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
1. 개요
죽지는 신라 시대의 인물로, 김술종의 아들이다. 649년 백제 은상의 침략을 막는 전투에서 김유신 휘하 장군으로 활약하였으며, 이후 집사부 시중을 역임하며 정치 활동을 했다. 백제 부흥 운동 진압, 고구려 정벌 등에도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득오와의 관계를 통해 《모죽지랑가》의 주인공으로도 알려져 있다.
| 원어 이름 | 죽지 |
|---|---|
| 별호 | 죽만(竹曼), 지관(智官), 죽지랑(竹旨郞) |
| 복무 | 신라군 |
| 작위 | 신라의 제1대 중시 |
|---|---|
| 재임 기간 | 651년~655년 |
| 군주 | 신라 태종무열왕 |
| 군주 칭호 | 국왕 |
| 후임자 | 문충 |
| 출생일 | 미상 |
|---|---|
| 출생지 | 미상 |
| 사망일 | 미상 |
| 사망지 | 미상 |
| 국적 | 신라 |
| 아버지 | 술종(述宗) |
| 성별 | 남성 |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제3차 고구려-당 전쟁 나당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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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진찬 -
거칠부
거칠부는 신라의 관리, 장군, 상대등으로, 승려였다가 환속 후 진흥왕 때 국사 편찬과 고구려와의 전쟁에 공을 세웠으며, 576년 상대등에 임명되었고, 그의 딸들은 미생, 문노와 혼인하여 신라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
이찬 -
김천존
김천존은 7세기 중후반 신라의 장군으로, 도살성 전투 승리, 황산벌 전투 참전, 당나라와의 협력, 백제 부흥군 진압, 당나라, 백제와의 화친, 고구려 정벌 등 다양한 공을 세웠다. -
화랑 -
찬기파랑가
찬기파랑가는 충담이 화랑 기파랑의 인품을 기려 지은 10구체 향가로, 그의 숭고한 이상과 고결한 정신을 기리는 내용으로 제망매가와 함께 향가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며 다양한 해독과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
화랑 -
김원술
김원술은 신라 진골 귀족이자 김유신의 아들로, 당나라와의 전투 패배 후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불우한 삶을 살았으나 매소성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원술 설화의 주인공이자 진주 김씨의 시조이다.
2. 생애
죽지는 진덕여왕, 태종무열왕, 문무왕, 신문왕의 4대에 걸쳐 재상이 되어 나라를 안정케 하였다고 전해진다. 651년(진덕여왕 5년) 파진찬 관등으로 새로 설치된 집사부의 중시가 되어 655년(태종무열왕 2년) 1월까지 기밀사무를 관장하였다.
2.1. 초기 생애와 백제와의 전투
김술종이 삭주도독이 되어 임지로 가던 중 죽지령(竹旨嶺)이라는 곳에서 한 거사(居士)를 만났고, 부임한 지 1달이 되었을 즈음에 거사가 죽었는데, 곧 김술종의 부인이 기이한 꿈을 꾸고는 아들을 낳았다. 술종공은 이를 거사가 환생한 것이라 여기고는 거사와 처음 만났던 곳의 지명을 따서 이름을 죽지라 했다.
649년(진덕여왕 3년) 8월, 백제의 장군 은상이 쳐들어오자, 진춘, 천존 등과 함께 김유신의 휘하 장군으로 참전하여 도살성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661년(문무왕 원년) 4월에는 여러 장수들과 함께 백제부흥군과 싸웠다가 패하였으나, 7월에는 천품과 함께 귀당총관(貴幢摠管)에 임명되어 다시 전선에 나섰다.
670년(문무왕 10년) 7월, 천존과 함께 웅진도독부를 공격하여 7성을 빼앗고 2천 명을 죽였다. 671년(문무왕 11년) 6월에는 백제 잔당들의 가림성으로 가서 그 곳의 벼를 짓밟아 식량보급을 차단했으며, 당나라 군사와 석성에서 싸워 5,300명의 목을 베고, 백제의 장군 두 명과 당나라의 과의(果毅) 여섯 명을 포로로 잡았다.
2.2. 집사부 시중과 정치 활동
죽지는 649년(진덕여왕 3년) 8월 백제의 장군 은상이 쳐들어오자 진춘, 천존 등과 함께 김유신의 휘하 장군으로 참전하여 도살성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651년(진덕여왕 5년) 2월 집사부 중시가 되어 655년(태종무열왕 2년) 1월까지 기밀사무를 관장하였다.
