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손서
1. 개요
사손서는 후한 시대의 인물로, 동탁 제거 계획에 참여하여 여포가 동탁을 죽이는 데 기여했다. 왕윤 사후 이각과 곽사의 난 때 죽임을 당했으나, 헌제는 그의 아들 사손맹을 담진정후에 봉했다. 사손서의 삼촌 사손분은 재산이 많았지만 구두쇠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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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년 출생 -
갈레노스
갈레노스는 로마 제국의 의사이자 철학자, 문헌학자로, 그의 방대한 저술은 서구 및 이슬람 의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해부학적 관찰과 동물 실험을 통해 히포크라테스의 4체액설을 발전시키고 인체의 기능과 질병에 대한 이론을 구축하여 의학사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
129년 출생 -
진기 (후한)
진기는 후한 말 영천군 허현 출신으로 아버지 진식의 영향으로 청류파로서 명성을 얻어 동탁 정권 하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해 평원국 상, 태복, 상서령, 대홍려 등을 역임한 인물이며, 그의 아들 진군은 조위에서 품관제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
후한의 상서령 -
왕윤
왕윤은 후한 말 관료로서 동탁 암살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황건적의 난 진압에도 공을 세웠으나, 동탁 제거 후 잔당의 반란으로 헌제를 지키다 가족과 함께 죽임을 당한, 뛰어난 능력과 충절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다. -
후한의 상서령 -
화흠
후한 말 혼란기에 여러 세력을 거쳐 조조에게 귀순하여 위나라 건국에 공헌, 삼공의 지위에 오른 화흠은 청빈한 삶을 살았다는 평가와 폭거를 저질렀다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
195년 사망 -
번조
번조는 후한 말 동탁의 부하로 시작하여 이각, 곽사와 함께 조정을 장악했으나, 이각의 시기로 암살당한 무장이며, 삼국지연의에도 등장한다. -
195년 사망 -
이몽 (후한)
후한 말 동탁을 섬긴 무장 이몽은 반동탁 연합군 토벌에 가담하고 동탁 사후 이각, 곽사와 함께 장안을 공격하여 왕윤 정권을 무너뜨렸으나, 195년 무군중랑장 재직 중 이각에게 살해당했다.
2. 생애
사손서는 학문에 뛰어나기로 유명했다. 동탁의 횡포가 계속되자, 192년 사도(司徒) 왕윤은 동탁을 제거할 뜻을 품었는데, 당시 상서복야(尙書僕射)였던 사손서도 왕윤의 계획에 가담하였다.
여포가 왕윤에게 설득되어 가담한 후 본격적으로 동탁 주살 계획이 꾸며졌다. 그해 4월 병에서 쾌유된 헌제를 축하하기 위한 잔치가 미앙전(未央殿)에서 열렸을 때, 사손서는 왕윤의 지시를 받아 자신이 동탁을 주살하라는 내용의 조서를 꾸며 썼다. 왕윤은 이 거짓 조서를 여포에게 보여주었으며, 이를 그대로 믿은 여포는 궁궐로 들어오려던 동탁을 북액문(北掖門)에서 죽였다. 이후 대사농으로 임명되었다.
왕윤이 동탁을 죽인 것만 생각하고 그 잔당들에게 야박하게 대하자, 이각 등은 군사를 이끌고 장안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왕윤을 죽였다. 그러나 사손서는 예전에 공로를 모두 왕윤에게 돌렸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은 이 같은 사손서의 행동이 지혜롭다고 평가하였다.
195년 이각과 곽사의 사이가 벌어져 장안에서 싸움을 계속하자, 헌제는 몇몇 대신들과 함께 장안에서 탈출하였다. 어가가 섬(陝)에 이르렀을 때 이각군과 곽사군이 쫓아와 위급하게 되자 헌제는 급히 구한 배를 타고 황하를 건넜는데, 이때 배에 탄 사람은 수십 명에 불과했다. 사손서는 미처 배를 타지 못했기에 이각에게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다.
조조의 도움으로 허(許)에 자리잡은 헌제는 사손서의 공을 기려 아들 사손맹을 담진정후(澹津亭侯)에 봉했다.
2.1. 동탁 주살 가담
사손서는 학문에 뛰어나기로 유명했다. 동탁의 횡포가 계속되자, 192년 사도(司徒) 왕윤은 동탁을 제거할 뜻을 품었는데, 당시 상서복야(尙書僕射)였던 사손서도 왕윤의 계획에 가담하였다.
여포가 왕윤에게 설득되어 가담한 후 본격적으로 동탁 주살 계획이 꾸며졌다. 그해 4월 병에서 쾌유된 헌제를 축하하기 위한 잔치가 미앙전(未央殿)에서 열렸을 때, 사손서는 왕윤의 지시를 받아 자신이 동탁을 주살하라는 내용의 조서를 꾸며 썼다. 왕윤은 이 거짓 조서를 여포에게 보여주었으며, 이를 그대로 믿은 여포는 궁궐로 들어오려던 동탁을 북액문(北掖門)에서 죽였다. 이후 대사농으로 임명되었다.
2.2. 이각·곽사의 난
사손서는 학문에 뛰어나기로 유명했다. 동탁의 횡포가 계속되자, 192년 사도(司徒) 왕윤은 동탁을 제거할 뜻을 품었는데, 당시 상서복야(尙書僕射)였던 사손서도 왕윤의 계획에 가담하였다.
이후 여포가 왕윤에게 설득되어 가담한 후 본격적으로 동탁 주살 계획이 꾸며졌다. 그해 4월 병에서 쾌유된 헌제를 축하하기 위한 잔치가 미앙전(未央殿)에서 열렸을 때, 사손서는 왕윤의 지시를 받아 자신이 동탁을 주살하라는 내용의 조서를 꾸며 썼다. 왕윤은 이 거짓 조서를 여포에게 보여주었으며, 이를 그대로 믿은 여포는 궁궐로 들어오려던 동탁을 북액문(北掖門)에서 죽였다. 이후 대사농으로 임명되었다.
왕윤이 동탁을 죽인 것만 생각하고 그 잔당들에게 야박하게 대하자, 이각 등은 군사를 이끌고 장안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왕윤을 죽였다. 그러나 사손서는 예전에 공로를 모두 왕윤에게 돌렸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은 이 같은 사손서의 행동이 지혜롭다고 평가하였다.
195년 이각과 곽사의 사이가 벌어져 장안에서 싸움을 계속하자, 헌제는 몇몇 대신들과 함께 장안에서 탈출하였다. 어가가 섬(陝)에 이르렀을 때 이각군과 곽사군이 쫓아와 위급하게 되자 헌제는 급히 구한 배를 타고 황하를 건넜는데, 이때 배에 탄 사람은 수십 명에 불과했다. 사손서는 미처 배를 타지 못했기에 이각에게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다.
조조의 도움으로 허(許)에 자리잡은 헌제는 사손서의 공을 기려 아들 사손맹을 담진정후(澹津亭侯)에 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