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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와디스와프 오도니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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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츠는 1190년경에 태어나 1239년에 사망한 폴란드의 공작이었다. 칼리시 공작을 거쳐, 삼촌인 브와디스와프 3세와 대립하며 대폴란드 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다투었다. 그는 교회와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세력을 강화하려 했으며, 1227년 가선바 회의에 참석했으나 레셰크 1세 암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았다. 대폴란드 통치를 위한 투쟁에서 여러 차례 패배하며 영토를 잃었고, 헨리크 2세와의 갈등 끝에 사망하여 포즈난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야드비가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그의 아들 프셰미슬 1세는 대폴란드의 공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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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와디스와프 오도니츠
기본 정보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츠의 인장, 1231년
1231년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츠의 인장
가문피아스트 가문
별칭침 뱉는 자 (the Spitter)
생애
출생1190년경
사망1239년 6월 5일
매장지포즈난 성 베드로-바울 대성당
가족 관계
아버지오돈
어머니비아체슬라바 야로슬라브나 할리츠카
배우자야드비가
자녀프셰미수1세
볼레스와프
살로메아
지에모미수
에우페미아
작위
비엘코폴스카 공작1229년 - 1234년

2. 초기 생애와 칼리시 공작 시절 (1190년경 - 1217년)

아버지 오돈이 일찍 사망하면서 어린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츠는 숙부이자 후견인인 브와디스와프 3세의 보호 아래 놓였다. 하지만 성인이 된 후, 자신의 세습 영지인 칼리시 공국의 소유권을 두고 숙부와 정치적 갈등을 겪게 되었다. 1206년 오도니츠는 그니에즈노 대주교 헨리크 키에틀리치를 비롯한 일부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숙부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실패하고 망명길에 올랐다. 그러나 1207년, 실롱스크 공작 헨리크 1세의 도움을 받아 칼리시 공작위를 확보하였고, 1217년까지 이 지역을 통치하며 교회와의 협력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해 나갔다.

2. 1. 출생과 유년 시절

칼리시 공작이었던 아버지 오돈은 1194년 4월 20일에 사망했다. 이때 브와디스와프는 4세였으며, 형제들과 함께 아버지의 삼촌이자 이복 형제인 브와디스와프 3세 꼬마발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브와디스와프 3세는 남부 대폴란드의 섭정 역할을 맡았는데, 이 지역은 1182년 브와디스와프의 할아버지 미에슈코 3세 구왕이 오돈을 위해 만든 공국이었다. 한편, 칼리시 공국 자체는 미에슈코 3세 구왕이 직접 자신의 영토로 합병하였다.

2. 2. 브와디스와프 3세와의 첫 번째 갈등 (1206-1208)

1202년 미에슈코 3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브와디스와프 3세가 대폴란드 영토를 상속받았다. 이후 브와디스와프 3세는 포메라니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칼리시 공국을 실롱스크 공작인 헨리크 1세에게 넘겨주고 그 대가로 루부시 지역을 얻었다.

1206년,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츠는 성인이 되어 자신의 영지에 대한 통치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특히 숙부 브와디스와프 3세가 자신의 정당한 유산이라고 생각했던 칼리시 공국을 헨리크 1세에게 넘겨준 것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숙부와 원만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오도니츠는 브와디스와프 3세를 실각시키기 위해 공개적으로 전쟁을 선포하기로 결정했다.

오도니츠의 이러한 움직임은 대폴란드 귀족 일부와 그니에즈노 대주교 헨리크 키에틀리치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키에틀리치 대주교는 교회의 독립성을 확보하고 더 많은 이익을 얻기를 원했으며, 이를 위해 브와디스와프 3세를 파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도니츠의 반란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났고, 그는 실롱스크의 헨리크 1세 궁정으로 망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도니츠는 1207년에 칼리시 공국을 되찾아 1217년까지 통치하게 된다.

한편, 헨리크 1세는 오도니츠를 군사적으로 지원하는 대신 외교적 해결을 모색하며 두 공작 사이의 중재를 시도했다. 1208년, 그워구프에서 브로츠와프 공작(헨리크 1세), 루부시 주교, 포즈난 주교 등이 모여 회의를 열었으나, 갈등 해결은 쉽지 않았다. 회의는 부분적인 성공에 그쳤는데, 브와디스와프 3세는 키에틀리치 대주교와 합의하여 파문이 철회되는 대가로 교회의 재산을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그니에즈노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츠는 이 회의를 통해 공식적으로는 아무런 이득을 얻지 못했다.

