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오 가즈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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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나오 가즈히사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로, 1956년 니시테쓰 라이온스에 입단하여 1969년 은퇴할 때까지 활약했다. 뛰어난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리그를 대표하는 투수로 명성을 떨쳤으며, 1956년 신인왕, 4번의 다승왕, 5번의 최우수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획득했다. 1958년에는 일본 시리즈에서 4승을 거두며 MVP로 선정되기도 했다. 선수 은퇴 후에는 감독과 해설가로 활동했으며, 1993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2007년 사망 후 욱일소수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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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오 가즈히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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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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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이름 | 이나오 가즈히사 (稲尾 和久) |
출생일 | 1937년 6월 10일 |
사망일 | 2007년 11월 13일 (향년 70세) |
출생지 | 오이타현 벳푸시, 일본 |
포지션 | 투수 |
투구/타석 | 우투/우타 |
데뷔 리그 | 일본 프로 야구 |
데뷔 | 1956년 3월 21일 |
데뷔 팀 | 니시테쓰 라이온스 |
마지막 팀 | 니시테쓰 라이온스 |
은퇴 연도 | 1969년 |
NPB 통산 승패 | 276승 137패 |
평균 자책점 | 1.98 |
완봉승 | 43 |
투구 이닝 | 3,599 |
탈삼진 | 2,574 |
선수 경력 | |
선수 | 니시테쓰 라이온스 (1956년~1969년) |
감독 | 니시테쓰 라이온스/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 (1970년~1974년), 롯데 오리온스 (1984년~1986년) |
수상 | |
NPB 트리플 크라운 | 2회 (1958년, 1961년) |
일본 프로 야구 신인왕 | 퍼시픽 리그 신인왕 (1956년) |
일본 프로 야구 최우수 선수 | 퍼시픽 리그 MVP (1957년, 1958년) |
일본 시리즈 우승 | 3회 (1956년, 1957년, 1958년) |
최다승 | 4회 (1957년, 1958년, 1961년, 1963년) |
최고 승률 | 2회 (1957년, 1961년) |
평균 자책점 | 5회 (1956년~1958년, 1961년, 1966년) |
최다 탈삼진 | 3회 (1958년, 1961년, 1963년) |
베스트 나인 | 5회 (1957년~1958년, 1961년~1963년) |
영구 결번 | |
영구 결번 | 세이부 라이온스 #24 |
일본 프로 야구 기록 | |
최다승 | 42승 (1961년) (일본 기록, 타이기록) |
연속 승리 | 20연승 (1957년) (일본 기록) |
최다 등판 | 78경기 (1961년) (퍼시픽 리그 기록) |
최고 평균 자책점 | 1.06 (1956년) (퍼시픽 리그 기록, 일본 신인 기록) |
최다 투구 이닝 | 404이닝 (1961년) (퍼시픽 리그 기록) |
월간 최다승 | 11승 (1956년 8월) (일본 기록) |
일본 시리즈 완투승 | 4회 (1958년) (일본 시리즈 기록, 타이기록) |
일본 시리즈 승리 | 4승 (1958년) (일본 시리즈 기록, 타이기록) |
일본 시리즈 통산 승리 | 11승 ( 호리우치 쓰네오 와 타이기록) |
명예의 전당 | |
헌액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1993년) |
고등학교 | |
고등학교 | 오이타현립 벳푸 미도리가오카 고등학교 |
별명 | |
별명 | 철완 (鉄腕), 사이짱 (サイちゃん) |
2. 선수 경력
니시테쓰 라이온스에 1956년 입단하여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15] 벳푸 미도리가오카 고등학교 시절 난카이 호크스의 스카우트와 감독이 접촉할 정도로 주목받았으나,[13] 아버지의 권유와 고교 선배의 조언으로 니시테쓰를 선택했다.[14] 입단 당시에는 주목받지 못했지만, 캠프에서 주력 타자들을 상대로 좋은 투구를 보여주며 코칭스태프의 눈에 띄게 되었다.[16][17]
1956년 데뷔 첫해 다이에이 스타즈와의 개막전에 구원 등판하여 4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했고, 5월에는 긴테쓰를 상대로 첫 선발 등판하여 뛰어난 투구를 선보였다.[20] 시즌 내내 안정적인 활약을 펼치며 21승 6패, 평균자책점 1.06이라는 뛰어난 성적으로 최우수 방어율과 신인왕을 차지했다.[24] 요미우리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도 3승을 거두며 팀의 우승에 기여했고, 감투 선수와 최우수 투수로 선정되었다.
