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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랑기아 친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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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랑기아 친위대는 동로마 제국 황제 바실리오스 2세가 창설한 정예 친위대였다. 키예프 루스의 블라디미르 1세가 지원한 바랑기아인 용병들을 기반으로 창설되었으며, 황제의 개인 경호 및 군사적 역할을 수행했다. 초기에는 루스인들이 주축을 이루었으나, 앵글로색슨족, 노르웨이인 등 다양한 출신의 용병들로 구성되었다. 바랑기아 친위대는 데인 도끼를 주 무기로 사용했으며, 뛰어난 충성심과 용맹함으로 명성을 얻었다. 룬스톤 기록과 노르드 사가에서도 바랑기아 친위대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으며, 이들은 동로마 제국 멸망 시까지 황실을 호위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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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랑기아인 - 루스인
    루스인은 8세기부터 13세기까지 동유럽에서 활동한 다민족 집단으로, 스칸디나비아 출신 바이킹이 중심이 되어 키예프 루스를 건설하고 동슬라브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9세기 이후 슬라브화 과정을 거쳤다는 설이 유력하며, 이들의 기원과 역할은 현재까지 역사학계의 중요한 연구 주제이다.
바랑기아 친위대
개요
레오 5세의 시신이 스킬라 관문을 통해 히포드롬으로 끌려가는 모습
레오 5세의 시신이 스킬라 관문을 통해 히포드롬으로 끌려가는 모습
국가동로마 제국
출신바랑기아인
병과보병
종류친위대
활동 기간987년 ~ 1453년
장비도끼
방패
체인메일

2. 역사

동로마 제국의 황제 바실리오스 2세는 988년 아나톨리아 귀족들의 반란에 직면하여 키예프 루스블라디미르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블라디미르 1세는 6천 명의 바랑기아인 군대를 지원했고, 바실리오스 2세는 이들의 도움으로 반란을 진압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바랑기아인 군대에 깊은 인상을 받아 이들을 친위대로 삼고, 동로마 황제와 충성 계약을 맺도록 했다. 이로써 바랑기아 친위대가 탄생했으며, 이들은 높은 충성심으로 동로마 제국 멸망 시까지 제국에 봉사했다.

바랑기아 친위대는 초기에는 키예프 루스 출신이 주를 이루었으나, 점차 다양한 지역 출신으로 구성되었다. 11세기에는 남부 이탈리아에서 노르만족과 롬바르드족에 맞서 싸웠으며, 칸네 전투에서 승리했다.[22] 또한 시칠리아 재정복에도 참여하여 노르웨이 왕 하랄 3세와 같은 인물이 활약하기도 했다.

1088년에는 노르만족의 잉글랜드 정복 이후 앵글로색슨족이 바랑기아 친위대에 합류하면서 그 수가 증가했다. 5,000명 이상의 앵글로색슨족과 덴마크인이 비잔틴 제국으로 이주했으며,[23] 이들은 알렉시우스 1세를 위해 헬레노폴리스를 건설하고 주둔했다.[24] 이 시기부터 친위대는 '앵글로-바랑기아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앵글로색슨족의 비중이 커졌다. 노르웨이 십자군 이후에는 노르웨이 전사들이 유입되기도 했다. 시구르 1세 망누손이 이끄는 노르웨이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에서 배를 팔고 소수의 병력만 데리고 귀국했다.[27]

바랑기아 친위대는 주로 넓은 칼날의 데인 도끼를 주 무기로 사용했지만, 검술과 궁술에도 능숙했다. 안나 콤네나의 ''알렉시아스''에서는 이들이 기마병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들은 주로 콘스탄티노플 주변에 주둔했으며, 부콜레온 궁전 단지에 주둔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전장에도 파견되어 베로이아 전투에서 페체네그족을 격파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26]

미하엘 프셀로스는 바랑기아인들을 "방패를 들고 어깨에 무거운 철제 무기를 휘두르는" 모습으로 묘사했다.[28] 이들은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도시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23] ''모레아 연대기''에 따르면, 바랑기아 친위대는 1259년 펠라고니아 전투 이후 아카이아 공을 감옥으로 호송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테오도르 1세 라스카리스에 의해 재건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며,[30] 1400년경 콘스탄티노플에서 바랑기아인으로 확인된 사람들이 발견되었다.[11]

