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우 클레오파스 오긴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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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하우 클레오파스 오긴스키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출신의 작곡가, 정치가이다. 그는 폴로네즈 《고별》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20여 개의 폴로네이즈, 피아노 곡, 마주르카, 행진곡 등을 작곡했다. 20세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특사로 활동했으며, 국왕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의 고문으로 활동했고, 1794년 코시치우슈코 봉기 당시 부대를 지휘하기도 했다. 이후 러시아 상원의원으로 임명되었으나 연방 재건에는 실패했으며, 1833년 피렌체에서 사망했다.

미하우 클레오파스 오긴스키 - [인물]에 관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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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미하우 클레오파스 오긴스키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는 리투아니아 대공국트라카이 총독을 지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계몽주의 사상을 접하고 음악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2.1. 초기 생애

오긴스키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구주프에서 태어났다. 이 지역은 현재 폴란드 마조비아의 지라르두프 군에 속하며, 바르샤바 서쪽에 위치한다. 그의 아버지 안제이 오긴스키(Andrzej Ogiński)는 오긴스키 가문 출신의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으로, 리투아니아 대공국트라카이 총독을 지냈다. 이 때문에 일부 자료에서는 미하우 오긴스키를 리투아니아인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그의 어머니 파울리나 솀베크(Paulina Szembek, 1740–1797)는 폴란드의 유력 가문인 솀베크 가문의 마레크 솀베크의 딸이다. 오긴스키에게는 누나 유제파(Józefa)와 어머니의 이전 결혼에서 태어난 이복 형제 펠릭스 우비엔스키와 안토니 프로타지 포토츠키가 있었다.

미하우 오긴스키, 1994년 벨라루스 우표
미하우 오긴스키, 1994년 벨라루스 우표

오긴스키는 어렸을 때 스워님에 있는 친척 미하우 카지미에시 오긴스키의 집을 방문하여 처음 음악을 접했다. 그곳에는 오페라와 발레 공연이 열리는 현대적인 유럽식 극장이 있었다. 그는 계몽주의 시대의 신사 교육을 받았다. 음악은 유제프 코즐로프스키에게 배웠고, 조반니 바티스타 비오티, 피에르 바이요, 이반 마네 야르노비치에게 바이올린 레슨을 받았다.

1772년 아버지가 에서 외교 임무를 수행한 이후, 왕자의 가정교사는 장 롤레이(Jean Rolay)였는데, 그는 나중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미하우 클레오파스는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를 배웠다. 훗날 오긴스키는 감사의 표시로 잘리에시 궁전에 가정교사 롤레이를 위한 기념비를 세웠다.

2.2. 정치 활동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에 있는 오긴스키의 묘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에 있는 오긴스키의 묘

20세의 나이에 오긴스키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특사로 선택되었다. 그는 국왕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의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1788년부터 1792년까지 열린 대(大) 세임에서 그를 지지했다.

1788년에는 성 스타니슬라우스 훈장을 받았고, 1789년에는 폴란드의 최고 훈장인 백수리 훈장을 받았다. 1790년에는 영국의 외교 대표로 파견되었으며, 그곳에서 로드 맨스필드를 만나 폴란드 왕국을 분할하려는 삼국 간의 세력에 대한 위험을 경고받았다. 1790년 이후, 그는 폴란드의 네덜란드 외교 대표로 헤이그에 파견되었고, 콘스탄티노플과 파리에서 폴란드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1793년에는 리투아니아 부재무관으로 임명되었다.

2.3. 코시치우슈코 봉기와 망명

1794년 코시치우슈코 봉기 동안 오긴스키는 자신의 부대를 지휘했다. 봉기가 진압된 후 그는 콘스탄티노플로 이주했고, 이후 프랑스로 건너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위한 지원을 모색했다.

2.4. 나폴레옹 시대와 말년

오긴스키는 당시 황제 나폴레옹이 세운 바르샤바 공국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완전한 독립을 위한 발판으로 여겼다. 그는 자신의 유일한 오페라인 Zelis et Valcour프랑스어를 나폴레옹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1810년, 오긴스키는 나폴레옹에게 실망하여 망명 생활 중 정치 활동을 그만두고 빌뉴스로 돌아갔다. 그는 폴란드가 프랑스러시아 중 한 곳에 의존해야 한다면, 차르 알렉산드르 1세 아래에서 폴란드의 복지와 국가 회복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았다.

