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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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사카 구장은 1950년 오사카 난바에 완공된 야구장으로, 난카이 호크스의 홈 구장으로 사용되었다. 1988년 난카이 호크스가 후쿠오카로 연고지를 옮긴 후, 긴테쓰 버펄로스 등의 준 홈구장으로 활용되었으며, 축구 경기, 콘서트, 각종 행사 등 다목적 시설로도 사용되었다. 1998년 폐쇄 후 철거되었으며, 현재는 복합 상업 시설인 난바 파크스가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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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구장 - [경기장/극장]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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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장 정보 | |
구장 명칭 | 오사카 구장 |
애칭 | Osaka Stadium |
위치 | 오사카부 오사카시 나니와구 난바나카 2-8-110 |
기공 | 1950년 1월 |
개장 | 1950년 9월 12일 |
폐장 | 1998년 11월 |
철거 | 2000년 |
소유주 | 오사카 스타디움 흥업 |
건축가 | 준조 사카쿠라 |
그라운드 | 외야만 잔디 (고려잔디) (폐장 시점) |
과거 사용팀 | 난카이 호크스 (1950년 ~ 1988년) 긴테쓰 펄스 (1950년 ~ 1957년) 요쇼 로빈스 (1953년 ~ 1954년) |
수용 인원 | 31,379명 (공칭 32,000명) |
규모 | 좌우익: 91.5 m 좌우 중간: 109.7 m 중앙: 115.8 m 백네트: 18.3 m |
펜스 높이 | 좌우익: 5.5 m 좌우 중간: 3.8 m 중앙: 3 m |
조명 | 조명탑: 6기 조도: 배터리 간 2600 룩스, 내야 2200 룩스, 외야 1500 룩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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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1950년 난카이 호크스의 홈구장 건설을 위해 오사카 구장이 개장했다.
1948년 일본 프로 야구 리그에서 난카이 호크스가 우승했을 때, GHQ 경제과학국장 윌리엄 마컷 소장이 난카이 구단 사장에게 홈 구장이 어디인지 물었다. 사장은 오사카부가 본거지이지만 자체 구장이 없어 효고현의 한신 고시엔 구장을 사용하고 있다고 대답했고, 마컷은 자체 구장을 건설해도 좋다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오사카시에 주목하여 난카이 난바역 남쪽 출구에 면한 옛 대장성 전매국(현 일본담배산업) 공장 부지에 구장을 건설하게 되었다. 이 땅은 에도 시대에 쌀 창고가 있던 곳으로, 이전에는 (난바) 구라마에초라는 지명이었다.[4]
1950년 9월 12일, 8개월 만에 사카쿠라 준조 건축사무소가 설계하고, 다케나카 공무점과 마노조가 시공하여 완공되었다. 당시 오사카 시내에서는 보기 드문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대규모 건축물로, "쇼와의 오사카성"으로 불렸다. 초기 그라운드 넓이는 양쪽 84미터, 중견 115.8미터였다. 부수입을 얻기 위해 관객석 아래에 임차인 공간을 마련했다. 스탠드는 급경사로 설계되어 "깔때기 구장"이라고 불렸으며, 내야 스탠드 경사는 37도에 달했다.[5]
그라운드가 좁아 투수에게는 어려운 구장이었다. 니시테쓰 라이온즈 OB(퇴역선수) 나카니시 후토시는 배트가 부러지면서도 타구를 외야 스탠드로 넘겼다고 하며, 스기우라 타다시 등 난카이 황금 시대 투수들의 제구력은 좁은 그라운드 덕분에 길러졌다는 설도 있다.
