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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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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하일 4세는 파플라고니아 출신의 그리스인으로, 환전상으로 일하며 황제 로마노스 3세의 사후 황후 조에와 결혼하여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형제인 환관 요한에게 정치를 위임하고 군대 및 재정 시스템 개혁을 시도했지만, 요한의 권력 독점과 과도한 세금 징수로 인해 반란이 발생했다. 미하일 4세는 불가리아 반란을 진압하고 시칠리아 원정을 추진하는 등 군사적 업적을 남겼으나, 뇌전증과 건강 악화로 인해 통치 기간이 짧았으며, 1041년 수도원에서 사망하고 조카 미하일 5세가 황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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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4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미하일 4세, 마드리드 스킬리체스 11세기 묘사
미하일 4세, 마드리드 스킬리체스 11세기 묘사
칭호로마인의 황제 및 전제자
배우자조에
출생지파플라고니아 테마(현재의 중앙 아나톨리아, 아나톨리아, 튀르키예)
사망1041년 12월 10일
사망 장소콘스탄티노폴리스 성 아나르기리 수도원(현재의 이스탄불, 튀르키예)
매장 장소콘스탄티노폴리스 성 아나르기리 수도원
통치
즉위1034년 4월 11일
대관식1034년 4월 12일
이전 통치자로마노스 3세
다음 통치자미하일 5세
인물 정보
왕조마케도니아 (결혼을 통해)
기타 정보

2. 초기 생애와 배경

미하일은 파플라고니아 출신의 그리스 농부 혹은 환전상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정확한 신분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형제인 고아 양육자 요한(환관 요한)은 황궁의 고위 관리인 ''파라코이모메노스''였으며, 그의 도움으로 미하일을 포함한 여러 동생들이 궁정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다.[2][3][4] 미하일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환전상으로 일했으며, 비밀리에 위조지폐를 만들었다는 소문도 돌았다.[2][3][4]

1028년 비잔틴 제국 황제가 된 로마노스 3세는[5] "통치자로서 그는 아무런 능력도 없었다"는 평가를 받았다.[6] 그는 황후 조에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얻지 못하면서 관계가 소원해졌고,[7] 로마노스는 첩을 두었으며 조에는 여러 차례 외도를 했다. 조에는 잘생긴 젊은 미하일에게 반해 그를 공공연히 애인으로 삼고 황제로 만들겠다는 이야기까지 할 정도였다. 로마노스는 이 소문을 듣고 미하일을 심문했으나, 미하일은 성 유물에 맹세하며 혐의를 부인했다. 의심을 푼 로마노스는 1033년 미하일을 자신의 개인 시종으로 삼았다.[8][9] 일부에서는 이것이 야심가인 형 요한이 환관인 자신 대신 동생 미하일을 제위에 앉히려는 계획의 일부였다고 보기도 한다.

마나세스 연대기에 묘사된 미하일 4세 파플라고니안의 명령에 따른 황제 로마노스 3세 아르기로스의 살해


1034년 초 로마노스 3세가 병에 걸리자 조에와 미하일이 그를 독살하려 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4월 11일, 로마노스는 목욕탕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 당시 궁정 관리이자 후일 연대기 작가가 된 미하일 프셀로스는 로마노스의 수행원 일부가 "오랫동안 그의 머리를 물속에 쳐박아 질식시키려 했다"고 기록했으며,[10] 요한 스킬리체스는 미하일의 명령으로 익사했다고 간결하게 기록했다. 에데사의 마태오의 기록에는 조에가 로마노스를 독살했다고 적혀 있다.

