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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익 (18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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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찬익은 1884년 경기도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이다. 유학을 배운 후 농상공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보안회, 신민회에 참여하여 계몽 운동을 전개했다. 1909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외무부 외사국장 등을 역임했으며, 임시정부의 법무부장, 외교연구위원으로 활동했다. 김구의 귀국 후에는 주화대표단 단장, 한국독립당 중국총지부 집행위원장을 맡아 한인들의 권익 보호에 힘썼다. 1948년 귀국 후에는 이승만, 한민당과 대립하는 보수 세력의 연합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1949년 서울에서 사망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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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익 (1884년)
기본 정보
박찬익
박찬익
본관반남(潘南)
남파(南坡)
다른 이름박건병(朴建秉)
생애
출생1884년 10월 17일
사망1949년 10월 13일 (향년 64세)
가족
배우자정경주
자녀4남 2녀
학력
최종 학력일본 메이지 대학 법학부 졸업
경력
직업독립운동가, 정치인
주요 경력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제헌 국회의원
훈장
훈장건국훈장 독립장 (1963년)

2. 생애

박찬익은 1884년 경기도에서 태어나 성인이 될 때까지 서당에서 유학을 배웠다. 1904년 한성부의 농상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일본인 교사와의 마찰로 중퇴하였다. 보안회(保安會)에 참여하여 일본의 한국 황무지 개척안에 반대하였고, 1907년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서북 지역에서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독립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고, 1921년 7월에는 임시정부 외무부 외사국장 겸 차장 대리를 역임하였다.[1] 1930년 4월에는 임시정부 난징 주재원이 되었고, 임시정부가 충칭에 있었을 때는 국무위원을 지냈다. 1940년 10월부터 1944년 5월까지 임시정부 법무부장을 역임하였으며,[1] 1943년 1월에는 임시정부 외교연구위원이 되었다.[1]

김구 귀국 후에는 주화대표단(주로 임시정부와 국민정부와의 연락 및 중국 거주 조선인 관련 문제 처리를 임무로 하였다.) 단장 겸 한국독립당 중국총지부 집행위원장을 역임하였다. 군정 당국의 한인(韓僑) 집중 관리 및 일괄송환 정책 등에 항의하였고, 행정원, 육군총부, 군령부, 외교부 등과 협상하여 한인 문제는 외교부의 통일적인 관리 하에 놓이게 되었다. 1946년 가을부터 1948년 봄까지 선양에 체류하였다.

1948년 4월 귀국 후 김구, 이승만, 한민당과 대립하던 보수 세력의 연합 및 통합에 힘썼으나, 1949년 2월 20일 서울 창신동의 여관에서 사망하였다.[2]

2. 1. 생애 초기

박찬익은 1884년 경기도에서 태어나 성인이 될 때까지 서당에서 유학을 배웠다. 1904년 한성부의 농상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일본인 교사와의 마찰로 중퇴하였다. 보안회(保安會)에 참여하여 일본의 한국 황무지 개척안에 반대하였고, 1907년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서북 지역에서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독립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상하이로 망명하여, 상해와 남만주 일대를 오가며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였다.

2. 1. 1. 출생과 가계

박찬익은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에서 반남 박씨 박봉서(朴鳳緖)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유년기에는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신문물을 배우기로 결심하고 한성으로 상경하였다.[3]

2. 1. 2. 학창 시절과 망명

1908년 4월 관립공업전습소에 입학하여 1910년에 졸업하였다.[3] 1910년 8월 나라를 일제에 강점당하자 만주 용정으로 망명하였다.

연길에서 그는 간민교육회를 조직하는데 참여[3], 곧 간민교육회의 부회장에 선임되었으며, 서일과 함께 대종교 항일무장단체인 중광단을 조직하였다. 1918년 11월에는 만주 길림에서 김교헌, 김동삼, 조소앙, 이동녕 등 38인의 동지와 함께 무오독립선언을 발표하였다.[3][4]

2. 2. 독립운동

1909년 독립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상해와 남만주 일대를 오가며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고, 1921년 7월에는 임시정부 외무부 외사국장 겸 차장 대리를 역임하였다.[1] 1930년 4월에는 임시정부 난징 주재원이 되었고, 임시정부가 충칭에 있었을 때는 국무위원을 지냈다. 1940년 10월부터 1944년 5월까지 임시정부 법무부장을 역임하였으며,[1] 1943년 1월에는 임시정부 외교연구위원이 되었다.[1]

김구 귀국 후에는 주화대표단(주로 임시정부와 국민정부와의 연락 및 중국 거주 조선인 관련 문제 처리를 임무로 하였다.) 단장 겸 한국독립당 중국총지부 집행위원장을 역임하였다. 군정 당국의 한인(韓僑)에 대한 집중 관리 및 일괄송환 정책 등에 항의하였다. 또한 행정원, 육군총부, 군령부, 외교부 등과 협상한 결과, 한인 문제는 외교부의 통일적인 관리 하에 놓이게 되었다. 1946년 가을부터 1948년 봄까지 선양에 체류하였다.

