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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페 타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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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스페 타협은 1410년 아라곤 왕 마르틴 1세의 사망 이후, 왕위 계승 문제로 발생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1412년 카스페에서 열린 회의이다. 아라곤 왕위 계승법의 불명확성으로 인해 여러 후보가 난립했고, 각 지역 의회와 세력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대립 교황의 중재로 9명의 타협자들이 모여 차기 왕을 선출하기로 합의했고, 그 결과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1세가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우르헬 백작 하우메 2세의 반란으로 이어졌고, 결국 카스티야 왕가의 영향력 확대로 이어져 스페인 통합의 기반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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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페 타협
사건 개요
사건명카스페 타협
원어 이름Compromís de Casp (카탈루냐어)
타협 원본 문서
장소아라곤 왕국 카스페
날짜1412년 3월 29일 - 6월 28일
참가자아라곤 연합 왕국의 본토 영토의 9명의 compromisarios (대표자)
결과카스티야의 페르난도 1세를 아라곤의 군주로 선포
아라곤 왕국의 트라스타마라 가문 설립
우르헬 백작령 해체 및 왕령지에 합병

2. 배경

1410년 아라곤 연합 왕국의 마르틴 1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을 둘러싼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아라곤 왕위 계승법은 명확한 법률보다는 관습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관련 판례법도 존재하지 않았다.[1] 1137년 카탈루냐와 아라곤 통합 이후 왕위 계승은 주로 장남, 차남, 외동딸 순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전 왕위 계승 사례를 보면, 아라곤 왕가의 친족(부계 혈통 남성)이 딸이나 그 후손보다 우선시되었다. 예를 들어 마르틴 1세는 형 후안 1세의 딸들을 제치고 왕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11세기에 페트로닐라가 친족(사촌 등)인 나바라 왕국 왕들의 주장을 제치고 왕위를 계승한 사례도 있었다.

J. N. 힐가스는 "부계 혈통 후손 중 마르틴과 가장 가까운 친족은 우르헬 백작 하이메 2세였다"라고 언급했다.[1] T. N. 비슨은 "문제는 단순한 법적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 문제였으며, 왕위 계승 주장을 가진 후보 중 누가 가장 훌륭한 왕이 될 것인가 하는 실용적인 문제였다"라고 서술했다.[2]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자는 다음과 같았다.

후보자출생-사망나이(1410년 말)비고
루나 백작 파드리케1402년 - 1438년8세마르틴 1세의 서자, 교황 베네딕토 13세 지지
우르헬 백작 자우메 2세1380년 - 1433년30세알폰소 4세의 남계 증손, 마르틴 1세가 왕국 장관직 임명
간디아 공작 알폰소 1세1332년 - 1412년78세하이메 2세의 남계 손자, 후보자 중 최고령
루이 3세 당주1403년 - 1434년7세후안 1세의 외손자
페르난도 데 안테케라1380년 - 1416년30세페드로 4세의 외손자, 교황 베네딕토 13세 지지


2. 1. 아라곤 왕위 계승법의 불명확성

당시 아라곤의 왕위 계승법은 제정된 법률보다는 관습에 더 기반을 두고 있었으며, 이러한 경우를 다루는 법률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1137년 아라곤과 카탈루냐의 동군 연합 이후, 모든 왕위 계승은 장자 상속으로 이루어졌고, 그 다음으로는 나이가 많은 남동생이나 유일한 딸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아라곤 왕가의 아냐테(남계 혈통의 남성)를 우선시했던 초창기의 계승법은 딸과 딸들의 자손들보다 우선했다. 예를 들어, 마르틴 1세 자신도 그의 형 후안 1세의 딸보다 우선하여 왕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11세기에 매우 먼 아냐테가 왕의 딸에게 왕위를 잃은 적이 있었는데, 페트로닐라 여왕이 아냐테(6촌 또는 그와 비슷한)에게서 나바라의 왕위를 차지했다.