2. 1. 기원과 초기 역사

동로마 제국 마케도니아 왕조의 9대 황제였던 바실리오스 2세는 키예프 루스대공 블라디미르 1세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블라디미르는 988년 바실리오스 2세의 왕위 방어를 돕기 위해 6,000명의 바랑기아인 군대를 파견했는데,[20] 이는 도로스톨론 공성전 (971) 이후 그의 아버지에 의해 체결된 조약에 따른 것이었다. 블라디미르는 이 기회를 통해 자신이 급여를 지급할 수 없었던 가장 다루기 힘든 전사들을 제거했다.[20] 이때 바실리오스 2세는 바랑기아인 군대를 맘에 들어하면서 바랑기아인 친위대 병사들을 모집하는 공고를 하였고 이들이 동로마 황제와 충성 계약을 맺으면서 바랑기아 친위대가 탄생하였다. 바랑기아 친위대는 높은 충성심으로 명성을 높이 사 동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제국에 봉사하였다. 989년, 바실리오스 2세가 직접 이끄는 바랑기아인들은 반군 장군 바르다스 포카스를 물리치기 위해 크리소스폴리스에 상륙했다. 전투 현장에서 포카스는 그의 상대가 보는 앞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고, 그의 군대는 도망쳤다. 바랑기아인들은 도망치는 군대를 추격하여 "즐겁게 조각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잔혹함이 주목받았다.



바랑기아 친위대의 초기 구성원은 키예프 루스에서 왔다.[13] 루스와 바실리 1세 치하의 비잔틴 제국 사이의 조약은 적대 행위 이후 874년에 체결되었다. 조약 조항에 따라 루스는 비잔틴 군대에 인력을 제공해야 했다. 907년과 911년 사이에 적대 행위가 재개되었고, 루스인이 원하면 비잔틴 제국에서 봉사할 수 있는 새로운 조약이 체결되었다.[13] 학계에서는 루스인이 현재의 동부 스웨덴 해안 지역에서 8세기경에 기원했으며, 그들의 이름이 스웨덴의 로슬라겐과 기원이 같다는 데에 합의하고 있다.[14] 로덴[15][16][17] 지배적인 이론에 따르면, 스웨덴을 가리키는 원시 핀어 이름(''*Roocci'')과 마찬가지로 이름 ''루스''는 "노를 젓는 사람들"을 뜻하는 고대 노르드어 용어(''rods-'')에서 유래되었으며, 노 젓는 것은 동유럽의 강을 항해하는 주요 방법이었고, 스웨덴의 해안 지역인 로슬라겐(''Rus-law'') 또는 이전에는 알려진 ''로덴''과 관련될 수 있다.[18][19]

911년 이른 시기부터 바랑기아인들은 비잔틴 제국을 위해 용병으로 싸웠다고 언급된다. 약 700명의 바랑기아인들이 902년에 크레타 토후국에 대한 비잔틴 해군 원정에서 달마티아인들과 함께 해병으로 복무했으며, 949년에는 629명의 병력이 콘스탄티누스 7세 포르피로게니투스 휘하에서 크레타로 돌아왔다. 415명의 바랑기아인 부대가 936년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했다. 또한 955년 시리아에서 아랍인과 싸운 군대에 바랑기아인 부대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간 동안 바랑기아 용병들은 ''대동료''(그리스어: Μεγάλη Εταιρεία|메갈리 에테리아grc)에 포함되었다.

3. 특징

바랑기아 친위대는 비잔티움 제국 황제의 개인 보디가드 역할을 했으며, 의례적인 임무와 경찰 업무도 일부 담당했다. 이들은 토착 비잔틴인이 아닌 별도의 장교인 ''아콜루토스''의 지휘를 받았다.[31]

바랑기아 친위대는 전투가 가장 치열하거나 결정적인 순간에만 투입되었다.[32] 동시대 비잔틴 연대기 작가들은 이들이 무모한 분노로 공격하며 피를 흘리거나 부상을 입는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광전사의 특징으로, 트랜스 상태에서 초인적인 힘을 얻고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32]

황제가 사망하면 바랑기아 친위대는 황실 금고에서 금과 보석을 가져갈 수 있는 '궁궐 약탈'(폴루타스바르프)이라는 독특한 권한을 가졌다.[32] 이 특권으로 많은 바랑기아인들이 부유해져 고향으로 돌아갔고, 더 많은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미클라가르드)의 친위대에 입대하게 되었다.[32]

3. 1. 무기와 장비

바랑기아 친위대는 전원 보병으로 구성되었으며, 주로 도끼방패로 무장했다. 갑옷으로는 체인메일 계열의 중갑을 착용했다고 한다.

