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찬호
1. 개요
민찬호는 1877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한 독립운동가이다. 배재학당에서 서재필의 지도를 받았고, 1901년 YMCA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1905년 하와이 그리스도 감리교회 목회자로 초빙되어 미국에서 목회와 교육 활동을 펼쳤으며, 한인상조회, 국민회, 흥사단 등 독립운동 단체에 참여했다. 1918년 파리 강화회의 대표로 선출되었으나 비자 발급 문제로 파견되지 못했고, 1919년 한인기독교회 초대 목사, 한인기독학원 교장을 지냈다. 2017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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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관 | 여흥 민씨 |
|---|---|
| 출생 | 1989년 1월 19일 (35세) |
| 거주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 학력 | 서강대학교 사회과학부 졸업 |
| 병역 | 대한민국 해군 병장 만기 전역 |
| 가족 | 배우자: 비연예인 (2023년 결혼 ~ 현재) |
| 소속 정당 | 국민의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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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경력 | 윤석열 대통령후보 국민의힘 선거대책본부 청년보좌역 국민의힘 대변인 국민의힘 상근부대변인 |
| 현재 직책 | 국민의힘 상근부대변인 |
| 2024 |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 국민의미래) 낙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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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거주한 한국인 -
이승만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고 해방 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독재적 통치와 부정부패에 대한 비판도 받으며 4·19 혁명 후 하와이로 망명하여 서거하였다. -
미국에 거주한 한국인 -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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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감리교도 -
이승만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고 해방 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독재적 통치와 부정부패에 대한 비판도 받으며 4·19 혁명 후 하와이로 망명하여 서거하였다. -
대한민국의 감리교도 -
이기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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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교육인 -
이상화 (시인)
이상화는 일제강점기의 저항 시인으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같은 작품을 통해 민족의 저항 의지를 표현했으며, 민족 시인으로서의 고뇌와 헌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그의 작품과 정신은 현재에도 재평가되고 있다. -
일제강점기의 교육인 -
김성수 (언론인)
김성수는 인촌이라는 호를 사용한 언론인이자 기업인, 정치인으로, 경성방직 설립, 동아일보 창간, 보성전문학교 인수 및 발전에 기여했으며 제2대 부통령을 역임했으나 친일 논란이 있다.
2. 생애 및 활동
민찬호는 1877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했다. 배재학당 재학 중 서재필의 지도를 받았고, 1901년 YMCA 초대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05년 하와이 그리스도감리교회 목회자로 초빙되어 LA 유학 전까지 약 6년간 시무했다. 이후 한인상조회(韓人相助會)를 조직하고, 1909년 국민회 창립, 1913년 흥사단 창립에 기여했다. 1911년 LA 신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남가주 대학에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18년 파리 강화 회의 대표로 선출되었으나 미국의 비자 거부로 1919년 제1차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했다. 같은 해 한인기독교회 초대 목사, 1928년까지 한인기독학원 교장을 역임했다. 1921년 동지회 창립에 참여, 1930년대 이후 중한민중동맹단(中韓民衆同盟團)에도 가담했다.
2.1. 초기 생애 (1877~1905)
민찬호는 1877년 황해도 평산에서 민형찬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에서 주로 성장했다. 배재학당 재학 중 서재필의 지도를 받아 협성회에 관여했으며, 1901년 YMCA가 발족할 때 초대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2.2. 하와이 이주 및 목회 활동 (1905~1911)
1905년, 민찬호는 하와이 그리스도 감리교회 제2대 목회자로 초빙되어 LA로 유학가기 전까지 약 6년간 시무하였다. 이후 하와이 동포들과 한인상조회(韓人相助會)를 조직하였고, 1909년 국민회 창립에 관여했으며, 1913년 안창호 등이 흥사단을 만들 때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2.3. 독립운동 참여 (1909~1921)
1905년 하와이 그리스도감리교회에 제2대 목회자로 초빙되어 LA로 유학가기까지 약 6년간 시무하였다. 이후 동포들과 한인상조회(韓人相助會)를 조직하였고 1909년 국민회(國民會) 창립에 관여했으며, 1913년 안창호 등이 흥사단을 만들 때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1918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할 대표로 이승만, 정한경과 함께 뽑혔으나, 미국 정부가 한국 대표의 비자를 발급하지 않아 실제 파견되지는 못했다. 대신 1919년 4월 14일부터 4월 16일까지 3일간 열린 제1차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1919년 한인기독교회 초대 목사를 역임했으며, 같은 해부터 1928년까지 약 10여년간 한인기독학원의 교장으로도 재직했다.
1921년 호놀룰루에서 동지회가 창립될 때 참가했다.
2.4. 교육 활동 및 기타 활동 (1911~1930년대)
1911년 LA 신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남가주 대학에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18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할 대표로 이승만, 정한경과 함께 선출되었으나, 미국 정부가 한국 대표의 비자를 발급하지 않아 실제 파견되지는 못했다. 대신 1919년 4월 14일부터 4월 16일까지 3일간 열린 제1차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1919년 한인기독교회 초대 목사를 역임했으며, 같은 해부터 1928년까지 약 10여 년간 한인기독학원 교장으로도 재직했다.
1921년 호놀룰루에서 동지회가 창립될 때 참여했고, 1930년대 이후에는 중립적인 위치에서 반이승만 계열인 중한민중동맹단(中韓民衆同盟團)에도 가담했다.
3. 가족 관계
민찬호의 부인 몰리 홍 민은 하와이 초기 한인 목사였던 홍치범의 동생이다. 영민했던 홍치범, 몰리 홍 민 남매는 평양지역 선교 책임자 윌리엄 노블 목사의 도움으로 서울과 미국 등지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몰리 홍은 하와이의 엘리트 여학교였던 카와이아하오 여자신학교와 디이컨 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 샌프란시스코 감리교 주교였던 휴스의 중매로 민찬호를 만나 같은 해 6월 4일에 결혼했다. 몰리 홍은 민족운동과 목회활동으로 바빴던 민찬호 목사 대신 집안의 경제를 도맡았으며, 민 목사 사후에는 적십자 활동을 적극적으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