J. N. 힐가스(Hillgarth)는 "마르틴에게 가장 가까운 친척이자 남계 후손 중에는 우르헬 백작 하우메 2세였다."라고 저술했다.[8] T. N. 비슨(Bisson)은 "사안은 단순히 법률적이라기 보다는 정치적인 것이었으며(되었으며), 어떤 가문의 권리를 가진 후보자가 가장 적법한 왕이 될 것이라는 실용주의적 질문이었다."라고 저술했다.[9]

2. 2. 마르틴 1세 사후의 정치적 상황

당시 아라곤 왕국의 왕위 계승법은 명확하게 제정된 법률보다는 관습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며, 이러한 경우를 다루는 법률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1137년 아라곤과 카탈루냐의 동군 연합 이후 모든 왕위 계승은 장자 상속으로 이루어졌으며, 장자가 없을 경우 연장자 순으로 남동생이나 외동딸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초기 계승법은 아라곤 왕가의 부계 혈통, 즉 남계 남성을 딸이나 딸의 자손보다 우선시했다. 예를 들어 마르틴 1세 자신도 그의 형 후안 1세의 딸보다 우선하여 왕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11세기에 매우 먼 친족 관계의 남성이 왕의 딸에게 왕위를 잃은 사례도 있었는데, 페트로닐라 여왕이 나바라 왕위를 친족에게서 차지한 것이 그 예이다.

J. N. 힐가스(Hillgarth)는 "마르틴에게 가장 가까운 친척이자 남계 후손 중에는 우르헬 백작 하우메 2세였다."라고 저술했다.[8] T. N. 비슨(Bisson)은 "사안은 단순히 법률적이라기 보다는 정치적인 것이었으며, 어떤 가문의 권리를 가진 후보자가 가장 적법한 왕이 될 것이라는 실용주의적 질문이었다."라고 저술했다.[9]

아라곤, 발렌시아, 카탈루냐 의회 또는 정부 간의 협상은 여러 요인으로 인해 난항을 겪었다. 여기에는 새 왕과 관련된 다양한 이해관계, 귀족 파벌 간의 다툼, 우르헬 백작 지지자들의 성급한 행동, 그리고 카스티야 왕자 페르난도의 군사적 개입 등이 포함되었다. 마르틴 1세는 자신의 손자인 파드리케를 후계자로 원했으나, 서자라는 신분이 문제가 되었다. 간디아 공작 알폰소는 혈통상으로는 가장 유력한 후보였지만, 최종 결정 전에 사망했다. 이후 마르틴 1세로부터 장관직을 제안받아 후한 대우를 받았던 우르헬 백작 자우메가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독단적인 정치 스타일로 인해 카탈루냐 자치 정부를 무시한다는 경계를 받았다. 한편, 교황 베네딕토 13세는 이베리아 반도에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카스티야 왕자 페르난도를 지지했다.

3. 왕위 계승 후보자

아라곤 연합 왕국에는 명확한 왕위 계승법이 존재하지 않았고, 계승자 결정은 법률보다는 관습에 기초했다. 판례법도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아라곤-카탈루냐에서의 왕위 계승은 모두 장남, 차남, 장녀(딸밖에 없는 경우)에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계승 이력은 아라곤 왕가의 딸이나 그 딸에게의 계승보다 남계 상속이 우선시되었음을 보여주었다.[6]

예를 들어, 마르틴 1세는 맏형 후안 1세에게 딸 비오란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위를 이었다. 그러나 과거의 남자 상속은 11세기 후기, 페트로닐라 여왕이 나바라에 있던 히메노 가문을 제쳐두고 즉위하면서 단절되었다. 또한 페트로닐라의 아들 알폰소 2세의 왕위 계승으로 바르셀로나 가문이 히메노 가문을 대신하여 아라곤의 왕가가 되었고, 카탈루냐와의 동군 연합은 이때 성립되었다.

T.N. 비슨은 왕위 계승이 단순한 정당성보다는 정치적인 문제이며, 왕조와 어떤 연관이 있는 후보자들 중 누가 최고의 왕이 될 것인가 하는 실제적인 문제라고 기술했다.[7]

아라곤, 발렌시아, 카탈루냐의 의회 또는 정부 간의 협상은 새 왕과 관련된 다양한 이해 관계, 귀족의 파벌 항쟁, 우르젤 백작 지지자들의 성급함, 그리고 카스티야 왕자 페르난도의 군대 간섭 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마르틴 1세는 손자인 파드리케를 후계자로 원했지만, 서자라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간디아 공작 알폰소가 혈통상 우위에 있었지만, 결정 전에 사망했다. 그 후, 마르틴 1세에게 장관직을 받아 후한 대접을 받던 우르젤 백작 자우메가 유력 후보가 되었으나, 전제적인 정치 자세로 인해 카탈루냐 자치 정부에게 경계받았다. 베네딕토 13세는 이베리아 반도에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카스티야 왕자 페르난도를 지지했다.