3. 2. 복무와 충성

동로마 제국 마케도니아 왕조의 9대 황제였던 바실리오스 2세 때 아나톨리아의 귀족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자 바실리오스는 키예프 루스대공이었던 블라디미르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해 약 6천 명의 바랑기아인 군대를 지원받아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바실리오스 2세는 바랑기아인 군대를 맘에 들어하면서 바랑기아인 친위대 병사들을 모집하는 공고를 하였고 이들이 동로마 황제와 충성 계약을 맺으면서 바랑기아 친위대가 탄생하였다. 바랑기아 친위대는 높은 충성심으로 명성을 높이 사 동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제국에 봉사하였다.

바랑기아 친위대의 대 통역관(megas diermeneutes) 미카엘의 인장


바랑기아 친위대의 임무와 목적은 키예프의 드루지나, 스웨덴/노르웨이의 히르드, 스칸디나비아와 앵글로-색슨의 호스칼이 제공하는 서비스와 유사했다(동일하지는 않더라도). 바랑기아인들은 황제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며 황제의 개인 보디가드 역할을 했다.[31] 그들은 수행원 및 환호자로서 의례적인 임무를 수행했으며, 특히 반역과 음모의 경우 일부 경찰 업무를 수행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토착 비잔틴인이었던 별도의 장교인 ''아콜루토스''의 지휘를 받았다.

바랑기아 친위대는 결정적인 순간이나 전투가 가장 치열한 경우에만 전투에 투입되었다.[32] 동시대 비잔틴 연대기 작가들은 "스칸디나비아인들은 외모와 장비 모두 무서웠으며, 무모한 분노로 공격했으며 피를 흘리거나 부상을 입는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두려움과 매혹이 뒤섞인 채 기록했다.[32] 이 묘사는 아마도 광전사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트랜스 상태가 그들에게 초인적인 힘을 부여하고 부상에 대한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32] 비잔틴 황제가 죽으면 바랑기아인들은 황실 금고로 달려가 최대한 많은 금과 보석을 가져갈 수 있는 독특한 권리를 가졌는데, 이는 고대 노르드어로 ''폴루타스바르프''(polutasvarf, "궁궐 약탈")로 알려진 절차였다.[32] 이러한 특권 덕분에 많은 바랑기아인들이 부유한 사람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이는 더 많은 스칸디나비아인들이 "미클라가르드"(스웨덴어 = 미클라가르드 = '거대한 도시', 즉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친위대에 입대하도록 장려했다.[32]

바랑기아인들의 충성은 비잔틴 작가들의 전형적인 주제가 되었다. 안나 콤네네는 1081년 아버지 알렉시우스가 황제 자리를 찬탈한 것에 대해 글을 쓰면서 바랑기아 친위대가 여전히 황제 니케포루스를 경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는 점을 언급했다. 왜냐하면 바랑기아인들은 "황제에 대한 충성과 그들의 신변 보호를 일종의 가문 전통이자 신성한 신뢰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충성은 "그들이 침해하지 않고 보존하며, 배신의 암시조차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했다.[33] 바실 2세가 매우 불신했던 토착 비잔틴 경비대와 달리, 바랑기아 친위대의 충성은 왕좌에 앉은 사람이 아닌 황제의 지위에 있었다. 이는 969년 친위대가 황제 니케포루스 2세가 암살당했을 때 복수하지 못한 사건에서 분명해졌다. 한 하인이 황제가 공격받는 동안 친위대를 호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황제가 죽어 있었다. 그들은 즉시 니케포루스의 살인자인 요한 치미스케스 앞에 무릎을 꿇고 그를 황제로 칭송했다. "살아있었다면 마지막 숨결까지 그를 방어했을 것이다. 죽었으니 복수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이제 새로운 주인이 있었다."[34]