로마노스 3세가 사망한 바로 그날, 조에는 미하일과 결혼했다.[7] 다음 날, 부부는 총대주교 알렉시오스 1세를 불러 대관식을 집전하게 했다.[11] 알렉시오스는 처음에는 망설였으나 약 22.68kg의 금을 받고 나서야[7] 미하일을 새로운 로마 황제, 즉 미하일 4세로 즉위시켰다.[12][13]

3. 황후 조에와의 관계 및 즉위 과정

미하일은 파플라고니아 출신의 그리스 농부 집안에서 태어났으며,[2] 환관이자 고위 궁정 관리인 ''파라코이모메노스''였던 형 요하네스 오르파노트로포스의 도움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황궁에서 일하게 되었다.[2][3][4]

당시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로마노스 3세(재위 1028-1034)였으나,[5] 그는 통치 능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6] 또한 황후 조에와의 사이에 아이가 없어 부부 관계가 소원했다.[7] 로마노스 3세는 첩을 두었고, 이미 50세가 넘었던 조에는 여러 차례 외도를 하다가 궁정에서 일하던 젊고 잘생긴 미하일에게 깊은 애정을 품게 되었다. 조에는 공공연히 미하일을 다음 황제로 만들고 싶다는 뜻을 내비칠 정도였다.[8][9] 일설에는 야심가였던 형 요하네스가 스스로는 환관이라 황제가 될 수 없기에, 동생 미하일을 제위에 앉히려고 조에와의 관계를 계획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로마노스 3세는 미하일을 의심하여 심문했으나, 미하일은 성유물에 손을 얹고 결백을 맹세하며 혐의를 부인했다. 의심을 푼 로마노스 3세는 1033년 미하일을 자신의 개인 시종으로 삼았다.[8][9]

1034년 4월 11일, 로마노스 3세가 목욕 중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조에와 미하일이 연루된 독살 혹은 익사 의혹이 제기되었으며,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10] 로마노스 3세가 사망한 바로 그날, 조에는 미하일과 결혼식을 올렸고,[7] 다음 날 총대주교 알렉시오스 1세를 통해 미하일을 새로운 황제 미하일 4세로 즉위시켰다.[11][7][12][13]

3. 1. 로마노스 3세의 죽음과 관련된 논란



로마노스 3세는 1034년 초 병에 걸렸고, 조에와 미하일이 그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널리 퍼졌다. 1034년 4월 11일, 로마노스 3세는 목욕탕에서 죽어가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여러 기록이 존재한다. 궁정 관리이자 후대의 연대기 작가인 미하일 프셀로스는 로마노스 3세의 수행원 중 일부가 "오랫동안 그의 머리를 물속에 쳐박아 질식시키려 했다"고 기록했다.[10] 반면 요한 스킬리체스는 로마노스 3세가 미하일의 명령으로 익사했다고 간략하게 기록했다. 에데사의 마태오는 조에가 직접 로마노스 3세를 독살했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일설에는 조에가 보낸 자객에 의한 암살이라는 주장도 있다.

로마노스 3세가 죽은 바로 그날, 조에는 미하일과 결혼했다.[7] 다음 날, 부부는 총대주교 알렉시오스 1세를 불러 새로운 황제의 대관식을 집전하게 했다.[11] 처음에는 주저하던 알렉시오스 1세는 50 파운드의 금을 받고 나서야 대관식을 진행했고,[7] 미하일을 로마 황제 미하일 4세로 즉위시켰다.[12][13]

4. 치세

1034년, 로마누스 3세 아르기루스가 목욕 중 갑작스럽게 사망하자(일설에는 황후 조에에 의한 암살설도 있다), 조에는 요하네스 오르파노트로포스의 동생이자 자신의 연인이었던 미하일과 결혼하여 그를 새로운 황제로 즉위시켰다. 이가 미하일 4세이다. 그러나 즉위 후 미하일 4세는 조에에 대한 관심을 잃고 그녀를 사실상 궁궐 내에 유폐했다.

미하일 4세는 황제로서 비교적 유능했으며, 특히 군사적인 면에서 재능을 보여 이슬람 세력을 비롯한 외부의 적에 맞서 여러 차례 성공적인 원정을 이끌었다. 하지만 그는 뇌전증을 앓고 있었고, 해가 갈수록 발작이 심해지면서 점차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실질적인 통치권은 그의 형이자 유력한 환관이었던 요하네스 오르파노트로포스에게 넘어갔다.