3. 1. 주요 후보자

후보자출생-사망나이(1410년 말)비고
알폰소 1세1332년 - 1412년78세하이메 2세의 남계 손자, 1412년 사망
자우메 2세1380년 - 1433년30세알폰소 4세의 남계 증손, 마르틴 1세의 이복 여동생과 결혼
페르난도 데 안테케라1380년 - 1416년30세카스티야 왕자, 레오노르의 아들
루이 3세 당주1403년 - 1434년7세욜란다의 아들
파드리케1402년 - 1438년8세젊은 마르틴의 서자, 베네딕토 13세가 정당한 계승자로 인정
리바고르사의 후안??알폰소 1세의 형제


  • 우르헬 백작 하우메 2세 : 알폰소 4세 데 아라곤의 부계 증손자이자 마르틴의 처남. 남계 상속인이자 남계 장자 상속법에 따라 왕위 주장.
  • 루이 당주 : 후안 1세 데 아라곤의 모계쪽 손자이자 마르틴의 조카의 아들. 남녀 장자 계승권에 따른 법정 상속인으로 왕위 주장.
  • 간디아 공작 알폰소 1세 : 하이메 2세 데 아라곤의 부계쪽 손자이며 80세. 연장자 상속권과 이전 왕에 대한 혈연적 우선권으로 왕위 주장. 1412년 3월 사망.
  • 리바고르사의 후안 : 알폰소의 형제로 형의 권리 상속.
  •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1세 : 페드로 4세 데 아라곤의 모계쪽 손자이자 마르틴의 조카. 마지막 왕의 혈연적 우선권으로 왕위 주장.
  • 루나 백작 파드리케 : 마르틴의 친손자이자 시칠리아의 마르티노 1세의 사생아.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에 의해 적출.

3. 2.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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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410–12년의 공위 기간

1410년 아라곤 왕국의 마르틴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아라곤 연합 왕국은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혼란에 빠졌다. 여러 왕위 요구자들이 나타났고, 각기 다른 세력의 지지를 받으며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라곤, 발렌시아, 카탈루냐코르테스(의회)가 소집되었으나, 각 지역의 이해관계가 달라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카탈루냐는 몬블랑에서 통합 코르테스를 개최할 것을 요구했지만, 회의는 연기되어 1410년 10월 바르셀로나에서 카탈루냐 공국 코르테스만 개최되었다.[10]

의회를 통한 해결이 지연되면서, 상황은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우르헬 백작 하이메 2세의 지지자인 안톤 데 루나가 사라고사 대주교이자 루이 3세 당주의 지지자인 가르시아 페르난데스 데 에레디아를 암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1] 이 사건으로 우르헬 백작은 후보로서 큰 타격을 입었고,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1세가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아라곤과 발렌시아에서는 지지 세력 간의 무력 충돌이 발생했고, 아라곤 왕국은 알카니스의 페르난도 1세 지지 세력과 메키넨사의 우르헬 백작 지지 세력으로 분열되었다.[12] 발렌시아에서도 비나로스와 트라이게라에서 각각 코르테스가 소집되었다. 1410년부터 1412년까지 페르난도 1세의 군대가 아라곤과 발렌시아에 진입하여 우르헬 백작 지지 세력과 전투를 벌였고, 1412년 2월 27일 모르베드레 전투에서 승리하며 발렌시아를 장악했다.

살바도르 비네그라가 묘사한 카스페 타협 선출 모습.


디오스코로 푸에블라가 그린 페르난도 1세의 아라곤 왕 선포.

4. 1. 각 세력 간의 갈등과 의회 소집 시도

각 지지 세력들은 이 사안을 해결하기 위해 의회 과정을 가지기로 동의했지만, 아라곤, 바르셀로나, 발렌시아의 코르테스(의회)만의 왕위 선정을 위한 조정은 그들의 서로 다른 이익 관계로 더욱 어려워졌다. 카탈루냐 정부는 몬블랑에서 종합적인 코르테스를 만나기로 요구했으나, 회의는 연기되어 카탈루냐 공국 코르테스만이 참여한 채 1410년 10월에나 시작되어 바르셀로나에서 끝이 났다.[10] 코르테스는 연기된 채, 상황은 무력을 동반한 모습으로 되어갔다.