이러한 명성은 최소한 두 번의 기록된 사례에서 진실을 넘어선다. 1071년, 황제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가 술탄 알프 아르슬란에게 패배한 후, 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오기 전에 궁정 쿠데타가 일어났다. 카이사르 요한 두카스는 바랑기아 친위대를 동원하여 부재 중인 황제를 폐위시키고, 황후 에우독시아를 체포하고, 디오게네스의 의붓아들인 미카엘 7세를 황제로 선포했다. 따라서 바랑기아인들은 부재 중인 황제를 방어하는 대신 찬탈자들에 의해 이용되었으며, 이는 항상 왕좌의 현재 점유자가 아니라 왕좌에 대한 그들의 충성을 증명했다. 더 불길한 에피소드에서 역사가 요안네스 조나라스는 1078년 장군 니케포루스 브리엔니오스가 실명된 후 친위대가 니케포루스 3세에 반란을 일으켜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웠지만 충성스러운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고 보고했다. 그들은 이후 사면을 요청하고 받았다.[35]

4. 주요 전투 및 역할

911년경부터 바랑기아인들은 비잔티움 제국을 위해 용병으로 활동했다. 902년 크레타 토후국에 대한 비잔티움 해군 원정에는 700명의 바랑기아인들이 달마티아인들과 함께 해병으로 복무했고, 949년에는 629명이 콘스탄티누스 7세 포르피로게니투스 휘하에서 크레타로 돌아왔다.[13] 936년 이탈리아 원정에는 415명의 바랑기아인이 참여했고,[13] 955년 시리아에서 아랍인과 싸운 군대에도 바랑기아인 부대가 있었다.[13] 이 기간 동안 바랑기아 용병들은 대동료(그리스어: Μεγάλη Εταιρεία|메갈리 에테리아grc)에 포함되었다.[13]

988년, 바실리 2세는 키예프의 블라디미르 1세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고, 도로스톨론 공성전 (971) 이후 체결된 조약에 따라 블라디미르는 6,000명의 병력을 보냈다.[20] 이들은 바랑기아 친위대의 공식적인 제도로 여겨진다.[21] 989년, 바실리 2세가 이끄는 바랑기아인들은 반군 장군 바르다스 포카스를 크리소스폴리스에서 물리쳤다.[12]

바랑기아 친위대는 남부 이탈리아에서도 활동했다. 1018년, 바실리 2세는 이탈리아 카테판, 바실 보요안네스로부터 멜루스 오브 바리의 롬바르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증원을 요청받았다.[12] 바랑기아 친위대는 칸네 전투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승리에 기여했다.[12]

1038년, 바랑기아인들은 조지 마니아케스 휘하에서 시칠리아 재정복에 참여했다. 이들은 노르만족, 롬바르드족과 함께 싸웠으며, 이 시기 친위대의 주요 구성원은 하랄 하르드라다였다.[12] 1041년, 카테판 미하일 두케니아노스는 바리에 바랑기아인 병력을 주둔시켰고, 같은 해 9월 엑사우스토스 보이오안네스가 바랑기아인 병력과 함께 이탈리아로 파견되었으나 노르만족과의 전투에서 패배했다.[12] 1047년 존 라파엘이 바랑기아인 병력과 함께 바리로 파견되었고,[12] 1067년 마브리카가 바랑기아 보조 병력과 함께 브린디시타란토를 점령했다.[12]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황제의 친위대 대부분이 전사했다.[22]

노르웨이 십자군 이후, 친위대는 노르웨이 전사들의 유입을 받았다.[27] 바랑기아인들은 주 무기로 데인 도끼를 사용했지만, 검술과 궁술에도 능했다.[28] 안나 콤네나의 ''알렉시아스''에서는 이들이 기마병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친위대는 주로 콘스탄티노플 주변에 주둔했으며, 부콜레온 궁전 단지에 주둔했을 수 있다. 1122년 베로이아 전투에서 바랑기아인들은 페체네그 마차 원을 헤쳐나가 비잔티움 제국의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26]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바랑기아 친위대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23] ''모레아 연대기''에 따르면, 이 부대는 1259년 펠라고니아 전투 이후 아카이아 공을 감옥으로 호송했다.[30] 1400년경 콘스탄티노플에서 바랑기아인으로 확인된 사람들이 발견되었다.[11]

