 공업고등학교(도치기현)를 꺾었으나, 2차전에서 요나고히가시 고등학교(돗토리현)에 0대 1로 석패했다. 고교 동기로는 우익수였던 야마모토 유키요시가 있었고, 1년 선배로는 이나오 가즈히사가 있었다.
2.2. 프로 선수 시절
1957년, 야마모토 유키요시와 함께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하여 프로 1년차부터 1군에서 등판 기회를 얻었다. 1961년까지는 뚜렷한 활약을 보이지 못했지만, 1962년부터 선발진의 일원으로 활약하며 개인 최다 성적인 17승을 기록했다. 이듬해 1963년에도 13승을 기록하며 팀의 주축 투수로 자리잡았다.
1965년에는 1.56의 시즌 평균 자책점으로 최우수 평균 자책점 타이틀을 획득했다. 그해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맞붙은 일본 시리즈에서는 2차전에 구원 등판했지만 연장 10회에 나가시마 시게오에게 2점 홈런을 맞고 패전 투수가 됐다. 3차전에서는 선발로 기용됐지만 1회에 또다시 나가시마에게 2점 홈런을 허용하는 등 3회 도중에 강판됐다. 1966년에도 15승을 기록하며 스기우라 다다시, 미나가와 무쓰오 등과 함께 난카이 전성기 시대의 투수진을 이끌었다.
1972년에는 9승을 기록했지만, 1973년 현금 트레이드로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로 이적했다. 다이헤이요에서도 선발 투수로 활약했지만, 1975년에는 승리 없이 1패만을 기록하며 그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3. 은퇴 이후
1977년 다이헤이요의 후신인 크라운에서 2군 투수 코치를 맡았다. 1978년에는 크라운 스카우트를 거쳐 퇴단했다. 이후 오사카시 기타구 기타신치에서 복어요리점을 운영했다. 2016년 3월 27일, 폐렴으로 오사카시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향년 77세).
4. 선수로서의 특징
스리쿼터에서 던지는 강속구의 위력이 뛰어나고, 커브, 슬라이더, 슈트, 너클볼을 다양하게 구사했다.
* 특히 너클볼은 무라카미 마사노리가 "내가 본 중에서 일본인으로 정말 너클을 던진 것은 그 사람 정도였어요"라고 말할 정도였다. 손가락의 관절로 잡지 않고 미국의 투수와 마찬가지로 공에 손톱을 세웠다. 손바닥이 크고 손가락도 길었기 때문에 변화하는 공을 포수가 잡지 못했다. 고교 시절에도 동급생 포수에게 던질 수 없었고, 난카이에서도 동료와 캐치볼을 할 때 "미우라 씨, 그렇게 대단하면 던져 봐"라고 해서 던졌더니, 모두 얼굴에 맞아서 미간이 찢어지거나 이마에 맞았다. 시바타 타케시도 이마에 맞았고, 노무라 가쓰야는 스스로 잡을 수 없어서 싫어했는데, 불펜에서 투구 연습에서 직구, 슈트, 슬라이더를 던지고, 마지막에 '너클 간다!'라고 말하자, 노무라는 '어, 교체'라며 젊은 포수에게 잡게 했다.
* 경기에서는 하라모토 이사오가 "너클을 던져 봐"라고 타석에서 요구할 정도로 다른 구단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 에이스였던 스기우라 다다시는 '이것을 꼭 가르쳐 줘'라며 너클을 배우려고 했지만, 미우라는 '스기 씨, 배우지 않는 편이 좋아. 손톱 빠져'라고 대답했다. 그래도 스기우라는 '절대, 그런 일 없을 거야'라며 경기에서 던졌지만, 한 방에 손톱이 빠져서, 그것 때문에 한동안 쉬었다.
* 미우라가 너클을 익힌 것은 초등학교 5~6학년 때였다. 소프트볼에서 "조금 손톱을 세우면 꽤 다를 거야"라고 생각하고 던졌지만, 그 당시에는 너클의 이름도 몰랐다. 정식으로 익힌 것은 고등학생 때였으며, 누구에게 배운 것도 아니었다.
* 허리 약간 위쪽에서 던지는 투구 폼으로 꽉 막힌 플라이로 아웃시키는 제구력도 있었다. 이것은 노무라에게 배운 것으로, 자신이 배운 이전까지의 상식에서 벗어났지만, 하라모토도 이것에 애를 먹었다.
* 프로 입단 초기에는 강속구 투수로 명성을 떨쳤지만, 너클을 많이 던지게 되면서 연투파로 변모했다.
5. 에피소드
* 입단 당시 구릿빛 피부에 마른 체형 때문에 "간디"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 유연하고 강인한 팔꿈치가 스포츠 의학 연구 대상이 된 적이 있다.
* 2024년 파리 올림픽 요트 여자 49erFX급 대표인 나가마츠 세라는 그의 친척이다.
* 은퇴 후 경영했던 『미우라야』에 걸린 사진에는 실제 통산 승수와 다른 "150승"이라는 글자가 후원회장의 "봐도 아무도 모르니까"라는 의도에 의해 적혀 있었다. 그럼에도 미우라 본인은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말이지, 너클을 조금 더 사용했더라면 200승을 했을 텐데"라고 말했다.