우르헬 백작 하이메 2세의 아라곤 지지자 안톤 데 루나가 사라고사 대주교 가르시아 페르난데스 데 에레디아(루이 당주의 지지자)를 암살하였다.[11] 이 사건은 우르헬 백작에게 후보자로서 큰 타격을 주었고,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1세(카스티야 왕국의 섭정이었기에 근방에서 군대를 이끌며 그의 동맹 세력들을 보호했다)에게 힘을 주었다. 거리에서는 아라곤 지지자들과 발렌시아 지지자들 간의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분쟁은 아라곤 왕국을 알카니스의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1세 지지 세력과 메키넨사의 우르헬 백작 하우메 2세 지지 세력(하지만 이곳은 토르토자의 카탈루냐 의회가 인정하지 않았다)이라는 두 적대 세력으로 분열되었다.[12] 이 같은 상황이 발렌시아에서도 발생하여, 각각 비나로스와 트라이게라의 코르테스가 생겨났다. 1410-1412년에 페르난도의 군대가 우르헬 지지 세력과 싸우기 위해 아라곤과 발렌시아에 들어오기에 이르렀고, 1412년 2월 27일 모르베드레 전투에서 트라스타마라 가의 승리로 마침내 발렌시아를 떠났다.

4. 2. 카스페 타협으로의 과정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아비뇽)는 9명의 조정자(compromisarios)로 구성된 소규모 조직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10] 알카니스의 트라스타마라 지지 세력 의회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14명의 트라스타마라 지지 아라곤인들과 여러 카탈루냐 지역의 사절자들로 구성된 5명으로 이루어진 카탈루냐-아라곤 위원회가 최종적으로 승낙되었다. 1412년 2월 15일에 이루어진 이 합의는 알카니스 화합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며칠 뒤 알카니스 의회는 아라곤, 카탈루냐, 발렌시아에서 각각 3명씩 조정자를 선출했는데, 이 과정에서 1410년 이래로 평화적 해법을 찾던 카탈루냐와 발렌시아 의회, 우르헬 백작 하이메 2세, 루이 3세 당주의 불만은 무시되었다.

이렇게 임명된 조정자들은 차기 왕을 선정하기 위해 카스페에 모였다. 역사가들은 헤로니모 수리타가 1576년 아라곤의 총 대표단에 남긴 원본 기록(19세기 정치적 혼란 속에서 사라지거나 불태워졌다)을 바탕으로 쓴 아라곤 왕 선출 관련 기술에 대부분 동의한다. 수리타에 따르면, 조정자들은 사망한 마르틴의 승계에 관하여 상반되는 견해를 가졌으며, 투표 결과도 달랐다. 투표는 1412년 6월 24일 금요일에 실시되었고, 6월 25일에 발표되었다. 비센 페레르는 처음으로 발표하면서 긴 연설을 통해 페르난도에게 투표하였다. 람, 그의 형제인 보니파시 페레르, 괄베스, 바르다시, 아란다도 그에게 동참했다. 사가리가, 발세카, 베르트란은 각자만의 이유로 다른 이들에게 투표하였다.

왕국대표자투표 대상
아라곤 왕국도메네크 람 (우에스카 교구 주교)카스티야의 페르난도
프란세스크 데 아란다 (왕실 고문관,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 특사)카스티야의 페르난도
베렝게르 데 바르다시 (법학자, 아라곤 의회 의원)카스티야의 페르난도
발렌시아 왕국비센 페레르 (도미니코회 수도사, 성인)카스티야의 페르난도
보니파시 페레르 (비센의 형제, 포르타셀리 수도원장)카스티야의 페르난도
페레 베르트란 (발렌시아 왕국 시민, 법 전문가 제네르 라바사 대리인)기권
카탈루냐 공작령페레 데 사가리가 이 데 파우 (타라고나 대교구 대주교)우르헬의 하이메, 간디아의 알폰소 (둘 중 다수 득표자에게)
베르나트 데 괄베스 (행정관, 바르셀로나 고문관)카스티야의 페르난도
길롐 데 발세카 (카탈루냐 의회 의원)우르헬의 하이메



1412년 6월 28일,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1세는 비센 페레르의 공개 연설에서 왕으로 선포되었다.

