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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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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창근은 함경북도 경흥군 출신의 기독교 목사로, 개화 사상과 기독교를 일찍 받아들인 집안에서 성장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가 이동휘와 교류하고,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평양 산정현교회 담임 목사로 활동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었으며,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친일 행적을 보였다. 해방 후 조선신학교를 설립하고 서울에서 목회 활동을 하던 중 납북되었으며, 1951년 평양 인근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후 친일 논란이 있었으며, 옹호론과 비판론이 공존한다.

2. 생애

송창근은 함경북도 경흥군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기독교 신앙을 접했다. 아버지가 세운 북일학교와 만주의 명동중학교를 거쳐 피어선기념성경학원(현 평택대학교)을 졸업하고, 일본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932년 귀국 후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시작했으나, 진보적인 신학 사상으로 인해 교회와 갈등을 겪고 1936년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에서는 빈민 구제 사업을 펼쳤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가석방된 후 김천 황금동교회에서 근무했다. 태평양 전쟁 기간에는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협조하여 신사참배 강요에 협조하고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의 총무로 임명되는 등 친일 행적이 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 설립에 참여하고 서울성남교회의 전신인 바울교회를 세워 목회 활동을 이어갔다. 한국 전쟁 중이던 1950년 납북되어 1951년 평양 인근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원용에 의하면 송창근은 친일 행적들이 자의에 의한 행위가 아닌 소극적 행위였음에도 양심의 부담을 안고 조용하게 살았다.[3]

2. 1. 초기 생애와 교육 (1898년 ~ 1931년)

함경북도 경흥군 출신이다. 일찍이 개화사상과 기독교를 받아들인 집안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아버지가 고향에 세운 북일학교를 거쳐 만주의 명동중학교에서 공부했다. 만주에서는 독립운동가 이동휘와 교류했다.

경성부의 피어선기념성경학원(현 평택대학교)을 졸업한 뒤 일본으로 유학하여 1926년 아오야마학원 신학부를 졸업했다. 이후 잠시 귀국하여 기독교 잡지 《신생명》 출판에 관여했다가, 곧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한경직, 김재준과 함께 공부했고, 펜실베이니아주 웨스턴 신학교에서 신학석사(1930년) 학위를, 콜로라도주 덴버에 있는 아일리프대학교에서 신학박사(1931년) 학위를 취득했다.[1]

2. 2. 목회 활동과 친일 논란 (1932년 ~ 1945년)

松倉芹|송창근일본어1932년 귀국하여 평양 산정현교회 전도사를 맡았다가 평양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담임 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송창근의 진보적인 '신신학'은 교회와 마찰을 일으켰고, 1936년 산정현교회에서 좌천되듯이 부산으로 내려갔다.[1] 부산에서는 성빈학사[2]를 설립하고 빈민구제 등 사회 사업을 시작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어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1939년 2년간 복역 후 가석방되었으며, 경상북도 김천 황금동교회에서 근무하였다.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가담한 친일 행적이 있다. 경북노회를 해산시키고 신사참배 강요에 협조했으며, 일제가 여러 교단을 통합해 강제로 조직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에서는 총무로 임명되어 중심 역할을 했다. 전쟁 지원 단체인 국민총력경북노회연맹 이사장,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경북교구회 김천지교구장, 조선전시종교보국회 경상북도지부 이사 등을 지냈다.[3]

2. 3. 해방 이후 활동과 납북 (1945년 ~ 1951년)

1940년 평양신학교가 폐교한 뒤 김재준과 함께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를 설립했고, 1945년 12월에는 서울역 인근에 서울성남교회의 전신인 바울교회를 설립해 목회 활동을 했다.[3] 조선인민군 점령 하의 1950년 8월 23일, 서울 종로에서 열린 기독교도연맹회의에 박현명 목사와 함께 참석했다가 납북되었다. 1951년 7월 경 평양 인근 대동군에서 병사했다는 증언이 내외문제연구소를 통해 공개된 바 있다.[4]

3. 사후 논란과 평가

송창근은 1951년에 사망했다는 설이 있으나,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교회사 관련 서적이나 용인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에서는 그를 '순교자'로 칭하고 있다.