2. 2. 1.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초기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4월 23일 서울의 국민대회에서 한성 임시정부가 조직되었을 때는 평정관에 선출되었다. 1921년 3월 임시 정부 후원회를 조직하였고, 7월에는 임시정부 외무부 외무차장대리로 외교임무를 실질적으로 전담하였으며, 주로 대중국 외교에 주력하였다.[3]

특히 중국 국민당의 쑨원이 광둥에 중국호법정부를 수립하자 임시정부를 승인받는데 기여하였으며, 1922년 2월에는 광둥에 주재하여 호법정부와의 외교를 전담하기도 하였다. 1926년 9월 31일 침체되어 있던 대종교 교도들의 활동을 조직적으로 강화하기 위해 윤세복, 정일우 등과 귀일당을 조직하였다.[3]

2. 2. 2. 임시정부 한국독립당, 한인애국단 활동

1929년 한국독립당 조직에 참여하였고, 1930년 10월 중국 국민당 제4차 중앙집행위원회에 임시정부 대표 조소앙과 함께 한국독립당 대표로 참가하였다. 1932년 5월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 후 임시정부를 가흥으로 안전하게 이동시키기 위하여 중국 정부와 교섭하여 많은 지원을 받았다. 같은 해 6월에는 다시 상해로 잠입하여 일제 앞잡이 옥관빈과 상하이 한인친우회 위원장으로 일경의 밀정 노릇을 하던 유인발 등을 적발, 처단하는 계획에 참여하였다.[3]

이후 외교술로 대외 교섭과 재정 조달 임무를 맡았다.[5]

1934년 한국국민당과 결별하였다.[3] 6월경 박찬익은 한국국민당의 자금 관리 문제를 김구에게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것이 불씨가 되어 박찬익과 김구 사이에 불화가 생겼고, 자금 운영 문제로 의심까지 받자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6]

2. 2. 3. 광복군 창군 활동



1938년 7월 이시영, 이동녕 등의 주선으로 다시 김구와 손잡고 임시정부와 한국국민당의 일을 보았다. 1939년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40년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옮긴 뒤에는 법무부장 겸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어 광복 시까지 임시 정부의 중책을 역임하였다.

1942년 10월 한중문화협회의 한국 측 이사로 선임되어 한중 친선에 기여하였으며, 1943년 5월 김구, 홍운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3] 1944년 4월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출되었다.

2. 3. 해방 후

1945년 8.15 해방 후 박찬익은 임시정부 주화대표단장으로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였다. 1946년 2월 한국독립당 중국 총지부 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으며, 1947년 중국 국공내전 상황에서 한인 군대의 필요성에 대한 계획서를 중국 당국에 제출하여 승인받아 동북행영 장연지구에 보병독립총대를 설치하였다.

박찬익은 이승만김구의 결속을 위해 양자와 연락하며 조율하였다. 그러나 1947년 12월 한국민주당 당수 장덕수 암살 사건 이후 이승만김구의 후원을 거절하면서 둘의 관계는 틀어졌다.[2]

군정 당국의 한인(韓僑) 집중 관리 및 일괄송환 정책 등에 항의하였고, 행정원, 육군총부, 군령부, 외교부 등과 협상하여 한인 문제는 외교부의 통일적인 관리 하에 놓이게 되었다. 1946년 가을부터 1948년 봄까지 심양에 체류하였다. 1948년 4월 귀국 후 김구, 이승만, 한민당과 대립하던 보수 세력의 연합 및 통합에 힘썼으나, 1949년 2월 20일 서울 창신동의 여관에서 사망하였다.[2]

2. 3. 1. 이승만, 김구의 갈등 중재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김구는 자신이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이승만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응답을 회피했다. 이승만국민회의를 방관하고 한민당과 연대하며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하자 김구는 분노하였다.[7] 1947년 12월 22일 김구는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을 주장하였다.[7] 이승만과 김구의 연대에 비판적이던 한민당은 이 사건을 정치적인 호재로 이용하고자 하였다.[7] 김구의 항의로 한국민족대표자회와의 합동작업이 재개되었지만 한민당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장덕수 암살 당시 이승만은 김구를 배후로 지목했고, 김구는 검찰에 연행되어 수모를 당한 후 이승만과 결별을 결심했다.[7]

박찬익은 김구이승만 사이를 꾸준히 연락하며 서로 화해할 것을 권고했으나, 이승만과 김구 모두 거절하였다. 1948년 1월 김구가 남북협상에 참여할 것을 주장하자, 박찬익은 김구의 측근 중 유일하게 남북협상 참여를 반대하였다.

1948년 4월 박찬익은 김구의 남북협상을 위한 월북을 만류하기 위해 인천 월미도로 귀국했으며, 1948년 말에는 정치적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김구의 은퇴를 권유하기도 하였다.

2. 3. 2. 우익진영 단결 노력

1948년 4월 19일 인천항으로 환국한 박찬익은 곧장 김구가 있는 경교장으로 갔으나, 김구는 이미 남북협상을 위해 떠난 뒤이므로 만날 수 없었다.[8] 5월 남북협상을 마치고 김구가 돌아오자, 박찬익은 김구에게 마곡사로 은퇴할 것을 권고했다. 박찬익은 민족진영의 통일을 희망했기에 김구가 잠시 은퇴하여 냉각기를 거친 후, 다시 이승만과 합작할 것을 바라면서, 김구의 은퇴 성명서까지 미리 직접 작성해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구의 은퇴는 김구 측근자들의 반대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8]

박찬익은 김구이승만, 한민당과 대립하고 있던 보수 세력의 연합 및 통합에 힘썼다.[2]

2. 4. 최후

1949년 3월 9일 서울 창신동의 여관에서 사망하였다.[2]

3.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1] 1993년 11월 19일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2009년 8월 대한민국 국가보훈처가 8월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참조

[1] 웹사이트 韓国臨時政府部署別職員名簿 http://db.history.go[...] 国史編纂委員会 2017-07-05
[2] 웹사이트 임시정부 국무위원 朴贊翊 별세 http://db.history.go[...] 国史編纂委員会 2015-10-22
[3] 웹사이트 pajusi.com - 최상의 pajusi 출처와 정보처 http://pajusi.com/pj[...]
[4] 문서 무오독립선언 연서자 명단
[5] 서적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 경인문화사 2007-04
[6] 서적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 경인문화사 2007-04
[7]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인물과사상사 2004
[8] 서적 한민족독립운동사연구 국학자료원 2006-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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