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는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설립된 로마의 황제 속주로, 이베리아 반도 북부를 포함한 넓은 지역을 차지했다. 타라코넨시스는 타라코(오늘날의 타라고나)를 수도로 하였으며, 초기에는 페니키아인과 카르타고인의 식민지였던 지역을 로마가 정복하면서 시작되었다. 주요 도시로는 타라코, 사라고사 등이 있었고, 광업, 농업, 무역을 통해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다. 종교적으로는 이시스, 마그나 마테르 등 다양한 신들이 숭배되었으며, 로마의 신들과 토착 신들이 혼합되어 나타나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 |
---|---|
개요 | |
공식 명칭 |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속주 |
로마자 표기 | Provincia Hispania Tarraconensis |
유형 | 속주 |
국가 | 로마 제국 |
시대 | 고대 |
수도 | 타라코 |
![]() | |
역사 | |
시작 | 기원전 27년 |
종료 | 472년 |
사건 | 서고트 왕국에 정복 |
이전 국가 |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 |
계승 국가 | 서고트 왕국 |
계승 국가 2 | 수에비 왕국 |
현재 국가 | |
국가 | 스페인 포르투갈 |
2. 역사
로마 제국이 이베리아 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전, 선주 민족인 이베리아인 외에도 페니키아인과 카르타고인들이 기원전 8세기에서 6세기 사이에 지중해 해안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후 그리스인들도 해안가를 따라 식민 도시들을 세웠다. 로마는 제2차 포에니 전쟁 중인 기원전 2세기에 히스파니아 지역에 처음 도달했으며, 이후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와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 속주를 두어 통치했다.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행정 개편으로 기존의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 속주를 대체하여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라는 이름의 황제 속주가 탄생했다. 수도는 타라코(오늘날 타라고나)에 두었으며, 이와 함께 루시타니아와 바이티카 속주도 정비되었다. 로마는 칸타브리아 전쟁(기원전 29년~19년)을 통해 아스투레스족과 칸타브리족이 거주하던 이베리아 반도 북부까지 완전히 정복하여 타라코넨시스 속주에 편입시켰다. 이로써 이베리아 반도 전체가 로마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속주는 이후 로마 제국의 일부로 발전했으며, 서기 68년에는 당시 총독이었던 갈바가 네로 황제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켜 잠시 황제에 오르기도 했다(네 황제의 해).[10] 대 플리니우스와 같은 유명 인물도 서기 73년에 이 속주의 프로쿠라토르(검사관)를 지냈다. 속주에서는 라스 메둘라스 등지에서 금, 은, 주석 등 광물 채취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서기 29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행정 개혁으로 타라코넨시스는 갈라이키아, 카르타기넨시스, 그리고 축소된 타라코넨시스의 세 속주로 분할되었다. 5세기 초인 409년, 수에비족, 반달족, 알란족 등 게르만 민족들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침입하면서 속주는 혼란에 빠졌고, 결국 서고트 왕국이 들어서면서 로마의 속주로서 역사는 막을 내렸다.
2. 1. 설립 배경
페니키아인과 카르타고인은 기원전 8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이베리아 반도의 지중해 해안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이후 그리스인들도 해안을 따라 식민지를 세웠다. 로마는 제2차 포에니 전쟁 중인 기원전 2세기에 히스파니아에 처음 진출했다.
로마 공화국 말기, 히스파니아는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Hispania Citerior, "더 가까운 히스파니아")와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Hispania Ulterior, "더 먼 히스파니아")로 나뉘어 관리되었으며, 키테리오르 속주는 프라이토르가 다스렸다.[21][1] 제1차 삼두정치 시기인 기원전 60년경,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 총독직을 맡았으나 로마에 머물며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등 세 명의 레가투스에게 통치를 위임했다. 이는 훗날 아우구스투스의 행정 개편에 영향을 미쳤다.

내전 종결 후,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는 히스파니아의 행정 구역을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기존의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를 대체하여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속주가 설립되었고,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는 루시타니아와 바이티카 속주로 분리되었다. 타라코넨시스와 루시타니아는 황제가 직접 관리하는 황제 속주였고, 바이티카는 원로원이 관리하는 원로원 속주였다. 타라코넨시스의 중심 도시는 타라코(Tarraco, 오늘날 카탈루냐의 타라고나)였다.
이러한 개편은 당시 로마의 지배 밖에 있던 갈라이키족, 칸타브리인, 아스투레스인이 거주하던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 지역을 완전히 로마 제국에 편입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타라코넨시스는 칸타브리아 전쟁 (기원전 29년~19년) 수행을 위한 중요한 기지 역할을 했으며, 아우구스투스 자신도 기원전 27년부터 26년까지 타라코 등에 머물며 전쟁을 지휘했다.[2][5] 이 전쟁을 통해 로마는 이베리아 반도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게 된다.
기원전 12년에는 속주 경계가 다시 조정되어, 기존에 루시타니아에 속했던 갈라이키아와 아스투리아스 지역, 그리고 바이티카에 속했던 카스툴로(Castulo) 주변 광산 지대가 타라코넨시스에 편입되었다.[8] 이 조치는 히스파니아 주둔 로마군 전체를 타라코넨시스 총독의 단일 지휘 아래 두는 한편, 금과 은 등 귀금속이 풍부한 주요 광산 지역을 황제의 직접 통제하에 두려는 의도였다.
