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슈바이크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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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은 1815년 빈 회의에서 독립 국가로 인정받아 1918년까지 존재했던 독일의 영방이었다. 1235년부터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칭호를 사용한 벨프 가문이 통치했으며, 나폴레옹 전쟁 중 베스트팔렌 왕국에 편입되었다가 해방 후 공국의 지위를 회복했다. 1815년 카를 2세가 즉위했으나 1830년 7월 혁명으로 퇴위하고, 빌헬름 8세가 뒤를 이었다. 1870년대에는 하노버 왕가와의 계승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1913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공작이 되었지만, 1918년 독일 혁명으로 퇴위하면서 브라운슈바이크 자유주로 전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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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슈바이크 공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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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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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
일반 명칭 | 브라운슈바이크 |
국가 지위 | 독일 연방, 북독일 연방, 독일 제국의 국가 |
정치 체제 | 입헌 군주제 |
역사 | |
건국 | 1815년 |
사건 시작 | 왕정복고 |
멸망 | 1918년 11월 8일 |
사건 종결 | 독일 혁명 |
이전 국가 |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국 |
이후 국가 | 브라운슈바이크 자유주 |
정부 | |
공작 | 프리드리히 빌헬름 (초대) |
통치자 연도 (초대) | 1813–1815 |
공작 (마지막) |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마지막) |
통치자 연도 (마지막) | 1913–1918 |
입법부 | 란데스페어잠룽 |
인구 | |
통계 년도 | 1910년 |
면적 | 3672 km² |
인구 | 494,339명 |
언어 및 종교 | |
공용어 | 독일어 동팔리아어 |
종교 | 브라운슈바이크 복음주의 루터교 주 교회 |
경제 | |
통화 | 탈러 (1842–1856) 페어아인스탈러 (1858–1871) 골드마르크 (1873–1914) 파피에르마르크 (1914–1918) |
현재 | |
현재 국가 | 독일 |
2. 역사
나폴레옹 전쟁 당시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은 프랑스에 점령되어 나폴레옹의 위성국(베스트팔렌 왕국)에 편입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이에 저항하여 게릴라전을 펼쳤다. 1813년 볼펜뷔텔이 해방된 후, 빈 회의에서 공국의 지위가 인정되어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으로 개명되었다.[1]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엘바 섬에서 돌아온 나폴레옹과 싸우다 전사했고, 백일천하에서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되면서 장남 카를 2세가 공작위를 계승했다. 카를 2세는 어린 나이였기에 영국과 하노버 왕국의 섭정 조지 4세가 후견인이 되었으나, 성인이 된 후 통치는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1830년 7월 혁명의 영향으로 브라운슈바이크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카를 2세는 퇴위하고 동생 빌헬름에게 공위를 양위했다.[1]
빌헬름은 통치를 대신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엘스 공령에서 지냈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 프로이센 왕국을 따라 독일 연방, 북독일 연방, 독일 제국의 영방으로 존속했다. 그러나 빌헬름이 자녀 없이 동족인 전 하노버 왕세자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를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독일 제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하노버 왕국이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제국 편에 섰다가 프로이센에 병합되었기 때문이다.[3]
1884년 빌헬름이 사망하자 독일 제국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공위 계승을 거부하고, 알브레히트 폰 프로이센을 섭정으로 임명했다. 알브레히트 사후에는 요한 알브레히트 츠 메클렌부르크가 섭정이 되었다.[4]
1913년 전 하노버 왕세자의 아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독일 황제빌헬름 2세의 딸 빅토리아 루이제와 결혼하면서 브라운슈바이크 공위가 부활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말 1918년 독일 혁명으로 독일 제국이 멸망하자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도 퇴위했고,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브라운슈바이크 자유주가 되었다.[4]