1957년에는 슈트와 슬라이더를 연마하고, 포크볼을 습득하여 더욱 강력한 투수가 되었다.[26] 시즌 20연승을 기록하고,[27] 35승 6패, 평균자책점 1.37, 승률 0.854로 다승, 최우수 방어율, 최고 승률 3관왕을 차지하며 리그 MVP를 수상했다.[29] 일본 시리즈에서도 2승을 거두며 최우수 투수로 선정되었다.
1958년에는 팀이 3연패 뒤 4연승으로 역전 우승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7경기 중 6경기에 등판하여 5경기에 선발 등판, 4번의 완투, 3차전 이후 5연투를 기록하며 26이닝 연속 무실점을 기록하는 등 놀라운 활약을 펼쳤다.[32] 이러한 활약으로 시리즈 MVP와 최우수 투수를 획득했고, "신님, 부처님, 이나오 님"[33]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1959년에는 30승을 거두었지만, 스기우라 타다시에게 밀려 무관에 그쳤다. 1960년에는 부상으로 고전했지만, 20승을 기록하며 5년 연속 20승을 달성했다.[37] 1961년에는 시즌 42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투수 4관왕을 달성했다.[40]
1962년부터는 혹사로 인한 팔꿈치 부상으로 고전했지만,[51] 1963년에는 28승을 거두며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54] 일본 시리즈에서는 오 사다하루를 11타수 1안타로 묶는 등 활약했지만, 팀은 패배했다.[55]
1964년에는 어깨 부상으로 승리 없이 시즌을 마감했지만,[59] 1965년 재기에 성공하여 13승을 거두었다.[62] 1966년에는 구원 투수로 활약하며 5번째 최우수 평균자책점을 획득했다.[64] 1969년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며 통산 276승을 기록했다.
2. 1. 주요 기록 및 수상
이나오 가즈히사는 일본 프로 야구 역사에 남을 수많은 기록을 세웠다. 주요 기록 및 수상 내용은 다음과 같다.'''주요 타이틀'''
타이틀 | 횟수 | 연도 |
---|---|---|
다승왕 | 4회 | 1957년, 1958년, 1961년, 1963년 |
최고 승률 | 2회 | 1957년, 1961년 |
최고 평균자책점 | 5회 | 1956년 ~ 1958년, 1961년, 1966년 |
최다 탈삼진(당시는 타이틀이 아님) | 3회 | 1958년, 1961년, 1963년 ※퍼시픽 리그에서는 1989년부터 타이틀로 제정됨. |
최다 선발승 | 5회 | 1957년(23승), 1958년(22승), 1961년(24승), 1962년(17승), 1963년(18승) |
'''주요 수상'''
수상 | 횟수 | 연도 |
---|---|---|
신인왕 | 1회 | 1956년 |
최우수 투수 | 2회 | 1957년, 1958년 |
MVP | 2회 | 1957년, 1958년 |
베스트 나인 | 5회 | 1957년, 1958년, 1961년 ~ 1963년 |
일본 시리즈 MVP | 1회 | 1958년 |
일본 시리즈 감투상 | 2회 | 1956년, 1963년 |
일본 시리즈 최우수 투수상 | 3회 | 1956년 ~ 1958년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 1993년 |
욱일소수장 | - | 사망일(2007년 11월 13일)부로 추서 |
'''기타 주요 기록'''
- 동일 시즌 최다 연승: 20연승(1957년)
- 최초 퍼시픽리그 선발 20승: 1957년 9월 18일 다이에이전(헤이와다이 야구장)(2-1 완투승)
- 월간 최다승: 11승(1962년 8월)
- 시즌 최다승: 42승(1961년)
- 시즌 30승 이상: 3년 연속 포함 4회(1957년 ~ 1959년, 1961년) ※연속 횟수 프로 야구 기록.
- 시즌 20승 이상: 8년 연속 8회(1956년 ~ 1963년)[141]
- 시즌 최다 탈삼진: 353개(1961년) ※퍼시픽 리그 기록.
