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티볼리오 가
1. 개요
벤티볼리오 가문은 1323년 볼로냐에서 처음 언급된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이다. 이들은 한때 볼로냐를 지배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16세기 초 교황 율리우스 2세에 의해 몰락했다. 벤티볼리오 가문은 14세기 구엘프 파의 지도자였으며, 조반니 1세, 안토니오 갈레아초, 안니발레 1세, 산테 1세, 조반니 2세, 안니발레 2세 등 여러 인물을 배출하며 볼로냐의 역사를 장식했다. 특히 조반니 2세는 볼로냐의 실질적인 통치자였으나, 1506년 추방당하며 가문의 몰락을 맞이했다. 가문은 페라라에 정착하여 여러 성직자를 배출했으며, 산 자코모 마조레 성당에 문화적 유산을 남겼다.
| 이름 | 벤티볼리오 가문 |
|---|---|
| 유형 | 귀족 가문 |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국가 | 교황령 |
|---|---|
| 설립 | 1401년 |
| 창시자 | 조반니 1세 벤티볼리오 |
| 모계 가문 | 호엔슈타우펜 (주장) |
| 폐위 | 1512년 |
| 마지막 통치자 | 안니발레 2세 벤티볼리오 |
| 작위 | 볼로냐의 영주 |
| 모토 | NUNC MICHI |
| 모토 (언어) | 라틴어 |
| 모토 (번역) | 지금은 나의 시간이다. |
| 영지 | 볼로냐의 팔라초 벤티볼리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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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티볼리오가 -
조반니 1세 벤티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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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티볼리오가 -
조반니 2세 벤티볼리오
조반니 2세 벤티볼리오는 15세기 볼로냐의 군주이자 콘도티에로로, 도시를 통치하며 미관을 개선하고 예술을 후원했으나, 체사레 보르자에게 저항하다 교황에게 파문당하고 권좌에서 물러난 후 포로로 사망했다. -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 -
메디치가
메디치가는 13세기부터 18세기까지 피렌체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메디치 은행의 부를 기반으로 정치, 경제, 문화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르네상스 황금기를 이끌었으나, 토스카나 대공국 건설 후 잔 가스토네의 죽음으로 가문의 통치가 종식되었다. -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 -
에스테가
에스테 가문은 11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귀족 가문으로, 이탈리아와 독일 두 분파로 나뉘어 북부 이탈리아 지역을 지배하며 예술을 후원했고, 독일 분파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영국 왕실과 연관을 맺었으며, 혼인을 통해 오스트리아-에스테 가문이 형성되어 유럽 정치사에 영향을 미치고 건축물과 예술품 등 문화적 유산을 남겼다.
2. 역사
벤티볼리오 가문은 14세기부터 16세기 초까지 이탈리아 볼로냐의 정치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가문이다. 1323년 기록에 처음 등장한 이 가문은 구엘프(교황파) 세력의 지도자로 성장하여 볼로냐의 통치권을 두고 경쟁했다.
조반니 1세 벤티볼리오가 1401년 잠시 볼로냐의 시뇨레(영주)가 되었으나 곧 축출되었고, 이후 안톤 갈레아초 벤티볼리오, 안니발레 1세 벤티볼리오 등이 가문의 세력을 유지하고 확장하려 노력했으나 암살 등으로 인해 불안정한 시기를 보냈다. 15세기 중반 산테 1세 벤티볼리오와 그의 뒤를 이은 조반니 2세 벤티볼리오의 통치 아래 가문은 전성기를 맞이하여 볼로냐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이 시기 볼로냐는 교황령의 주권 아래 있었지만 상당한 자치권을 누렸으며,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 등 주변 강대국들과의 외교 관계를 통해 세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1506년, 강력한 중앙 집권을 추구하던 교황 율리오 2세에 의해 조반니 2세 벤티볼리오가 볼로냐에서 추방되면서 가문의 통치는 막을 내렸다. 그의 아들 안니발레 2세 벤티볼리오가 잠시 권력을 되찾으려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암살당했다. 이후 벤티볼리오 가문은 페라라 등지로 망명하여 정착했으며, 후대에 여러 고위 성직자를 배출하는 등 명맥을 이어갔다.