타협 이후 왕으로 선포된 카스티야의 페르난도의 초상화


5. 카스페 타협 (1412년)



1412년, 아라곤 연합왕국의 왕위 계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카스페 타협이 이루어졌다.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아비뇽)의 제안으로 아라곤, 카탈루냐, 발렌시아 3개국에서 각각 3명씩, 총 9명의 대표(타협자)가 카스페에 모여 회의를 진행했다.[3]

헤로니모 수리타의 《아라곤 왕관 연대기》에 따르면, 타협자들은 마르틴 왕의 계승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투표 방식도 달랐다. 1412년 6월 24일 금요일에 투표가 실시되었고, 6월 25일에 결과가 기록되었다. 빈센트 페레르가 처음으로 연설을 시작하여 카스티야의 페르난도에게 투표했고, 그의 형제 보니파시 페레르, 베르나트 데 구알베스, 베렌게르 데 바르다이시, 프란체스크 데 아란다가 그에게 합류했다. 페레 데 사가리가 이 데 파우, 기옘 데 발세카, 페레 베르트란은 다른 이유로 다른 후보에게 투표하거나 기권했다.

최종적으로, 9명의 타협자 중 6명이 카스티야의 페르난도에게 투표하여 그가 페르난도 1세로 즉위하게 되었다.

6월 28일, 빈센트 페레르는 공개 연설을 통해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1세를 왕으로 선포했다. 기사 기옘 라몬 알레마니 데 세르벨로와 이리고 데 알파로는 페르난도에게 그의 선출 소식을 전했다.

이 타협으로 아라곤 왕가(바르셀로나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았지만, 외국인 왕이 선택되었다. 이는 투표로 뽑힌 왕이라면 각국의 자치 제도(3개국 모두 독자적인 법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를 존중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페르난도 1세의 후계자들에 의해 무너지게 된다.

5. 1. 조정자(Compromisarios) 구성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는 9명의 조정자(Compromisarios)로 구성된 소규모 조직을 제안했다.[10] 알카니스의 트라스타마라 지지 세력 의회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1412년 2월 15일 알카니스 화합으로 알려진 이 합의는 14명의 트라스타마라 지지 아라곤인들과 여러 카탈루냐 지역 사절들로 구성된 카탈루냐-아라곤 위원회에 의해 최종 승인되었다. 그러나 며칠 뒤 알카니스 의회는 아라곤, 카탈루냐, 발렌시아 출신 조정자 세 명씩을 임명했다. 1410년부터 평화적 해결책을 찾던 카탈루냐와 발렌시아 의회의 불만은 무시되었고, 우르헬 백작 하이메 2세와 루이 3세 당주의 불만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임명된 조정자들은 차기 왕을 선정하기 위해 카스페에 모였다. 역사학자 헤로니모 수리타는 1576년 아라곤의 총 대표단에 남긴 원본 기록(19세기 정치적 혼란 속에서 사라지거나 불태워짐)을 바탕으로 《아라곤 왕 연대기》를 썼는데,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그의 기록에 동의한다. 수리타에 따르면, 조정자들은 사망한 마르틴의 승계에 관하여 상반된 견해를 가졌으며, 투표 방식도 달랐다. 투표는 1412년 6월 24일 금요일에 실시되었고, 6월 25일에 결과가 발표되었다. 비센 페레르는 처음으로 발표했고 페르난도에게 투표했다. 람, 보니파시, 괄베스, 바르다시, 아란다도 그에게 동참했다. 사가리가, 발세카, 베르트란은 각자만의 이유로 다른 이들에게 투표했다.