- 시즌 최다 등판: 78경기(1961년) ※퍼시픽 리그 기록.
- 시즌 평균자책점: 1.06(1956년) ※퍼시픽 리그 기록·신인 기록.
- 시즌 최다 투구 이닝: 404이닝(1961년) ※퍼시픽 리그 기록.
- 시즌 최다 피안타: 358개(1963년) ※퍼시픽 리그 기록.
- 일본 시리즈 통산 완투: 9회
- 일본 시리즈 통산 승리: 11승(시리즈 타이 기록)[142]
- 일본 시리즈 등판 경기: 6경기(1956년, 1958년)[143]
- 일본 시리즈 완투: 4회(1958년)[144]
- 일본 시리즈 승리: 4승(1958년)[145]
- 일본 시리즈 투구 이닝: 47이닝(1958년) ※시리즈 기록.
- 일본 시리즈 누적 투구수: 578구(1958년) ※시리즈 기록.
- 일본 시리즈 피안타: 30개(1958년) ※시리즈 기록.
- 일본 시리즈 탈삼진: 32개(1958년) ※시리즈 기록.
- 일본 시리즈 연속 이닝 무실점: 26이닝(1958년)[146]
- 일본 시리즈 자책점: 12점(1963년)[147]
2. 2. 투구 스타일
이나오 가즈히사는 뛰어난 제구력과 다양한 변화구를 구사하는 기교파 투수였다. 주무기는 슬라이더였으며, 슈트와 포크볼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22] 특히,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는 투구 폼과 정교한 컨트롤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118]아오타 노보루는 "프로야구 역사상 진짜 슬라이더를 던진 투수는 후지모토 히데오, 이나오 가즈히사, 이토 토모히토 세 명뿐이다"라고 평가했다.[112] 이나오는 슬라이더 외에도 역방향 슈트를 비밀 병기로 가지고 있었으며, 타자의 의식이 슬라이더에 집중될 때 슈트를 던져 범타를 유도했다. 그러나 노무라 가쓰야는 이나오의 진짜 결정구가 슈트임을 간파했다.[112]
다이마이 오리온스의 강타자 에노모토 키하치를 상대하기 위해 포크볼을 익혔다. 에노모토 외의 타자에게는 포크볼을 던지지 않았으며, 에노모토와의 승부를 "스포츠가 아니라 진검승부, 결투와 같았다"라고 회상했다.[115]
노무라 가쓰야는 이나오의 변화구와 제구력을 극찬하며 "기교파" 투수의 대표격으로 꼽았다.[117] 그는 이나오의 직구가 빠르지는 않지만, 공의 구위와 체감 속도가 뛰어나 타자들이 어려움을 겪었다고 평가했다.[117] 특히 바깥쪽 컨트롤이 뛰어나, 주심이 하마사키 타다하루일 때는 볼 2, 3개 밖으로 벗어나도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았다.[119]
이나오는 상대 타자를 아웃시키는 공에서부터 거꾸로 계산하여 투구하는 "역산의 피칭"을 만들어낸 투수로 알려져 있다.[120] 그는 마운드에서의 매너도 훌륭하여, 상대 투수에게 마운드를 넘겨줄 때 로진백을 정해진 위치에 놓고 투구로 파인 부분을 정리하는 등 타자뿐만 아니라 투수에게도 모범이 되었다.
발 뒤꿈치를 땅에 붙이지 않고 발가락으로 서서 던지는 독특한 투구 폼은 어부였던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작은 배에서 노를 젓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109] 주니치 드래건스의 에이스 곤도 히로시는 이나오의 폼을 따라 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2. 3. "신님, 부처님, 이나오님"
1958년 일본 시리즈에서 이나오 가즈히사는 소속팀 니시테츠 라이온즈가 3연패를 당한 뒤 4연투하여 4연승을 거두는 대활약을 펼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32] 이때 언론과 팬들은 그의 활약에 경의를 표하며 "신님, 부처님, 이나오 님"이라고 칭송했다.[33]미하라 감독은 이나오의 계속된 등판에 대해 "그 해 3연패를 했을 때 패배를 예상했다. 누구를 던지면 선수나 팬들이 납득할 수 있을까 생각했을 때, 이나오밖에 없었다"라고 밝혔다. 훗날 병상에 있던 미하라는 이나오에게 4연투를 강요한 것에 대해 사과했지만, 이나오는 "당시에는 던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라고 답했다.[34]
3. 지도자 경력
이나오 가즈히사는 1969년 현역에서 은퇴한 후, 니시테쓰 라이온스와 롯데 오리온스(현 지바 롯데 마린스)의 감독을 역임했다.
