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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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민애왕은 신라의 제45대 왕으로, 838년부터 839년까지 재위했다. 김명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23세에 사망했다. 희강왕을 옹립한 후 왕위에 올랐으나, 김우징 세력의 반란으로 인해 살해되었다. 신무왕에 의해 민애왕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경주 내남면에 민애왕릉으로 추정되는 사적이 있다.

민애왕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김명 (金明)
칭호국왕
왕조신라
재위 기간838년 - 839년 2월 10일
출생817년
사망839년 2월 10일 (22세)
아버지선강왕 김충공
어머니선의태후 김씨 (귀보부인)
왕후윤용왕후 김씨
시호민애(閔哀)
작위제44대 신라 국왕
전임자희강왕
후임자신무왕
생애
출생817년
사망839년 (음력 1월 23일)
가계아버지: 김충공 (金忠恭)
어머니: 귀보부인 김씨 (貴寶夫人 金氏)
배우자: 윤용왕후 김씨 (允容王后 金氏)
즉위
즉위 과정희강왕이 암살당한 후, 상대등 김양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희강왕의 측근들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름.
치세
정치사치와 향락에 빠져 정치를 소홀히 함.
국고를 탕진하고 백성들의 원망을 삼.
군사839년 1월, 김우징(후의 신무왕)이 장보고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킴.
김우징의 군대에 패배하여 살해당함.
기타
암살김우징의 반란으로 살해당함.
능묘위치 정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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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현존하는 역사서에는 민애왕의 출생 연도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863년 경문왕이 민애왕의 명복을 기원하며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에 봉안한 민애대왕석탑사리호(敏哀大王石塔舍利壺, 보물 제741호, 현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839년 정월 23일에 2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리호 명문에는 민애왕의 휘가 '肌'이며, 선강대왕의 맏아들이자 당시 왕인 경문왕의 아버지의 외삼촌(老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흥덕왕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했다. 민애왕(당시 김명)은 이 과정에서 김균정과의 경쟁에서 김제륭(희강왕)을 지지하여 옹립하는 데 기여했고, 837년에는 상대등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838년 정월, 그는 시중 이홍과 함께 사병을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희강왕의 측근을 제거하고 왕을 압박했으며, 결국 희강왕이 궁궐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자 김명은 귀족들의 추대 절차 없이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르자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청해진장보고에게 의탁하여 군사적 지원을 얻어 복수를 도모했다. 838년 3월부터 김양이 이끄는 군대는 무주(광주)와 남원소경(남원) 등을 함락시키며 민애왕을 압박했다. 839년 윤 정월 19일, 김양의 군대가 수도 금성 인근의 달벌까지 진격해오자, 민애왕은 군대를 동원하여 방어에 나섰으나 크게 패배하였다. 패전 소식에 측근들이 모두 흩어지자 왕은 금성 서쪽 교외의 월유택(月遊宅)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정월 23일, 추격해 온 병사들에게 발각되어 살해당했다.

사후 신무왕이 즉위한 뒤 민애왕(閔哀王)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예법에 따라 장례가 치러졌다. 현재 경주시 내남면 망성리에 있는 사적 제190호가 전(傳) 민애왕릉으로 지정되어 있다.

2.1. 즉위 전

835년 2월, 김균정상대등에 임명되고 그의 아들 김우징(훗날의 신무왕)이 시중 자리에서 물러나자, 당시 대아찬이었던 김명(훗날의 민애왕)이 시중 자리를 이어받았다. 흥덕왕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를 두고 김균정과 그의 조카 김제륭(훗날의 희강왕)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다. 김명은 김균정과 김제륭 모두와 누이를 통해 인척 관계(매형)를 맺고 있었다.

836년, 김명은 아찬 이홍, 배훤백 등과 힘을 합쳐 김제륭을 지지했고, 결국 김제륭이 왕위에 올라 희강왕이 되었다. 희강왕 즉위 후인 837년 봄 정월, 김명은 상대등으로 임명되었고, 이홍은 시중이 되어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한편,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 등은 청해진(현재 전라남도 완도군)의 대사 장보고(궁복)에게 몸을 의탁하며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838년 봄 정월, 김명은 시중 이홍과 함께 사병을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희강왕의 측근 세력을 제거하고 왕을 압박했으며, 결국 희강왕은 궁궐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희강왕이 죽자 김명은 귀족들의 추대 절차 없이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2.2. 즉위와 최후

838년 이찬 김귀(金貴)를 상대등으로, 아찬 헌숭(憲崇)을 시중으로 삼았다. 같은 해 2월, 김우징은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 청해진으로 가서 장보고에게 의탁하며 군사를 요청했고, 장보고는 이를 지원하였다. 김양(金陽)이 평동장군이 되어 군대를 이끌고 3월부터 군사 활동을 시작하여 무주(광주)와 남원소경(남원)을 함락시켰다. 겨울 12월, 김양의 군대가 무주 철야현(武州鐵冶縣)까지 진격하자, 왕은 대감 김민주(金敏周)에게 군사를 내어 맞서게 했으나, 김양 군은 낙금(駱金)과 이순행(李順行)이 이끈 기병 3천의 돌격으로 왕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839년 윤 정월 19일, 김양의 군대는 밤낮으로 행군하여 수도 금성 인근의 달벌(達伐)에 도착하였다. 왕은 이찬 대흔(大昕)과 대아찬 윤린(允璘), 의훈(嶷勛) 등에게 병력을 주어 방어하게 했으나, 김양 군에게 크게 패하여 왕의 군사 절반 이상이 전사했다. 패전 소식을 들은 왕의 측근들은 모두 흩어졌고, 왕은 금성 서쪽 교외의 월유택(月遊宅)으로 도망쳐 숨었으나 병사들에게 발각되어 살해되었다.

사망 날짜는 《삼국유사》 왕력에는 정월 22일로, 863년 경문왕이 민애왕의 명복을 빌며 제작한 민애대왕석탑사리호 명문에는 정월 23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때 나이는 23세였다. 이후 신무왕이 즉위하여 여러 신하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내고 시호를 민애(閔哀)라 하였다. 경주시 내남면 망성리에 있는 사적 제190호가 전 민애왕릉으로 지정되어 있다.

3. 가계

삼국유사》 왕력(王歷) 편에 따르면, 민애왕의 아버지 김충공과 어머니 귀보부인은 모두 원성왕의 손자인 혜충태자 인겸의 자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남매 간의 근친혼에 해당한다.

* 증조부: 제38대 원성왕(元聖王, ? ~ 798년)
* 조부 겸 외조부: 혜충태자 인겸(惠忠太子 仁謙, ? ~ 791년) - 원성왕의 장자로, 소성왕에 의해 혜충왕(惠忠王)으로 추존되었다.
* 아버지: 김충공(金忠恭, ? ~ 835년) - 선강왕(宣康王)으로 추존되었다.
* 어머니: 귀보부인 김씨(貴寶夫人 金氏, 생몰년 미상) - 선의태후(宣懿太后)로 추존되었다.삼국사기》에는 박씨(朴氏)로 기록되어 있다.
* 누이: 문목부인 김씨(文穆夫人 金氏) - 희강왕의 왕비이며 경문왕의 할머니이다.
* 누이: 조명부인 김씨(照明夫人 金氏) - 김균정의 부인이며 헌안왕의 어머니이다.
* 왕후: 윤용왕후 김씨(允容王后 金氏, 생몰년 미상) - 각간(角干) 영공(永公)의 딸이다.

4. 민애왕이 등장하는 작품

* 《해신》(KBS 2TV, 2004년~2005년, 배우:김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