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명 (종교인)
1. 개요
박현명은 함경남도 북청군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및 해방 이후 한국의 성결교회에서 활동한 종교인이다. 과거 공부를 하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경성성서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성결교 목회자가 되었다. 1927년 일본 선교를 거쳐 경성성서학원 교편을 잡았으며, 일제강점기 말 어용 단체 활동과 재림 교리 문제로 투옥되기도 했다. 광복 후 기독교조선성결교회 초대 총회장을 지냈으나, 1950년 한국 전쟁 중 납북되었다. 2008년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성결교단 측은 교단을 지키기 위한 활동이었다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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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신학자 -
함석헌
함석헌은 평안북도 출신의 인권운동가, 언론인, 재야운동가, 문필가로서, 일제강점기와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펼치며 '씨알의 소리'를 통해 '씨알사상'을 알렸고, 비폭력·민주·평화 사상으로 '한국 간디'라 불리며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
일제강점기의 신학자 -
박용길
박용길은 '봄길'이라는 호를 사용한 대한민국의 여성운동가이자 통일운동가로, 목사이자 통일운동가인 문익환의 배우자로서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에 헌신하며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공동의장, 통일맞이 칠천만겨레모임 이사장 등을 역임했고, 김일성 주석 1주기 추모 방북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
최남선
최남선은 1890년에 태어나 1957년에 사망한 대한민국의 문인이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역사학자이며, 《소년》을 창간하고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현대 한국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3·1 운동 독립선언서 기초, 친일 행적, 단군 연구, 《단군론》, 《불함문화론》 저술 등의 활동을 했다. -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
이원수 (작가)
이원수는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아동문학가로서 1926년 동시 〈고향의 봄〉으로 등단하여 동요, 동시, 동화, 소년소설 등 다양한 작품을 발표하고 한국아동문학가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며 아동문학 발전에 기여했으나, 친일 작품으로 논란이 있다. -
대한민국의 대학 교수 -
정경심
정경심은 자녀 입시 비리 혐의로 징역 4년형이 확정되어 복역 후 가석방된 대한민국의 영문학자이자 대학교수였다. -
대한민국의 대학 교수 -
정태인
정태인은 서울대학교에서 경제학 학위를 취득하고 참여정부에서 경제 정책에 영향을 미쳤으나 행담도 개발 사업 논란으로 물러난 후, 한미 FTA를 비판하고 진보신당 창당에 참여한 경제학자이자 대학교수, 정치인이다.
2. 생애
함경남도 북청군 출신인 박현명은 이준을 배출한 명문가에서 과거 공부를 하다가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였다. 이후 한학 공부를 중지하고 경성부로 올라와 경성성서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성결교 목회자가 되었다. 1927년 일본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7년간 사역한 뒤 1934년 귀국해 경성성서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성결교단의 지도적 인물로서 어용 단체에서 활동한 기록이 있다. 조선기독교연합회(1938년),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동양선교회 성결교회연맹(1939년~1940년), 국민총력 조선예수교동양선교회 성결교회연맹(1940년~1943년), 기독교신문협회(1942년) 등이다. 반면, 1942년 경부터 일제는 서양 선교사들을 탄압하고 신학교를 폐쇄하였으며, 성결교의 재림(再臨) 교리가 문제가 되어 투옥되었다. 재림(再臨) 교리는 천황이 신(神)이 아닌 인간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 심판을 받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성결교회는 이 재림 교리를 지키기 위해 1943년 5월 전원 검거·투옥되었고, 9월 예배 중지령, 12월 성결교단이 해산되었다.
광복 후 서울신학교 교수로 일하면서 1946년 4월 재건된 기독교조선성결교회의 초대 총회장을 맡았다. 1950년 한국 전쟁 중 8월 23일 서울 종로구에서 열린 기독교도연맹회의에 참석했다가 송창근 등과 함께 실종되어 납북되었다. 이후 북한에서 1950년대 중반 또는 1960년대 초반까지 생존했다는 풍문이 있으나, 이후 소식은 알 수 없다.
2.1. 초기 생애와 신앙 입문
박현명은 함경남도 북청군 출신이다. 처가는 이준을 배출한 명문가였는데, 과거 공부를 위해 처가에서 공부하다가 근처의 교회에서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게 되었다.