1969년 시즌 종료 후, 나카니시 이타 감독이 성적 부진과 검은 안개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자, 이나오는 10월 26일 구단주 구스네 무네오로부터 감독 요청을 받고 수락했다. 32세로 전임 감독으로서는 최연소로 라이온즈 감독에 취임했으며, 현역 시절 등번호 '24'번을 감독 시절에도 그대로 사용했다.[67] 취임 당시 이나오는 구스네에게 검은 안개 사건으로 흔들리는 니시테츠 구단의 존속 의지를 확인하고 "내가 눈을 부릅뜨고 있는 한 절대 라이온즈를 망하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는 답변을 얻었다.[67]
감독으로서 처음 맞이한 캠프에서는, 억측 기사를 경계하여 보도 통제를 시행했는데, 언론으로부터 가와카미 테츠하루 감독의 커튼에 빗대어 "코뿔소 커튼"이라고 비판받았다.[74] 이나오는 세키구치 세이지를 헤드 코치, 와다 히로미를 배터리 코치로 초빙했다. 그러나 전년도 51승 중 3/2 이상에 해당하는 36승을 거둔 5명의 투수(이나오 자신 포함)를 잃은 투수진은 붕괴된 상태였고, 3년차 카와하라 아키라가 에이스 격으로, 2년차 히가시오 슈, 신인 미와 사토루 등을 계속 투입하지 않으면 운영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76] 전반기에는 겨우 15승밖에 거두지 못했고, 시즌에서도 43승 78패로 선두 롯데에 34게임 차로 뒤져, 팀 창단 이래 처음으로 최하위에 머물렀다.
검은 안개 사건으로 주력 선수를 잃어 경기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나오는 구단 프런트의 협력을 얻어 다른 구단에 선수 공급을 요청했지만, 호응하는 구단은 없었다. 그러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가와카미 감독만이 협력하여, 투수가 없을 것이라며 1969년 오프 시즌에 자이언츠로부터 타카하시 아키라, 다나카 아키라, 우메다 쿠니조, 니시테츠로부터 히로노 이사오, 하마무라 켄지의 3대 2 트레이드가 성사되었다.[77][78] 또한, 젊은 투수 카와하라, 히가시오, 야나기다 유타카를 강화 대상으로 육성했다.
10월 18일에 열린 시즌 최종전 난카이전(오사카)에서 히가시오를 선발로 내세웠지만, 3회 도중 4안타 3사사구 3실점으로 강판되었다. 이어서 등판한 야나기다 등도 얻어맞아, 5명의 투수가 20안타를 허용하며 17실점으로 대패했다.[79] 니시노미야시코토엔의 숙소로 돌아오자, 이나오는 카와하라, 히가시오, 야나기다 3명을 방으로 불러 호통을 치고 철권을 휘둘렀다.[79] 이나오는 이들 3명에게 "심신을 단련해 오라"는 지시를 내리고 오프 시즌에 요가 도장에서의 수행을 명했고, 3명은 시즈오카현미시마시에서 산속으로 들어갔다.[79]
1971년에는 이적생인 타카하시가 14승(13패)을 거두며 분전했지만, 기대했던 히가시오는 8승, 카와하라는 4승, 야나기다는 3승으로 성장세가 둔화되었고, 팀 전체적으로도 38승 84패로 선두 한큐에 43.5게임 차로 성적이 더욱 떨어졌다. 다음 해인 1972년이 되자, 히가시오가 리그 4위인 18승(25패)을 거두고, 가토 하지메가 17승(16패)으로 신인왕을 획득, 6년차 모토이 미츠오가 타율 .301을 기록하여 2루수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는 등, 젊은 선수들이 실적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팀은 47승 80패로 3년 연속 최하위에 머물렀다.