2.1. 가문의 기원
벤티볼리오 가문의 존재는 1323년 볼로냐의 기록에서 처음 언급된다. 가문의 이름은 볼로냐 인근의 성에서 유래했으며, 스스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사생아인 사르데냐의 왕 엔초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14세기 동안 가문은 볼로냐의 노동자 길드에 속해 있었고, 친교황파인 구엘프 세력의 지도자로서 힘을 키웠다. 1401년 3월 14일, 볼로냐의 세력 다툼 속에서 조반니 1세는 밀라노의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를 "영주(signore)"이자 "곤팔로니에레 디 주스티치아"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가 적대적으로 돌아서면서, 조반니 1세는 1402년 6월 26일 카살레키오 전투에서 패배하고 사망했으며, 산 자코모 마조레(San Giacomo Maggiore) 성당에 안장되었다.
이후 수십 년간 볼로냐의 정치 상황과 벤티볼리오 가문의 운명은 불안정했다. 조반니 1세의 아들인 안톤 갈레아초(c. 1385–1435)는 민법 강사였으며, 1420년에 잠시 볼로냐에서 권력을 잡았으나 곧 축출되었다. 그는 콘도티에로가 되었지만, 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교황령 측 관리들에 의해 1435년 12월 23일에 암살당했다(그는 그해 12월 볼로냐로 돌아왔었다). 그의 통치 시기에 벤티볼리오 가문은 카스텔 볼로네세 영지를 얻었다.
1438년, 안톤 갈레아초의 아들로 추정되는 안니발레 1세(그의 어머니 리나 카니자니[Lina Canigiani]는 아들의 아버지가 불확실하다고 말했고, 주사위를 던져 결정했다고 전해진다)는 교황령에 대항하는 반란을 이끌었다. 그는 밀라노의 비스콘티 가문과 평화 관계를 맺고, 교황에게 볼로냐가 교황령의 직접 통치 하에 있지 않다는 것을 설득하려 했다. 1442년, 비스콘티 가문의 콘도티에로 니콜로 피치니노가 안니발레와 그의 추종자들을 바라노(Varano)에 감금했으나, 같은 해 갈레아초 마레스코티(Galeazzo Marescotti)에 의해 풀려났다. 안니발레가 볼로냐로 돌아오자, 도시 정부는 그의 정치적 중요성을 인정하며 통치권을 부여했다. 하지만 안니발레는 1445년 6월 24일,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지원을 받던 경쟁자 바티스타 카네스키(Battista Canneschi)에게 암살당했다.
안니발레의 자리는 산테 1세(1426–1463)가 이어받았다. 산테 역시 출생 배경에 의문이 있었지만, 안니발레 1세의 사촌인 에르콜레 벤티볼리오의 아들로 인정받았다. 본래 피렌체의 양모 길드 도제였던 산테는 1442년부터 볼로냐의 "영주(signore)"로서 통치했다. 코시모 데 메디치의 후원을 받은 그는 도시에 잠시 정치적 안정을 가져왔다. 법적으로는 항상 교황의 통치권 아래 있었지만, 볼로냐는 상당한 자치권을 누렸으며, 지주 귀족, 부유층, 고위 교황청 관료들로 구성된 지역 의회를 통해 봉건제적 질서를 회복했다. 이 시기 볼로냐는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와의 관계를 강화했다.
산테의 뒤를 이은 조반니 2세(1443–1508)는 안니발레 1세의 아들로, 볼로냐의 실질적인 참주로서 통치했다. 그러나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에 의해 조반니 2세가 볼로냐에서 추방당하면서 벤티볼리오 가문의 통치는 막을 내렸다.