1951년, 간사이 지역 최초로 야간 조명 설비를 설치하고 첫 나이트 게임을 개최했다(난카이 대 매일 오리온스전). 내야 스탠드에는 일본 최초의 박스석이 설치되었다. 1950년대-1960년대는 쓰루오카 가즈토 감독이 이끄는 난카이의 황금기로, 매년 우승 경쟁을 벌여 간사이에서 한신을 능가하는 인기 구단이었다. 마이니치 방송은 1959년 난카이전 독점 중계 계약을 맺었으나, 1960년 난카이 측의 방영권료 인상으로 계약 범위를 축소했고, 1961년에는 계약을 포기하여 텔레비전 노출이 감소했다.[7][8] 1963년 8월 29일 난카이 대 한큐전에서는 비로 2시간 14분 중단 후, 그라운드에 가솔린을 뿌려 불을 붙여 경기를 재개하기도 했다.[9] 이는 노무라 가쓰야의 홈런 기록을 위한 난카이 측의 의도였으며, 현재는 소방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센트럴 리그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전 중계가 많아지면서, 간사이에서는 한신이 "요미우리의 대항마"로 인기를 얻었고, 퍼시픽 리그의 인기는 하락했다. 1970년대 후반 이후 난카이의 약화로 관객 동원 수가 저조했다.
난카이 본선 종점 난바역 남쪽 출구 역전, 미나미 번화가에 위치함에도 불구하고, 오사카 스타디움 흥업의 사사에 따르면, 본 구장의 연간 관객 동원은 1965년 이후 1988년까지 50만 명을 넘지 못했다 (공식 발표상 1988년 91만 5천 명이 최다였다).
난카이 전철에게는 좋은 조건이 아니었다. 철도 회사는 자사 연선 교외에 구장을 건설하여 운임 수입을 얻는 것이 일반적이지만,[10] 본 구장은 번화가 터미널역 앞에 있어 국철(현 JR 서일본), 오사카 시영 지하철(현 오사카시 고속 전기 궤도), 긴테쓰 난바선(1970년 개업) 등 다른 교통 수단으로도 접근이 용이하여[11] 운임 수입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난카이 전철 본사에서도 구단 매각이 노사 투쟁의 표적이 되곤 했다.
1957년까지 긴테쓰 펄스도 본거지로 사용했다. 긴테쓰의 본래 본거지인 후지이데라 구장에 당시 야간 경기 설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긴테쓰가 1979년과 1980년 일본 선수권 시리즈에 출전했을 때, 일본생명구장(닛세이 구장)의 수용 인원이 부족하고 후지이데라 구장에도 설비가 없어, 본 구장을 빌려 일본 시리즈를 개최했다(상대는 양년 모두 히로시마 도요 카프).[12] 1953년부터 1954년까지 다이요 쇼치쿠 로빈스가 본거지로, 한신도 1956년 고시엔에 조명이 설치될 때까지 준본거지로 사용했다. 본 구장 정면에는 난카이, 긴테쓰, 한신의 구단기를 장식한 간판이 있었다. 1954년 7월 25일 한신 대 주니치 드래건스전에서는 판정 문제로 2차례 분규가 발생, 관객이 그라운드로 진입하여 몰수 경기가 되기도 했다.[13]
난카이의 마지막 공식전은 1988년 10월 15일 대 긴테쓰전이었다. 기시카와 가쓰야의 결승 홈런으로 난카이가 6-4로 승리했다.[14]
2. 1. 건설 배경
난카이는 전쟁 전에는 사카이시의 나카모즈 구장(나카모즈 구장)을 주로 본거지로 삼았지만, 오사카 시내 및 고베시에서의 접근성이 좋지 않았다. 애초에 한신 고시엔 구장이나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과 같이 수만 명을 수용하는 스탠드를 갖추지 않아, 나카모즈 구장에서의 공식전 개최는 매우 적었다.[4]1948년 제3회 일본 직업 야구 리그에서 우승했을 때, GHQ 경제 과학국장 윌리엄 마컷 소장이 난카이 구단의 마쓰우라 다케마쓰 사장에게 "홈 타운·홈 그라운드는 어디인가?"라고 묻자 마쓰우라는 "오사카부가 본거지이지만, 자체 구장이 없어서 고시엔(효고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고, 마컷은 자체 구장을 건설해도 좋다고 제안했다.
이에 따라 난카이는 오사카시에 주목하여, 남부 최대의 번화가인 난카이 난바역 남쪽 출구에 면한 남서쪽 역전의 옛 전매국(현: 일본 담배 산업) 공장 부지에 구장을 건설하기로 했다. 이 땅은 에도 시대에 쌀 창고(난바 미쿠라)가 있던 곳으로, 현 지명 이전에는 (난바) 구라마에초라고 불렸다.