1972년 여름 무렵부터 니시테츠 구단의 매각 소문이 흘러나왔고, 팀이 술렁여 야구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게 되었다. 이나오는 "기술만 갈고 닦으면, 어디에 나가도 훌륭하게 밥은 먹고 살 수 있다"라고 역설했다. 선수들은 비로소 침착해졌지만, 선수들은 개인 플레이에 열중하게 되었다.[81] 결국 같은 해 10월 말에 구단이 니시닛폰 철도에서 후쿠오카 야구 주식회사로 매각되었다.[83] 구단 매각에 즈음하여 이나오는 감독 사임을 표명했지만, 새 구단주 나카무라 나가요시로부터 속행 지명을 받았고, 전 구단주 키모토 모토타카로부터 "니시테츠의 냄새를 남기고 싶다"라는 설득을 받아 감독을 계속 맡게 되었다.[84][85]
1973년부터 등번호를 "81"로 변경했다. 이 때 24번을 영구 결번으로 하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본인은 사양했다.[86]
1973년, 태평양 구단 프런트가 화제를 만들고자 기획한 "롯데와의 대립을 연출한다"는 영업 방침에, 롯데의 가네다 마사이치 감독의 제안에 응하는 형태로 동의, 오프 시즌부터 설전을 벌여 유감을 연출했다. 그러나 규슈의 탄광 폐쇄 후 게이힌 공업지대로 이주한 니시테츠 팬이 많았던 가와사키 구장에서의 롯데전에서 니시테츠가 참패하자 팬들이 관람석 의자를 부수고 난동을 부리거나, 6월 헤이와다이 구장에서의 롯데전에서는 경기 후에 팬들이 소란을 피워 롯데 선수들이 구장에서 퇴장할 수 없게 되어 기동대가 출동하는 등[87], 관계자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반응을 불러 "유감 경기"라고까지 불리는 사태에 이르렀다.
1974년에 구단이 포스터에 돈 뷰포드가 가네다를 난투로 넘어뜨린 그림을 사용한 포스터를 제작하자(이후, 경찰의 요청을 받아 회수), 이나오는 "난투까지 영업 재료로 할 필요는 없지 않나"라며 구단의 경영 방침에 상반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89] 같은 해 전기 3위를 기록하여, 감독 취임 5년 만에 처음으로 A 클래스에 들어갔지만, 후기 4위로 시즌 통산 4위를 기록했다. 같은 해 오프 시즌에 해임되었다.[90]
퇴임 후에는 RKB 마이니치 방송 해설자, 스포츠 닛폰 평론가(1975년 - 1977년)를 맡았다.[91]
1978년에 주니치 드래곤스의 1군 투수 코치로 취임했다.[92] 1980년에 퇴임했다.
1981년부터는 RKB·TBS 해설자로 복귀했다. 1982년에는 오사카로 이사하여 1983년까지 아사히 방송에서 해설자를 맡았다.
1984년부터 롯데 오리온스 감독을 맡아, 1986년까지 역임하였다.
연도 | 구단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게임차 | 홈런 | 타율 | 방어율 | 연령 |
---|---|---|---|---|---|---|---|---|---|---|---|---|
1970년 | 니시테쓰· 다이헤이요 | 6위 | 130 | 43 | 78 | 9 | .355 | 34 | 137 | .225 | 4.12 | 33세 |
1971년 | 6위 | 130 | 38 | 84 | 8 | .311 | 43.5 | 114 | .231 | 4.31 | 34세 | |
1972년 | 6위 | 130 | 47 | 80 | 3 | .370 | 32.5 | 110 | .242 | 4.12 | 35세 | |
1973년 | 4위 | 130 | 59 | 64 | 7 | .480 | 4위·5위 | 116 | .239 | 3.58 | 36세 | |
1974년 | 4위 | 130 | 59 | 64 | 7 | .480 | 3위·4위 | 90 | .235 | 3.46 | 37세 | |
1984년 | 롯데 | 2위 | 130 | 64 | 51 | 15 | .557 | 8.5 | 149 | .275 | 4.22 | 47세 |
1985년 | 2위 | 130 | 64 | 60 | 6 | .516 | 15 | 168 | .287 | 4.80 | 48세 | |
1986년 | 4위 | 130 | 57 | 64 | 9 | .471 | 13 | 171 | .281 | 4.34 | 49세 | |
통산: 8년 | 1040 | 431 | 545 | 64 | .442 | A 클래스 2회, B 클래스 6회 |
- 니시테쓰(니시테쓰 라이온즈)는 1973년에 다이헤이양(다이헤이양 클럽 라이온즈)으로 구단명을 변경
4. 해설자 및 기타 경력