아담 예지 차르토리스키는 오긴스키를 차르 알렉산드르 1세에게 소개했고, 차르는 그를 러시아 상원의원으로 임명했다. 오긴스키는 차르에게 옛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재건하도록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에 환멸을 느낀 그는 1815년에 폴란드를 떠나 해외로 이주했으며, 1833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생을 마감했다.

3. 작품

미하우 클레오파스 오긴스키는 작곡가로서 1794년 코시치우슈코 봉기 진압 이후 망명길에 오르면서 작곡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특히 폴로네이즈 《내 조국에 대한 작별인사》(Pożegnanie Ojczyznypol)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이 곡은 폴란드 낭만주의 음악의 초기 사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오긴스키는 프랑스 오페라와 이탈리아 오페라, 그리고 하이든모차르트의 작품을 존경했다. 그는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였으며 클라비코드발랄라이카도 다루었다. 1790년대에는 행진곡과 군가를 작곡하여 1794년 봉기 당시 반란군 사이에서 인기를 얻기도 했다. 그는 약 20개의 폴로네이즈 외에도 피아노 곡, 마주르카, 행진곡, 로망스, 왈츠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다.

3.1. 주요 작품 목록

작곡가로서 오긴스키는 1794년 코시치우슈코 봉기 진압 이후 망명 생활을 하던 중 잘레시에 지역(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현재 벨라루스)에서 작곡한 폴로네이즈 《내 조국에 대한 작별인사》(폴란드어: Pożegnanie Ojczyzny)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곡은 [https://www.youtube.com/watch?v=tziH_rWlLcs 유튜브]에서 감상할 수 있다.

이 곡이 작곡된 1794년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에 의해 여러 차례 분할을 겪으며 주권을 상실해가던 비극적인 시기였다. 결국 1795년, 폴란드는 이 세 나라에 의해 완전히 분할되어 지도상에서 사라졌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패전한 1918년 말이 되어서야 공화국으로 독립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작곡된 《내 조국에 대한 작별인사》는 나라를 잃은 폴란드인들의 슬픔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절절하게 담아낸 곡으로 평가받는다. 음악적으로는 멜랑콜리한 선율과 환상적인 악구가 특징이며, 프레데리크 쇼팽 이전에 나타난 폴란드 낭만주의 음악의 초기 사례 중 하나로 여겨진다. 이 곡의 [https://www.youtube.com/watch?v=0FDeO1liXqc 파이프 오르간 버전]도 존재한다.

오긴스키는 프랑스 오페라와 이탈리아 오페라, 그리고 하이든모차르트의 작품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였으며, 클라비코드발랄라이카도 연주했다. 1790년대부터는 행진곡과 군가를 작곡하기 시작했는데, 이 곡들은 1794년 봉기 당시 반란군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그는 약 20개의 폴로네이즈를 비롯하여 피아노 곡, 마주르카, 행진곡, 로망스, 왈츠 등 다양한 장르의 곡을 남겼다.

그의 다른 주요 작품과 저작물은 다음과 같다.

* 오페라: 《젤리스 에 발쿠르 또는 보나파르트 르 케르》(Zelis et Valcour, ou Bonaparte au Caire) (1799)
* 논문: 《음악에 관한 편지》(Lettres sur la musique) (1828)
* 회고록: 《1788년부터 1815년 말까지의 폴란드와 폴란드인에 관한 회고록》(Mémoires sur la Pologne et les Polonais, depuis 1788 jusqu'à la fin de 1815프랑스어), 파리에서 출판됨.

말라제치나에 있는 미하우 클레오파스 오긴스키의 기념비, 벨라루스
말라제치나에 있는 미하우 클레오파스 오긴스키의 기념비, 벨라루스

4. 서훈 내역

* 1788년 흰독수리 훈장 Order Orła Białegopo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