조반니 2세의 아들인 안니발레 2세(1469–1540)는 1487년 페라라 공작 에르콜레 1세 데스테의 사생아 딸 루크레치아 데스테와 결혼했으며, 콘도티에로로 활동했다. 1511년 교황 율리우스 2세에 대항한 반란 때 프랑스의 도움으로 잠시 볼로냐를 장악했으나, 1년 만에 권력을 잃었다. 그는 기슬리에리(Ghislieri), 카네톨리(Canetoli) 등 다른 경쟁 가문들의 시기를 받았고 결국 암살당했다. 안니발레 2세는 벤티볼리오 가문의 마지막 통치자였다.
망명 후 벤티볼리오 가문은 페라라에 정착하여 여러 명의 고위 성직자를 배출했다.
2.2. 초기 활동 (14세기 ~ 15세기 초)
볼로냐에 벤티볼리오 가문이 존재했다는 기록은 1323년에 처음 나타난다. 가문의 이름은 볼로냐 인근의 성에서 유래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사생아인 사르데냐 왕 엔초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14세기 동안 가문은 볼로냐의 노동자 길드에 속해 있었으며, 친교황파인 구엘프 파의 지도자로서 힘을 키워나갔다. 도시 내 세력 다툼 속에서 조반니 1세 벤티볼리오는 1401년 3월 14일, 밀라노의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를 볼로냐의 '시뇨레'(영주)이자 '곤팔로니에레 디 주스티치아'(정의의 기수)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가 곧 적대적으로 돌아서면서, 조반니 1세는 1402년 6월 26일 카살레키오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하였고, 시신은 산 자코모 마조레 성당에 안치되었다.
조반니 1세 사후 수십 년간 볼로냐의 정치 상황과 벤티볼리오 가문의 운명은 매우 불안정했다. 그의 아들인 안톤 갈레아초 벤티볼리오 (약 1385년 ~ 1435년)는 대륙법 교수였으며 1420년에 잠시 볼로냐에서 권력을 잡았으나 곧 축출되었다. 이후 콘도티에로(용병대장)로 활동했으며, 그의 통치 시기에 벤티볼리오 가문은 카스텔볼로녜세 영지를 얻었다. 하지만 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한 교황청 측 인사들에 의해 1435년 12월 23일 암살당했다.
1438년, 안톤 갈레아초의 아들로 추정되는 안니발레 1세는 교황령에 대항하는 반란을 이끌었다. 안니발레 1세는 밀라노의 비스콘티 가문과 동맹을 맺으려 했고, 교황에게 볼로냐가 교황의 직접 통치 하에 있지 않음을 설득하려 시도했다. 1442년, 비스콘티 가문의 콘도티에로 니콜로 피치니노에게 바라노에서 감금되었으나, 같은 해 갈레아초 마레스코티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안니발레 1세가 볼로냐로 돌아오자 도시 정부는 그의 정치적 중요성을 인정하며 권력을 부여했다. 그러나 1445년 6월 24일,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지원을 받던 정적 바티스타 카네스키에게 암살당했다.
2.3. 전성기와 몰락 (15세기 중반 ~ 16세기 초)
1438년, 안톤 갈레아초의 아들로 추정되는 안니발레 1세는 교황령에 대항하는 볼로냐의 반란을 이끌었다. 그의 어머니 리나 카니지아니는 아들의 아버지가 불확실하다고 말했으며, 주사위를 던져 결정했다고 전해진다.출생 관련 기록 안니발레 1세는 밀라노의 비스콘티와 평화 관계를 맺으려 했고, 교황에게 볼로냐가 교황령의 통치 하에 있지 않도록 설득하고자 했다. 1442년, 비스콘티 가문의 콘도티에로 니콜로 피치니노에게 잠시 감금되었으나, 갈레아초 마레스코티(Galeazzo Marescotti)에 의해 풀려났다. 볼로냐로 돌아온 안니발레 1세는 도시 정부로부터 통치권을 인정받으며 가문의 정치적 중요성을 확인시켰다. 그러나 1445년 6월 24일,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지원을 받던 경쟁자 바티스타 카네스키(Battista Canneschi)에게 암살당했다.
