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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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종홍은 평안남도 평양 출신의 철학자이자 교육자이다. 평양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교사 생활을 시작하여 경성제국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이화여자전문학교와 경성제국대학 강사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로 정년퇴임할 때까지 40여 년간 교육 활동을 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학문 연구와 교육에 전념했으며, 광복 후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철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박정희 정부에서 국민교육헌장 기초에 참여했으나, 군부독재 협력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1976년 대통령 특별보좌관 재직 중 사망했으며,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그는 한국 철학 연구의 개척자로 평가받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 설립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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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홍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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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박종홍 |
원래 이름 | 박종홍 (朴鍾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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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03년 8월 23일 |
출생지 | 대한제국 평안남도 평양 |
사망일 | 1976년 3월 17일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본관 | 평산(平山) |
종교 | 유교(성리학) → 개신교(침례회) |
정당 | 무소속 |
공직 활동 | |
임기 | 1969년 11월 30일 ~ 1972년 1월 31일 |
대통령 | 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 |
총리 | 정일권 대한민국 국무총리 백두진 대한민국 국무총리 김종필 대한민국 국무총리 서리 김종필 대한민국 국무총리 |
장관 | 김정렴 대한민국 대통령 비서실 실장 |
직책 | 대한민국 대통령 비서실 교육문화담당 특별보좌관 |
경력 |
2. 생애
박종홍은 1920년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교원 임용시험에 합격, 1921년 18세에 전라남도 교육청에 발령되어 최연소 교사가 되었다. 1921년 보성보통학교를 시작으로 1922년 대구 수창보통학교, 1926년 대구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1929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에 진학하여 칸트와 헤겔 철학과 공리주의를 연구하였다.
1935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철학과 강사로도 출강하였다. 1937년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 철학교과 담당 교수, 1939년 이화여전 문과 과장을 역임하였다. 1940년 조선총독부의 창씨개명 강요를 거부하고 학문 연구와 교육 활동, 독서 장려 운동 등에 힘썼다.
1946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가 되어 1968년까지 재직했다. 한국 전쟁 이후 1953년 학술원 회원이 되고 종신회원으로 뽑혔으며, 1954년 한국철학회 회장이 되었다. 1960년 <부정에 관한 연구>로 서울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4년 한국사상연구회 회장을 역임했다.
1968년 정년퇴임 후에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 학장 (1969년 유학대학원장 겸임), 도산서원장, 1970년 한양대학교 문과대학 학장 등을 역임하였다. 1970년 12월에는 대통령 교육문화담당 특별보좌관에 임명되었으며 대한민국문화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1]
1976년 3월 17일 대통령 특별보좌관 재직 중 노환과 과로로 별세하였다.[1] 사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1]
2. 1. 보통학교, 고등학교 교사 생활 (1920-1932)
1920년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교원 임용시험에 합격, 1921년 18세에 전라남도 교육청에 발령되어 최연소 교사가 되었다. 1921년 3월 1학기부터 보성보통학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하면서, 1922년 잡지 《개벽》지에 <한국미술사>를 연재하였다.[3] 그 해에 대구 수창보통학교 교사로 옮겼고, 1924년 철학논문 '퇴계의 교육사상'을 발표하였다. 1926년 고등보통학교 교사자격검정시험에 합격하여 대구고등보통학교 교사로 봉직하였으며, 1929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에 진학하여 칸트와 헤겔 철학과 공리주의를 연구하였다.2. 2. 대학 교수 생활과 저술 활동 (1932-1945)
1935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로 옮겼고 다시 경성제국대학 철학과 강사로도 출강하였다. 1937년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 철학교과 담당 교수, 1939년 이화여전 문과 과장을 역임하였다.1940년 조선총독부 학무국으로부터 창씨개명령이 떨어지고 유예기간을 거친 뒤 1941년 창씨개명이 단행되자, 그는 자기 소신을 공개적으로 밝혀 조선인에게는 조선인의 것이 최고라며 창씨개명을 거부하였다. 이후 일체의 정치적인 활동을 삼가고 학문 연구와 교육 활동, 독서 장려 운동, 문풍 진작에 진력하였다.