요하네스는 국민과 귀족들에게 압정을 펼치며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고, 바실리우스 2세가 비교적 관대하게 대했던 슬라브족에게도 억압적인 정책을 시행했다. 이러한 통치는 제국 곳곳에서 반란을 불러일으켰는데, 특히 불가리아에서는 불가리아 제국의 부활을 선언하는 대규모 봉기가 발생하는 등 심각한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미하일 4세는 건강이 악화되는 와중에도 이러한 반란들을 진압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자신의 병세가 깊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예감하고, 조카 미하일을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지명했다. 1041년 12월 10일, 그는 수도원으로 은퇴했으며 그날 그곳에서 사망했다.

4. 1. 내정

미하일과 조에의 결혼, ''마드리드 스킬리체스''에 묘사됨


미하일 4세는 준수한 외모와 영리함, 관대함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교육 수준이 낮았고 간질을 앓고 있어 황제로서의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기는 어려웠다.[14][15] 이 때문에 그는 실제 통치 업무를 다른 이들에게 맡겼는데, 특히 이미 콘스탄티누스 8세와 로마누스 3세 치하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형 환관 요한에게 대부분의 권한을 위임했다.[14][15] 한편, 황후 조에는 미하일 4세가 전 남편 로마누스 3세보다 자신에게 더 헌신적일 것이라 기대했지만 이는 실망으로 돌아갔다. 미하일은 조에가 자신을 배신할 것을 두려워하여 그녀를 정치에서 배제하고 궁궐 내 여성 구역인 γυναικεῖον|지나이케움grc(gynaikeion)에 사실상 가두고 활동을 감시했으며, 거의 방문하지 않았다.

환관 요한이 콘스탄티누스 달라세노스를 추방하는 모습.


환관 요한은 군사 및 재정 시스템 개혁을 통해 제국의 대외적인 힘을 일시적으로 강화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이를 위해 세금을 크게 인상하면서 귀족과 평민 모두에게 큰 불만을 샀다. 요한의 권력 독점과 Ἀερικόν|아에리콘grc(Aerikon)과 같은 새로운 세금 도입은 미하일 4세와 요한 형제에 대한 여러 음모를 촉발했다.[16] 특히 1035년에는 악천후와 메뚜기 떼의 습격으로 심각한 흉작과 기근이 발생하면서 백성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국 곳곳에서 반란과 소요가 잇따랐다. 미하일 4세가 알레포에 대한 통제 강화를 시도하자 현지 주민들은 제국 총독을 축출했으며,[17][18] 안티오크, 니코폴리스, 그리고 불가리아 등지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19]

이집트 칼리프의 기독교 과부가 미하일 4세에게 편지를 보내는 장면.


요한의 통치에 대한 반발은 구체적인 음모와 반란으로 이어졌다.

연도사건비고
1034년콘스탄티누스 달라세노스 체포안티오크에서 반란을 조장했다는 혐의.
1037년황후 조에의 환관 요한 독살 시도실패함.[7]
1038년아나톨리아 군대 봉기 진압미하일 4세의 형제 콘스탄티누스가 진압함.
1040년미하일 케룰라리오스 연루 음모 발각케룰라리오스는 수도사가 되어 목숨을 건짐. 훗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됨.
1040년불가리아 대규모 봉기 발생환관 요한은 혼란을 이용해 반대 세력 숙청을 시도했으나, 봉기에 가담한 테오도시오폴리스의 스트라테고스 체포에는 실패함.[20][21]



환관 요한은 바실리우스 2세가 관용 정책을 폈던 슬라브족에게도 억압적인 정책을 강행하는 등 전반적으로 강압적인 통치를 이어갔고, 이는 제국 내 불안정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비록 미하일 4세 치세 동안 이러한 반란들이 군사적으로 진압되기는 했지만, 근본적인 불만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4. 2. 외정

