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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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민승호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명성황후의 의붓 오빠이자 흥선대원군의 척족 세력이었다. 돈령부 판서와 공조 판서를 지냈으며, 1861년 음서로 관직에 올라 고종 즉위 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 등을 거쳤다. 1866년 명성황후가 왕비로 책봉된 후 이조참의, 호조참판을 역임했고 형조, 병조 판서를 지냈다. 1874년 자택에서 폭탄 테러로 사망했으며, 흥선대원군의 관련설이 제기되었다. 사후 고종은 그에게 충정이란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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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승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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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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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 민승호 |
한자 | 閔升鎬 |
로마자 표기 | Min Seungho |
2. 생애
민승호는 돈령부판사와 공조판서를 지낸 민치구와 부인 전주 이씨의 차남으로, 외가 쪽으로는 덕흥대원군의 후손이었다. 누이인 여흥부대부인이 남연군의 넷째 아들 흥선대원군과 혼인하면서 왕실의 근친이 되었다.[1]
본래 민치구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11촌 아저씨뻘 되는 명성황후의 생부 민치록의 양자로 입양되었다.[1] 이에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봉사손 자격으로 1861년 음서로 관직에 올랐다.[2] 1863년 누이의 아들(고종)이 왕으로 즉위하였다. 1864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종5품)를 제수받았고, 곧 응교(정4품), 전한(종3품), 규장각 직각(정3품), 가례도감 부제조(정3품 당상)로 파격 승진을 거쳤다.
1866년 양누이동생인 명성황후가 왕비로 책봉되면서 이조참의(정3품 당상)으로 임명되었으며, 1867년 1월 호조참판에 승진되었다. 그 뒤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일본이 국서를 보내 와서 국교를 요청하였을 때 흥선대원군이 국교 수립에 반대하자 그에 맞서 찬성하였고,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민씨 족당의 수령이 되었다.
1874년 음력 11월 28일 신원미상의 승려가 그에게 선물이라며 진상품을 갖다 바쳤고, 이것을 들고 와 개봉하던 중 상자 안에 들어있던 화약이 터지면서 민승호, 민승호의 아들, 양어머니 감고당 한산이씨 등이 모두 그자리에서 사망했다.[3] 민승호는 죽기전 운현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운현궁......"이라고 말했다.[3] 그 뒤 대를 잇기 위해 민태호(閔台鎬, 민치구의 장남과는 한자가 다른 동명이인)의 아들 민영익을 양자로 들였다.
2. 1. 가계와 초기 활동
민승호(閔升鎬)의 실부는 민치구(閔致久)이며, 민치록(閔致祿)의 양자가 됨으로써 고종의 왕비 명성황후(민비)의 의붓 오빠가 되었다. 친누나로는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민씨가 있고, 친동생으로는 민겸호가 있었다.1864년 무과 증광시에 급제, 1866년 이조 참의, 호조 참판을 거쳐 정3품으로 승진했다. 1872년 정2품으로 승진한 후 형조 판서, 1873년 병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1874년 11월, 자택에 배달된 폭탄을 개봉하다 사망했는데, 범인으로 흥선대원군의 전 별장 신철균이 체포되어 고문 끝에 자백하고 처형되었다.
2. 2. 관직 생활과 척족 세력의 부상
민승호는 돈령부판사와 공조판서를 지낸 민치구와 부인 전주 이씨의 차남으로, 외가 쪽으로는 덕흥대원군의 후손이었다. 누이인 여흥부대부인이 흥선대원군과 혼인하면서 왕실의 근친이 되었다.[1] 본래 민치구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11촌 아저씨뻘 되는 명성황후의 생부 민치록의 양자로 입양되었다.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봉사손 자격으로 1861년 음서로 관직에 올랐으며,1863년 누이의 아들(고종)이 왕으로 즉위하였다.[2] 1864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종5품)를 제수받았고, 곧 응교(정4품), 전한(종3품), 규장각 직각(정3품), 가례도감 부제조(정3품 당상)로 파격 승진을 거쳤다.
1866년 양누이동생인 명성황후가 왕비로 책봉되면서 이조참의(정3품 당상)으로 임명되었으며, 1867년 1월 호조참판에 승진되었다. 그 뒤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일본이 국서를 보내 와서 국교를 요청하였을 때 흥선대원군이 국교 수립에 반대하자 그에 맞서 찬성하였고,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민씨 족당의 수령이 되었다.
1874년 음력 11월 28일 신원미상의 승려가 그에게 선물이라며 진상품을 갖다 바쳤고, 이것을 들고와 개봉하던 중 상자 안에 들어있던 화약이 터지면서 민승호, 민승호의 아들, 양어머니 감고당 한산이씨 등이 모두 그자리에서 사망했다.[3] 민승호는 죽기전 운현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운현궁......"이라고 말했다. 그 뒤 대를 잇기 위해 민태호의 아들 민영익을 양자로 들였다. 친누나로 흥선대원군의 여흥부대부인 민씨, 친동생으로 민겸호가 있다.