이후 한학 공부를 중지하고 경성부로 올라와 성결교 계열의 경성성서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전도사를 거쳐 성결교 목회자가 되었다. 1927년 일본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7년간 사역한 뒤 1934년 귀국해 경성성서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2.2. 목회 활동과 신학 교육
함경남도 북청군 출신인 박현명은 이준을 배출한 명문가에서 과거 공부를 하다가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였다. 이후 한학 공부를 중지하고 경성부로 올라와 경성성서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성결교 목회자가 되었다. 1927년 일본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7년간 사역한 뒤 1934년 귀국해 경성성서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성결교단의 지도적 인물로서 어용 단체에서 활동한 기록이 있다. 조선기독교연합회(1938년),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동양선교회 성결교회연맹(1939년~1940년), 국민총력 조선예수교동양선교회 성결교회연맹(1940년~1943년), 기독교신문협회(1942년) 등이다. 반면, 1942년 경부터 일제는 서양 선교사들을 탄압하고 신학교를 폐쇄하였으며, 성결교의 재림(再臨) 교리가 문제가 되어 투옥되었다. 재림(再臨) 교리는 천황이 신(神)이 아닌 인간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 심판을 받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성결교회는 이 재림 교리를 지키기 위해 1943년 5월 전원 검거·투옥되었고, 9월 예배 중지령, 12월 성결교단이 해산되었다.
광복 후 서울신학교 교수로 일하면서 1946년 4월 재건된 기독교조선성결교회의 초대 총회장을 맡았다. 1950년 한국 전쟁 중 8월 23일 서울 종로구에서 열린 기독교도연맹회의에 참석했다가 송창근 등과 함께 실종되어 납북되었다. 이후 북한에서 1950년대 중반 또는 1960년대 초반까지 생존했다는 풍문이 있으나, 이후 소식은 알 수 없다.
2.3. 일제강점기 말기의 행적과 논란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종교 부문에 포함되었다. 2005년 예비명단이 공개되자 성결교단 측은 박현명의 이름이 관제 단체에 등록되거나 이들 단체가 국방헌금을 헌납한 것은 사실이나, 이는 교단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활동이었을 뿐이라며 반박했다. 아름다운재단 이사이며 목회자인 장남 박상증도 법적 대응을 고려한다며 강력히 반발했다.
2.4. 일제의 종교 탄압과 투옥
박현명은 일제강점기 말기에 성결교단의 지도적 인물로서 어용 단체에서 활동한 기록이 있다. 조선기독교연합회(1938년),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동양선교회 성결교회연맹(1939년~1940년), 국민총력 조선예수교동양선교회 성결교회연맹(1940년~1943년), 기독교신문협회(1942년) 등에서 활동했다.
반면, 1942년경부터 일제는 서양 선교사들을 미국의 스파이라는 혐의로 탄압하고 모든 서양 선교사를 강제 추방했으며, 신학교 폐쇄 등의 조치가 뒤따랐다. 특히 박현명은 성결교 목사로서 재림(再臨) 교리 문제로 투옥되었다.
재림(再臨)이란 약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로부터 이 땅에 다시 내려와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교리이다. 이 재림 교리는 일제의 국체명직, 즉 천황이 다스리는 신국(神國)임을 부정하는 교리로 간주되었다. 재림 교리에 따르면 천황은 신(神)이 아닌 인간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 예수를 믿지 않는 모든 인간은 심판을 피할 수 없는데, 천황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결교회는 이 재림 교리를 핵심 교리로 삼아 일제의 회유와 협박에도 타협하지 않았다. 성결교회는 이 재림 교리를 목숨 걸고 지켜, 1943년 5월 일제의 총검거령에 의해 소속 목회자 전원이 검거·투옥되었고, 9월에는 성결교회 예배 중지령으로 모든 예배가 불법화되었으며, 12월에는 성결교단이 해산되었다.
2.5. 해방 이후와 납북
박현명은 광복 후 서울신학교 교수로 일하면서 1946년 4월 재건된 기독교조선성결교회의 초대 총회장을 맡는 등 활동을 재개했다. 1950년 한국 전쟁 중 북한으로 납북되었는데,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되어 있던 8월 23일 서울 종로구에서 열린 기독교도연맹회의에 송창근 등과 함께 참석했다가 실종되었다. 당시 박현명은 서울신학교 구내 사택에 거주하고 있었다.
북한에서 1950년대 중반 또는 1960년대 초반까지 생존했거나 공식 활동을 했다는 풍문이 있으나, 이후 소식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