2. 3. 칼리시 공작 즉위 (1207-1217)

1206년,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츠는 성년이 되어 자신의 영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숙부이자 후견인인 폴란드 대공 브와디스와프 3세가 오도니츠의 세습 영지인 칼리시 공국을 실롱스크의 헨리크 1세에게 넘기고 루부시를 얻으려 한 것에 강하게 반발했다. 이는 오도니츠가 자신의 정당한 유산으로 여겼던 칼리시 공국의 할양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숙부와 원만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오도니츠는 브와디스와프 3세에게 공개적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이 시도는 대폴란드 일부 귀족과, 교회의 독립과 이익 확대를 원했던 그니에즈노 대주교 헨리크 키에틀리치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키에틀리치 대주교는 브와디스와프 3세를 파문하기까지 했으나, 반란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오도니츠와 키에틀리치 대주교는 국외로 추방되었다. 오도니츠는 브로츠와프의 헨리크 1세 궁정으로 피신했다. 헨리크 1세는 브와디스와프 3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도니츠를 전적으로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1207년, 헨리크 1세는 오도니츠에게 칼리시 공국을 넘겨주었다. 다만, 이는 오도니츠가 나중에 남부 대폴란드 지역을 되찾을 경우 칼리시를 다시 실롱스크에 반환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오도니츠는 이로써 칼리시 공작이 되었고, 1217년까지 이 지위를 유지했다.

1210년, 오도니츠는 보지코바에서 열린 회의에 헨리크 1세, 마조비아 공작 콘라트 1세와 함께 참석하여, 1180년 웽치차에서 폴란드 교회에 부여되었던 특권들(세속 법정 소환 면제 등)을 재확인하는 데 참여했다.

2. 4. 교회와의 긴밀한 협력 (1210-1217)

1208년 그워구프(Głogów) 회의에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츠는 이후 교회와의 관계 강화에 힘썼다. 그는 1207년에 세습 영지인 칼리시 공국을 되찾아 1217년까지 통치하고 있었는데, 이 시기 교회와의 협력은 그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210년 7월, 보르지코바 시노드가 열렸을 때,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츠는 백공 레셰크, 마조비아의 콘라트 1세 등과 함께 숙부 브와디스와프 3세 스핀들생크스에 대항하는 연합을 형성했다. 이 회의에서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교황 칙서 관련 문제 해결을 논의했으며, 1180년 웽치차에서 폴란드 교회에 부여되었던 특권, 특히 세속 법정으로부터의 면제권이 재확인되었다.

오도니츠의 적극적인 친(親)교회 정책은 구체적인 결실로 이어졌다. 1211년 5월 13일,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츠를 교황의 보호 아래 둔다는 내용의 칙서를 발표했다. 또한 오도니츠는 수도회, 특히 시토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1210년 7월 29일에는 프셰멘트 지역의 토지를 시토회에 기증했으며, 1213년 10월 20일에는 프로스나 강변의 오워보크에 자신이 재정을 지원하여 새로운 시토회 수도원을 설립했다.

1215년, 오도니츠는 볼보르츠에서 열린 공작들과 주교들의 회의에 참석하여 백공 레셰크, 마조비아의 콘라트 1세, 오폴레의 카지미르 1세 등 다른 피아스트 가문 군주들과 함께 교회의 경제적, 법적 특권을 더욱 확대하는 데 동의하며 교회와의 긴밀한 관계를 이어갔다.

3. 대폴란드 통치를 위한 투쟁 (1217-1239)

1216년,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츠는 숙부 브와디스와프 3세 스핀들생크로부터 남부 대폴란드 영토의 통치권을 넘겨받았다. 그러나 이는 오브라 강 인근 영토에 대한 소유권 문제와 헨리크 1세 수염공과의 1206년 조약에 따른 칼리시 공국 반환 문제 등 새로운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또한, 과거 우호적이었던 그니에즈노 대주교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1217년, 단쿠프에서 열린 피아스트 공작들의 회의에서 브와디스와프 3세와 백색 레셰크가 상호 상속 협약을 맺으면서, 오도니츠가 평화적으로 숙부의 영지를 계승할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졌다. 결국 1218년 오도니츠는 숙부에게 밀려 공국에서 쫓겨났고, 아내의 오빠이자 그단스크 공작인 시비엥토페우크 2세에게 의탁했다.

