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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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보회는 1969년 전태일을 중심으로 결성된 평화시장 재단사들의 모임이다. 근로기준법 준수와 열악한 노동 조건 개선을 목표로 활동했으며, 설문 조사와 진정서 제출, 시위 등을 통해 노동 현실을 알리려 노력했다. 바보회는 삼동친목회로 이름을 바꾸어 활동을 이어갔으나, 전태일의 분신 사건 이후 해체되었다. 바보회의 활동은 노동운동 활성화에 기여했으며, 현재까지도 노동 소외 문제 해결을 위한 재결성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전태일은 1960년대 후반 아버지와 노동환경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연히 근로기준법을 알게 되었다. 근로기준법을 알게 된 전태일은 이를 준수하고 타당한 임금을 받기 위해 김영문[1]에게 재단사 모임을 만들어 근로조건을 개선해 보자고 제의했다.
1968년 설립된 바보회는 평화시장 근로 조건 개선을 목표로 활동하였다.[1] 1969년 8~9월경 평화시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근로 실태 조사를 위한 설문지를 배부하였다.[1] 설문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전태일은 열악한 근로 조건에 대해 보고했지만, 시청과 노동청 측은 적절한 조치를 취해주지 않았다.[1]
평화시장, 동화시장, 통일상가 노동자들의 연대 조직이다. '삼동'은 이 세 시장을 지칭한다. 전태일이 '바보회' 활동으로 직장을 잃은 후,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개선하기 위해 다시 만든 모임으로, 삼동 노동자들이 함께 모여 단결하고자 하였다. 삼동친목회는 전태일과 동료들이 겪었던 노동 현실을 세상에 알리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시청과 노동청은 노동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이에 경향신문 기자를 설득하여 기사화했다.[1]
바보회는 1970년대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청계피복노동조합 결성에 영향을 주었다. 이상찬의 분신 기도, 신진자동차 파업 투쟁 등 노동자들의 투쟁과 대학생들의 시위가 활발하게 일어났으며, 1971년 노동자 투쟁 건수는 전년 대비 10배 이상 증가했다.[2]
평화시장 노동자들은 채광이 잘 안 되는 작업장, 135cm~140cm 높이의 낮은 형광등, 소음, 먼지가 가득한 환경에서 일했다. 대부분 아침 8시에 출근해서 밤 11시에 퇴근했으며, 평소에는 일요일에도 격주로 쉬었지만, 의류 성수기에는 열흘에서 스무 날씩 집에 가지 못했다.[1] 전태일의 1967년 3월 17일자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2. 설립 배경
그 후 10명 안팎의 재단사들이 매주 한 번씩 평화시장 부근 다방에서 모였다. 이로써 1969년 6월, 10명 안팎의 재단사들이 모여 ‘바보회’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3. 초기 활동 내용
전태일은 포기하지 않고 1970년 9월 16일 바보회의 이름을 삼동친목회로 바꾸어 활동했다.[1] 삼동친목회는 평화시장 주변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 조항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라는 것을 설명했다.[1] 그리고 노동자들이 받는 불합리한 대우를 고발하기 위하여 서울시청, 노동청, 방송국, 신문사를 찾아다녔다.[1]
1969년에 진행한 설문 조사의 회수율이 저조하여 다시 노동 실태를 조사했는데, 이때 126명의 응답을 받았다.[1] 이를 바탕으로 평화시장 피복 제품상 종업원 근로 개선 진정서를 만들었고, 90명 정도의 노동자들이 서명했다.[1] 1970년 10월 7일 경향신문 등에서 노동자들의 근로 조건 실태를 보도했다.[1] 노동청 관리들은 노동 조건 개선을 약속했지만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고, 이에 분노한 삼동친목회 회원들은 10월 20일 노동운동을 계획했다.[1] 하지만 정보가 노동청 관리에게 들어가면서 전태일은 기한 연기를 선택했고, 10월 24일 시위를 했으나 경찰에 의해 무산되었다.[1] 11월 13일 다시 시위를 벌였으나 무산 위기에 놓이자 전태일은 분신자살을 선택했다.[1]
4. 삼동친목회
노동청은 협상을 약속했지만, 계속해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에 노동자들은 시위를 계획했지만, 경찰의 방해로 실패했다. 결국 전태일은 온몸으로 노동 현실 개선을 호소하기 위해 분신을 선택했다.[1]
5. 사회에 미친 영향
2012년 전태일 재단은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 장애인, 청년 등의 노동 소외 문제 해결을 위해 바보회 재결성을 선언했다.[1] 재결성된 바보회는 노동절을 전후하여 출범,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1]
5. 1. 1970년대 이후
바보회는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을 활발히 일으킨 시발점 역할을 하였는데, 평화시장엔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군사독재체제였던 1970년엔 조선호텔 노동자 '''이상찬'''의 분신 기도가 있었다. 1971년엔 신진자동차에서 직원과 그 가족 등 총 1,900명의 파업투쟁이 있었다. 그리고 서울 시내 여러 대학교 학생운동가들의 시위도 있었다. 1971년의 노동자의 투쟁 건은 1,600건에 이르렀는데, 이는 전년도에 비해 10배가 넘는 수치였다.[2] 노동 투쟁에 대해 정부는 지식인, 종교인 등을 무차별적으로 체포하고 감금하였다.