9명의 조정자들의 명단과 투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왕국이름투표 대상
아라곤 왕국도메네크 람 (우에스카 주교)카스티야의 페르난도
프란세스크 데 아란다 (왕실 고문관, 베네딕토 13세 특사)카스티야의 페르난도
베렝게르 데 바르다시 (법학자, 아라곤 의회 의원)카스티야의 페르난도
발렌시아 왕국비센 페레르 (도미니코회 수도사, 성인)카스티야의 페르난도
보니파시 페레르 (비센의 형제, 포르타셀리 수도원장)카스티야의 페르난도
페레 베르트란 (발렌시아 시민, 법 전문가 제네르 라바사 대리인)기권
카탈루냐 공작령페레 데 사가리가 이 데 파우 (타라고나 대주교)우르헬 백작 하이메 2세와 간디아의 알폰소, 둘 중 득표가 많은 쪽에 투표
베르나트 데 괄베스 (행정관, 바르셀로나 고문관)카스티야의 페르난도
길롐 데 발세카 (카탈루냐 의회 의원)우르헬 백작 하이메 2세


5. 2. 투표 결과 및 페르난도 1세 선출



1412년 6월 24일 금요일에 투표가 실시되었고, 6월 25일에 결과가 발표되었다.[1] 비센 페레르는 처음으로 발표를 시작하여, 오랫동안 연설을 하고 카스티야의 페르난도에게 투표하였다. 그 이후에 도메네크 람, 그의 형제인 보니파시 페레르, 괄베스, 바르다시, 프란세스크 데 아란다도 그에 동참했다. 페레 데 사가리가 이 데 파우, 길롐 데 발세카, 페레 베르트란은 각자만의 이유로 다른 이들에게 투표하였다.[2]

9명의 타협자(Compromisarios)들의 투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왕국대표투표
아라곤 왕국도메네크 람 (우에스카 주교)카스티야의 페르난도
프란세스크 데 아란다 (전 왕실 고문관, 베네딕토 13세 특사)카스티야의 페르난도
베렝게르 데 바르다시 (법학자, 아라곤 의회 의원)카스티야의 페르난도
발렌시아 왕국비센 페레르 (도미니코회 수도사, 이후 성인)카스티야의 페르난도
보니파시 페레르 (비센의 형제, 포르타셀리 수도원장)카스티야의 페르난도
페레 베르트란 (발렌시아 시민, 법학 전문가 제네르 라바사 대리인)기권
카탈루냐 공작령페레 데 사가리가 이 데 파우 (타라고나 대주교)우르헬의 하이메와 간디아의 알폰소에게 투표, 최종적으로 둘 중 다수 득표자에게 투표.
베르나트 데 괄베스 (행정관, 바르셀로나 고문관)카스티야의 페르난도
길롐 데 발세카 (카탈루냐 의회 의원)우르헬의 하이메



6월 28일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1세는 비센 페레르의 공개 연설에서 왕으로 선포되었다.

6. 카스페 타협의 여파

카스페 타협으로 왕위 청구권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유력 후보였지만 왕위를 얻지 못한 우르헬 백작 자우메 2세는 즉시 군사를 일으켰으나, 페르난도 1세에게 패배하여 1413년부터 20년간 유폐된 채 사망했다. 이로 인해 바르셀로나 가문의 적통 남자는 끊어졌다. 1416년에는 페르난도 1세의 장남 알폰소 5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1458년 알폰소 5세의 뒤를 이은 동생 후안 2세 때 카탈루냐 내전(1462년~1472년)이 일어났다. 이 기간 동안 대립왕으로서 후안 2세의 조카인 카스티야 왕 엔리케 4세, 우르헬 백작 자우메 2세의 외손인 포르투갈 왕족 페드루 데 코임브라, 루이 3세 단주의 동생 르네 당주가 차례로 바르셀로나 백작으로 선출되었다 (이들은 아라곤 왕도 칭했지만, 발렌시아 왕위는 후안 2세가 유지했다). 루이 3세와 르네 형제는 알폰소 5세와 나폴리 왕위 계승권을 다투어 1442년에 획득했다. 한편, 젊은 마르틴의 후처였던 나바라 공주 블랑카는 후안 2세의 첫 번째 아내가 되었으며, 후안의 아라곤 왕위 계승 이전인 1425년에 공동으로 나바라 왕위를 계승했다.

1479년 아라곤 왕위를 계승한 후안 2세의 아들 페르난도 2세는 1474년에 아내 이사벨 1세와 함께 카스티야 왕위에 올라 있었다. 이로 인해 아라곤 연합왕국과 카스티야의 연합이 새롭게 성립되어, 스페인 왕국으로 통합되어 갔다.