같은 오사카를 거점으로 하는 다이요 로빈스도 기타구 다마에바시의 간사이 씨름 협회 소유지를 매입하여 건설 후보지로 올렸지만, 니시노미야시(효고현)를 프랜차이즈로 하는 오사카 타이거스(한신)와 한큐 브레이브스가 "터미널의 우메다에 가깝고, 손님을 빼앗긴다"는 것을 두려워하여 반대했다.[4] 한신과 한큐는 난카이에 의한 난바 구장 건설을 지지했다.
일본 야구 연맹도 후보지를 시찰하여 난바 안을 채택했지만, 다이요의 오너였던 다무라 코마지로가 "난카이가 1년 이내에 건설하지 못하면 자신이 구장을 만들겠다"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난카이는 1년 이내에 완공할 수 있도록 공사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5]
2. 2. 난카이 호크스 시대 (1950년 ~ 1988년)
1948년 일본 프로 야구 리그에서 난카이 호크스가 우승했을 때, GHQ 경제과학국장 윌리엄 마컷 소장이 난카이 구단 사장에게 홈 구장이 어디인지 물었다. 사장은 오사카부가 본거지이지만 자체 구장이 없어 효고현의 한신 고시엔 구장을 사용하고 있다고 대답했고, 마컷은 자체 구장을 건설해도 좋다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오사카시에 주목하여 난카이 난바역 남쪽 출구에 면한 옛 대장성 전매국(현 일본담배산업) 공장 부지에 구장을 건설하게 되었다. 이 땅은 에도 시대에 쌀 창고가 있던 곳으로, 이전에는 (난바) 구라마에초라는 지명이었다.[4]1950년 9월 12일, 8개월 만에 사카쿠라 준조 건축사무소가 설계하고, 다케나카 공무점과 마노조가 시공하여 완공되었다. 당시 오사카 시내에서는 보기 드문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대규모 건축물로, "쇼와의 오사카성"으로 불렸다. 초기 그라운드 넓이는 양쪽 84미터, 중견 115.8미터였다. 부수입을 얻기 위해 관객석 아래에 임차인 공간을 마련했다. 스탠드는 급경사로 설계되어 "깔때기 구장"이라고 불렸으며, 내야 스탠드 경사는 37도에 달했다.[5]
그라운드가 좁아 투수에게는 어려운 구장이었다. 니시테쓰 라이온즈 OB(퇴역선수) 나카니시 후토시는 배트가 부러지면서도 타구를 외야 스탠드로 넘겼다고 하며, 스기우라 타다시 등 난카이 황금 시대 투수들의 제구력은 좁은 그라운드 덕분에 길러졌다는 설도 있다.
1951년, 간사이 지역 최초로 야간 조명 설비를 설치하고 첫 나이트 게임을 개최했다(난카이 대 매일 오리온스전). 내야 스탠드에는 일본 최초의 박스석이 설치되었다. 1950년대-1960년대는 쓰루오카 가즈토 감독이 이끄는 난카이의 황금기로, 매년 우승 경쟁을 벌여 간사이에서 한신을 능가하는 인기 구단이었다. 마이니치 방송은 1959년 난카이전 독점 중계 계약을 맺었으나, 1960년 난카이 측의 방영권료 인상으로 계약 범위를 축소했고, 1961년에는 계약을 포기하여 텔레비전 노출이 감소했다.[7][8] 1963년 8월 29일 난카이 대 한큐전에서는 비로 2시간 14분 중단 후, 그라운드에 가솔린을 뿌려 불을 붙여 경기를 재개하기도 했다.[9] 이는 노무라 가쓰야의 홈런 기록을 위한 난카이 측의 의도였으며, 현재는 소방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센트럴 리그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전 중계가 많아지면서, 간사이에서는 한신이 "요미우리의 대항마"로 인기를 얻었고, 퍼시픽 리그의 인기는 하락했다. 1970년대 후반 이후 난카이의 약화로 관객 동원 수가 저조했다.