2. 2. 초기 발전과 로마화
로마 제국이 이베리아 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전, 선주 민족인 이베리아인 외에도 페니키아인과 카르타고인들이 기원전 8세기에서 6세기 사이에 지중해 해안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후 그리스인들도 해안가를 따라 식민 도시들을 세웠다. 로마인들은 제2차 포에니 전쟁 중인 기원전 2세기에 히스파니아 지역에 처음 도달했으며, 전쟁 이후 이베리아 반도 남동부를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 남서부를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 속주로 편입하여 지배했다.
로마 공화국 말기, 제1차 삼두정치의 일원이었던 폼페이우스 대왕은 히스파니아 속주의 총독직을 맡았으나 로마에 머물며 세 명의 레가투스에게 통치를 위임했다.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는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를,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와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는 각각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의 동부와 서부를 나누어 다스렸다.[1]
내전 종결 후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7년, 히스파니아의 행정 구역을 재편했다. 이 개편으로 기존의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 속주는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라는 이름의 황제 속주로 재편되었고, 수도는 타라코(오늘날 타라고나)에 두었다. 이와 함께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는 루시타니아(황제 속주)와 바이티카(원로원 속주)로 분할되었다. 이 개편은 갈라이키아인, 칸타브리족, 아스투레스족 등 아직 로마의 지배 밖에 있던 북서부 민족들을 정복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타라코넨시스 속주는 칸타브리아 전쟁(기원전 29–19년) 동안 로마군의 주요 활동 기지 역할을 했으며, 이 전쟁을 통해 이베리아 반도 전역이 로마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7년부터 26년까지[2] 세기사마(현대 사사몬, 부르고스)[3][4]와 타라코[5]에 머물며 전쟁을 지휘했고, 이때 인도 사절단을 맞이하기도 했다. 그의 조카 마르켈루스[6]와 의붓아들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25년 칸타브리아 전쟁에서 군사 호민관으로 복무하며 군 경력을 시작했다.[7]
기원전 12년, 속주의 경계가 다시 조정되어 이전에는 루시타니아에 속했던 갈리시아와 아스투리아스 지역, 그리고 바이티카에 속했던 카스툴로 주변의 광산 지대가 타라코넨시스에 편입되었다.[8] 이 조치로 히스파니아 주둔 로마군 전체가 타라코넨시스 총독의 지휘 아래 놓이게 되었고, 갈리시아 고원의 금광과 시에라 모레나의 은광 등 주요 광산 지역이 황제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들어갔다.

아우구스투스는 속주 내 많은 공동체에 콜로니아[9]나 무니키피움 지위를 부여하여 로마화를 촉진했다. 특히 레반테 해안, 에브로 계곡, 메세타 센트랄 지역의 정착지들이 혜택을 받았다. 그의 뒤를 이은 티베리우스 황제 역시 메세타 센트랄 북부에 무니키피아를 추가 지정하며 로마화 정책을 이어갔다. 아우구스투스부터 네로 시대에 걸쳐 기존 도로들이 로마 도로로 정비되면서 속주 내 교류가 활발해졌다. 라틴어가 빠르게 공용어로 자리 잡았고, 화폐 경제가 발달했으며, 이탈리아산 아레티노 도자기나 갈리아산 사미안 도자기 같은 로마의 상품들이 대량으로 유입되었다.
속주는 비교적 평화로웠으나, 네로 황제 시기 아스투레스족의 반란 시도가 레기오 VI 빅트릭스에 의해 진압된 사례가 있었다. 이후 속주의 군사적 중요성이 감소하면서 주둔 군단 수도 점차 줄어들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서기 42-43년에 레기오 IV 마케도니카를 게르마니아로 이동시켰고, 네로 황제는 서기 63년에 레기오 X 게미나를 판노니아로 보냈다.
서기 68년, 61년부터 타라코넨시스 총독으로 있던 갈바는 빈덱스의 요청을 받아 네로에 대항하는 반란에 가담했다. 갈바는 클루니아에서 스스로 황제를 선포하고,[10] 루시타니아 총독 오토의 지지를 확보한 뒤 레기오 VI 빅트릭스를 기반으로 바스코네스족 병사 등으로 구성된 레기오 VII 갈비아나를 창설하여 로마로 진군했다. 갈바는 잠시 황제에 올랐으나 곧 암살되었고, 이후 속주는 오토와 비텔리우스 지지자들을 거쳐 최종적으로 플라비우스 왕조의 시조인 베스파시아누스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서기 74년경 칙령을 통해 속주 내 많은 도시들에 라틴 권리를 부여하여 무니키피아로 승격시켰다. 또한 그는 속주의 군사 주둔 규모를 레기오 VII 게미나 펠릭스와 그 보조 부대 수준으로 축소하여, 주로 총독 업무 지원, 치안 유지, 광산 감독 등의 임무를 맡겼다. 대 플리니우스는 서기 73년에 타라코넨시스에서 프로쿠라토르(검사관)로 근무하며 속주의 사정을 기록으로 남겼다.
로마 시대 동안 타라코넨시스에서는 광범위한 광물 채취가 이루어졌는데, 특히 금, 주석, 은 채굴이 활발했다. 라스 메둘라스의 사금 광산 유적은 로마 기술자들이 주변 산에서 물을 끌어오기 위해 총 길이 약 48.28km에 달하는 수로를 건설하고, 수력 채굴(루이나 몬티움) 기법을 사용하여 대규모로 금을 채취했음을 보여준다. 사금이 고갈된 후에는 단단한 암석 속 금맥을 따라 터널을 파고 화력 채굴을 이용해 금을 캐냈다. 대 플리니우스는 이러한 히스파니아의 채광 기술에 대해 상세한 기록을 남겼는데, 이는 그가 직접 관찰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293년 로마 제국의 행정 구역을 재편하면서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를 갈라이키아, 카르타기넨시스, 타라코넨시스의 세 개 속주로 분할했다. 이 분할은 타라코넨시스 속주의 초기 발전과 로마화 시대의 종결을 알리는 중요한 변화였다.