2. 1.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국 (1269-1815)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Herzog zu Braunschweig und Lüneburgde)이라는 칭호는 1235년부터 북서부 독일의 여러 작은 영토를 통치한 벨프 (구엘프) 가문의 여러 구성원이 사용했다. 이러한 영토는 현대의 단일 국가가 갖는 공식적인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지 않았으며, 빽빽하게 모여있지도 않았고 나눌 수도 없었다. 공작의 여러 아들이 권력을 다툴 때, 영토는 종종 그들 사이에서 분할되었고, 가문의 한 분파가 권력을 잃거나 대가 끊길 때, 영토는 가문의 생존 구성원에게 다시 분배되었으며, 서로 다른 공작들은 영토를 교환하기도 했다. 이러한 모든 영토에서 공통되는 요소는 오토 1세 공작(1235–1252년 통치)의 남성 혈통 후손들이 통치한다는 것이었다.[1]
초기의 여러 분할 이후,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는 마그누스 2세 공작(1373년 사망) 아래에서 다시 통합되었다. 그의 사망 후, 그의 세 아들이 공국을 공동으로 통치했다. 형제 프리드리히 1세가 살해된 후, 형제 베른하르트와 하인리히는 땅을 다시 분할하여 하인리히가 볼펜뷔텔 영토를 받았다.[1]
1432년부터 볼펜뷔텔 공국은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의 수도가 되었다. 1546년부터 에스테-구엘프 브라운슈바이크 가문에는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출신의 "선임"과 칼렌부르크-하노버 출신의 "젊은 분가"라는 두 개의 왕조가 존재한다는 것이 널리 알려지고 확인되었다.[1]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통치 군주들은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이 제국 자유 도시가 되기를 원했을 때,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이 일시적으로 수도로 사용된 1754년까지 볼펜뷔텔 공국에서 더 큰 공국을 계속 통치했다.[1]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은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 군에 점령되어, 나폴레옹의 위성 국가(베스트팔렌 왕국)에 편입되었다. 볼펜뷔텔 공작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게릴라전을 통해 나폴레옹의 지배에 저항했다. 1813년에 볼펜뷔텔이 해방되자, 나폴레옹 전쟁 이후 빈 회의에서 공국의 지위가 인정되어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1]
2. 2.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1815-1918)
1815년 빈 회의에서 볼펜뷔텔 영토는 주권 국가인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으로 인정받았다. 이곳은 중세 시대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의 일부였다.
초대 공작은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아들 카를 2세였다. 카를 2세는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영국과 하노버 왕국의 섭정이었던 조지 4세의 후견을 받았다. 그러나 카를 2세는 성년이 된 후 통치 과정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고, 1830년 7월 혁명의 영향으로 브라운슈바이크에서 시민 반란이 일어나자 퇴위하고 망명했다.
카를 2세의 동생 빌헬름 8세가 새로운 공작이 되었다. 빌헬름 8세는 통치 대부분을 장관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영지 밖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자유주의 개혁이 이루어졌고, 1832년에는 새로운 헌법이 채택되었다.
빌헬름 8세는 독일 통일 과정에서 프로이센 왕국을 따라 북독일 연방과 독일 제국에 가입했다. 그러나 빌헬름 8세에게는 자녀가 없었고, 동족인 전 하노버 왕국 왕세자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를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독일 제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하노버 왕국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편에 섰다가 패배하여 프로이센에 병합되었기 때문이다.
1884년 빌헬름 8세가 사망하자, 독일 제국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브라운슈바이크 공위 계승을 거부했다. 그 결과, 공국은 군주 부재 상태에서 알브레히트 폰 프로이센을 섭정으로 뒀으며, 알브레히트 사후에는 요한 알베르트 폰 메클렌부르크를 섭정으로 앉혔다.
1913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아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딸 빅토리아 루이제와 결혼하면서 브라운슈바이크 공위가 부활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말기 독일 혁명으로 독일 제국이 멸망하자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퇴위했고,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은 바이마르 공화국 아래 브라운슈바이크 자유주가 되었다.