광복 전까지 《일반논리학》(1948), 《인식논리학》(1953), 《철학개론강의》(1953) 등 저술활동을 시작했다.[4]
2. 3. 서울대학교 교수 활동 (1946-1968)
1946년 경성대학이 서울대학교로 이름을 바꾸면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가 되어 1968년까지 있었다. 1968년 정년퇴직 때까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장, 대학원장 등을 맡으며 인재 양성에 힘썼다.[1]한국 전쟁으로 피난갔다가 1952년 다시 서울로 돌아와 칼럼, 강연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1953년 학술원 회원이 되고 그해 종신회원으로 뽑혔으며, 1954년 한국철학회 회장이 되었다. 서울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한국철학회장, 한국사상연구회장, 학술원 회원, 국민교육헌장 기초위원 등을 겸직하였다.
1960년 <부정에 관한 연구>로 서울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4년 한국사상연구회 회장이 되었다.
2. 4. 퇴임 이후 (1968-1976)
1968년 정년퇴임 후에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에 초빙되었고,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 학장과 1969년 유학대학원장, 도산서원장, 1970년 한양대학교 문과대학 학장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학술, 언론, 강연, 사회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직접 서울과 산골 오지까지 손수 자기 차량과 자비를 들여 다니면서 인문학의 필요성과 철학이 무엇인가를 강연하여 인문학의 중요성과 독서의 필요성을 설파하고 다녔다. 1970년 12월에는 대통령 교육문화담당 특별보좌관에 임명되었으며 대한민국문화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1]2. 5. 최후
1976년 3월 17일 대통령 특별보좌관 재직 중 노환과 과로로 별세하였다.[1] 사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1]3. 학술 및 교육 활동
1921년 18세에 전라남도 교육청에 발령되어 최연소 교사가 되었다. 1921년 3월 1학기부터 보성보통학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하면서, 1922년 잡지 《개벽》지에 <한국미술사>를 연재하였다.[3] 그 해에 대구 수창보통학교 교사로 옮겼고, 1924년 철학논문 '퇴계의 교육사상'을 발표하였다. 1926년 고등보통학교 교사자격검정시험에 합격하여 대구고등보통학교 교사로 봉직하였으며, 1929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에 진학하여 칸트와 헤겔 철학과 공리주의를 연구하였다. 1932년 경성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대학원 철학과로 진학했다.
1933년 잡지 《철학》지에 '철학하는 것의 출발점에 관한 일(一)의 문(問)'을 발표하고, 1934년에 경성제국대학 대학원에서 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해 경성제국대학 대학원 졸업과 동시에 모교인 경성제국대학 철학과의 조교가 되었다. 1935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로 옮겼고 다시 경성제국대학 철학과 강사로도 출강하였다. 1937년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 철학교과 담당 교수, 1939년 이화여전 문과 과장을 역임하였다.
1940년 조선총독부 학무국으로부터 창씨개명령이 떨어지고 유예기간을 거친 뒤 1941년 창씨개명이 단행되자, 그는 자기 소신을 공개적으로 밝혀 조선인에게는 조선인의 것이 최고라며 창씨개명을 거부하였다. 이후 일체의 정치적인 활동을 삼가고 학문 연구와 교육 활동, 독서 장려 운동, 문풍 진작에 진력하였다.
1945년 경성대학 교수가 되고, 광복 후부터는 본격적인 저술활동을 시작하여, 《일반논리학》(1948), 《인식논리학》(1953), 《철학개론강의》(1953), 《철학개설》(1954), 《지성의 방향》(1956), 《철학적 모색》(1959), 《새날의 지성》(1962), 《현실과 구상》(1963), 《지성과 모색》(1967), 《한국의 사상적 방향》(1968), 《한국사상사-불교사상편-》(1972), 《지각과 의욕》(1972) 등 많은 저작을 남겼다.
1946년 경성대학이 서울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면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가 되어 1968년까지 봉직했다. 1968년 정년퇴직 때까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장, 대학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인재양성에 힘썼다.