5. 룬스톤 기록



스칸디나비아 전역에는 룬스톤이라고 불리는 여러 개의 세워진 석재 기념물이 있다. 룬스톤은 스칸디나비아에 불균등하게 분포되어 있는데, 덴마크에는 250개, 노르웨이에는 50개가 있으며, 아이슬란드에는 없다.[36] 스웨덴에는 정의에 따라 1,700[36]개에서 2,500[37][38]개에 이르는 룬스톤이 있다. 스웨덴 웁랜드 지역은 1,196개의 석재 비문으로 가장 높은 밀도를 보이며, 쇠데르만란드가 391개로 그 뒤를 잇는다.[38] 많은 비문이 바이킹 시대에 속하며, 바랑기아 친위대와 관련된 비문도 많이 있다.[39][40]

이 바랑기아 룬스톤은 새겨진 룬 문자를 통해 여러 전사들의 죽음을 기념하며, 동쪽(''Austr'') 또는 동쪽 경로(''Austrvegr'')로의 항해, 또는 가르다리키 (오늘날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와 같은 더 구체적인 동부 지역으로의 항해를 언급한다. 바랑기아 친위대가 겪은 손실은 그리스 룬스톤이라고 불리는, 해외 항해에 대해 이야기하는 가장 큰 룬스톤 그룹에 반영되어 있다.[41] 이 룬스톤들은 바랑기아 친위대의 전 구성원 또는 그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더 작은 그룹은 남부 이탈리아에서 죽은 바랑기아 친위대 구성원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4개의 이탈리아 룬스톤으로 구성된다.

가장 오래된 그리스 룬스톤은 RAK 스타일의 6개의 석재로, 서기 1015년 이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42] 이 그룹에는 스케프투나 룬스톤 U 358, 베스트라 레딩에 룬스톤 U 518, 넬베르가 룬스톤 Sö 170, 에릭스타드 룬스톤 Sm 46이 있다.[43]

Pr4 스타일의 더 유명한 후기 룬스톤 중 하나는 에드 룬스톤 U 112로, 에드 호수의 서쪽 기슭에 있는 큰 바위이다. 이 룬스톤은 바랑기아 친위대 대장 라그발드르가 고국으로 돌아와 죽은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비문을 새겼다고 전한다.[43]

에드 룬스톤 U 104 (현재 옥스퍼드애슈몰린 박물관에 소장)와 같은 가장 어린 룬스톤은 Pr5 스타일로, 룬스톤이 유행하지 않게 된 서기 1080-1130년 시기에 속한다.[43]

바랑기아인들은 비잔틴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예를 들어, 11세기 초 리스뷔르 룬스톤 U 161에 새겨진 비잔틴 십자가는 오늘날 스웨덴 스톡홀름주에 있는 3개 자치구 지역이자 태비 시의 자리인 태비문장이다.[44] 룬 문자는 바이킹 보레스타의 울프가 새겼으며, 오르케스타 룬스톤 U 344를 참조하면 스칼함라에 있는 또 다른 울프를 기리기 위해, 그리고 후자의 아버지의 요청으로 새겨졌음을 알 수 있다.[44]

피레우스 사자 곡선형 린드웜 그림. 사자에 새겨진 룬 문자는 비잔틴(동로마) 황제를 위해 용병으로 복무한 스웨덴 전사들, 아마도 바랑기아인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비잔틴 십자가, U 161에 새겨져 있으며, 오늘날 스웨덴 태비 시의 문장이다.


하기아 소피아의 룬 비문 중 하나로, 아마도 바랑기아 친위대 구성원들이 새겼을 것이다.

6. 노르드 사가 기록

사가에 따르면, 서부 노르드인은 동부 노르드인보다 훨씬 늦게 친위대에 들어갔다. 락스다엘라 사가에 따르면, 아이슬란드인 볼리 볼라손 (1006년경 출생)이 바랑기아 친위대에 소속된 최초의 아이슬란드인으로 알려져 있다.[45] 덴마크를 거쳐 콘스탄티노플로 여행한 그는 바랑기아 친위대에서 여러 해를 보냈으며, "사람을 시험하는 모든 일에서 가장 용맹하다고 여겨졌고, 항상 최전선에 섰다."[46] 사가는 또한 그의 추종자들이 황제로부터 받은 화려함과 그가 아이슬란드로 돌아온 후 누린 영향력을 기록하고 있다.