안니발레 1세의 뒤를 이어 산테 1세(1426–1463)가 권력을 잡았다. 산테 1세 역시 출생에 대한 의문이 있었으나, 안니발레 1세의 사촌인 에르콜레 벤티볼리오의 아들로 인정받았다. 본래 피렌체의 양모 길드 견습생이었던 그는 1442년부터 볼로냐의 사실상 통치자(시뇨레, signore)로 군림했다. 피렌체의 강력한 실권자였던 코시모 데 메디치의 후원을 받으며, 산테 1세는 볼로냐에 비교적 안정적인 시기를 가져왔다. 이 시기 볼로냐는 법적으로는 교황의 주권 아래 있었지만, 지주 귀족, 부유층, 교황청 관료 등으로 구성된 지역 의회를 통해 상당한 자치권을 누렸으며 봉건제와 유사한 체제를 유지했다. 또한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 등 주변 도시들과의 관계를 강화하며 외교적 입지를 다졌다.
산테 1세 사후, 안니발레 1세의 아들인 조반니 2세(1443–1508)가 권력을 계승하여 볼로냐의 실질적인 참주로서 통치했다. 그의 통치 아래 벤티볼리오 가문은 권력의 정점에 달했지만, 1506년 강력한 권력을 추구하던 교황 율리오 2세에 의해 조반니 2세가 볼로냐에서 추방당하면서 가문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조반니 2세의 아들인 안니발레 2세(1469–1540)는 1487년 페라라 공작 에르콜레 1세 데스테의 사생아 딸인 루크레치아 데스테와 결혼했으며, 콘도티에로로 활동했다. 1511년, 교황 율리오 2세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나자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잠시 볼로냐를 되찾았으나, 그의 통치는 1년에 그쳤다. 기슬리에리(Ghislieri), 카네톨리(Canetoli) 등 다른 경쟁 가문들의 견제 속에서 결국 암살당하며, 벤티볼리오 가문의 볼로냐 통치는 막을 내렸다. 이후 망명한 벤티볼리오 가문은 페라라에 정착하여 몇몇 고위 성직자를 배출했다.
2.4. 벤티볼리오 가문의 몰락 이후
1506년 교황 율리오 2세는 조반니 2세 벤티볼리오를 볼로냐에서 추방하였고, 이로써 벤티볼리오 가문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조반니 2세의 아들인 안니발레 2세(1469–1540)는 1487년 페라라 공작 에르콜레 1세 데스테의 사생아 딸인 루크레치아 데스테와 결혼하였으며, 콘도티에로로 활동했다. 1511년, 그는 율리오 2세에 대항한 반란 중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볼로냐를 잠시 장악했으나, 경쟁 가문들의 미움을 받아 1년 만에 암살당했다. 안니발레 2세는 벤티볼리오 가문의 마지막 볼로냐 통치자였다.
볼로냐에서 추방된 후, 벤티볼리오 가문의 후손들은 페라라에 정착하여 새로운 기반을 다졌다. 이 시기 가문에서는 여러 저명한 성직자들이 배출되었다.
* 추기경 귀도 벤티볼리오(1579–1644): 젊은 시절 갈릴레오에게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훗날 종교 재판관으로서 갈릴레오의 유죄 판결에 서명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교황청 외교관으로 활동했으며, 저서 델라 구에라 디 피안드라(Della Guerra di Fiandra)를 통해 플랑드르 전쟁의 역사를 기록하기도 했다.
* 추기경 코르넬리오 벤티볼리오(1668–1732): 역시 가문 출신의 고위 성직자였다.
한편, 조반니 2세의 셋째 아들인 알레산드로 벤티볼리오는 이폴리타 스포르차와 결혼한 후 밀라노에서 활동했다. 그는 밀라노의 마지막 스포르차 공작의 고문이었으며, 1525년에는 밀라노 총독이 되어 가문의 롬바르디아 분파를 형성했다.