2. 2. 1. 카를 2세 (1815-1830)
1815년 빈 회의에서 볼펜뷔텔 영토는 주권 국가로 인정받았다. 어린 카를 2세는 전사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공작의 장남이었으며, 영국과 하노버의 섭정 공인 조지 4세의 후견을 받았다.젊은 공작은 성년이 되는 나이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1827년에 카를 2세는 미성년자 시절에 만들어진 일부 법률이 무효라고 선언하여 갈등을 일으켰다. 독일 연방이 개입한 후, 카를 2세는 해당 법률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의 행정은 부패하고 잘못된 것으로 여겨졌다.[1]
1830년 7월 혁명의 여파로 카를 2세는 나라를 떠나야 했다. 그의 절대 군주제 통치 스타일은 귀족과 부르주아 계급을 소외시켰으며, 하층 계급은 좋지 않은 경제 상황에 불만을 품었다. 1830년 9월 7일 밤에서 8일 밤 사이에 브라운슈바이크 궁전은 분노한 폭도들에게 습격당해 불태워져 완전히 파괴되었다. 카를은 국외로 도피했지만, 퇴위하지는 않았다.[2]
2. 2. 2. 빌헬름 8세 (1830-1884)
카를 2세의 동생 빌헬름 8세는 1830년 9월 10일 브라운슈바이크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빌헬름은 처음에는 자신을 형의 섭정으로만 생각했지만, 1년 후 스스로 통치 공작임을 선언했다. 이후 카를은 빌헬름을 폐위시키기 위해 여러 번 필사적인 시도를 했지만 실패했다.[3]빌헬름은 대부분의 정부 업무를 그의 장관들에게 맡기고, 그의 재산이 있는 욀스에서 그의 영지 밖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1830년 혁명 이후 자유주의 개혁이 이루어졌고, 1832년 10월 12일에 새로운 헌법이 채택되었다. 인구 조사 선거권 제도를 통해 유권자 수가 브라운슈바이크 남성 인구의 약 40%로 제한되었지만, 브라운슈바이크 의회는 당시 다른 대부분의 독일 국가보다 더 많은 권리를 부여받았고 공작의 예산과 권한은 크게 제한되었다.[3]
1866년 빌헬름은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북독일 연방에 가입했지만, 프로이센은 그의 가장 가까운 남성 계승자인 하노버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황태자를 그의 상속자로 인정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프로이센과의 관계는 긴장되었다.[3]
하노버 왕국이 1866년 프로이센에 의해 합병되었지만,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은 주권과 독립을 유지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은 처음에는 북독일 연방에 가입했고, 1871년에는 독일 제국에 가입했다.[3]

1870년대에는 당시 집권 벨프 가문의 장자 분가가 빌헬름 공작과 함께 단절될 것이 분명해졌다. 가문의 법에 따라 하노버 가문의 일원이 공작의 왕위에 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하노버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의 왕국에 대한 프로이센의 합병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그 결과, 프로이센은 하노버의 게오르크 5세나 그의 아들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브라운슈바이크를 계승하는 것을 기꺼이 허용하지 않았다. 베를린은 하노버 사람들이 독일 헌법에 충성을 맹세하고 하노버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하는 것을 포함한 엄격한 조건 하에서만 브라운슈바이크의 공작이 되는 것에 동의했다.[3]
1879년 법에 따라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은 공작의 죽음 시에 인수를 위한 임시 섭정 위원회를 설립했다. 영국 귀족 계급에서 컴벌랜드 공작으로 만들어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계승할 수 없다면, 위원회는 섭정을 임명할 권한도 갖게 된다. 1884년 빌헬름이 사망하면서 볼펜뷔텔 가문은 종말을 맞이했다. 컴벌랜드 공작은 그 후 스스로를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라고 선포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하노버의 정당한 왕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연방 평의회는 그가 브라운슈바이크를 계승하면 독일 제국의 평화를 위반할 것이라고 판결했다. 장기간의 협상이 이어졌지만 결코 해결되지 않았다.[3]
2. 2. 3. 섭정기 (1884-1913)
1884년 빌헬름 8세가 사망하자, 독일 제국은 하노버 왕세자였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브라운슈바이크 공위 계승을 거부했다. 이는 하노버 왕국이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제국 편에 섰다가 패전하여 프로이센에 병합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은 군주 부재 상태에서 알브레히트 폰 프로이센을 섭정으로 임명했으며, 알브레히트 사후에는 요한 알베르트 츠 메클렌부르크를 섭정으로 앉혔다.[4]2. 2. 4.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913-1918)
1912년에 컴벌랜드 공작의 장남이 사망하면서, 노령의 공작은 브라운슈바이크를 그의 막내 아들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에게 양위했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빌헬름 2세 황제의 딸과 결혼했고, 독일 제국에 충성을 맹세했으며, 하노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했다. 따라서 그는 1913년 11월에 공국의 왕위에 오르는 것이 허용되었다.[4]
1918년 독일 혁명의 와중에 공작은 퇴위해야 했고, 브라운슈바이크 자유주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구성 국가로 설립되었다.[4]
3. 역대 군주
재위 기간 | 이름 | 비고 |
---|---|---|
1813년 ~ 1815년 | 프리드리히 빌헬름 | |
1815년 ~ 1830년 | 카를 2세 | |
1830년 ~ 1884년 | 빌헬름 8세 | |
1885년 ~ 1906년 | 알브레히트 폰 프로이센 | 섭정 |
1906년 ~ 1913년 | 요한 알브레히트 츠 메클렌부르크 | 섭정 |
1913년 ~ 1918년 |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
4. 지리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은 여러 개의 연결되지 않은 지역으로 구성되었으며, 크게 세 개의 큰 지역과 일곱 개의 작은 지역으로 나뉘었다. 가장 크고 인구가 많은 지역은 브라운슈바이크, 볼펜뷔텔, 헬름슈테트 도시와 엘름 주변 지역으로, 북쪽의 알러 강에서 남쪽의 하르츠 산맥까지 뻗어 있었다. 홀츠민덴 마을이 있는 서부 지역은 동쪽의 베저 강에서 서쪽의 하르츠 포어랜드까지 뻗어 있었고, 블랑켄부르크 마을이 있는 남부 지역은 하르츠 산맥에 위치해 있었다.