2005년 친일인명사전 후보자로 지목되었으며,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종교 부문에 포함되었다.[5]

3. 1. 친일 행적 옹호론

강원용은 저서 《역사의 언덕에서》를 통해 송창근의 친일은 소극적 행위였으며,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교계 지도자들을 세 부류로 나누었는데, 첫 번째는 주기철 목사처럼 감옥에서 저항하다 순교한 사람, 두 번째는 신사참배를 강요한 친일파 목사, 세 번째는 부득이하게 일제 테두리 안에서 목숨을 이어간 인물이라고 하였다. 강원용은 송창근이 세 번째 부류에 해당한다고 변호하며, "그가 했다고 하는 친일 내용을 자세히 알아보면 그것은 친일이라고 얘기할 수도 없는 성질의 것"이라고 옹호했다.[3] 또한 강원용은 친일파 청산 기준의 공정성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3]

동료 김재준은 송창근을 유머, 인정, 창의성, 용감함을 갖춘 인물이며, "‘내 민족을 위해서라면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져도 좋다’고 할 만큼 민족애에 불타는 애국자였다"라고 평가했다.[5] 송창근의 제자였던 문동환은 송창근이 재치 있는 목회와 지혜로운 교회 정치로 교회를 부흥시켰다고 회상했다.

3. 2. 친일 행적 비판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종교 부문에 송창근이 포함되었다.[5] 송창근의 제자 문동환은 그를 교회 부흥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했고, 동료 김재준은 민족애가 강한 애국자로 묘사했다.[5] 강원용은 저서 《역사의 언덕에서》를 통해 송창근의 친일 행적이 소극적이었으며, 양심의 부담을 안고 살았다고 주장하며 친일파 선정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3] 그는 일제강점기 당시 교계 지도자들을 세 부류로 나누며, 송창근이 어쩔 수 없이 일제 치하에서 생존을 위해 고통스러운 삶을 산 인물이라고 변호했다.[3] 또한 강원용은 친일파 청산 기준의 공정성에 문제를 제기하며, 윤동주의 창씨개명 예를 들어 당시 시대적 상황의 어려움을 강조했다.[3]

4. 평가

송창근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제자였던 문동환은 송창근이 재치 있는 목회로 교회를 크게 부흥시킨 인물이자 지혜로운 교회 정치가였다고 회상했다. 동료 김재준도 "만우 송창근은 유머에 능했고, 인정스러웠고, 창의적이었고, 용감했으며, 바울의 고백과 같이 '내 민족을 위해서라면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져도 좋다'고 할 만큼 민족애에 불타는 애국자였다"라고 평가했다.[5]

강원용은 저서 《역사의 언덕에서》에서 송창근의 친일파 선정에 비판을 가했다.[3] 그는 송창근이 일제강점기에 여러 사건으로 감옥에 드나들며 고생했으며, 고문 후유증으로 항일 활동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고 밝혔다. 일본 경찰이 그에게 친일 유세를 강요했지만, 송창근은 정치적 발언은 피하고 만담식으로 가벼운 이야기만 했다고 한다. 해방 후 송창근은 소극적 친일 행위에 대한 양심의 부담을 안고 조용히 살았다고 한다.[3]

강원용은 당시 교계 지도자들을 세 부류로 나누었다. 주기철 목사처럼 순교한 사람, 신사참배를 강요한 친일파 목사, 그리고 일제 치하에서 생존하며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 위해 고통스러운 삶을 산 인물이다. 그는 송창근이 세 번째 부류에 속하며, 그의 친일 행위는 친일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변호했다.[3]

강원용은 《역사의 언덕에서》에서 친일파 청산 기준의 공정성을 비판하며,[3] 일제 시대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친일과 항일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거물들은 창씨개명을 거부할 수 있었지만, 일반 국민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윤동주의 창씨개명을 예로 들며, 생존이 걸린 문제였음을 강조했다.[3]

2005년 친일인명사전 후보자로 지목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종교 부문에 포함되었다.

참조

[1] 서적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 지식산업사 2006-03-30
[2] 웹사이트 성빈학사 http://dept.hs.ac.kr[...] 2007-10-27
[3] 뉴스 잘못한 것은 회개하지만 친일명단 성급했다 http://www.christian[...] 크리스찬투데이 2008-05-03
[4] 뉴스 죽음의 歲月 (29) https://web.archive.[...] 동아일보 1962-04-30
[5] 뉴스 떠돌이 목자의 노래 -‘세 기둥’ 밑에서 ‘기독론’ 탐미 http://www.hani.co.k[...] 한겨레 2008-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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