2. 3. 군사적 중요성
폼페이우스 대왕은 로마 공화국 말기, 카이사르의 내전 직전에 히스파니아를 세 명의 레가투스에게 분할하여 통치를 맡겼다. 이는 제1차 삼두정치 합의의 결과로, 폼페이우스는 로마에 머물며 수도의 업무를 감독하고자 했기 때문이다.[1]-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 (3개 군단)
-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 동부 (2개 군단)
-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 서부 (2개 군단)
내전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7년 히스파니아를 재편하여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루시타니아, 바이티카의 세 속주를 공식적으로 설립했다. 이 중 타라코넨시스와 루시타니아는 황제 속주였고, 바이티카는 원로원 속주였다.

새롭게 설립된 타라코넨시스 속주는 갈라이시, 칸타브리, 아스투레스가 거주하던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 지역을 로마 제국에 편입시키기 위한 군사적 거점 역할을 했다. 특히 칸타브리아 전쟁 (기원전 27년–19년) 동안 중요한 기지로 활용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7년부터 26년까지[2] 세기사마(사사몬, 부르고스)[3][4]와 타라코[5]에 머물렀으며, 이때 그의 조카 마르켈루스[6]와 의붓아들 티베리우스가 칸타브리아 전쟁에서 군사 호민관으로 복무하며 첫 군 경력을 쌓았다.[7]
기원전 12년에는 속주 경계가 재조정되어, 이전에 루시타니아에 속했던 갈리시아와 아스투리아스 지역, 그리고 카스툴로 주변의 광산 지역(이전에는 바이티카의 일부)이 타라코넨시스에 편입되었다.[8] 이 재편으로 히스파니아에 주둔한 모든 로마 군대는 타라코넨시스 속주 총독의 단일 지휘 아래 놓이게 되었으며, 갈리시아 고원의 금과 시에라 모레나의 은 등 귀금속을 공급하는 주요 광산 지역이 황제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들어갔다.
칸타브리아 전쟁 이후, 타라코넨시스의 질서 유지를 위해 3개의 군단이 배치되었다.
군단 | 초기 주둔지 | 이동 시기 및 장소 |
---|---|---|
제6 승리 군단 (Legio VI Victrix) | 레온 | 불명,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
제10 게미나 군단 (Legio X Gemina) | 페타보니움 | 서기 63년, 판노니아 |
제4 마케도니카 군단 (Legio IV Macedonica) | 피소라카 | 서기 42-43년, 게르마니아 |
이들 군단은 ''알라 파르토룸''이나 ''코호르스 IV 갈로룸''과 같은 다양한 보조 부대의 지원을 받았으나, 이 부대들의 정확한 주둔 위치나 시기는 파악하기 어렵다.
네로 통치 시기 아스투레스에서 반란 시도가 있었으나, 제6 승리 군단에 의해 쉽게 진압되었다. 이후 속주의 군사 주둔 규모는 점차 축소되어,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인 서기 42-43년에는 제4 마케도니카 군단이 게르마니아로, 네로 황제 때인 서기 63년에는 제10 게미나 군단이 판노니아로 이동했다.
서기 68년, 당시 타라코넨시스 총독이었던 갈바는 빈덱스의 요청을 받아 네로에 대항하는 반란에 가담했다. 갈바는 클루니아에서 스스로 황제를 선포하고, 기존의 제6 승리 군단, 기병 알라 2개, 보병 코호르테스 3개에 더해 바스코네스 코호르테스와 제7 갈비아나 군단 (훗날 제7 게미나 군단) 등 보조병력을 추가로 모집하여 로마로 진군했다.[10][19]
이듬해인 서기 69년, 비텔리우스는 제1 아디우트릭스 군단과 제10 게미나 군단을 히스파니아로 파견하도록 명령했다.[20] 이들은 루키우스 클로디우스 마케르가 통치하던 북아프리카로부터의 잠재적 위협에 대비하여 바이티카와 타라코넨시스 남동부에 주둔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군단들과 제6 승리 군단은 곧 비텔리우스를 버리고 베스파시아누스 지지를 선언했으며, 베스파시아누스는 이들을 즉시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로 보내 바타비아 반란을 진압하도록 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속주의 군사 주둔 규모를 축소하기로 결정하고, 서기 74년에 제7 게미나 펠릭스 군단 (Legio VII Gemina Felix)을 제6 승리 군단의 옛 주둔지였던 레온에 배치했다. 이 군단은 5세기 초까지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의 핵심 군사력으로 주둔하며 속주 총독 지원, 치안 유지, 광산 작업 감독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제7 게미나 군단은 속주 내 여러 지역으로 벡실라티오(vexillatio, 분견대)를 파견했다.
- 타라코: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총독 보좌
- 아우구스타 에메리타: 루시타니아 속주 총독 보좌
- 비르기둠 주변 광산 지역: 광석 채취 및 운송 감독
- 포르투갈 북부 광산 지역: 금광석 채취 및 운송 감독
- 트리튬 마갈룸: 도자기 생산 중심지의 포르토리움(관세 징수소) 관리
- 루쿠스 아우구스티: 포르토리움 관리
- 세기사마: 부르디갈라로 향하는 도로 통제소(''스타티오'') 관리
늦어도 서기 1세기 말에는 제7 게미나 군단을 지원하는 5개의 보조 부대가 타라코넨시스에 주둔했다.