난카이 본선 종점 난바역 남쪽 출구 역전, 미나미 번화가에 위치함에도 불구하고, 오사카 스타디움 흥업의 사사에 따르면, 본 구장의 연간 관객 동원은 1965년 이후 1988년까지 50만 명을 넘지 못했다 (공식 발표상 1988년 91만 5천 명이 최다였다).
난카이 전철에게는 좋은 조건이 아니었다. 철도 회사는 자사 연선 교외에 구장을 건설하여 운임 수입을 얻는 것이 일반적이지만,[10] 본 구장은 번화가 터미널역 앞에 있어 국철(현 JR 서일본), 오사카 시영 지하철(현 오사카시 고속 전기 궤도), 긴테쓰 난바선(1970년 개업) 등 다른 교통 수단으로도 접근이 용이하여[11] 운임 수입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난카이 전철 본사에서도 구단 매각이 노사 투쟁의 표적이 되곤 했다.
1957년까지 긴테쓰 펄스도 본거지로 사용했다. 긴테쓰의 본래 본거지인 후지이데라 구장에 당시 야간 경기 설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긴테쓰가 1979년과 1980년 일본 선수권 시리즈에 출전했을 때, 일본생명구장(닛세이 구장)의 수용 인원이 부족하고 후지이데라 구장에도 설비가 없어, 본 구장을 빌려 일본 시리즈를 개최했다(상대는 양년 모두 히로시마 도요 카프).[12] 1953년부터 1954년까지 다이요 쇼치쿠 로빈스가 본거지로, 한신도 1956년 고시엔에 조명이 설치될 때까지 준본거지로 사용했다. 본 구장 정면에는 난카이, 긴테쓰, 한신의 구단기를 장식한 간판이 있었다. 1954년 7월 25일 한신 대 주니치 드래건스전에서는 판정 문제로 2차례 분규가 발생, 관객이 그라운드로 진입하여 몰수 경기가 되기도 했다.[13]
난카이의 마지막 공식전은 1988년 10월 15일 대 긴테쓰전이었다. 기시카와 가쓰야의 결승 홈런으로 난카이가 6-4로 승리했다.[14]
2. 3. 복합 시설로서의 활용
1972년, 난카이 난바역 개수 공사로 양쪽 펜스가 91.4미터로 확대되었다. 이는 축구 프로화와 인기를 예상한 구장 측의 야구와 축구 겸용 시도였다. 당시 오사카에서 국제 규격 축구 경기 시설은 나가이 육상 경기장뿐이었고, 야간 조명 시설도 없었다. (1996년 전면 개수로 설치) 그래서 오사카 중심부에 위치해 관객 동원이 가능한 오사카 구장에 주목했다. 1977년 펠레의 은퇴 경기 "축구 페스티벌 사요나라 펠레"가 개최되었지만, 경기장 크기는 축구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구장 스탠드 하층부에는 윈즈 난바(중앙 경마 장외 마권 판매소), 아이스 스케이트 링크, 탁구장, 문화 센터 등이 설치되어 야구를 중심으로 한 복합 시설로 이용되었다. 고서점가, 스포츠 용품점, 일본 자전거 진흥회, 유스호스텔 사무소 등이 입점했다. 문화 센터에는 도이 마사루 요리 교실, 이시이 카즈요시가 지도한 극진공수도 아시하라 도장 등이 있었다. (배우 신도 에이사쿠와 나카야마 타케오도 재적) 특히 아이스 스케이트 링크는 후쿠토쿠 상호 은행 아이스하키부가 연습과 경기에 사용했다.
