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총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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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질 총독부는 포르투갈이 브라질에 설치한 식민 행정 기구로, 1549년 세습 카피타니아 제도의 실패 이후 설립되었다. 초대 총독 토메 드 소자는 바이아에 식민지 중심지를 건설했으며, 이후 여러 차례 분할과 통합을 거쳐 브라질의 영토를 확장했다. 1580년부터 1640년까지 이베리아 연합 시기에는 네덜란드의 침략을 받아 네덜란드령 브라질이 건설되기도 했으나, 결국 포르투갈이 이를 회복했다. 식민지 브라질은 사탕수수 플랜테이션과 노예제를 기반으로 경제가 발전했으며, 18세기에는 금광 발견으로 리우데자네이루가 수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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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총독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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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공식 명칭 | 브라질 총독부 |
일반 명칭 | 브라질 |
상태 | 포르투갈 제국의 식민지 |
존속 기간 | 1549년–1572년, 1578년–1607년, 1613년–1621년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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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및 문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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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 |
정치 체제 | 봉건주의 군주제 하의 속령 |
군주 | 주앙 3세, 펠리페 3세 |
통치 기간 | 1549년–1557년 (주앙 3세), 1598년–1621년 (펠리페 3세) |
총독 | 토메 드 소우사 |
임기 | 1549년–1553년 (토메 드 소우사) |
수도 | |
수도 | 상 살바도르 |
언어 및 종교 | |
공용어 | 포르투갈어 |
종교 | 로마 가톨릭교 |
통화 | |
통화 | 포르투갈 헤알 |
역사 | |
이전 국가 | 브라질의 카피타니아 식민지 |
이후 국가 | 리우데자네이루 총독부 바이아 총독부 브라질 국가 마라냥 국가 (식민지) |
시작 연도 | 1549년 |
종료 연도 | 1621년 |
2. 초기 역사 및 건국
세습 카피타니아 제도가 실패하자, 주앙 3세는 카피타니아들을 합병하여 브라질 총독부를 설립했다. 1549년 1월 7일 초대 총독으로 토메 드 소자가 임명되어 3월 29일 브라질에 도착했다. 토메 드 소자는 식민 통치의 중심지를 건설하고, 해안 경비를 정비하며, 식민지의 행정과 사법 제도를 정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도시를 정비하고 사탕수수 생산을 장려했으며, 식민지에 중앙 통치 체제를 확립하여 식민화를 가속화했다.[1]
1553년 두아르트 다 코스타가 후임 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예수회 선교사 호세 데 안치에타와 함께 브라질에 도착했다. 호세 데 안치에타는 원주민에게 기독교를 전파했지만, 알바루 다 코스타와 원주민 노예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 다 코스타의 임기 중 프랑스인들이 구아나바라에 프랑스 안타르크티크를 건설하자, 바이아 의회는 왕실에 총독 교체를 요청했다.
1558년 멩 드 사가 세 번째 총독으로 부임하여 세즈마리아 정책을 이어갔다. 그는 세르지피 강변에 엔제뉴를 건설하고, 프랑스 안타르크티크에 맞서기 위해 테미미노인들과 연합했다. 1565년 이스타시우 드 사가 구아나바라 지역을 수복하고 히우 지 자네이루를 건설했다.[1]
2. 1. 브라질 총독부 설립
주앙 3세는 세습 카피타니아 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카피타니아들을 합병하고 브라질 총독부를 세웠다. 1549년 1월 7일 초대 총독 토메 드 소자가 임명되었고, 3월 29일 브라질에 도착하였다. 초대 총독의 임무는 식민통치의 중심지를 건설하는 것이었는데, 중심지로 바이아의 토두스 우스 산투스가 선정되었고 도시는 상사우바도르 다 바이아 지 토두스 우스 산투스라고 불렸다.[1] 총독부는 15개의 원래 자치령 식민지를 통합했는데, 일부는 왕실로 귀속되었고 다른 일부는 버려졌지만, 각 자치령은 총독부의 지방 행정 단위로 계속 존재했다.[2] 1572년부터 1578년, 그리고 1607년부터 1613년의 두 짧은 기간 동안, 브라질 총독부는 남쪽의 리오데자네이루 총독부와 북쪽의 바이아 총독부로 분할되었다.1621년, 브라질 총독부는 브라질 주(State of Brazil)와 마라냥 주(식민지)(State of Maranhão (colonial)) 두 식민지로 분할되었다.