부대명 | 종류 | 주둔지 |
---|---|---|
알라 II 플라비아 히스파노룸 시민 로마노룸 | 기병 알라 | 페타보니움 |
코호르스 I 켈티베로룸 에퀴타타 시민 로마노룸 | 기병 코호르스 | 소브라도 도스 몬헤스 (A 코루냐) |
코호르스 I 갈리카 에퀴타타 시민 로마노룸 | 기병 코호르스 | 피소라카 (팔렌시아) |
코호르스 III 루센시움 | 보병 코호르스 | 루쿠스 아우구스티 (루고) |
코호르스 II 갈리카 | 보병 코호르스 | 위치 미상 (ad cohortem Galicam) |
이러한 군사 배치는 2세기부터 5세기까지 유지되었으며, 이 시기 히스파니아 전체에 주둔한 로마 군대의 총 병력은 7,712명을 넘지 않았다.
2. 4. 행정 구역 개편과 쇠퇴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의 행정 개편에 따라, '''타라코넨시스'''(Tarraconensis)라는 황제 속주가 공화정 말기에 프로파이토르[21]가 관리하던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 속주를 대체했다. 중심 도시는 타라코 (오늘날 타라고나)였으며, 이 개편으로 히스파니아는 타라코넨시스, 루시타니아, 그리고 원로원 속주인 바이티카 세 속주로 나뉘었다. 타라코넨시스는 칸타브리아 전쟁 (기원전 29–19년)을 통해 아스투레스족과 칸타브리족이 거주하던 이베리아 반도 북부 지역까지 로마의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기원전 12년에는 속주 경계가 다시 조정되어, 이전 루시타니아에 속했던 갈리시아와 아스투리아스 지역, 그리고 카스툴로 주변의 광산 지역(이전에는 바이티카의 일부)이 타라코넨시스에 편입되었다.[8] 이러한 재편성은 히스파니아 주둔 로마 군대의 지휘 체계를 단일화하고, 갈리시아 고원의 금과 시에라 모레나의 은 같은 귀금속 광산 지역을 황제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두려는 목적이었다.서기 68년, 61년부터 속주 총독을 지내던 갈바는 빈덱스로부터 네로 황제에 대항하는 반란에 동참하라는 제안을 받았다. 네로가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갈바는 클루니아에서 스스로 황제를 선포하고[10] 레기오 VI 빅트릭스를 포함한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했다. 이는 네 황제의 해로 알려진 혼란기의 시작이었다. 이후 플라비우스 왕조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속주는 안정을 되찾았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서기 74년경으로 추정되는 칙령을 통해 속주 내 많은 도시 공동체에 라틴 권리를 가진 무니키피움 지위를 부여했다. 또한, 속주의 군사 주둔군을 레기오 VII 게미나와 그 보조 부대 중심으로 축소하여 총독 업무 지원, 치안 유지, 광산 작업 감독 등에 집중하도록 재편했다. 한편, 대 플리니우스는 73년에 타라코넨시스에서 프로쿠라토르(검사관) 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기인 293년, 제국 행정 개혁의 일환으로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는 갈라이키아, 카르타기넨시스, 타라코넨시스라는 세 개의 더 작은 속주로 분할되었다.
타라코넨시스 속주는 5세기 초까지 유지되었으나, 409년 수에비족, 반달족, 알란족 등 게르만 민족들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침입하면서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침략은 로마 제국의 통치력을 약화시켰고, 결국 서고트 왕국이 성립되면서 속주는 소멸하였다. 로마 통치 기간 동안, 특히 라스메둘라스와 같은 지역에서는 금, 주석, 은 채굴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로마인들은 주변 산에서 물을 끌어오기 위해 총 약 48.28km에 달하는 수로를 건설하고, 수력 채굴(Ruina montium)과 화력 채굴 같은 발달된 기술을 사용하여 대규모로 광물을 채취했다. 대 플리니우스는 히스파니아에서 사용된 이러한 채굴 방법들에 대해 직접 관찰한 것을 바탕으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3. 지리와 행정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는 로마 제국의 속주 중 하나로, 최대 확장기에는 이베리아 반도 영토의 약 3분의 2를 차지하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북쪽으로는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갈리아와 접했고, 남서쪽으로는 루시타니아, 남쪽으로는 바에티카 속주와 경계를 이루었다.[12] 면적이 넓고 인구도 상당하여, 설립 초기 로마 제국에서 가장 큰 속주 중 하나로 여겨진다.[13]
기원후 27년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행정 개편으로 타라코넨시스는 황제 속주로 지정되었으며, 수도는 타라코(현재의 타라고나)에 두었다. 속주의 통치는 황제가 임명한 집정관급 레가투스가 맡았다.[14] 속주의 광대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티베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기 사이에 7개의 사법 관할 구역인 '''콩벤투스 이우리디키'''(Conventus iuridici)로 행정 구역이 나뉘었다. 각 콩벤투스는 황제가 임명한 레가투스 이우리디쿠스(Legatus iuridicus)가 관리했으며, 자체적인 중심 도시를 가졌다. 재정 관리는 황제가 직접 임명한 기사 계급의 프로쿠라토르(Procurator Caesaris)가 담당했으며, 북서부 금광 지역은 별도의 프로쿠라토르가 관리하기도 했다.