공국의 작은 월경지로는 브레멘 근처의 테딩하우젠, 하르츠부르크, 칼푀르데, 보덴부르크 및 외스트룸, 고슬라 근처의 오스트하링엔, 페이네 근처의 외르스부르크, 그리고 팔슈타인 근처의 작은 숲이 있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은 거의 전적으로 하노버와 작센의 프로이센 주에 둘러싸여 있었으며, 남동쪽으로는 안할트 공국, 서쪽으로는 발데크-피르몬트 공국 및 프로이센의 베스트팔렌 주와 접해 있었다.[5]
공국의 서부 지역은 베저 고지대에, 중부 및 남부 지역은 북부 하르츠 포어랜드와 하르츠 산맥에 위치했다. 북부 지역은 북독일 평원과 중앙 고지대의 경계에 있었다. 공국의 최고봉은 해발 971m의 부름베르크였다. 브라운슈바이크를 관통하는 주요 강으로는 베저 강, 알러 강, 라이네 강, 오커 강, 보데 강, 이너스테 강이 있었다.
지역 또는 월경지[5] | 면적 (제곱 킬로미터) | 인접한 지역 |
---|---|---|
브라운슈바이크, 볼펜뷔텔, 헬름슈테트가 있는 본토 | 1808 | 하노버 주, 작센 주 |
홀츠민덴, 제젠, 간더스하임이 있는 서부 | 1107 | 하노버 주, 베스트팔렌 주, 발데크 |
블랑켄부르크, 브라운라게가 있는 로어 하르츠 | 475 | 하노버 주, 작센 주, 안할트 |
하르츠부르크 | 125 | 하노버 주 |
칼푀르데 | 102 | 작센 주 |
테딩하우젠 | 56 | 하노버 주 |
보덴부르크와 외스트룸 | 10 | 하노버 주 |
오스트하링겐 | 4 | 하노버 주 |
외르스부르크 | 3 | 하노버 주 |
5. 인구
1910년,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의 인구는 494,339명이었다.
1885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주민 중 84.90% (316,208명)가 브라운슈바이크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54,738명 (14.70%)은 다른 독일 국가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1,506명 (0.40%)은 외국 국적이었는데, 그중 785명은 오스트리아-헝가리, 133명은 영국, 112명은 미국, 91명은 이탈리아, 83명은 러시아 제국, 81명은 스위스 출신이었다.[8]
1905년, 인구의 92.5%인 450,760명이 브라운슈바이크 복음주의 루터교회 신자였다. 26,504명(5.5%)은 가톨릭 신자였고, 4,720명(0.97%)은 개혁교회 신자였다. 1,815명(0.39%)은 유대교 신자였다.[9]
도시 또는 마을 | 인구 (1910년 12월 1일)[6] |
---|---|
브라운슈바이크 | 143,552 |
볼펜뷔텔 | 18,934 |
헬름슈테트 | 16,421 |
블랑켄부르크 암 하르츠 | 11,487 |
홀츠민덴 | 10,249 |
쇤닝겐 | 9,773 |
제젠 | 5,381 |
하르츠부르크 | 4,728 |
오커 | 3,984 |
슈타트올덴도르프 | 3,728 |
랑엘스하임 | 3,611 |
쇤펜슈테트 | 3,226 |
쾨니히슬루터 | 3,126 |
뷘트하임 | 2,982 |
브라운라게 | 2,811 |
간데르스하임 | 2,711 |
하셀펠데 | 2,649 |
6. 경제
1905년, 주민 1,000명 중 455명이 산업, 광업, 건설 분야에서 일했으며, 289명은 농업 및 임업, 121명은 상업에 종사했다. 57.3명은 공무원으로, 70명은 기타 다양한 직업에 종사했다.[9]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국영 철도는 독일 최초의 국영 철도였다. 1838년 12월 1일, 브라운슈바이크와 볼펜뷔텔을 잇는 브라운슈바이크-바트 하르츠부르크 철도 노선의 첫 구간이 개통되었으며, 이는 북부 독일 최초의 철도 노선이었다.[10] 1870년대에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국영 철도는 왕립 프로이센 국영 철도와 합병되었다. 1884년에 설립된 브라운슈바이크 국영 철도 회사는 중요성이 떨어지는 다른 철도 노선들을 운영했다.