2. 2. 초기 총독들의 역할과 식민지 발전
토메 드 소자의 임무는 해안 경비를 정비하고 지주들을 도와 식민지의 행정과 사법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었다. 총독은 도시를 정비하고 특히 사탕수수 생산에 큰 역할을 하였는데, 땅을 나눠주고 길을 냈으며 조선소도 만들었다. 이렇게 식민지에 중앙통치체제가 자리 잡았으며, 카피타니아들을 총독부로 통합하면서 식민화가 한층 더 빨라졌다.[1]1553년에 소자가 물러나고, 두아르트 다 코스타가 부임했다. 소자와 마찬가지로 260명의 일행을 데리고 도착했다. 그 중에는 아들인 알바루 다 코스타와 바스크인 예수회 선교사 호세 데 안치에타도 있었다. 호세 데 안치에타는 원주민에게 처음으로 기독교를 전파한 선교사였는데, 개종한 이들을 포함한 원주민을 노예로 부리려 했던 알바루 다 코스타와 갈등을 빚었다. 두아르트 다 코스타의 임기 중에는 또한 프랑스인 개신교 선교사들이 구아나바라에 정착하여 프랑스 안타르크티크라는 식민지를 건설했는데, 이에 분노한 바이아 의회가 왕실에 총독 교체를 요청했다.
1558년에 세 번째 총독인 멩 드 사가 부임했고, 정착해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 땅을 지급하는 세즈마리아 정책을 계속 이어나갔다. 멩 드 사는 또한 세르지피 강변에 엔제뉴(사탕수수 제분소)를 지었으며, 구아나바라 만의 타모이우인들과 연합한 프랑스 안타르크티크에 맞서기 위해 아라리보이아가 이끄는 테미미노인들과 연합했다. 1565년에 멩 드 사의 조카 이스타시우 드 사가 구아나바라 지역을 수복하고, 히우 지 자네이루라는 도시를 세운다.
3. 이베리아 연합 시기 (1580년 ~ 1640년)
1580년부터 1640년까지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이베리아 연합을 형성하여 펠리페 2세, 펠리페 3세, 펠리페 4세의 통치를 받았다. 이 시기 남아메리카에서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른 국경이 사실상 무의미해졌고, 브라질은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했으며, 스페인은 여러 행정적 변화를 시도했다.
3. 1. 내륙 탐험과 영토 확장
1580년부터 1640년 사이 포르투갈 왕가와 스페인 왕가는 이베리아 연합을 형성했으며, 스페인의 왕인 펠리페 2세, 펠리페 3세, 펠리페 4세의 통치를 받았다. 이 시기 남아메리카에서는 사실상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형성된 국경이 무의미해졌으며, 브라질은 서쪽으로 확장되었다.엔트라다 또는 반데이란치라고 불리는 내륙 탐험대가 조직되었고, 이들은 세르탕(오지)이라 불렸던 서부 내륙 지방을 탐험하며 금이나 은 같은 값진 광물을 찾거나 원주민을 납치해 노예로 삼았다.
3. 2. 유럽 열강과의 갈등
1580년부터 1640년까지 포르투갈 왕가와 스페인 왕가는 이베리아 연합을 형성했으며, 펠리페 2세, 펠리페 3세, 펠리페 4세 등 스페인 왕의 통치를 받았다. 이 시기 남아메리카에서는 사실상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형성된 국경이 무의미해졌으며, 브라질은 서쪽으로 확장되었다.이베리아 연합 시기에는 포르투갈과는 우호적인 관계였지만 스페인과는 적대하던 유럽 열강들이 브라질을 침략하기도 했다. 그 중 네덜란드인들은 페르남부쿠와 파라이바 등 브라질 북동부 해변에서 25년 동안 물러나지 않았다.