행정 체계의 기본 단위는 도시(라틴어: ''civitates'')였다. 이 도시들은 로마식으로 조직된 콜로니아(Colonia)나 무니키피움(Municipium) 형태, 혹은 로마 정복 이전의 전통적인 제도를 유지하는 형태로 존재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토착 공동체들도 점차 로마식 행정 모델을 받아들였다. 특히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히스파니아의 모든 자유민에게 라틴 시민권을 부여한 것은[17] 많은 토착 공동체가 무니키피움으로 전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대 플리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타라코넨시스에는 수많은 도시가 있었으며, 특히 에브로 강 유역과 지중해 연안에 밀집되어 있었다.[16]
3. 1. 지리적 범위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는 최대 영토 확장 시 이베리아 반도의 약 3분의 2를 차지했다. 북쪽으로는 피레네 산맥이 갈리아와의 경계를 이루었다. 남서쪽의 루시타니아와의 경계는 칼레(오늘날의 포르투, 포르투갈)에서 시작하여 도루 강을 따라 흐른 다음 토르메스 강을 따라 이어졌다. 바에티카와의 경계는 카스툴로(오늘날의 리나레스)에서 시작하여 아치(과딕스)를 거쳐 알메리아 만까지 이어졌다.[12]
타라코넨시스는 면적이 약 380000km2, 인구는 300만~350만 명으로 추산되어 인구 밀도는 km²당 8~9명이며, 건국 당시 로마 제국에서 가장 큰 속주였을 것으로 보인다.[13]
3. 2. 행정 조직
기원후 27년,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는 루시타니아와 함께 황제 속주로 지정되었고, 바이티카는 원로원 속주가 되었다. 타라코넨시스 속주는 집정관급 관리가 다스렸으며, 루시타니아와 바이티카는 프라에토르급 관리가 담당했다.[14] 타라코넨시스의 총독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레가투스(Legatus Augusti pro praetore)라는 칭호를 가졌고, 이 직책은 집정관 계급의 원로원 의원이 맡았다. 속주의 수도는 콜로니아 등급의 도시인 타라코(현재의 타라고나)였다. 스트라보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에는 이 속주에 3개의 로마 군단이 주둔했으나, 칼리굴라 황제 때 2개로, 네로 황제 때 1개로 감축되었다.[15]
속주의 규모가 매우 컸기 때문에, 티베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 황제 통치 시기 사이 어느 시점에 속주는 7개의 '''콩벤투스 이우리디키'''(Conventus iuridici, 사법 관할 구역)로 나뉘었다. 각 콩벤투스는 황제가 직접 임명한 '''레가투스 이우리디쿠스'''(Legatus iuridicus)가 관리했다. 이 7개의 콩벤투스와 각 수도는 다음과 같다.
콩벤투스 | 수도 | 현재 지명 |
---|---|---|
타라코넨시스 (Tarraconensis) | 콜로니아 타라코 (Colonia Tarraco) | 타라고나 |
카르타기넨시스 (Carthaginensis) | 콜로니아 카르타고 노바 (Colonia Carthago Nova) | 카르타헤나 |
카이사라우구스투스 (Caesaraugustanus) | 콜로니아 카이사르 아우구스타 (Colonia Caesar Augusta) | 사라고사 |
클루니엔시스 (Cluniensis) | 콜로니아 클루니아 술피시아 (Colonia Clunia Sulpicia) | 코루냐 델 콘데 |
아스투리켄시스 (Asturicensis) | 무니키피움 아스투리카 아우구스타 (Municipium Asturica Augusta) | 아스토르가 |
루켄시스 (Lucensis) | 루쿠스 아우구스티 (Lucus Augusti) | 루고 |
브라카렌시스 (Bracarensis) | 무니키피움 브라카라 아우구스타 (Municipium Bracara Augusta) | 브라가 |
각 콩벤투스의 수도에는 황제 숭배를 위한 중심지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곳에서는 황제의 수호신령인 게니우스 아우구스티와 신격화된 황제들을 기렸으며, 속주 내 특권 공동체(콜로니아와 무니키피움)의 엘리트 중에서 선출된 남녀 사제, 즉 '''플라멘 아우구스티'''(Flamen Augusti)와 '''플라메니카 아우구스티'''(Flamenica Augusti)가 의례를 주관했다. 매년 이들은 타라코의 속주 포룸(Provincial Forum)에 모여 자신들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속주 전체를 대표하여 황제 숭배를 담당할 플라멘과 플라메니카를 각각 한 명씩 선출했다(이들이 반드시 부부일 필요는 없었다).
타라코넨시스의 재정 관리는 대부분 황제가 직접 임명한 프로쿠라토르(Procurator Caesaris)에게 맡겨졌다. 이들은 기사 계급 중에서 선발되었으며, 속주 수도인 타라코에 기반을 두고 속주 전체의 세금 징수를 관리했다. 그러나 서기 1세기 말 또는 2세기 초부터 속주 북서부 지역의 금광 관리는 별도의 프로쿠라토르, 즉 '''프로쿠라토르 메탈로룸'''(Procurator Metallorum)이 담당하게 되었다. 이 직책은 주로 황제의 해방 노예가 맡았으며, ''아스투리카 아우구스타''(현재의 아스토르가)에 거점을 두었다. 이들 재정 관리자들은 속주 총독이 아닌 황제에게 직접 보고했지만, 실제 행정 운영에서는 총독과 긴밀히 협력해야 했다.