미하일 4세의 치세 초기에는 아랍인의 미라 약탈, 세르비아인의 이탈, 페체네그족의 침입 등 군사적으로 불안정했다. 그러나 곧 동부 국경에서 아랍 해적을 소탕하고 반호 동쪽 해안의 무슬림 요새인 페르크리를 점령했으며, 1037년에는 에데사를 제국 영토로 편입시키는 등 상황을 안정시켰다.[22][23]

서부에서는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 장군을 통해 시칠리아 정복을 시도하여 초기 성공을 거두었으나, 내부 문제로 완전한 정복에는 실패했다.[24][25][26] 북부에서는 1040년 세르비아인과 불가리아인의 대규모 반란, 특히 페타르 델리안의 반란이 발생했다. 이는 요하네스 오르파노트로포스의 과세 정책과 불가리아 독립 열망이 원인이었다.[27][28] 미하일 4세는 심각한 건강 악화에도 불구하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여, 1041년 노르웨이의 하랄 3세가 이끄는 노르드 용병의 도움을 받아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선했다.[29][30]

4. 2. 1. 시칠리아 원정

서부 전선에서 미하일 4세와 환관 요한은 장군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에게 시칠리아 에미레이트 정복을 명령했다. 1038년, 마니아케스는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하여 곧 메시나를 점령했다. 그는 흩어진 아랍군을 격파하고 섬의 서부와 남부 도시들을 점령했다. 1040년까지 그는 시라쿠사를 공격하여 점령하는 등 큰 성공을 거두었다.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 휘하의 비잔틴 군대가 시칠리아에 상륙하여 아랍인들을 격파하다.


마니아케스는 아랍 세력을 시칠리아에서 거의 몰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내부 문제에 부딪혔다. 그는 롬바르드 동맹군과 불화를 겪었고, 그의 이탈리아-노르만 용병들은 임금에 불만을 품고 그를 버렸다. 이 용병들은 이탈리아 본토에서 반란을 일으켜 바리가 일시적으로 함락되기도 했다. 마니아케스가 이들을 진압하려 했으나, 환관 요한은 그가 음모를 꾸민다는 혐의를 씌워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했다.[24] 마니아케스가 소환된 후, 시칠리아에서 이룬 성과의 대부분은 상실되었다. 노르만족에 대한 후속 원정은 여러 차례 패배를 겪었지만, 바리는 결국 되찾았다.[25][26]

4. 2. 2. 불가리아 반란 진압

1040년, 세르비아인들과 불가리아인들이 비잔틴 제국에 대항하여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부분적으로 요하네스 오르파노트로포스가 불가리아에 금화로 과중한 세금을 부과한 정책 때문이었다. 이전에는 현물로 세금을 냈었다. 또한 반란은 페타르 델리안의 지도 아래 불가리아 국가를 재건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27][28] 반군은 벨그라드를 점령하고 델리안을 불가리아 황제로 선포했으며, 곧이어 스코피도 점령했다.

페타르 델리안이 불가리아 황제로 선포되다.


미하일 4세는 페타르 델리안을 상대로 진격하던 테마의 두스를 음모 혐의로 기소하고 해임하면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해임된 두스의 군대는 대부분 불가리아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이 반란에 가담하면서 델리안은 테살로니카를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디라키움이 함락되었고, 델리안은 헬라스의 ''스트라테고스''를 격파했다. 니코폴리스 테마의 대부분 지역 역시 요한 오르파노트로포스의 탐욕에 불만을 품고 미하일에 대항하여 봉기했다.[27][28]

알루시안 휘하의 불가리아 반군이 테살로니카 전투 2차에서 패배하다.


알루시안이 페타르 델리안을 연회에 초대하여 배신하고 눈을 멀게 하다.