6. 1. 우르헬 백작 하우메 2세의 반란

타협 과정 재연.


우르헬 백작 하이메 2세는 처음에는 판결을 받아들이고 새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나, 1413년 5월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2년간의 전투와 싸움 끝에 더 많은 귀족들을 동원하는 데 실패했다. 발렌시아와 카탈루냐에서 하이메를 지지하는 봉기가 있었고, 하이메는 자신의 영지인 우르헬 백국에서 출병했다. 하이메 지지자들은 1413년 6월 25일 예이다 외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했다. 안톤 데 루나는 가스코뉴와 잉글랜드 병력을 지원받아 하카를 침공했으나, 하이메의 군대와 합류하기 전인 1413년 7월 10일에 패배했다.

8월에 페르난도는 발라게르 공성전을 시작했다. 한편, 안톤 데 루나는 우에스카 주에서 방어 체계를 조직했지만, 몬테아라곤은 8월 11일에 함락되었고, 그와 그의 군대는 로아레 성으로 퇴각했다. 마침내 1413년 10월, 하이메는 자신의 도시인 발라게르에서 항복했다. 이듬해 1월 로아레 성이 함락되면서 반란은 종식되었다. 우르헬 백작령은 1413년에 해체되어 왕령지인 바르셀로나 백작령에 통합되었고, 트라스타마라 가 지지자들에게 분배되었다.

6. 2. 카스티야의 영향력 확대와 스페인 통합의 기반 마련

카스티야 왕가 출신의 젊은 왕자가 왕으로 선출되면서, 아라곤 연합왕국은 더 힘이 강했던 카스티야 왕국의 영향력에 점점 놓이게 되었다. 카스페 타협 이후 약 50년 뒤, 페르난도 1세의 손자인 페르난도 2세가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 1세와 결혼하면서, 아라곤은 오늘날의 스페인을 이루게 된 동군 연합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1]

6. 3. 시칠리아 왕국의 상황

바르셀로나 가문의 다른 계통이 다스리던 시칠리아 왕국은 1377년 페데리코 3세가 사망하면서 남계 남자가 끊어졌다. 이후 1392년에 마르틴 1세(어머니 레오노르는 페데리코 3세의 누나)와 그의 아들 젊은 마르틴(마르틴 1세의 이복 누나 콘스탄사와 페데리코 3세의 딸 마리아 여왕과 결혼)에 의해 정복되었다.[1] 하지만 마르틴 1세 사망 후 현지 귀족들이 내분으로 소모되었다.[1] 그 때문에 2년간의 공위 기간을 거친 후에도 아라곤 왕에 대항할 여력이 없었고, 이듬해 1413년 카타니아 의회에서 페르난도 1세를 시칠리아 왕으로 승인했다.[1]

7. 카스페 타협에 대한 평가와 현대적 의의

카스페 타협에 대한 평가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특히, 타협 과정에서 비밀 투표가 있었는지, 그리고 9명의 타협위원들이 만장일치로 페르난도를 왕으로 선출했는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당시 사료에 비밀 투표에 대한 증거가 없다는 점을 들어 수리타의 기록을 부정하는 주장을 펼쳤다. 이들은 공식 문서에 선거 결과가 명시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일부 타협위원들의 증언을 근거로 만장일치 선출설을 주장했다.[1][2][3]

그러나 다른 역사학자들은 교황 선거와 같은 비밀 투표의 특성상 결과가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지적하며 반박했다. 또한, 당시 기록과 다른 역사학자들의 저술을 근거로 타협위원들 사이에 이견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며, 수리타의 기록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다.[4][5]

이처럼 카스페 타협에 대한 평가는 다양한 관점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은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남아있다.

7. 1. 긍정적 평가

최근 몇 년 동안, 세 명의 아라곤 역사학자(호세 앙헬 세스마 무뇨스, 카를로스 랄리에나, 크리스티나 몬테르데)는 수리타의 주장을 거부하며, 어떤 비밀 투표의 존재도 당시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세스마는 2011년에 아홉 명의 모든 ''타협자''가 각기 다른 선호에도 불구하고 페르난도를 선택하는 데 만장일치로 동의했다고 주장했다.[1] 그는 2012년 랄리에나, 몬테르데와 함께 이 견해를 반복했다.[2] 그들의 주요 주장은 1412년 6월 25일에 발행된 공식 공포 증서에 이 투표의 결과가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멜초르 데 괄베스 등 6월 28일 공포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의 증언(하지만 전체 진술은 아님)을 인용했는데, 세 명의 카탈루냐 ''타협자''가 "자유롭게 행동했으며 어떤 압력도 받지 않았다"고 선언했으며, 결국 "모두가 같은 의견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3] 2013년 현재, 이 새로운 이론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출판물은 없다.