뉘알의 사가는 홀름가르드(노브고로드)로 갔다가 미클라가르드(콘스탄티노플)로 가서 황제의 신하가 된 아이슬란드인 콜스케그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그에 대해 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은 그곳에서 아내를 얻고 바랑기아인들의 대장이 되어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는 것이다."[48]

바랑기아 친위대의 일원 중 한 명은 미래의 노르웨이 왕 노르웨이의 하랄 3세인 하랄 하르드라데("강철 통치자")였다.[49] 고국에서 도망친 하랄은 먼저 가르다리키로 갔다가 1035년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그는 18번의 전투에 참여했고, 조지 마니아케스 장군 휘하에서 아나톨리아와 시칠리아에서 아랍인과 싸웠고, 남부 이탈리아와 불가리아에서도 싸웠다. 하랄 시구르드손의 여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하랄 시구르드손의 사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바랑기아 친위대에 있는 동안 하랄은 "망글라비테스"와 "스파타로칸디다토스"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그의 복무는 지휘하에 있었을 때 가져간 제국의 약탈물을 횡령한 혐의로 투옥되면서 끝났다. 그는 황제 미카엘 5세가 폐위되면서 석방되었고, 사가 자료에 따르면 그와 그의 삼촌이 스투디우스 수도원의 교회로 도망쳐 제단에 매달렸을 때 황제를 눈멀게 하도록 보내진 사람이 그였다고 한다.

하랄은 그 후 그의 직책에서 물러나려고 했지만 거부당했다. 그는 결국 탈출하여 1043년 고국으로 돌아와 노르웨이 왕이 되었고, 1066년 잉글랜드를 침략하는 동안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사망했다.

하랄 하르드라데의 손자인 노르웨이의 시구르드 1세가 노르웨이 십자군을 성지로 떠났을 때 바랑기아 친위대는 옛 스칸디나비아의 모습을 되찾았다. 무슬림과의 전투를 벌인 후 1110년 시구르드 왕은 원래 6,000명이었던 나머지 병력을 바랑기아 친위대에 합류시켰다. 시구르드 왕은 개인 경호원 중 100명 미만과 함께 귀국했다.

바랑기아 친위대에 있는 노르웨이인이나 아이슬란드인을 다루는 대부분의 고대 노르드어 서술은 13세기에 작성되었으며, 서부 노르드 문화권 내에서 비잔틴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견해를 증명한다.[50]

참조

[1] Citation English Refugees in the Byzantine Armed Forces: The Varangian Guard and Anglo-Saxon Ethnic Consciousness http://deremilitari.[...] The Society for Medieval Military History 2014-06-23
[2] 서적 Private Security in the 21st Century: Concepts and Applications Jones and Bartlett Publishers 1997
[3] 웹사이트 Varangian Guard: Protectors of the Byzantine Empire – Medieval History https://historymedie[...] 2024-11-24
[4] 서적 The Varangian Guard 988–1453 https://books.google[...] Bloomsbury USA 2010-06-22
[5] 서적 A companion to Russian history https://books.google[...] Wiley 2009-04-06
[6] 서적 How the Barbarian Invasions Shaped the Modern World https://books.google[...] Fair Winds Press
[7] 서적 Viking Empires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8] 간행물 "Austrvegr'': The Role of the Eastern Baltic in Viking Age Communication Across the Baltic Sea" Brill 2018
[9] 문서 Jansson 1980:22
[10] 문서 Pritsak 1981:386
[11] 문서 The Late Byzantine Army: Arms and Society 1204–1453 Philadelphia 1992
[12] citation John Skylitzes: A Synopsis of Byzantine History, 811–1057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3] 문서 D'Amato, pp. 4, 6
[14] 웹사이트 The Vikings at home https://www.historye[...] 2020-05-24
[15] 웹사이트 Kievan Rus https://www.worldhis[...] 2020-05-24
[16] 웹사이트 The Vikings (780–1100) https://www.metmuseu[...] www.metmuseum.org 2020-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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