한국 전쟁으로 피난갔다가 1952년 다시 서울로 돌아와 칼럼, 강연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1953년 학술원 회원이 되고 그해 종신회원으로 피선되었으며 1954년 한국철학회 회장이 되었다. 서울대학교 교수로 봉직하면서 한국철학회장, 한국사상연구회장, 학술원 회원, <국민교육헌장> 기초위원 등을 겸직하였다.
1960년 <부정에 관한 연구>로 서울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64년 한국사상연구회 회장이 되었다.
1961년 5ㆍ16 군사 정변 후 박정희의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위원, 국민교육헌장 기초위원으로 임명되어 일제의 교육칙어를 본떠 만든 국민교육헌장 기초에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1]
4. 박정희 정부와의 관계
1961년 5ㆍ16 군사 정변 이후 박정희의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위원, 국민교육헌장 기초위원으로 임명되었다.[5] 1970년 김정렴 비서관의 추천으로 대통령 교육문화담당 특별보좌관이 되었다.[2][6] 김정렴은 혜화동 박종홍의 자택을 직접 찾아 특보 제도의 목적과 박정희의 뜻을 전하였으나 박종홍은 고령이라는 이유와 밤새 연구하고 새벽에 취침하는 생활 습관을 들어 김정렴의 추천을 사양하였다. 그러나 박정희가 박종홍에 한해서는 오후에 출근해도 좋으니 꼭 모셔오라고 지시한 것을 김정렴에게 전달받자 특별 배려를 전해 듣고 보좌관직을 승낙, 첫날부터 일반 공무원과 같은 시간에 출근하였다.[5]
대통령 특별보좌관에 취임한 얼마 후 박종홍은 박정희에게 국민 정신 문화의 계도와 연구, 진흥을 위한 목적의 국민정신연구원 설립 계획서를 작성하여 김정렴에게 협조를 구하고 박정희에게 건의하였다.[7]
5. 사후
박종홍의 유지에 따라 1978년 6월 경기도 국사봉 기슭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설립되었다.[8] 박정희는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를 지시하였다.[9]
6. 평가와 비판
소광희 서울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는 박종홍을 '한국철학 연구의 개척자'로 평가하였다.[1] 일생을 학문에 바쳤던 경건한 삶과 독실한 인품에 수많은 제자가 존경했다고도 한다.[10] 한국 실존주의의 효시라는 평가도 있다.[11] 김정렴은 서양의 철학사상을 우리나라에 올바로 소개했고 한국 사상연구를 본격적으로 체계화했으며 이황과 이이의 학문에 정통했고 실학을 깊이 수용했다고 하였다.[5]
박정희 정부에 참여하여 국민교육헌장이 파시즘적 문서라는 혹평을 받기도 하였고, 박정희 정부에서 활동한 경력을 놓고 군부독재에 협력한다, 박정희의 푸들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2] 그러나 경남대학교 김재현 교수는 우리의 전통 철학과 서양 철학을 종합하려 시도했던 박종홍의 철학에 대한 연구는 한국현대철학의 역사적 연구 뿐만 아니라 한국 지성사의 이해를 위해서도 필수적인 작업이라 하며 그에 대한 비판은 신중해야 한다고 하였다.[2]
물질에 매진했던 박정희가 정신문화 연구원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방향의 전환이었다. 문제는 정신 문화가 거기에 모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박종홍의 또 하나의 실패는 제자를 키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참조
[1]
뉴스
(우리 시대의 명저 50)<44> 박종홍의 '한국사상사'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07-11-07
[2]
웹인용
동아 문화
https://web.archive.[...]
2008-07-08
[3]
백과사전
박종홍
http://encykorea.aks[...]
[4]
서적
아! 박정희
중앙M&B
[5]
서적
아! 박정희
중앙M&B
[6]
서적
아! 박정희
중앙M&B
[7]
서적
아! 박정희
중앙M&B
[8]
서적
아! 박정희
중앙M&B
[9]
서적
아! 박정희
중앙M&B
[10]
웹사이트
권력 참여 지식인이 '실패'하지 않으려면
http://www.pressian.[...]
[11]
뉴스
우리들의 일그러진 실천철학
http://www.hani.co.k[...]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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