가문의 이름은 현대에도 이어져, 20세기 이탈리아의 배우 갈레아초 벤티(Galeazzo Benti)는 본명이 갈레아초 벤티볼리오였다.
3. 볼로냐 통치자
벤티볼리오 가문은 14세기 볼로냐의 노동자 길드에 속하며 친교황파 구엘프 지도자로서 세력을 키웠다. 1401년 조반니 1세 벤티볼리오가 처음으로 도시의 통치자(signore이탈리아어)가 되면서 가문의 볼로냐 지배가 시작되었다. 이후 약 100여 년간 벤티볼리오 가문은 여러 차례 권력 투쟁과 외부 세력의 개입 속에서 부침을 겪으며 볼로냐의 통치권을 유지하거나 되찾으려 노력했다.
다음은 볼로냐를 통치했던 주요 벤티볼리오 가문 구성원 및 통치 기간이다. 각 인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하위 문서를 참고할 수 있다.
| 초상화 | 시뇨레 | 재임 기간 | |
|---|---|---|---|
| ]] | 조반니 1세 벤티볼리오 | 1401년 | 1402년 |
| 1402년~1403년: 밀라노 공국에 통합. | |||
| 1403년~1416년: 추기경 발다사레 코사의 시뇨리아. | |||
| ]] | 안토니오 갈레아초 벤티볼리오 | 1416년 3월 3일 | 1435년 12월 23일 |
| 1435년~1443년: 니콜로 피치니노의 시뇨리아. | |||
| ]] | 안니발레 1세 벤티볼리오 | 1443년 8월 14일 | 1445년 6월 24일 |
| ]] | 산테 벤티볼리오 | 1445년 6월 24일 | 1463년 10월 1일 |
| ]] | 조반니 2세 벤티볼리오 | 1463년 10월 1일 | 1506년 11월 2일 |
| ]] | 안니발레 2세 벤티볼리오 | 1511년 5월 | 1512년 5월 |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에 의해 조반니 2세 벤티볼리오가 추방되었고, 그의 아들 안니발레 2세 벤티볼리오가 1511년 잠시 권력을 되찾았으나 1년 만에 다시 쫓겨났다. 안니발레 2세를 마지막으로 벤티볼리오 가문의 볼로냐 통치는 막을 내렸으며, 이후 가문은 페라라에 정착하여 명맥을 이어갔다.
3.1. 조반니 1세 벤티볼리오 (1401-1402)
14세기 동안 벤티볼리오 가문은 볼로냐의 노동자 길드에 속해 있었으며, 친교황파 구엘프 지도자로서 세력을 키웠다. 1401년 3월 14일, 도시 내 파벌 간의 갈등 속에서 조반니 1세 벤티볼리오는 밀라노 공작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의 지원을 받아 스스로를 볼로냐의 '영주(signore이탈리아어)'이자 '곤팔로니에레 디 주스티치아'(정의의 기수)로 선포했다.
그러나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는 곧 조반니 1세를 외면했고, 결국 조반니 1세는 1402년 6월 26일 카살레키오 전투에서 비스콘티에게 패배하여 살해되었다. 그의 시신은 산 자코모 마조레 교회에 안장되었다.
3.2. 안톤 갈레아초 벤티볼리오 (1416-1435)
조반니 1세 벤티볼리오의 아들인 안톤 갈레아초 (또는 안토갈레아초, c. 1385–1435)는 민법 강사였다. 그는 1420년에 잠시 볼로냐에서 권력을 잡았으나 곧 도시에서 쫓겨났다.
이후 콘도티에로가 되어 활동했으며, 1435년 12월 볼로냐로 돌아오려 하자 그의 복귀를 우려한 교황 측 관리들에 의해 1435년 12월 23일 암살당했다. 그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벤티볼리오 가문은 카스텔 볼로네세를 봉토로 받았다.