3. 3. 도시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의 행정 체계에서 가장 기본적인 단위는 도시(라틴어: ''civitates'')였다. 이 도시들은 로마식 방식(콜로니아와 무니키피움)으로 정치적으로 조직되거나, 로마 정복 이전의 전통적인 제도를 유지하면서 지방 총독의 직접적인 감독을 받았다. 로마식 도시와 원주민 공동체 모두 일반적으로 높은 수준의 자치를 누렸으며, 총독의 과도한 간섭 없이 자체적으로 관리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원주민 공동체들은 점차 자신들의 자치 제도를 로마의 ''municipia''와 ''coloniae'' 모델에 맞춰 조정하는 경향을 보였다. 두 유형의 공동체 간 주요 차이점은 로마법의 적용 여부였다. ''coloniae''와 ''municipia''의 시민에게는 로마법이 의무적으로 적용되었지만, 비로마 공동체에게는 황실 당국 및 개별 로마 시민과의 상호 작용을 제외하고는 선택 사항이었다. 이러한 상호작용이 발생할 경우, 로마법이 지역 법률보다 우선했다.
이제, 이 속주 전체는 7개의 ''conventus''로 나뉜다: 카르타기넨시스, 타라코넨시스, 카이사라우구스투스, 클루니엔시스, 아스투룸, 루첸시스, 그리고 브라카룸... 이 속주 자체에는 (다른 지역에 종속된 293개의 공동체를 제외하고) 179개의 도시가 있으며, 그중 12개의 ''coloniae'', 13개의 로마 시민 도시, 18개의 고대 라틴인, 1개의 포에데라티 도시, 그리고 135개의 조세 대상 도시가 있다.
— 대 플리니우스, ''박물지'' 3.18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히스파니아의 다른 모든 자유 거주자에게 라틴 시민권을 부여했다. 이는 그들이 로마법에 따라 사업을 수행할 권리(''ius commercii'')와 로마 여성과 결혼할 권리(''ius conubii'')를 갖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권리의 부여 시기는 서기 69년 베스파시아누스가 권력을 잡은 직후 또는 서기 74년으로 추정되며 논쟁의 여지가 있다.[17] 이 권리 부여는 타라코넨시스의 많은 조공 공동체 및 종속 공동체가 ''municipia''로 전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예를 들어 ''노바 아우구스타''(Lara de los Infantes, 부르고스), ''베르기둠 플라비움''(토레 델 비에르소, 엘 비에르소, 레온), ''세고비아'', 두라톤 (세고비아), 그리고 ''아쿠아 플라비에''(샤베스, 포르투갈) 등이 대표적이다.







이 속주의 주요 도시는 다음과 같다.
콘벤투스 타라코넨시스 | |||
---|---|---|---|
이름 | 현대 이름 | 지위 | 설립자 |
타라코 | 타라고나 | 콜로니아 |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
바르키노 | 바르셀로나 | 콜로니아 |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
이에소 | 기소나, 레이다 | 무니키피움 | 플라비우스 왕조 |
아에소 | 이소나 이 콩카 델라, 레이다 | 무니키피움 | 플라비우스 왕조 |
이울리아 리비카 | 리비아, 지로나 | 무니키피움 | 율리우스 카이사르 |
아우사 | 빅, 바르셀로나 | 무니키피움 | 아우구스투스 |
바에툴로 | 바달로나, 바르셀로나 | 무니키피움 | 아우구스투스 |
일루로 | 마타로, 바르셀로나 | 무니키피움 | 율리우스 카이사르 |
엠포리에 | 엠푸리에스, 지로나 | 콜로니아 | 율리우스 카이사르 |
게룬다 | 지로나 | 무니키피움 | 아우구스투스 |
데르토사 | 토르토사, 타라고나 | 무니키피움 | 아우구스투스 |
발렌티아 | 발렌시아 | 무니키피움 | 아우구스투스 |
사군툼 | 사군토, 발렌시아 | 무니키피움 | 율리우스 카이사르 |
에데타 | 리리아, 발렌시아 | 무니키피움 | 아우구스투스 |
콘벤투스 카이사라우구스타누스 | |||
이름 | 현대 이름 | 지위 | 설립자 |
이레르다 | 레이다 | 무니키피움 | 아우구스투스 |
오스카 | 우에스카 | 무니키피움 | 아우구스투스 |
이아카 | 하카, 우에스카 | 무니키피움? | |
라비톨로사 | 라 푸에블라 데 카스트로, 우에스카 | 무니키피움 | 플라비우스 왕조 |
카이사르 아우구스타 | 사라고사 | 콜로니아 | 아우구스투스 |
아우구스타 빌빌리스 | 칼라타유드, 사라고사 | 무니키피움 | 아우구스투스 |
투리아소 | 타라조나, 사라고사 | 무니키피움 | 아우구스투스 |
셀사 | 벨리야 데 에브로, 사라고사 | 콜로니아 | 제2차 삼두정치 |
부르사우 | 보르하, 사라고사 | 무니키피움 | 플라비우스 왕조 |
아르코브리가 | 몬레알 데 아리사, 사라고사 | ||
오시케르다 | 라 푸에블라 데 히하르, 테루엘 | 무니키피움 | 아우구스투스 |
세곤티아 | 시구엔사, 과달라하라 | 무니키피움 | 플라비우스 왕조[18] |