6. 수상 및 기록
1965년에 최우수 평균 자책점 타이틀을 획득했다. 첫 등판, 첫 탈삼진, 첫 선발, 첫 승리, 첫 선발 승리, 첫 완투 승리, 첫 완봉 승리, 통산 1000투구 이닝, 통산 1500투구 이닝, 통산 100승, 통산 2000투구 이닝, 통산 500경기 등판, 통산 1000탈삼진 등의 개인 기록을 달성했으며, 올스타전에 2회(1965년, 1966년) 출장했다.
6.1. 타이틀
최우수 평균 자책점: 1회(1965년)
6.2. 개인 기록
| 구분 | 내용 |
|---|---|
| 첫 등판 | 1957년 7월 29일, 대 니시테쓰 라이온스 14차전(오사카 구장), 8회초에 4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마무리, 2이닝 1실점 |
| 첫 탈삼진 | 상동, 8회초에 가와무라 히사후미로부터 |
| 첫 선발 | 1958년 4월 6일, 대 도에이 플라이어스 2차전(고마자와 야구장), 5와 1/3이닝 2실점 |
| 첫 승리 | 1959년 4월 15일, 대 긴테쓰 버펄로 2차전(오사카 구장), 6회초에 2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 2이닝 무실점 |
| 첫 선발 승리 | 1962년 6월 15일, 대 긴테쓰 버펄로스 9차전(닛폰 생명 구장), 6과 1/3이닝 2실점 |
| 첫 완투 승리 | 1962년 7월 1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11차전(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9이닝 1실점 |
| 첫 완봉 승리 | 1963년 4월 11일, 대 도에이 플라이어스 2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
| 통산 1000투구 이닝 | 1966년 6월 7일, 대 니시테쓰 라이온스 8차전(오사카 구장) ※역대 121번째 |
| 통산 1500투구 이닝 | 1969년 8월 31일, 대 긴테쓰 버펄로스 21차전(오사카 구장) ※역대 65번째 |
| 통산 100승 | 1971년 4월 29일, 대 롯데 오리온스 4차전(오사카 구장), 선발 등판으로 6이닝 3실점 ※역대 53번째 |
| 통산 2000투구 이닝 | 1972년 8월 13일, 대 긴테쓰 버펄로스 16차전(오사카 구장) ※역대 39번째 |
| 통산 500경기 등판 | 1973년 6월 2일, 대 롯데 오리온스 전기 6차전(헤이와다이 야구장), 5와 1/3이닝 3실점 ※역대 29번째 |
| 통산 1000탈삼진 | 1973년 10월 7일, 대 긴테쓰 버펄로스 후기 13차전(헤이와다이 야구장), 8회초에 이와키 야스오로부터 ※역대 48번째 |
| 올스타전 출장 | 2회 (1965년, 1966년) |
7. 출신 학교
벳푸 쓰루미가오카 고등학교 시절에는 에이스로서 1956년 하계 고시엔 대회(제38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다. 1차전에서는 아시카가 공업고등학교를 꺾었지만, 2차전에서 요나고히가시 고등학교에게 0대 1로 석패했다. 고교 동기로는 우익수였던 야마모토 유키요시가 있었다.
8. 선수 경력
벳푸 쓰루미가오카 고등학교 시절 에이스로서 1956년 하계 고시엔 대회(제38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다. 1차전에서 아시카가 공업고등학교(도치기현)를 꺾었지만, 2차전에서 요나고히가시 고등학교(돗토리현)에게 0대 1로 석패했다. 고교 동기로는 우익수였던 야마모토 유키요시가 있었다.
1957년 야마모토와 함께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 프로 1년차부터 1군 등판 기회를 얻었으나 1961년까지 뚜렷한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1962년 개막 이후부터 선발진의 일원으로 활약하며 개인 최다 성적인 17승을 기록했고, 이듬해 1963년에도 13승을 기록했다. 1965년 1.56의 시즌 평균 자책점으로 최우수 평균 자책점 타이틀을 석권했다. 그해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맞붙은 일본 시리즈 2차전에서 7회에 조 스탠카를 구원 등판했지만, 연장 10회에 나가시마 시게오에게 2점 홈런을 맞고 패전 투수가 됐다. 3차전에서는 선발로 기용됐지만 1회에 또다시 나가시마에게 2점 홈런을 허용하는 등 3회 도중에 강판됐다. 1966년에도 15승을 기록하면서 이후 스기우라 다다시, 미나가와 무쓰오 등과 함께 난카이 전성기 시대의 투수진을 맡았다.
1972년 9승을 기록했지만, 1973년 현금 트레이드로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로 이적했다. 다이헤이요에서도 난카이 시절과 마찬가지로 선발로 활약했지만, 1975년 승리 없이 1패만 기록하여 그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 1977년 다이헤이요의 후신 크라운에서 2군 투수 코치, 1978년 크라운 스카우트를 거쳤고, 퇴단 후에는 오사카시 기타구 기타신치에서 복어 요리점을 운영했다. 2016년 3월 27일, 폐렴으로 오사카시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향년 77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