시비엥토페우크 2세의 도움을 받아 오도니츠는 비엘코폴스카 탈환을 위한 투쟁을 시작했으며, 1229년에는 마침내 비엘코폴스카 전역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1227년 곤사바에서 열린 제후 회의 중 레셰크 1세 (백공)가 암살되고 헨리크 1세가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오도니츠가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기도 했다.

1231년, 오도니츠는 비엘코폴스카 공작으로 브와디스와프 3세를 복위시키려던 헨리크 1세의 군대를 물리쳤다. 그러나 1233년, 포즈난 주교에게 특권을 부여하려던 약속이 귀족들의 반발을 사 반란이 일어났다. 헨리크 1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비엘코폴스카의 일부를 점령했으며, 오도니츠는 1239년 사망할 때까지 이 영토를 되찾지 못했다. 오도니츠 사후, 비시체와 나크워 등 남은 영토 일부는 헨리크 1세의 아들인 헨리크 2세 경건공에게 정복되었다.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츠는 1239년 사망했으며, 포즈난의 성 베드로-파베우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3. 1. 브와디스와프 3세와의 두 번째 갈등과 망명 (1217-1223)

1217년, 단코프 조약(곧 헨리크 1세 수염공이 참여했다)과 그니에즈노 대주교 헨리크 키에트리츠의 죽음은 브와디스와프 3세 스핀들생크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었다. 그는 다른 피아스트 군주들의 호의적인 중립 속에서 조카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츠를 공격할 수 있었다. 오도니츠는 자신이나 영토를 방어할 힘이 없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헝가리로 망명해야 했다.

오도니츠가 폴란드를 떠나 망명 생활을 시작한 초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일각에서는 그가 왕자 신분으로 헝가리의 언드라시 2세가 이끈 제5차 십자군팔레스타인 원정에 참여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 후 그는 아마도 보헤미아독일 지역으로 가서 현지 통치자들의 도움을 구하려 했을 것으로 보인다.

1218년, 오도니츠는 아내 헤드비가의 오빠이자 그단스크 공작인 시비엥토페우크 2세에게 피신했다. 시비엥토페우크 2세의 도움을 받아 오도니츠는 비엘코폴스카를 되찾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3. 2. 포메라니아 도착과 우이시체, 나크워 점령 (1218-1227)

1218년,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츠는 포메라니아의 스비엥토펠크 2세 궁정에 도착했다.[2] 당시 스비엥토펠크 2세는 레셰크 백작에 대한 복속 관계를 청산하고 독자적인 세력 구축을 모색하고 있었으며, 오도니츠에게 그의 정당한 유산을 되찾도록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

포메라니아 공작의 도움을 받은 오도니츠는 1223년 북동부의 중요 거점인 우이시체를 성공적으로 점령했다. 이후 1225년에는 숙부 브와디스와프 3세의 반격을 물리치고 나크워 지역까지 확보하며 세력을 넓혔다.

1227년, 곤사바에서 열린 폴란드 제후 회의 도중 레셰크 1세 (백공)가 암살되고 헨리크 1세 (수염공)가 심각한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오도니츠가 이 사건의 배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3. 3. 브와디스와프 3세와의 전쟁 재개와 승리 (1227)

1227년, 숙부인 브와디스와프 3세 스핀들생크는 마침내 조카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츠를 직접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보이보드 도브로고스트가 지휘하는 군대를 파견하여 우이시체를 포위하게 했다. 그러나 도브로고스트는 강력하게 요새화된 도시를 점령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츠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결국 7월 15일, 도브로고스트의 군대는 완전히 패배했고 도브로고스트 자신도 전사했다. 이 결정적인 승리를 통해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츠는 대폴란드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3. 4. 곤사바 회의와 레셰크 1세 암살 사건 (1227)