교통이 편리한 위치 덕분에 간사이 지방에서 인기 스타 공연장 및 대규모 흥행 개최지로 자리 잡았다. 1974년부터 10년간 니시조 히데키가 솔로 가수 최초로 스타디움 콘서트를 개최했다.[15] 사이먼 앤 가펑클, 마이클 잭슨, 마돈나, 에릭 클랩튼 등 해외 슈퍼스타와 오자키 유타카, 와타나베 미사토, 체커스, 사잔 올 스타즈, TUBE 등 일본 가수들도 대규모 콘서트를 열었다. 1982년 일본 TV "울트라 퀴즈 사상 최대의 패자 부활전", 1983년 "전국 고등학교 퀴즈 선수권" 제1회 간사이 지역 예선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1960년대에는 프로 레슬링 경기장으로도 사용되어, 자이언트 바바 대 진 키니스키, 안토니오 이노키 대 조니 발렌타인 전 등 명승부가 열렸다. 1950년대에는 프로 복싱 경기장으로 시라이 요시오의 논타이틀전 등이 개최되었다.
프로 야구 시즌 오프에는 오사카부 내 자동차 딜러가[16] 중고차 세일을 그라운드에서 열기도 했다.
2. 4. 호크스 매각 및 후쿠오카 이전 이후 (1989년 ~ 1998년)
1988년, 난카이 호크스가 다이에에 매각되어 후쿠오카시로 이전한 후, 1989년과 1990년에 긴테쓰가 준 본거지로서 연간 10경기 정도의 주최 경기를 개최했다.[1] 1990년 6월 12일 긴테쓰 대 다이에 전에서는 당시 긴테쓰의 신인이었던 노모 히데오가 선발 등판하여 완투 승리를 거두고 100탈삼진 달성의 시즌 최속 기록을 세웠다(종전 최속은 에나츠 유타카).[1] 다음 날에는 다이에가 연장전을 제압하여 야마우치 타카노리가 "호크스" 마지막 승리 투수가 되었다.[1] 마지막 프로 야구 공식전은 1990년 8월 2일 긴테쓰 대 오릭스 브레이브스전으로, 몬다 히로미츠도 출전, 마지막 홈런은 연장 10회 초에 부머가 터뜨린 결승 3점 홈런이었다.[1] 당시에는 그 해 말 폐쇄는 결정되지 않았지만, 장래적인 철거는 기정 사실이었기 때문에 이 경기가 마지막 프로 야구 공식전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평일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29,000명의 관객이 몰렸다.[1]
1989년 이후 호크스의 매각·이전으로 인해 스케줄에 여유가 생겼지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 개최 기간 중 한신의 주최 경기는 개최되지 않았다.[1]
본 구장은 이미 구단 매각 전인 1986년 무렵부터 간사이 국제공항 건설 시작에 따른 난바 지구 재개발 계획에 의해 수년 내에 해체될 것이 결정되었지만, 이후 버블 붕괴 등으로 계획이 차례차례 동결되어 오랫동안 방치 상태가 지속되었다.[1] 말년에는 그라운드 부분을 사용하여 주택 전시장 "난바 오사카 구장 주택 박람회"로 이용되었다.[1] 그라운드 안에 모델 하우스가 들어서 있었지만, 관람석과 스코어보드도 그대로 남겨져 야구장으로서는 매우 드문 사용 예로 해외 건축 전문 잡지에도 소개되었다.[1] 또한, 전면적인 해체 공사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일부분을 개조하여 장외 마권장·윈즈 난바가 입주해 있었다.[1] 구장으로서의 역할을 마친 후에는 그라운드도 포장되어 주차장으로도 이용되었지만,[1] 엔터테인먼트로서의 활용은 극단 사계가 상설 극장으로 캣츠 시어터를 설치하여 뮤지컬 "캣츠"의 롱런 공연을 펼친 것을 비롯하여 사카모토 준지 감독·아카이 히데카즈 주연의 영화 "왕수"도 특설 텐트가 설치되어 상영되었다.[1]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오사카 대회에서도 1990년의 72회 대회까지 사용되었지만, 본 구장의 야구장 기능 폐지에 따라 오사카부 내에서의 구장이 부족해져 일부 경기를 효고현의 한큐 니시노미야 스타디움과 나라현의 나라시 고노이케 구장에서 1991년의 73회 대회부터 1993년의 75회 기념 대회 기간 동안 타 현에서 개최했다.[1] 도시 대항 야구와 더불어 사회인 야구의 2대 대회인 일본 선수권도 1980년부터 개최되었지만 1989년을 마지막으로 다음 해부터 그린 스타디움 고베로 변경되었다.[1]
1998년 10월 18일, 작별 행사 "야구 페스타"가 난카이 OB와 소년 야구 선수들을 초청하여 개최되었다.[1] 이 행사의 마지막 인사는 스기우라 타다시가 맡았으며, 스기우라의 인사가 끝나자마자 조명이 꺼졌다.[1] 그 후 해체 철거되어 2003년 10월에 대규모 복합 상업 시설 "난바 파크스"로 탈바꿈했다.[1]
2. 5. 해체 이후
3. 시설
- 부지 면적: 35,67435674m2
- 그라운드 면적: 12,21312213m2
- 스탠드 면적: 13,65313653m2
- 스코어보드: 수기 패널 방식이었으며, 두 차례 교체되었다.