이미 2012년에 이 관점은 역사학자 에르네스트 벨렝게르에 의해 반박되었는데, 그는 이러한 종류의 선거(예: 교황 선거와 마찬가지로)에서는 투표 결과를 발표하지 않으므로, 이러한 종류의 증서만으로 만장일치 선거를 추론할 수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또한 트라스타마라 왕가의 공식 연대기 작가인 로렌초 발라조차 15세기에 ''타협자''들 사이에 매우 다른 의견이 있었다고 말했다고 언급했다.[4] 또한 벨렝게르는 17세기에 수리타와 동일한 문서를 보았던 우스타로스, 도르머와 같은 다른 작가들을 인용했는데, 그들은 아홉 명의 ''타협자'' 각자의 선호에 대한 수리타와 동일한 설명을 보고했다.[5]

7. 2. 부정적 평가

최근 몇 년 동안, 호세 앙헬 세스마 무뇨스, 카를로스 랄리에나, 크리스티나 몬테르데 등 세 명의 아라곤 역사학자들은 비밀 투표의 존재에 대한 증거가 당시 사료에 없다고 주장하며 수리타의 기록을 반박했다. 세스마는 2011년에 9명의 타협위원(compromisarios) 모두가 각기 다른 선호에도 불구하고 만장일치로 페르난도를 선택했다고 주장했다.[1] 그는 2012년에도 랄리에나, 몬테르데와 함께 이 견해를 반복했다.[2] 그들의 핵심 논거는 1412년 6월 25일의 공식 증서 선포에서 선거 결과가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6월 28일 선포식에 참석했던 카탈루냐 타협위원 3명 중 한 명인 멜코르 데 괄베스의 증언(완전한 진술은 아니지만)을 인용했다. "그들은 자유롭게 행동했으며 아무런 압력을 받지 않았다", "모든 이들을 자유롭게 그들의 의견을 낼 수 있었다".[2] 2013년에는 이 새로운 이론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출판물이 없었다.

2012년에 이미 이러한 관점은 역사학자 에르네스트 벨렝게르에 의해 반박되었다. 그는 교황 선거(콘클라베)와 같이 이러한 종류의 선거는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무기명 투표 결과는 발표되지 않으므로 이런 종류의 증거만으로 만장일치 선거를 추론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15세기의 트라스타마라 가의 공식 연대기 작가 로렌초 발라가 타협위원들 사이에 매우 다른 이견들이 있었다고 말했다는 것을 언급했다.[3] 벨렝게르는 우스타로스, 도르메르 같이 수리타가 본 것과 같은 기록을 보았던 17세기의 작가들을 인용했고, 9명의 타협위원 모두의 선호도가 확인된 수리타의 것과 같은 기록이었음을 발표했다.[3]

참조

[1] 서적 The Spanish Kingdoms 1250-1516 1978
[2] 서적 The Medieval Crown of Aragon: a short history 1991
[3] 서적 Caspe, Compromise of https://books.google[...] Routledge, New York 2003
[4] 서적 La dinámica política https://books.google[...] Ediciones Istmo 2005
[5] 서적 Jerusalén, hora cero: nueve brindis por un rey https://books.google[...] Editorial Fundamentos 1995
[6] 서적 The Spanish Kingdoms 1250-1516
[7] 서적 The Medieval Crown of Aragon
[8] 서적 The Spanish Kingdoms 1250-1516 1978
[9] 서적 The Medieval Crown of Aragon: a short history 1991
[10] 서적 Caspe, Compromise of https://books.google[...] Routledge, New York 2003
[11] 서적 La dinámica política https://books.google[...] Ediciones Istmo 2005
[12] 서적 Jerusalén, hora cero: nueve brindis por un rey https://books.google[...] Editorial Fundamentos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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