3. 3. 행정 구역 변화
1580년부터 1640년 사이 이베리아 연합 시기, 브라질은 스페인 왕 (펠리페 2세, 펠리페 3세, 펠리페 4세)의 통치를 받았다. 이 시기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형성된 남아메리카의 국경은 사실상 무의미해졌고, 브라질은 서쪽으로 확장되었다.1621년, 브라질 총독부는 브라질 주(State of Brazil)와 마라냥 주(식민지)(State of Maranhão (colonial))로 분할되었다.[2] 브라질국은 페르남부쿠부터 산타 카타리나까지, 마라냥국은 세아라와 아마존 우림 지역에 걸쳐 있었다. 마라냥국의 수도는 상루이스, 브라질국의 수도는 사우바도르였다.
17세기에 브라질국은 파라에서 히우 그란지 두 노르치까지 영역을 확장했고, 18세기에는 히우그란지지상페드루(현재의 히우그란지두술)와 미나스제라이스 지역, 그리고 일부 아마존 우림 지역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마라냥국은 폼발 후작 시대에 소멸했다.
1572년부터 1578년, 그리고 1607년부터 1613년의 두 차례에 걸쳐 브라질 총독부는 남쪽의 리오데자네이루 총독부와 북쪽의 바이아 총독부로 분할되기도 했다.[2]
4. 네덜란드령 브라질 (1630년 ~ 1654년)
네덜란드의 브라질 북동부 침략은 네덜란드-포르투갈 전쟁의 일부였다. 1630년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가 페르남부쿠 카피타니아를 침략했다. 이베리아 연합 시기(1580년-1640년)에, 스페인과 전쟁 중이었으나 아직 독립을 인정받지 못한 네덜란드 공화국은 가장 부유한 카피타니아인 페르남부쿠를 침략함으로써 스페인에 일격을 가하고, 동시에 바이아에서의 실패를 만회하려 했다.
1629년 12월 26일, 카보베르데의 상비센트섬에서 배 66척과 사람 7280명으로 이루어진 함대가 페르남부쿠로 출발했으며, 파우 아마렐루 해변에 도착해서 1630년 2월에 페르남부쿠 카피타니아를 정복하고 네데를란츠브라질리어(네덜란드령 브라질) 또는 니우홀란트(뉴홀란트)라 불리는 식민지를 건설했다.[1] 도시 강 유역에서 포르투갈의 반격이 있었고, 포르투갈이 올린다를 공격해 헤시피로 통하는 지협을 차지했다.
4. 1. 네덜란드의 통치와 발전
1630년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가 페르남부쿠 카피타니아를 침략하면서 네덜란드-포르투갈 전쟁의 일부로 브라질 북동부 침략이 시작되었다. 1629년 12월 26일 카보베르데 상비센트섬에서 출발한 함대는 1630년 2월 페르남부쿠 카피타니아를 정복하고, 네데를란츠브라질리어(네덜란드령 브라질) 또는 니우홀란트(뉴홀란트)라 불리는 식민지를 건설했다.[1]1637년 요한 마우리츠 공작이 건축가와 기술자들을 데리고 니우홀란트에 도착하면서 마우리츠스타트(현 헤시피) 건설이 시작되었다.[1] 건축가 피터르 포스트가 신도시, 궁전, 천문대 등을 설계했다. 1644년 2월 28일에는 라틴 아메리카 최초의 다리가 헤시피(현 헤시피 구)와 마우리츠스타트를 연결했다.[1] 나사우시헌 정부를 거치면서 헤시피는 아메리카 최대의 국제도시이자, 아메리카 최대의 유대인 거주지가 되었다. 이곳에 신대륙 최초의 시나고그인 카할 추르 이스라엘과 두 번째 시나고그인 마겐 아브라함이 지어졌다.[1] 프레이뷔르흐 궁 내부에는 아메리카 최초의 천문대가 세워졌다.[1]
이후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가 요한 마우리츠 공작을 해임하면서, 페르남부쿠 주민들이 저항세력과 연합해 페르남부쿠 반란을 일으켰다.[1]
4. 2. 페르남부쿠 반란과 네덜란드의 패배
네덜란드의 브라질 북동부 침략은 네덜란드-포르투갈 전쟁의 일부였다. 1630년,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는 페르남부쿠 카피타니아를 침략했다. 스페인과 전쟁 중이던 네덜란드는 가장 부유한 카피타니아인 페르남부쿠를 침략하여 스페인에게 타격을 주려 했다.1629년 12월 26일, 배 66척과 7280명으로 이루어진 함대가 페르남부쿠로 출발하여 1630년 2월에 페르남부쿠 카피타니아를 정복하고 네데를란츠브라질리어(네덜란드령 브라질)를 건설했다.