폼파엘로 | 팜플로나, 나바라 | 무니키피움 | 율리우스 카이사르 |
카라 | 산타카라, 나바라 | ||
안델로스 | 멘디고리아, 나바라 | ||
바레이아 | 로그로뇨, 라 리오하 | 무니키피움 | 아우구스투스 |
트리티움 마갈룸 | 트리시오, 라 리오하 | 무니키피움 | 플라비우스 왕조 |
리비아 | 에라멜루리, 라 리오하 | 무니키피움? | 플라비우스 왕조? |
그라쿠르리스 | 알파로, 라 리오하 | 무니키피움 | 아우구스투스 |
카스칸툼 | 카스칸테, 나바라 | 무니키피움 | 아우구스투스 |
칼라구리스 | 칼라오라, 라 리오하 | 무니키피움 | 율리우스 카이사르 |
오이아소 | 이룬, 기푸스코아 | 무니키피움? | |
벨레이아 | 이루냐 데 오카, 알라바 지방 | 무니키피움 | 아우구스투스 |
에르카비카 | 카냐베루엘라스, 쿠엥카 | 무니키피움 | 아우구스투스 |
콤플루툼 | 알칼라 데 에나레스, 마드리드 지방 | 무니키피움 | 아우구스투스 |
콘벤투스 카르타기넨시스 | |||
이름 | 현대 이름 | 지위 | 설립자 |
카르타고 노바 | 카르타헤나, 무르시아 | 콜로니아 | 율리우스 카이사르 |
사에타비 | 사티바, 발렌시아 | 무니키피움 | 아우구스투스 |
일리치 | 엘체, 알리칸테 | 콜로니아 | 아우구스투스 |
디아눔 | 데니아, 알리칸테 | 무니키피움 | 아우구스투스 |
루켄툼 | 알리칸테 | 무니키피움 | 아우구스투스 |
톨레툼 | 톨레도 | 무니키피움 | 아우구스투스 |
베가스트리 | 세헤긴, 무르시아 | 무니키피움? | 플라비우스 왕조? |
리비소사 | 레수사, 알바세테 | 콜로니아 | 아우구스투스 |
살라리아 | 우베다, 하엔 | 콜로니아 | 아우구스투스 |
시사포 | 알모도바르 델 캄포, 시우다드 레알 | 무니키피움 | 아우구스투스 |
일루고 | 벤타 데 산 안드레스, 산티스테반 델 푸에르토, 하엔 | 무니키피움 | 플라비우스 왕조 |
카스툴로 | 리나레스, 하엔 | 무니키피움 | 율리우스 카이사르 |
아치 | 과딕스, 그라나다 | 콜로니아 | 아우구스투스 |
발레리아 | 발레리아, 쿠엥카 | 무니키피움 | 아우구스투스 |
티툴키암 | 티툴시아, 마드리드 | 무니키피움 | 플라비우스 왕조 |
세고브리가 | 사엘리세스, 쿠엥카 | 무니키피움 | 아우구스투스 |
콘벤투스 클루니엔시스 | |||
이름 | 현대 이름 | 지위 | 설립자 |
플라비오브리가 | 카스트로-우르디알레스, 칸타브리아 | 콜로니아 | 베스파시아누스 |
포르투스 빅토리아에 이울리오브리겐시움 | 산탄데르 또는 산토냐 (칸타브리아) | 무니키피움? | 플라비우스 |
포르투스 블렌디움 | 수안세스, 칸타브리아 | 무니키피움? | |
율리오브리가 | 레토르티요, 레이노사 근처, 칸타브리아 | 무니키피움 | 플라비우스 |
클루니아 | 페냐바 데 카스트로, 부르고스 | 무니키피움; 콜로니아 | 티베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 |
오킬리스 | 메디나셀리, 소리아 | 무니키피움? | 플라비우스 |
누만티아 | 누만시아, 소리아 | 무니키피움? | 플라비우스 |
테르멘티아 | 몬테호 데 티에르메스, 소리아 | 무니키피움 | 티베리우스 |
욱사마 아르가엘라 | 엘 부르고 데 오스마, 소리아 | 무니키피움 | 티베리우스 |
아우구스토브리가 | 무로 데 아그레다, 소리아 | 무니키피움? | 플라비우스? |
팔란티아 | 팔렌시아 | 무니키피움? | 플라비우스? |
핀티아 | 파디야 데 두에로, 바야돌리드 | 무니키피움? | |
인테르카티아 | 몬테알레그레 데 캄포스, 바야돌리드 | 무니키피움? | 플라비우스? |
알보셀라 | 비야라산, 사모라 | 무니키피움? | 아우구스투스? |
셉티만카 | 시만카스, 바야돌리드 | ||
라우다 | 로아, 부르고스 | 무니키피움? | 플라비우스? |
데오브리굴라 | 타르다호스, 부르고스 | 무니키피움 | 플라비우스 |
비로베스카 | 브리비에스카, 부르고스 | 무니키피움? | |
데오브리가 | 미란다 데 에브로, 부르고스 | 무니키피움? | 아우구스투스? |
세기사마 이울리아 | 사사몬, 부르고스 | 무니키피움 | 플라비우스 |
노바 아우구스타 | 라라 데 로스 인판테스, 부르고스 | 무니키피움 | 플라비우스 |
카우카 | 코카, 세고비아 | 무니키피움 | 플라비우스 |
콩플루엔타 | 두라톤, 세고비아 | 무니키피움 | 플라비우스 |
세고비아 | 세고비아 | 무니키피움 | 플라비우스 |
브리게코 | 데에사 데 모랄레스 데 라스 쿠에바스, 카스트로곤살로, 사모라 | 무니키피움 | 플라비우스 |
콘벤투스 아스투리케시스 | |||
이름 | 현대 이름 | 지위 | 설립자 |
기가 | 히혼, 아스투리아스 | 무니키피움? | 플라비우스? |
루쿠스 아스투룸 | 루고 데 랴네라, 아스투리아스 | ||
플라비오나비아 | 프라비아, 아스투리아스? | 무니키피움? | 플라비우스? |
아스투리카 아우구스타 | 아스토르가, 레온 | 무니키피움? | 아우구스투스? |
레온 | 카나바 of 제6 승리 군단 그리고 제7 게미나 군단 | ||
란치아 | 비야사바리고, 레온 | 무니키피움 | 플라비우스 |
베두니아 | 산 마르틴 데 토레스, 레온 | ||