숙부 브와디스와프 3세 스핀들생크는 조카 오도니츠와의 계속되는 분쟁으로 영토를 모두 잃을 것을 우려하여 평화적인 해결책을 모색했다. 이를 위해 1227년 11월, 쿠야비아 지방의 가선바에서 피아스트 공작, 주교, 귀족들이 참여하는 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는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츠, 레셰크 백공, 헨리크 1세 브로다티, 마조비아의 콘라트 1세 등이 참석했다. 하지만 정작 회의를 주선한 브와디스와프 3세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불참했는데, 아마도 포즈난 주교 파울이 그의 입장을 대변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회의에서는 두 브와디스와프 간의 문제 외에도, 대폴란드 지역의 혼란을 틈타 브와디스와프 3세의 영지였던 나크워를 점령하고 스스로 공작을 칭한 포메라니아의 시비에토페우크 2세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논의될 예정이었다.

회의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마무리되었다. 11월 24일 아침, 잠시 회의가 중단된 사이 참석자들이 포메라니아인들의 습격을 받았다. 이 공격으로 레셰크 백공이 목숨을 잃었고, 헨리크 1세 브로다티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여러 기록과 역사학 연구에서는 이 암살의 배후로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츠를 지목하고 있으나[3], 일부 역사학자들은 시비엥토페우크 2세 공작 역시 사건에 연루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또 다른 학자들은 오도니츠가 이 공격과 무관하다고 보기도 한다.

3. 5. 브와디스와프 3세 축출과 사망 (1228-1231)

1228년 초, 삼촌 브와디스와프 3세슐레지엔 군대의 도움을 받아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츠를 물리치고 포로로 잡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브와디스와프 3세는 이 성공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그해 말,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츠는 삼촌이 소폴란드에 있는 틈을 타 우치로 탈출하여 마조비아 공작콘라트 1세와 손을 잡았다.

1229년,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츠는 콘라트 1세와 함께 브와디스와프 3세에 대항하는 공동 행동에 나섰다. 오도니츠는 삼촌의 영토를 성공적으로 장악했지만, 콘라트 1세의 군대는 칼리시 포위에 실패하며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브와디스와프 3세는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고 실레시아라치부시로 도망쳤다.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츠는 비록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여전히 위험은 남아 있었다. 1231년 봄, 헨리크 1세는 브와디스와프 3세를 복위시키기 위해 대폴란드 원정을 감행했으나, 그의 실레시아 군대는 그니에즈노 성벽 앞에서 패배했다.

1231년 11월 3일, 브와디스와프 3세는 예상치 못하게 사망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가 강간하려던 독일 소녀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츠의 상황을 크게 바꾸지는 못했는데, 그의 삼촌이 죽기 전에 모든 상속 권리를 헨리크 1세에게 넘겼기 때문이다.

3. 6. 헨리크 1세와의 갈등과 대폴란드 분할 (1232-1238)

실롱스크 공작 헨리크 1세 (수염공)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츠는 교회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정책을 펼쳤다. 1232년, 그는 포즈난 주교에게 면제 특권을 부여하여, 주교 소유의 모든 백성이 공작에게 충성을 바치는 의무를 면제해주었다. 또한, 주교 파울에게는 자체적으로 주화를 주조할 수 있는 권한도 허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 중심 정책은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1233년, 귀족들은 오도니츠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대폴란드 공국을 헨리크 1세에게 넘기려 했다. 하지만 헨리크 1세가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덕분에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다. 헨리크 1세의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 오도니츠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여, 그는 헨리크 1세로부터 브와디스와프 3세의 상속지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한다는 공식적인 약속을 받아냈다.

평화가 확립되자 오도니츠와 헨리크 1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경건공 헨리 2세는 1233년부터 1234년까지 마조비아의 콘라트 1세와 함께 튜튼 기사단이 프로이센을 상대로 조직한 원정에 공동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1234년, 최근에 맺어진 평화 조약은 갑자기 깨졌고, 헨리크 1세와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츠 사이의 적대 행위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헨리크 1세가 잘 준비하여 큰 어려움 없이 대폴란드 남부 지역을 점령했다. 결국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츠는 포즈난의 파베우 주교와 그니에즈노의 그니에즈노 대주교 풀코의 중재를 받아들여 평화 회담에 응해야 했다.

1234년 9월 22일에 발표된 협정 조건은 오도니츠에게 매우 불리했다. 그는 바르타 강 남쪽과 서쪽에 위치한 영토를 포기해야 했다.