2. 3. 의문의 죽음
민승호는 돈령부판사와 공조판서를 지낸 민치구와 부인 전주 이씨의 차남이었다. 외가 쪽으로는 덕흥대원군의 후손이었다. 누이인 여흥부대부인이 남연군의 넷째 아들 흥선대원군과 혼인하면서 왕실의 근친이 되었다.[1]본래 민치구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11촌 아저씨뻘 되는 명성황후의 생부 민치록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봉사손 자격으로 1861년 음서로 관직에 올랐다.[2] 1863년 누이의 아들(고종)이 왕으로 즉위하였다. 1864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종5품)을 제수받았고, 곧 응교(정4품), 전한(종3품), 규장각 직각(정3품), 가례도감 부제조(정3품 당상)로 파격 승진을 거쳤다.
1866년, 양누이동생인 명성황후가 왕비로 책봉되면서 이조참의(정3품 당상)으로 임명되었으며, 1867년 1월 호조참판에 승진되었다. 그 뒤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일본이 국서를 보내 와서 국교를 요청하였을 때 흥선대원군이 국교 수립에 반대하자 그에 맞서 찬성하였고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민씨 족당의 수령이 되었다.
1874년 음력 11월 28일 신원미상의 승려가 그에게 선물이라며 진상품을 갖다 바쳤고, 이것을 들고 와 개봉하던 중 상자 안에 들어있던 화약이 터지면서 민승호, 민승호의 아들, 양어머니 감고당 한산이씨 등이 모두 그자리에서 사망했다. 민승호는 죽기전 운현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운현궁......"이라고 말했다.[3] 그 뒤 대를 잇기 위해 민태호(閔台鎬, 민치구의 장남과는 한자가 다른 동명이인)의 아들 민영익을 양자로 들였다.
친누나로 흥선대원군의 여흥부대부인 민씨, 친동생으로 민겸호가 있다. 1864년에 무과 증광시에 급제하여, 1866년에 이조 참의, 호조 참판을 거쳐 정3품으로 승진, 1872년에 정2품으로 승진한 후 형조 판서, 1873년에 병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1874년 11월, 자택에 배달된 폭탄을 개봉하다 사망했는데, 범인으로 흥선대원군의 전 별장 신철균이 체포되어 고문 끝에 자백하고 처형되었다.
2. 4. 사후
고종은 민승호에게 충정이란 시호를 내렸다.[4] 민승호는 뒤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민비는 촌수가 좀 먼 민태호의 아들 민영익을 양자로 삼겠다고 했다.[4] 민태호는 반대하였으나, 그의 동생 민규호가 형을 협박하여 민영익은 민승호의 양자로 들어갔고, 뒤이어 민규호는 이조판서 겸 도통사가 되었다.[4] 1892년 봄 운현궁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가 민승호의 죽음이 흥선대원군과 관련이 있다고 여긴 명성황후의 보복이라는 주장이 있다.[3]3. 가족 관계
민백술(閔百述)의 증손이며, 친조부는 민단현(閔端顯)이다. 아버지는 민치구(閔致久, 1795년~1874년)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 ~ 1873년 11월 17일)로, 통덕랑 이옥의 딸이자 경원군 이하전의 고모이다. 친누나는 흥선대원군의 부인 여흥부대부인(1818년 - 1898년 1월)이며, 친동생은 민겸호(閔謙鎬, 1838년 - 1882년)이다.
민진후의 손자 민백분(閔百奮)을 양증조부, 민기현(閔耆顯)을 양조부, 민치록(閔致祿, 1799년~1858년)을 양부로, 감고당(感古堂) 한산 이씨(韓山李氏, ?~1874년)를 양모로 각각 입적하였다. 양 여동생은 명성황후이다. 부인은 3명으로 광산김씨(光山金氏, 경인년 ~ 기미년 4월 23일)는 김재정(金在廷)의 딸, 연안김씨(延安金氏, 임인년 ~ 정묘년 2월 11일)는 김정수(金鼎秀)의 딸, 덕수이씨(德水李氏, 신해년 ~ 기미년 7월 1일)는 이민성(李敏星)의 딸이다. 양자는 민영익(閔泳翊, 1860년~1914년)으로 생부는 민태호(閔台鎬)이다.
4. 기타
조카 민영환의 시호도 그의 시호와 같은 충정공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민충정공이라 하면 민영환이 더 많이 지목된다.
5. 민승호를 연기한 배우
참조
[1]
문서
[2]
웹사이트
깨진 링크
http://people.aks.ac[...]
[3]
서적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
경인문화사
2007-04
[4]
서적
매천야록
일문서적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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