1637년, 요한 마우리츠 공작이 마우리츠스타트(현 헤시피) 도시 건설을 시작했다. 1644년 2월 28일에는 라틴 아메리카 최초의 다리가 헤시피(현 헤시피 구)와 마우리츠스타트를 연결했다. 나사우시헌 정부를 거치면서 헤시피는 아메리카 최대의 국제도시이자, 최대의 유대인 거주지가 되었다.
이후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가 마우리츠 공작을 해임하면서, 페르남부쿠 주민들이 저항세력과 연합해 페르남부쿠 반란을 일으켰다.
1645년 5월 15일, 반란군 지도자 18명이 네덜란드 지배세력에 저항하기로 결의했고, 타보카스 산 전투에서 포르투갈계 반란자 1,200여 명이 네덜란드군 1,900여 명을 상대로 첫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여러 전투에서 반란군이 승리했다.
니우홀란트에 고립된 네덜란드인들은 식량 부족에 시달리다가 1646년 4월 24일에 테주쿠파푸 전투에서 여성 농민들에게 패배했다. 이는 여성이 참여한 최초의 브라질 영토 방어전이다.
포르투갈군이 증원되면서, 네덜란드인들은 1654년의 2차 구아라라페스 전투를 마지막으로 완전히 물러났다. 이때 브라질 육군이 창설되었다.
포르투갈인들은 유대인들이 3개월 안에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식민지를 떠나도록 했다. 대부분 암스테르담으로 떠났으며, 마지막 배는 뉴욕으로 떠나 경제적 성공을 거두었다.
네덜란드 공화국은 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때문에 브라질의 네덜란드인들을 돕지 못했으나, 전쟁이 끝나고 1654년 5월에 식민지 반환을 요구했다. 결국 1661년 8월 6일, 헤이그 조약을 통해 네덜란드 공화국은 브라질 북동부를 포르투갈에 공식적으로 양도했다.
4. 3. 네덜란드 유대인들의 이주
1637년 요한 마우리츠 공작이 니우홀란트에 부임하면서 헤시피는 아메리카 최대의 국제도시이자, 아메리카 최대의 유대인 거주지가 되었다.[1] 이곳에 신대륙 최초의 시나고그인 카할 추르 이스라엘과 두 번째 시나고그인 마겐 아브라함이 지어졌다.[1]1654년 네덜란드인들을 몰아낸 포르투갈인들은 유대인들에게 3개월 안에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식민지를 떠날 것을 요구했다.[1] 종교 재판 화형을 두려워한 유대인 대부분은 재산을 처분하고 16척의 배를 타고 떠났다.[1] 대부분은 암스테르담으로 갔지만, 마지막 배는 뉴욕으로 향했다.[1] 맨해튼에 도착한 이들은 훗날 큰 경제적 성공을 거두었다.[1]
4. 4. 헤이그 조약 (1661년)
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을 치르느라 브라질의 네덜란드인들을 돕지 못했던 네덜란드는 전쟁이 끝난 후 1654년 5월에 식민지 반환을 요구했다. 브라질 북동부를 다시 침략하겠다는 위협을 받은 포르투갈은 16년간 4백만 크루자두를 네덜란드 공화국에 지급하라는 요구에 굴복했으며, 결국 1661년 8월 6일에 헤이그 조약을 통해 네덜란드 공화국이 공식적으로 브라질 북동부를 포르투갈에 양도하게 된다.[1]5. 식민지 브라질의 경제와 사회
파우 브라질 고갈 이후, 사탕수수가 새로운 주요 산업으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엔제뇨(설탕 농장)와 파젠다(농장)에서 일할 노예 무역도 활발해졌다. 처음에는 인디오를 노예로 부렸으나, 수가 부족해지자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대량으로 수입했다. 17세기에는 상파울루의 반데이란테스(노예사냥 탐험대)가 내륙을 탐험하며 원주민들을 노예로 잡았다. 한편, 가혹한 노동을 견디지 못한 노예들은 킬롬보(도망 노예 공동체)를 형성하여 저항했다. 18세기에는 미나스제라이스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골드 러시가 일어났고, 브라질의 중심이 북동부에서 남서부로 이동하여 리우데자네이루가 수도가 되었다.