이나오 가즈히사는 감독직에서 물러난 후, 야구 해설자와 평론가로 활동하며 야구계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과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 RKB 마이니치 방송 야구 해설 위원 (1975년 ~ 1977년, 2000년 ~ 2007년)
- 아사히 방송 야구 해설 위원 (1981년 ~ 1983년)
- 닛칸 스포츠·아사히 방송 야구 해설 위원 (1987년 ~ 1999년)
- 프로 야구 마스터스 리그 후쿠오카 돈타크스(福岡ドンタクズ|후쿠오카 돈타크스일본어) 감독
- 1981년부터 RKB·TBS 해설자로 복귀
- 1982년 오사카로 이사하여 1983년까지 아사히 방송에서 해설자를 역임[95]
- 평론가 생활 외에도, "이나오 상사"라는 회사 경영[95]
2007년 6월, 다이아몬드 페리의 신조선 "선플라워 골드"의 명예 선장으로 취임[109]
출연 방송
5. 수상 및 타이틀 경력
이나오 가즈히사는 니시테츠 라이온즈에서 투수로 활약하며 4번의 퍼시픽 리그 우승과 3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개인적으로는 일본 야구 기구(NPB)에서 총 22개의 타이틀을 획득했는데,[4] 여기에는 다승왕 4회, 최우수 방어율 5회, 탈삼진왕 3회, 최고 승률 2회가 포함된다. 또한, 최우수 선수 2회, 신인왕, 베스트 나인 5회 등 주요 표창도 8개나 받았다.[4]
1956년에는 신인으로서 최우수 방어율과 신인왕을 수상했고,[24] 1957년과 1961년에는 최고 승률을, 1956년부터 1958년까지, 그리고 1961년과 1966년에는 최우수 방어율을 차지했다. 1958년, 1961년, 1963년에는 탈삼진왕에 올랐다.
1957년과 1958년에는 리그 MVP를 2회 연속 수상했으며, 1957년부터 1958년, 1961년부터 1963년까지 5회에 걸쳐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1958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팀이 3연패를 한 뒤 4연투 4연승을 거두는 활약으로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신님, 부처님, 이나오 님'''"이라는 칭송을 받았다.[32][33]
5. 1. 타이틀
- 최다 승리(다승왕): 4회(1957년, 1958년, 1961년, 1963년) ※ 퍼시픽 리그 타이기록 (다른 선수는 노모 히데오, 와쿠이 히데아키)
- 최우수 방어율(최고 평균자책점): 5회(1956년 ~ 1958년, 1961년, 1966년) ※ 최다 기록. 3년 연속은 최장 타이기록 (다른 선수는 스기우라 타다시, 야마모토 요시노부)
- 최다 탈삼진(당시는 타이틀이 아님): 3회(1958년, 1961년, 1963년) ※퍼시픽 리그에서는 1989년부터 타이틀로 제정됨.
- 최고 승률(최고 승률): 2회(1957년, 1961년)
- 최다 선발승: 5회(1957년 23, 1958년 22, 1961년 24, 1962년 17, 1963년 18)
5. 2. 수상
- 신인왕 (1956년)
- 최우수 투수 : 2회 (1957년, 1958년)
- MVP : 2회 (1957년, 1958년)
- 베스트 나인 : 5회 (1957년, 1958년, 1961년 ~ 1963년)
- 일본 시리즈 MVP : 1회 (1958년)
- 일본 시리즈 감투상 : 2회 (1956년, 1963년)
- 일본 시리즈 최우수 투수상 : 3회 (1956년 ~ 1958년)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1993년)
- 욱일소수장 (사망일인 2007년 11월 13일부로 추서)
- 최고 훈장 선수(MVP) : 2회 (1957년, 1958년)
- 야구 명예의 전당 경기자 표창 (1993년)
- 최우수 투수 : 2회 (1957년 - 1958년)
- 일본 시리즈 MVP : 1회 (1958년) ※ 21세 수상은 사상 최연소
- 일본 시리즈 감투상 : 2회 (1956년, 1963년) ※ 19세 수상은 사상 최연소, 우승팀에서 선정(1956년)은 사상 유일
- 일본 시리즈 최우수 투수상 : 3회 (1956년 - 1958년)
- 일본 프로 스포츠 대상 공로상 (2007년)
- 욱일 소수장 (서거일 2007년 11월 13일)
6. 출신 학교
1953년 오이타현립 벳푸 미도리가오카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고등학교 4년 선배로는 후에 프로에서 동료가 되는 카와무라 히사후미가 있었다.