5. 2. 현재
2012년 전태일 재단은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 장애인, 청년 등이 겪는 노동 소외 문제 해결을 위해 바보회 재결성을 선언했다.[1] 재결성된 바보회는 노동절인 5월 1일 전후에 출범하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1]
6. 노동자들이 겪은 어려움
> 정말 하루하루가 못 견디게 괴로움의 연속이다. 아침 8시부터 저녁 11시까지 하루 15시간을 칼질과 다리미질을 하며 지내야 하는 괴로움. 허리가 결리고 손바닥이 부르터 피가 나고 손목과 다리가 조금도 쉬지 않고 아프니 정말 죽고 싶다.
평화시장에서 5~6년씩 일한 20대 초중반의 미싱사들은 얼굴에 핏기가 없고 안질, 신경통, 기관지염, 폐병, 소화불량, 신경성 위장병, 월경불순 등 여러 질병에 시달렸다.[1]
6. 1. 바보회 활동 당시
평화시장 노동자들은 채광이 안 되는 작업장, 약 135cm~140cm인 낮은 형광등, 소음, 먼지 자욱한 헝겊 더미 속에서 일했다. 대부분 아침 8시에 출근해서 밤 11시에 퇴근했으며, 평소에는 일요일에도 격주로 쉬었지만, 의류업 성수기에는 열흘에서 스무 날씩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1] 1967년 3월 17일자 전태일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정말 하루하루가 못 견디게 괴로움의 연속이다. 아침 8시부터 저녁 11시까지 하루 15시간을 칼질과 다리미질을 하며 지내야 하는 괴로움. 허리가 결리고 손바닥이 부르터 피가 나고 손목과 다리가 조금도 쉬지 않고 아프니 정말 죽고 싶다.
평화시장에서 5~6년씩 일한 스물 서넛의 미싱사들은 얼굴에 핏기가 없고 안질, 신경통, 기관지염, 폐병, 소화불량, 신경성 위장병, 월경불순 등 갖가지 질병에 시달렸다.[1] 이는 당시 노동자들의 노동 현실이 매우 열악했음을 보여준다.
6. 2. 현재
근로기준법이 1960-70년대보다 준수되고 있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있다. 대표적인 예로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가 있다.[3][4] 비정규직은 계약직, 일용직, 파견근로직 등 정규직에 비해 열악한 대우와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고용형태를 말한다.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 공장 여성 노동자 황유미 씨가 반올림[5]에 의해 급성 백혈병으로 사망한 사건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황유미 씨는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던 중 급성 백혈병에 걸려 사망했다. 황유미 씨의 부친은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 유족급여를 신청했으나, 근로복지공단은 산업재해로 인정하지 않고 급여 지급을 거절했다. 이를 계기로 그해 11월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규명과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대책위원회'인 반올림이 발족되면서 삼성전자 백혈병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7. 현재 바보회와 비슷한 노동 조직
- '''대한간호조무사협회'''
대한간호조무사협회|大韓看護助務士協會한국어는 간호조무사의 권익 보호를 위해 1973년 7월 28일에 설립된 단체이다. 2024년 3월 21일, 근로 조건 개선을 위한 토론회를 개최했다.[1]
-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민주노총)
1995년 군부 독재 정권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으로 조직되었다. 2018년 1월 기준, 2,032개의 노동조합, 796,8명의 조합원, 7,416개의 가맹 연맹, 그리고 16개의 지역 본부 및 41개의 지구 협의회를 보유하고 있다.[1]
- '''한국노동조합총연맹''' (한국노총)
1961년 8월 30일, 16개의 산별 노조와 1개의 연합 노조로 결성되었다. 전국 단위 노동조합의 대표 단체이며, 현재 54개의 지역 본부를 두고 있다.[1]
- '''전국철도노동조합'''
1945년 11월 1일 설립되어, 철도 노동자들의 기본권 수호와 차별 철폐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5개의 지방 본부와 130개의 지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공공운수노동조합에 가입되어 있다.[1]
8. 당시의 근로기준법
1953년 5월 10일에 제정된 한국의 근로기준법은 한국 전쟁 중 북한의 노동자 정책에 대응하기 위한 목적이었다.[1] 북한은 노동자를 위한 국가라 선전했고, 남한은 노동자들이 북한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노동법을 제정했다.[1]