661년(문무왕 원년) 4월에는 여러 장수들과 함께 백제부흥군과 싸웠다가 패하였으나, 7월에는 천품과 함께 귀당총관(貴幢摠管)에 임명되어 다시 전선에 나섰다. 668년(문무왕 8년) 6월에는 이찬 관등으로 진춘과 함께 경정총관(京停摠管)에 임명되어 같은 해 10월 고구려 정벌에서 공을 인정받아 각간 관등을 받았다.
670년(문무왕 10년) 7월, 천존과 함께 웅진도독부를 공격하여 7성을 빼앗고 2천 명을 죽였다. 671년(문무왕 11년) 6월에는 백제 잔당들의 가림성으로 가서 그 곳의 벼를 짓밟아 식량 보급을 차단했으며, 당나라 군사와 석성에서 싸워 5천 3백 명의 목을 베고, 백제의 장군 두 명과 당나라의 과의(果毅) 여섯 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후 기록이 없어 행적은 알 수 없지만, 진덕여왕, 태종무열왕, 문무왕, 신문왕의 4대에 걸쳐 재상이 되어 나라를 안정케 하였다고 전해진다.
2.3. 백제 부흥 운동 진압과 고구려 정벌
661년(문무왕 원년) 4월, 죽지는 여러 장수들과 함께 백제부흥군과 싸웠다가 패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천품과 함께 귀당총관(貴幢摠管)에 임명되어 다시 전선에 나섰다.
668년(문무왕 8년) 6월, 이찬 관등으로 진춘과 함께 경정총관(京停摠管)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10월 고구려 정벌에서 공을 세워 각간 관등을 받았다.
2.4. 웅진도독부 공격과 백제 잔당 소탕
670년(문무왕 10년) 7월, 죽지는 천존과 함께 웅진도독부를 공격하여 7개 성을 빼앗고 2천 명을 죽였다. 671년(문무왕 11년) 6월에는 백제 잔당들이 점거한 가림성으로 가서 그 곳의 벼를 짓밟아 식량 보급을 차단했으며, 당나라 군사와 석성에서 싸워 5천 3백 명의 목을 베고, 백제의 장군 두 명과 당나라의 과의(果毅) 여섯 명을 포로로 잡았다.
3. 모죽지랑가의 주인공
《모죽지랑가》는 신라 효소왕 때 득오(得烏)가 지은 향가로, 화랑 죽지랑을 사모하는 내용이다. 득오는 죽지랑의 낭도였으며, 죽지랑이 익선에게 부당하게 징발된 득오를 구출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과 존경의 마음을 담아 이 노래를 지었다.
得烏去隱春皆林米한국어
毛冬居叱哭屋尸以憂音한국어
阿冬音乃叱好支賜烏隱한국어
貌史年數就音墮支行齊한국어
目煙廻於尸七史伊衣한국어
逢烏支惡知作乎下是한국어
郞也慕理尸心未 行乎尸道尸한국어
蓬次叱巷中宿尸夜音有叱下是한국어
3.1. 득오와의 관계와 익선의 횡포
효소왕 대 모량리(牟粱)에서 아찬 관등을 지내던 익선(益宣)은 죽지랑의 낭도인 득오(得烏)를 차출하여 부역시켰다. 죽지랑은 익선에게 득오의 휴가를 청하여 함께 돌아오고자 하였으나 이를 거절당하였고, 사리(使吏) 간진(侃珍)의 도움으로 득오를 데려올 수 있었다. 익선의 악행을 들은 화주(花主)는 익선을 벌하고자 하였으나 그가 도망치자 그 아들을 대신 벌하였다. 이 일로 인해 모량리 사람은 벼슬할 수 없게 되었다. 훗날 득오가 죽지랑을 기리며 《모죽지랑가》를 지었다.
3.2. 모죽지랑가
효소왕 때 모량리(牟粱)에서 아찬 관등을 지내던 익선(益宣)은 죽지랑의 낭도인 득오(得烏)를 차출하여 부역시켰다. 죽지랑은 익선에게 득오의 휴가를 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고, 사리(使吏) 간진(侃珍)의 도움으로 득오를 데려올 수 있었다. 익선의 악행을 들은 화주(花主)는 익선을 벌하고자 하였으나 그가 도망치자 그 아들을 대신 벌하였다. 이 일로 인해 모량리 사람은 벼슬할 수 없게 되었다. 훗날 득오가 죽지랑을 기리며 《모죽지랑가》를 지었다.
4. 관련 작품
죽지와 관련된 작품은 다음과 같다.
5. 가계
* 아버지: 김술종 (金述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