7. 등번호
- '''24''' (1956년 ~ 1972년)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의 영구 결번(2012년 7월 4일 제정)[107]
- '''81''' (1973년 ~ 1974년)
- '''63''' (1978년 ~ 1980년)
- '''72''' (1984년 ~ 1986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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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ll of Fame pitcher Inao dead at 70
http://www.japantime[...]
2007-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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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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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村の著書『西鉄ライオンズ-伝説の野武士球団』や映画『鉄腕投手 稲尾物語』でも語られ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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週刊ベースボール連載コラム「豊田泰光のオレが許さん!」稲尾追悼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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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年に田中将大が更新するまで56年間も保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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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年の三浦方義の29勝を更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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年度別成績 1957年 パシフィック・リー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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農民に尽くしている伊奈忠次が言われた「神様・仏様・伊奈様」のモジリ(パロディ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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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神様、仏様、稲尾様」という見出しは、2008年のライオンズ・クラシックの第4章(対北海道日本ハムファイターズ戦)でもサブタイトルとして付与され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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鉄腕はヘトヘトに疲れていた…西鉄、奇跡の大逆転V裏話
http://www.sponichi.[...]
스포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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サイちゃん主演映画「鉄腕投手 稲尾物語」がクランクイ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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豪球列伝-プロ野球不滅のヒーローた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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鉄腕稲尾和久、最速達成 たった7年で200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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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背番号物語】西武「#24」振り返られた西鉄の栄光。“鉄腕”の永久欠番が西武を黄金時代に導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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週刊ベースボール2024年6月10日号、レジェンドを訪ねる、昭和時代の言い残し、広野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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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日・鉄腕コーチ 一味違う投手矯正法 ウィリアム・テルならぬイナオ・テ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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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めくりプロ野球 12月 【12月20日】1979年(昭54) 藤沢公也→小松辰雄 契約更改でも“快勝リレ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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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2020年9月号、東映フライヤーズ暴れん坊伝説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別冊夏祭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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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セ・パ誕生70年記念特別企画】よみがえる1980年代のプロ野球 Part.10 [1984年編] (週刊ベースボール別冊秋風号)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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幻に終わった「ロッテ福岡移転計画」監督候補は稲尾和久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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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セ・パ誕生70年記念特別企画】よみがえる1980年代のプロ野球 Part.2 [1986年編] (週刊ベースボール別冊冬桜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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稲尾和久急逝 恩師の死に落合博満は…ライバル野村克也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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打撃の神髄 榎本喜八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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私が見た最高の選手、最低の選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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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 貞治、長嶋茂雄、田中将大、大谷翔平……球界のレジェンド・野村克也が『パワプロ』各選手&自身の能力データをボヤキながら分析してみ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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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대륙 よみがえる熱球第2集「背番号「3」燦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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伝説のプロ野球選手に会いにい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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伝説のプロ野球選手に会いにいく
白夜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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清原和博は一晩500万円! プロ野球「夜遊び“剛速球”伝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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週刊ベースボールプラス6 1950-2011 わが愛しのスワローズ 国鉄から始まった栄光の軌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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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稲尾さんは本当に神様」ノムさん、星野さん…レジェンド支えた新人王投手・佐藤道郎 私生活では2度離婚 あの人~ネクストステー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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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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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시리즈 타이 기록. 그 밖에 나카무라 다이세이, 후지타 모토시, 도바시 마사유키, 무라야마 미노루, 고바야시 시게루 등도 기록하였고, 2차례 기록한 것은 이나오였으며, 1956년은 시리즈 전 경기 등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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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시리즈 타이 기록, 그 외에 스기시타 시게루도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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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시리즈 타이 기록. 그 외에 스기우라 다다시도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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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시리즈 기록, 통산 기록이라고 해도 역대 2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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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시리즈 타이 기록, 그 외에 야마다 히사시가 2차례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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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2경기 올스타전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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