당시 근로기준법은 근로시간, 유급휴가, 18세 미만자와 여성의 근로 조건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2] 그러나 경제 상황 등으로 인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2] 근로자들은 장시간 노동과 휴일 부족에 시달렸고, 건강 진단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2] 특히 여성 및 연소 노동자(18세 미만)는 하루 14시간 이상 일하는 등 더욱 심각했는데, 이는 근로기준법상 하루 7시간 이상 근무가 불법인 것에 비하면 매우 열악한 환경이었다.[2]
9. 매체 속의 바보회
바보회는 여러 매체에서 다뤄졌다. 전태일 평전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를 바탕으로 한 최호철 작가의 장편 만화 태일이에서 바보회가 노동자들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삼았던 목표와 하고자 했던 일들을 쉽게 설명해준다.[2] 전태일 평전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서는 바보회가 처음 만들어지는 장면과 바보회 회장인 전태일이 노동청에 찾아가 근로자의 부당한 현실을 알리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전태일은 다니던 공장에서 해고당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1]
9. 1. 종이 매체
전태일 평전은 전태일의 생애를 다룬 책으로, 3부 141쪽부터 177쪽에서 바보회가 평화시장의 노동 조건 실태를 조사한 내용 등 바보회의 활동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1]최호철 작가의 장편 만화 태일이는 전태일 평전과 전태일 수기 모음집인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를 바탕으로 하며, 바보회가 노동자들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삼았던 목표와 하고자 했던 일들을 쉽게 설명해준다.[2]
9. 2. 영상 매체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전태일 평전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이다. 영화에서는 바보회가 처음 만들어지는 장면(약 36분 29초)과 바보회 회장인 전태일이 노동청에 찾아가 근로자의 부당한 현실을 알리지만, 노동청 근무자는 근로자 편을 들어주지 않고 전태일은 다니던 공장에서 해고당하는 장면(약 38분 40초)이 묘사되어 있다.[1]
10. 해체
평화시장주들이 바보회 회장인 전태일의 노동운동 사실을 알게 되면서, 회원들은 일자리를 잃고 모임도 제대로 유지되기 어려워졌다. 결국 재정적 어려움과 회원들의 일자리 상실로 인해 바보회는 해체되었다.[1] 전태일은 바보회 해체 후 1970년에 삼동친목회를 결성했지만, 전태일의 분신자살 이후 삼동친목회는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1]
11. 의의와 한계
바보회는 노동운동을 활발히 일으킨 시발점 역할을 하였다. 1971년엔 신진자동차에서 직원과 그 가족 등 총 1900여 명의 파업투쟁이 있었다. 또한 서울시내 대학교 학생운동가들이 집회를 벌이기도 했다.[2] 노동 투쟁에 대해 정부는 지식인, 종교인 등을 무차별적으로 체포하고 감금하였다.
11. 1. 의의
바보회는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을 활발히 일으킨 시발점 역할을 하였는데, 평화시장엔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군사독재체제였던 1970년엔 조선호텔 노동자 '''이상찬'''의 분신 기도가 있었다.[2] 1971년의 노동자 투쟁 건은 1600여 건에 이르렀는데, 이는 전년도에 비해 10배가 넘는 수치였다.전태일의 어머니인 이소선은 아들의 유언에 따라 노동운동에 뛰어들었고 '''전국연합노조 청계피복지부'''를 평화시장에 결성시켰다. 이소선은 2011년 사망할 때까지 노동운동에 크게 헌신하며 노동자들의 어머니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활동들은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당시 정부의 산업화 과정에서 희생당하던 노동자들의 삶이 사회 문제로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 학생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참조
[1]
문서
전태일이 평화시장에서 만난 바보회·삼동친목회를 함께한 사람
[2]
문서
노동청 실태조사 및 김대중 후보의 전태일 관련 발언
[3]
문서
비정규직의 근로조건 특징
[4]
문서
일용직의 근로조건 특징
[5]
문서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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