7. 스포츠
1847년, MTV 브라운슈바이크가 브라운슈바이크 최초의 스포츠 클럽으로 설립되었다.[11]
브라운슈바이크는 독일 축구 역사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브라운슈바이크 출신 교사 콘라트 코흐는 최초로 독일어 축구 규칙을 작성했으며, 아우구스트 헤르만과 함께 1874년 자신의 학교인 ''마르티노-카타리네움'' 학생들 간의 독일 최초의 축구 경기를 조직했다고 주장한다.[12][13]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축구 협회(Fußballbund für das Herzogtum Braunschweigde)는 1904년 5월에 설립되었다.[14] 1895년에 설립된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는 북부 독일의 주요 축구 클럽 중 하나가 되었다. 오늘날까지 이 팀은 브라운슈바이크의 깃발에서 유래된 파란색과 노란색을 사용한다.
8. 문장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은 브라운슈바이크 가문의 장자 소유지에서 형성되었으며, 이 가문은 이탈리아 에스테 가문에서 기원했다.[15] 1269년에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가문은 뤼네부르크 공국과 브라운슈바이크(후에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즉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분가로 나뉘었다.
두 분가 모두 브라운슈바이크의 두 마리 사자, 뤼네부르크의 파란 사자, 그리고 작센의 작센 백마를 문장으로 사용했다. 구엘프 가문에서 사자를 문장 동물로 사용하는 것은 적어도 12세기의 사자공 하인리히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하인리히는 사자 한 마리만 사용했고, 브라운슈바이크의 두 마리 황금 사자는 그의 장인인 잉글랜드 왕이 하인리히에게 수여했다는 기록은 현대 역사가들은 허구로 간주한다.[15] 잉글랜드의 마틸다와의 결혼으로 낳은 하인리히의 아들들이 왕족 혈통을 나타내기 위해 잉글랜드 왕실 문장을 개조했는데, 오토의 문장에는 잉글랜드의 금색 사자 세 마리가, 하인리히는 두 마리만 사용했다. 하인리히 5세의 두 마리 사자는 구엘프 가문의 상징이 되었다.[16] 뤼네부르크의 파란 사자는 뤼네부르크의 요한 1세 공작이 덴마크 왕과의 친족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덴마크 문장을 기초로 채택했다.[17] 브라운슈바이크 공작들은 뤼네부르크 영토에 대한 자신들의 권리를 나타내기 위해 나중에 파란 사자를 문장에 추가했다.
백마는 8세기의 작센 공작 비두킨트의 상징이라고 전해지는데, 전설에 따르면 그는 세례를 받기 전에는 검은 말을, 그 후에는 흰 말을 탔다고 한다. 그러나 말을 작센의 상징으로 사용한 것은 14세기로, 구엘프 가문이 오래된 작센 공작의 진정한 후손임을 나타내기 위해 채택했다.[18]
시간이 지남에 따라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의 문장은 왕관과 방패, 두 와일드 맨이 지지하는 형태로, 뤼네부르크의 파란 사자, 브라운슈바이크의 두 마리 금색 사자, 작센 백마 등이 나타났다.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의 소형 문장은 빨간색 배경에 흰 말이 있는 왕관이 씌워진 방패였다. 1834년에 채택된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의 대형 문장은 공작 관을 얹고 사자 훈장의 표지로 둘러싸인 방패를 보여준다. 방패에는 뤼네부르크의 파란 사자, 브라운슈바이크의 두 마리 사자, 그리고 에버슈타인, 홈부르크, 디폴츠(상반부), 라우터베르크, 호야 및 브루흐하우젠, 디폴츠(하반부), 혼슈타인, 레겐슈타인, 클레텐베르크 및 블랑켄부르크의 문장이 표시되어 있다.[21] 빌헬름 8세 치하에서 도입된 새로운 소형 문장은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문장으로 돌아갔는데, 두 마리의 사자가 지지하는 왕관이 씌워진 방패에 표시되었다. 라틴어 비문은 "IMMOTA FIDES"(변함없는 충성심)와 "NEC ASPERA TERRENT"(어려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였다.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의 깃발은 파란색과 노란색이었으며,[21] 1912년에 도입된 국가기#정부기는 파란색과 노란색이었고, 중앙에는 빨간색 배경에 흰 말이 있는 왕관이 씌워진 방패가 있었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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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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