베르기둠 플라비움 | 카카벨로스, 레온 | 무니키피움 | 플라비우스 |
인테르암니움 플라비움 | 벰비브레, 레온 | 무니키피움 | 플라비우스 |
페타보니움 | 로시노스 데 비드리알레스, 사모라 | 카나바 of 제10 게미나 군단 그리고 Ala II Flavia Hispanorum, 이후 무니키피움? | |
콘벤투스 루첸시스 | |||
이름 | 현대 이름 | 지위 | 설립자 |
아르도비쿰 코로니움 | 라 코루냐 | 무니키피움 | 플라비우스 |
플라비움 브리기안티움 | 베탄소스, 라 코루냐? | 무니키피움 | 플라비우스 |
이리아 플라비아 | 파드론, 라 코루냐 | 무니키피움 | 플라비우스 |
비코 스파코룸 | 비고, 폰테베드라 | 무니키피움 | 플라비우스 |
루쿠스 아우구스티 | 루고 | 무니키피움? | 아우구스투스? |
콘벤투스 브라카라우구스타노룸 | |||
이름 | 현대 이름 | 지위 | 설립자 |
무니키피움 리미코룸 | 신소 데 리미아, 오렌세 | 무니키피움 | 플라비우스 |
브라카라 아우구스타 | 브라가, 포르투갈 | 무니키피움? | 아우구스투스? |
아쿠아 플라비에 | 샤베스, 포르투갈 | 무니키피움 | 플라비우스 |
칼레와 포르툼 칼레 | 포르투, 포르투갈 | 무니키피움? |
4. 경제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상세 내용을 다루므로 중복 방지를 위해 생략)
4. 1. 광업
로마 시대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에서는 광범위한 금속 채취, 특히 금, 주석, 은 채굴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라스메둘라스에 있는 사금 광산 유적은 당시 로마 기술자들이 주변 산맥의 물을 활용하기 위해 총 약 48.28km에 달하는 송수로 여러 개를 건설하여 대규모로 작업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빠른 물살을 부드러운 바위 지대로 흘려보내는 수력 채굴법(la)을 사용하여 대량의 금을 추출했다. 사금이 고갈된 후에는, 불을 이용하여 단단한 암석을 깨뜨리는 화력 채굴 방식으로 지하의 금 함유 광맥까지 터널을 뚫어 채굴을 이어갔다. 대 플리니우스는 히스파니아에서 사용된 이러한 채굴 방법들에 대해 상세한 기록을 남겼는데, 이는 그가 직접 관찰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타라코넨시스의 주요 수출품은 다음과 같다.
4. 2. 농업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에서는 다양한 물품이 생산되어 수출되었는데, 농업 분야에서는 포도주와 올리브유가 주요 수출품이었다. 또한 목재도 중요한 수출 자원 중 하나였다.4. 3. 무역
타라코넨시스의 수출품에는 목재, 진사, 금, 철, 주석, 납, 도기, 대리석, 포도주, 올리브유 등이 있다.5. 종교
히스파니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신은 이시스였고, 대어머니신인 마그나 마테르가 그 뒤를 이었다. 카르타고 및 페니키아의 신들인 멜카르트(태양신이자 바다의 신)와 타니트-칼레스티스(달과 연관된 여신) 역시 인기가 있었다. 로마의 판테온은 동일시화(예를 들어, 멜카르트는 그리스인들이 자신들의 헤라클레스의 변형으로 오랫동안 받아들여 헤르쿨레스가 되었다)를 통해 빠르게 토착 신들을 흡수했다. 카르타고의 주신이었던 바알 하몬은 히스파니아에서도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이집트 신인 베스와 오시리스도 숭배되었다.
참조
[1]
서적
The History of Rome
[2]
서적
Augustus
[3]
서적
[4]
서적
History against the Pagans
[5]
서적
[6]
서적
[7]
서적
Tiberius
[8]
웹인용
Bierzo Edict
http://revistas.ucm.[...]
[9]
서적
Res Gestae Divi Augusti
[10]
서적
Life of Galba
[11]
서적
Life of Galba
[12]
웹사이트
Copia archivada
http://revistas.ucm.[...]
2009-09-04
[13]
서적
La popolazione del mondo greco-romano. Con appendici
Arnaldo Forni Editore
1977
[14]
서적
[15]
서적
[16]
논문
OPPIDA STIPENDIARIA: LOS MUNICIPIOS FLAVIOS EN LA DESCRIPCIÓN DE HISPANIA DE PLINIO
http://digitool-uam.[...]
2022-01-14
[17]
서적
Vespasian
Routledge
2017
[18]
웹사이트
Copia archivada
http://revistas.ucm.[...]
2009-09-04
[19]
서적
Vit. Galb.
[20]
서적
Hist
[21]
서적
The History of Rome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