이 시기 미하일은 간질 발작이 심해져 거의 반신불수 상태였고, 다리에 괴저를 동반한 심각한 복수병까지 앓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불가리아 반란군에 맞서겠다고 발표하자 그의 고문들은 경악했다. 1041년, 미하일은 미래의 노르웨이 국왕이 되는 노르웨이의 하랄 3세를 포함한 노르드 용병의 지원을 받아 4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마케도니아로 향했다. 모시노폴리스에서 병력을 집결시킨 황제는 불가리아 군대를 기다렸다.

비잔틴 제국의 군사적 우위는 불가리아 반군 내부의 불화 덕분에 더욱 강화되었다. 미하일은 진격하여 테살로니카를 구원했으며,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불가리아군을 격파하고 델리안을 생포하는 데 성공했다. 미하일은 여세를 몰아 불가리아로 군대를 적극적으로 진격시켰다. 남아 있던 가장 큰 규모의 불가리아 군대는 프릴레프에 위치한 마누엘 이바츠가 지휘하는 요새화된 진영에 있었다. 비잔틴군은 이 진영을 공격하여 불가리아군을 흩어지게 하고 이바츠마저 생포했다. 이 힘든 원정으로 미하일은 거의 죽음에 이르렀지만,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콘스탄티노플로 개선할 수 있었다.[29][30]

5. 질병과 죽음



미하일 4세는 해마다 뇌전증 발작이 악화되었다.[32] 그의 성공적인 군사 원정에도 불구하고, 미하일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해졌다. 그는 성 데메트리오스의 테살로니키 신전을 방문하고 교회를 짓거나 재건하며 종교적인 구원을 갈망했다. 1039년에는 제국의 모든 수도승과 사제, 그리고 자신의 자녀에게 대부가 되어 준 모든 부모에게 금전적인 선물을 주었다.[32]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던 환관 요하네스 오르파노트로포스는 조에에게 미하일 4세의 조카, 즉 그의 여동생의 아들인 미하일을 양자로 삼도록 강요했다.[32][33] 이는 후계자를 정하기 위함이었다.

결국 1041년 12월 10일, 미하일 4세는 삭발례를 받고 수도원으로 은퇴했으며, 같은 날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마지막까지 아내 조에가 만나기를 간청했지만 거부했다.[32][33] 그의 조카는 미하일 5세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32][33]

6. 평가

미하일 4세는 황제로서 비교적 유능했고, 특히 군사적인 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 이슬람 세력을 비롯한 적대 세력과의 원정에서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해마다 뇌전증 발작이 심해지면서 건강이 악화되어, 결국 형이자 유력한 환관이었던 요하네스 오르파노트로포스에게 정치 실권을 넘기고 은퇴하게 되었다.

실권을 장악한 요하네스는 국민과 귀족에게 압정을 가했으며, 이전 황제 바실리우스 2세가 비교적 관대하게 대했던 슬라브족에게도 억압적인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통치는 제국 각지에서 반란을 불러일으켰고, 특히 불가리아에서는 불가리아 제국의 부활을 선언하는 대규모 반란(페타르 델리안의 봉기)이 일어나기도 했다. 미하일 4세는 병든 몸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반란들을 진압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예감하고 조카 미하일을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정했다. 이후 1041년 12월 10일, 수도원으로 은퇴한 당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군사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건강 문제와 형의 실정으로 인해 제국 내 불안정은 계속되었다.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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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적
[6] 서적
[7] 서적 Zoë Porphyrogenita
[8] 서적
[9] 서적
[10] 서적
[1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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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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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서적
[18] 서적
[19] 서적
[20] 서적
[21] 서적
[22] 서적
[2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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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서적
[26] 서적
[27] 서적
[28]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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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서적 The illustrated chronicle of Ioannes Skylitzes in Madrid https://www.worldcat[...] Alexandros 2002
[32] 서적
[3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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