3.3. 안니발레 1세 벤티볼리오 (1443-1445)
안톤 갈레아초 벤티볼리오의 아들로 추정되는 안니발레 1세는 1438년 교황령에 대항하는 볼로냐 시민들의 반란을 이끌었다. 그의 어머니 리나 카니지아니가 아들의 친자 관계를 확신하지 못해 주사위로 결정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는 밀라노의 비스콘티와 평화를 맺고, 교황에게 볼로냐가 교황령의 직접 통치 하에 놓이지 않도록 설득하고자 노력했다.
1442년, 밀라노의 콘도티에로 니콜로 피치니노는 안니발레와 그의 지지자들을 바라노 성에 가두었으나, 같은 해 갈레아초 마레스코티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안니발레가 볼로냐로 돌아오자, 시민들은 그에게 통치권을 부여하며 가문의 정치적 중요성을 인정했다. 그는 1443년 8월 14일부터 볼로냐를 통치하기 시작했으며, 피치니노의 친밀라노 세력을 몰아내고 1445년에는 볼로냐 통치 기구인 '16인의 개혁가' 수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1445년 6월 24일, 경쟁 가문인 칸네스키 가문의 바티스타 칸네스키는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지원을 받아 안니발레 1세를 암살했다.
3.4. 산테 벤티볼리오 (1445-1463)
아니발레 1세 벤티볼리오가 1445년 6월 24일 암살된 후, 그의 뒤를 이어 산테 1세(1426년–1463년 10월 1일)가 볼로냐의 통치자가 되었다.
산테는 아니발레 1세의 사촌인 에르콜레 벤티볼리오의 아들이라고 주장했으나, 그의 출생과 친자 관계에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는 원래 피렌체의 양모 길드 견습생이었으며, 메디치 가문의 수장인 코시모 데 메디치의 집에서 성장하며 그의 후원을 받았다.
산테는 코시모 데 메디치의 지지 아래 볼로냐의 "영주(signore)"로서 1445년부터 1463년 자연사할 때까지 통치했다. 그는 아니발레 1세의 어린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조반니 2세 벤티볼리오의 섭정 역할도 수행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볼로냐는 비교적 정치적 안정을 누렸다. 비록 기술적으로는 교황령의 주권 아래 있었지만, 도시는 상당한 자치권을 확보했다. 산테는 토지 소유 귀족, 부유한 신흥 상인, 교황 지지 귀족들로 구성된 공동 원로원을 중심으로 하는 일종의 봉건제적 통치 체제를 재건했다. 또한, 볼로냐는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와 같은 주변 강대 도시들과의 관계를 강화하며 외교적 안정도 꾀했다.
3.5. 조반니 2세 벤티볼리오 (1463-1506)
산테 1세의 뒤를 이어 안니발레 1세 벤티볼리오의 아들인 조반니 2세(1443년–1508년)가 1463년 10월 1일부터 볼로냐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1506년까지 약 43년간 볼로냐를 실질적으로 다스렸으며, 일부 기록에서는 그를 '폭군'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조반니 2세는 메디치 가문, 스포르차 가문, 교황령과 같은 강력한 이웃 세력들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1501년에는 체사레 보르자의 봉신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내부적인 혼란 끝에 1506년 11월 2일,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볼로냐를 정복하면서 조반니 2세는 도시에서 추방되었다. 그는 추방된 지 2년 후인 1508년 밀라노에서 사망했다.
3.6. 안니발레 2세 벤티볼리오 (1511-1512)
조반니 2세 벤티볼리오의 아들인 안니발레 2세(1469년–1540년)는 1487년 페라라 공작 에르콜레 1세의 사생아인 루크레치아 데스테와 결혼했으며, 콘도티에로로 활동했다.