5. 1. 사탕수수 플랜테이션과 노예제
파우 브라질이 고갈된 이후, 새로운 산업으로 북동부에 마데이라 제도에서 사탕수수가 도입되었다. 엔제뇨(설탕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력으로 처음에는 인디오가 노예화되었다. 그러나 인디오의 수가 부족해지자 서부와 앙골라, 모잠비크에서 흑인 노예가 대량으로 유입되었다. 이들은 포르투갈 농장주의 파젠다(농장)에서 혹사당했다.[1]5. 2. 반데이란테스와 킬롬보
파우 브라질이 고갈된 후, 북동부에 마데이라 제도에서 사탕수수가 도입되어 엔제뇨(설탕 농장)에서 일할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인디오를 노예화했지만, 인디오의 수가 부족해지자 서부와 앙골라, 모잠비크에서 흑인 노예가 대량으로 유입되었다. 이들은 포르투갈 농장주의 파젠다(농장)에서 혹사당했다.17세기에는 상파울루의 반데이란테(노예사냥 탐험대)가 브라질 내륙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반데이란테는 각지에 원정하여 현재 도시의 기반이 되는 마을을 많이 세웠지만, 남부와 파라과이까지 원정하여 예수회가 보호하던 과라니 사람을 노예로 잡아갔다.
힘든 강제노동에 참다못한 흑인 노예 중에는 브라질 오지로 도망쳐 주거지를 형성한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주거지들을 '모캄보'나 '킬롬보'라고 불렀고, 이곳에는 아프리카 흑인들뿐만 아니라 인디오 원주민들도 있었다.
가장 규모가 컸던 킬롬보는 오늘날의 알라고아스주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었던 킬롬보 도스 팔마레스였다. 강가 즘비가 다스렸으며, 이후 그의 후계자인 즘비가 통치하였다. 네덜란드인들과 포르투갈인들이 여러 차례 팔마레스를 공략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1695년 상파울루 출신의 도밍고스 조르제 벨호가 킬롬보 공략에 성공하여 즘비를 죽이고 이곳을 정복했다.[1]
5. 3. 영토 분쟁과 가우초의 등장
1680년 포르투갈 식민지 정부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무시하고 라플라타 강 하구 좌안의 부에노스아이레스 건너편에 콜로니아 데 사크라멘토를 건설했다.[1] 이 때문에 이후 반다 오리엔탈 지역은 독립 이후까지 계속되는 브라질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권력 사이의 충돌의 장이 되었다.[1] 또한, 남부에서는 라플라타 지역의 스페인의 영향을 받아 가우초라는 목동 집단이 생겨났다.[1]5. 4. 골드 러시와 수도 이전
18세기 미나스제라이스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골드 러시가 일어났고, 브라질의 중심이 북동부에서 남서부로 이동하였다. 1763년 리우데자네이루가 식민지의 수도가 되었다.참조
[1]
웹사이트
Brasil Escola - Governo Geral
http://www.brasilesc[...]
[2]
웹사이트
Arquivo Público do Estado do Espírito Santo - Relação de Tabelas do Brasil Colonial
https://web.archive.[...]
2014-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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