- * 초대 스코어보드 (1950년 ~ 1974년경): 고라쿠엔 구장의 두 번째 스코어보드와 같은 형태였다. 중앙에 15회까지의 스코어를 표시하고, 하단에 그날의 경기 결과나 다른 구장 경기 속보(최대 3경기)를 나타냈다. 서브 보드가 완성된 후에는 광고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양쪽 사이드에는 세로 스크롤, 가로 쓰기 방식으로 선수명을 표기했다. 홈런이 나오면 측면 광고 부분에 "HOMERUN"이라고 적힌 네온사인이 켜지는 장치도 있었다. 1961년에는 1루 측 내야 스탠드 상단에 다른 구장의 결과 및 경과를 표시하는 전용 게시판(메인 스코어보드보다 작은 크기)이 설치되었다. 이 보드는 "스포츠닛폰 속보"라고 불렸다. 이 서브 보드는 두 번째 스코어보드 설치 공사 시 메인 보드로 사용되기도 했다.
- * 2대 스코어보드 (1975년 ~ 폐쇄): 인접한 빌딩 측벽에 부착하는 형태로 설치되었다. 스코어보드 상단에 12회까지의 스코어(총 득점, 안타, 에러 포함)를 표시하고, 하단에 가로 스크롤, 세로 쓰기 방식으로 선수명을 표기했다. (팀명은 구단 색상, 수비 번호와 팀명인 난카이는 녹색, DH는 흰색으로 게시) 중앙부에 회전 광고 간판(도쿄은행→난바 CITY)을 설치했다. 홈런이 나오면 외주에 있는 전구가 점멸함과 동시에 광고 부분이 홈런용 일러스트(2장)로 바뀌는 방식이었다. 1975년부터 폐쇄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스코어보드는 센터의 백스크린보다는 조금 라이트 스탠드 쪽에 설치되었으며, 구장 뒤편 빌딩(구 윈즈 난바・A관)에 부착된 형태였기 때문에 스탠드 철거 시 그대로 유지되었다. (스코어보드 자체는 2002년 11월 1일에 해체되었다.)

4. 교통
5. 에피소드
구장 외벽에 설치되었던 "오사카 구장" 간판(네온사인)은 해체 후, 호크스 팬이 개인 소유하고 있다. 2008년 소프트뱅크가 난카이 시대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치렀을 때, 교세라 돔 오사카 전광판 아래에 이 간판이 특별 설치되었다.[19]
6. 갤러리
참조
[1]
서적
Sport, Memory and Nationhood in Japan: Remembering the Glory Days
Taylor & Francis
2013
[2]
문서
[3]
문서
[4]
서적
南海ホークスがあったころ 野球ファンとパ・リーグの文化史
紀伊國屋書店
[5]
서적
ホークスの70年
ソフトバンククリエイティブ
2008
[6]
서적
建築課坂倉準三 モダニズムを生きる{{!}}人間、都市、空間
建築資料研究社
2010-08-10
[7]
문서
[8]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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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追憶のスタジアム(5)】大阪球場 南海ホークス黄金期の舞台(4)
http://www.sanspo.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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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大阪球場 南海本拠地はミナミの超一等地 ヤジに笑い身売りに泣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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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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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おかえりノムさん、44年ぶり南海に 新たに遺品展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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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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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セラドームに「大阪球場」が復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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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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