1506년 아버지 조반니 2세가 교황 율리우스 2세에 의해 볼로냐에서 추방당하자, 안니발레 2세는 복권을 노렸다. 캉브레 동맹 전쟁이 한창이던 1511년 5월, 그는 프랑스 군대의 지원을 받아 교황령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켜 볼로냐를 장악하고 가문의 통치를 잠시 회복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볼로냐 내부에서는 기슬리에리, 카네톨리 등 경쟁 가문들의 극심한 반대와 미움에 부딪혔다. 외부적으로는 프랑스 군대가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정치적 기반을 잃었다. 결국 안니발레 2세는 1512년 5월, 볼로냐를 통치한 지 불과 1년 만에 다시 도시에서 추방되었다. 이로써 그는 볼로냐를 다스린 벤티볼리오 가문의 마지막 통치자가 되었다.
추방된 안니발레 2세는 1529년 교황청과 합의에 이르렀다. 그는 가문의 재산을 일부 돌려받는 대가로 볼로냐에 대한 모든 권리 주장을 포기했다. 이후 페라라에 정착하여 여생을 보냈으며, 1540년 그곳에서 사망했다. 망명한 벤티볼리오 가문은 페라라에서 여러 저명한 성직자를 배출하며 가문의 명맥을 이어갔다.
4. 주요 인물
벤티볼리오 가문의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 에르콜레 벤티볼리오 : 산테 1세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인물.
* 귀도 벤티볼리오 : 추기경, 교황청 외교관, 역사가.
* 코르넬리오 벤티볼리오 : 추기경.
* 알레산드로 벤티볼리오 : 조반니 2세의 아들, 밀라노 총독.
* 갈레아초 벤티 : 20세기 배우.
4.1. 에르콜레 벤티볼리오
산테 1세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에르콜레 벤티볼리오(Ercole Bentivoglio이탈리아어)는 망명 생활 중 피렌체와 페라라에서 거주했다. 그는 식이요법에 관한 장편 시를 저술했는데, 특히 치즈의 의학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내용을 담았다. 또한 풍자적인 작품을 쓰기도 했다.
4.2. 귀도 벤티볼리오 추기경
추기경 귀도 벤티볼리오(1579–1644)는 갈릴레오의 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종교 재판에서 갈릴레오의 유죄 판결에 서명한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교황청의 외교관으로 활동했으며, 플랑드르 전쟁의 역사를 다룬 저서 Della Guerra di Fiandra이탈리아어를 남긴 역사가이기도 하다.
4.3. 코르넬리오 벤티볼리오 추기경
1506년 볼로냐에서 추방된 벤티볼리오 가문은 페라라에 정착하여 여러 중요한 성직자를 배출했다. 코르넬리오 벤티볼리오(1668년–1732년) 추기경도 그중 한 명이다.
4.4. 알레산드로 벤티볼리오
조반니 2세의 셋째 아들인 알레산드로 벤티볼리오는 이폴리타 스포르차와 결혼하였다. 그는 밀라노의 마지막 공작의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이후 1525년에는 밀라노의 총독이 되어 가문의 롬바르드 분파를 형성했다.
4.5. 갈레아초 벤티
벤티볼리오 가문의 최근 주목할 만한 인물로는 20세기의 배우인 갈레아초 벤티가 있다. 그의 본래 이름은 갈레아초 벤티볼리오였다.
5. 문화적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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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산 자코모 마조레 성당
산 자코모 마조레 성당은 13세기 중반에 처음 세워졌다. 15세기에 들어서 벤티볼리오 가문은 이 성당을 주변 지역의 권력 기반으로 삼았으며, 이에 맞춰 성당 내부를 장식했다. 성당 안에는 조각가 야코포 델라 퀘르차가 만든 안톤 갈레아초 벤티볼리오의 묘가 있다. 또한, 벤티볼리오 가문의 개인 예배당도 마련되었는데, 이 예배당의 제단에는 화가 로렌초 코스타가 그린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벤티볼리오 가문이 다른 볼로냐 가문들에 대해 거둔 승리를 인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