할양 영토위치 (기준)
칼리시바르타 강 남쪽/서쪽
산토크바르타 강 남쪽/서쪽
미엔지제치바르타 강 남쪽/서쪽
시렘바르타 강 남쪽/서쪽



중재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오도니츠는 1232년에 포즈난 교회에 부여했던 면제 특권을 그니에즈노 대주교 풀코와 그니에즈노 주교구에도 확대 적용했다. 이 불리한 협정은 1235년 6월 26일에 비준되었지만, 양측 모두 새로운 전쟁 발발이 시간 문제임을 인지하고 있는 듯했다.

1233년의 귀족 반란 이후, 헨리크 1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오도니츠가 사망한 1239년까지 비엘코폴스카의 일부를 차지했다. 헨리크 1세 사후에는 그의 아들 경건공 헨리 2세가 비시체와 나크워를 추가로 정복했다.

3. 7. 헨리크 2세와의 갈등과 죽음 (1238-1239)

헨리크 1세 수염공이 1238년 3월 19일에 사망했지만, 실레지아 공작들과의 갈등은 끝나지 않았다. 헨리 1세의 아들이자 계승자인 헨리 2세 경건공이 대폴란드에 대한 권리를 계속 주장했기 때문이다. 1239년에 새로운 전쟁이 발발했고,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츠는 다시 패배했다. 이 패배로 오도니츠는 우이시체와 나크워 나트 노테치아를 제외한 나머지 대폴란드 영토를 잃었다.[4]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츠는 1239년 6월 5일에 사망했으며, 포즈난 대성 베드로 및 바오로 대성당에 묻혔다.

4. 결혼과 자녀

1218년에서 1220년 사이에 브와디스와프는 야드비가(1249년 12월 29일 사망)와 결혼했다. 야드비가의 출신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과 자료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린다. 일부 자료는 그녀의 부모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그녀가 포메라니아 또는 모라비아 출신일 것으로 추정한다. 구체적으로는 포메라니아의 메슈틴 1세 공작의 딸[5][6](이 경우 시비엥토펠크 2세의 여동생)이거나, 프르셰미슬 왕조의 일원일 가능성이 제기된다.[7][8]

브와디스와프와 야드비가 사이에는 다음의 자녀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름생몰년배우자 및 기타 정보
야드비가1218/20년 출생 – 1234년 1월 8일 이후 사망약 1233년 쿠야비아의 카지미르 1세 공작과 결혼.[9]
대폴란드의 프셰미슬 1세1220년 6월 5일/1221년 6월 4일 출생 – 1257년 6월 4일 사망
볼레스와프 경건공1224/27년 출생 – 1279년 4월 14일 사망
대폴란드의 살로메아약 1225년 출생 – 1267년 4월 사망?1249년 글로고프의 콘라트 1세 공작과 결혼.
지에모미슬1228/32년 출생 – 1235/36년 사망[10]
대폴란드의 에우페미아약 1230년 출생 – 1281년 2월 15일 이후 사망1251년 오폴레의 브와디스와프와 결혼.


참조

[1] 간행물 Genealogia Piastów wielkopolskich. Potomstwo Władysława Odonica Kronika Miasta Poznania 1995
[2] 문서
[3] 서적 Historia Kaszubów w dziejach Pomorza (The history of Kashubians within history of Pomerania) Gdańsk 2006
[4] 문서
[5] 간행물 Genealogia Piastów wielkopolskich. Potomstwo Władysława Odonica Warsaw 1959
[6] 웹사이트 Complete Genealogy of the House of Piast http://genealogy.euw[...] Genealogy.EU 2012-08
[7] 간행물 Imię Przemysł w wielkopolskiej linii Piastów. Niektóre aspekty stosunków książąt wielkopolskich z Czechami do połowy XIII wieku Piastowie-Leksykon Biograficzny 1999
[8] 웹사이트 Władysław Odonic Plwacz http://www.poczet.co[...]
[9] 간행물 W sprawie pochodzenia Jadwigi, pierwszej żony księcia kujawskiego Kazimierza Konradowica Europa Środkowa i Wschodnia w polityce Piastów 1997
[10] 간행물 Genealogia Piastów wielkopolskich. Potomstwo Władysława Odon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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