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로쿠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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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산로쿠 전쟁은 아베 신타로 사후 자유민주당 청화회 파벌의 후계자 경쟁을 일컫는 말이다. 아베파 사천왕으로 불린 미쓰즈카 히로시, 가토 고이치, 시오카와 마사주로, 모리 요시로가 후계 자리를 놓고 경쟁했으며, 미쓰즈카와 가토의 대립을 산로쿠 전쟁, 미쓰즈카와 모리의 대립을 MM 전쟁으로 불렀다. 다케시타 노보루의 개입과 모리 요시로의 지지 속에 미쓰즈카 히로시가 파벌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가토 고이치는 이후 오자와 이치로와 함께 신생당을 창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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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로쿠 전쟁 | |
|---|---|
| 개요 | |
| 명칭 | 산로쿠 전쟁 (三六戦争) |
| 다른 명칭 | 후쿠오카 대공습 (福岡大空襲) |
| 배경 | |
| 시기 | 태평양 전쟁 말기 |
| 원인 | 일본 본토 공습의 일환 |
| 전투 | |
| 주요 전투 지역 |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주로 모지구, 고쿠라구, 와카마쓰구) |
| 주요 공격 목표 | 군수 공장, 항만 시설, 주택 지역 |
| 주요 공격 세력 | 미국 육군 항공대 |
| 사용된 폭탄 종류 | 소이탄 |
| 피해 규모 | 심각한 인명 피해 도시 기능 마비 주택 및 기반 시설 파괴 |
| 경과 | |
| 주요 사건 | 1945년 6월 ~ 8월 사이 집중적인 공습 특히 1945년 8월 8일 대규모 공습 (후쿠오카 대공습) |
| 종전 | 일본의 항복 후 미군의 점령으로 종결 |
| 영향 | |
| 피해 상황 | 사망자 수천 명 발생 부상자 다수 발생 이재민 발생 도시 기능 상실 |
| 사회적 영향 | 전쟁 후 혼란과 빈곤 심화 전후 복구 노력 필요 |
| 역사적 의의 | 태평양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사례 전쟁의 비극성을 상징하는 사건 |
| 기타 | |
| 관련 인물 | 해당 정보 없음 |
| 관련 장소 | 기타큐슈시 평화자료관 기타큐슈시 각 지역의 공습 희생자 위령비 |
| 관련 자료 | 전쟁 관련 기록물, 사진 자료, 생존자 증언 등 |
2. 아베의 후계 분쟁
아베 신타로가 1991년 5월 사망하면서 그가 이끌던 청화회(세이와 정책연구회) 내에서 후계자 분쟁이 발생했다. 아베파 사천왕으로 불리던 미쓰즈카 히로시, 가토 고이치, 시오카와 마사주로, 모리 요시로가 경쟁했다.[1]
이들 중 미쓰즈카는 리크루트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고 다케시타 노보루의 후원을 받아 기반을 다진 반면, 가토와 모리는 리크루트 사건에 연루되어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었다. 이로 인해 미쓰즈카와 가토 간의 '산로쿠 전쟁', 미쓰즈카와 모리 간의 'MM 전쟁'이라 불리는 대립이 발생했다. 시오카와는 후쿠다 다케오와 가까워 경쟁에서 거리를 두었다.[1]
2. 1. 아베파 사천왕
아베 신타로가 이끌던 청화회에는 주요 간부 네 명이 있었는데, 이들을 아베파 사천왕이라 불렀다. 시오카와 마사주로, 모리 요시로와 함께 가토 고이치, 미쓰즈카 히로시가 사천왕의 일원이었다. 1991년 5월 아베가 사망하면서 파벌 회장 자리가 비게 되었고, 후계자 경쟁이 본격화되었다.[1]사천왕 중 미쓰즈카가 가장 후배였지만, 가토와 모리가 리크루트 사건에 연루되자 다케시타 노보루의 후원을 받아 내각과 당의 요직을 역임하며 실력자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가토와 모리는 미쓰즈카를 경계했는데, 미쓰즈카와 가토의 대립을 '산로쿠 전쟁', 미쓰즈카와 모리의 대립을 'MM 전쟁'이라 불렀다. 사천왕 중 가장 연장자였던 시오카와는 후쿠다 다케오와 가까운 사이였기에 표면적으로는 세 사람의 주도권 경쟁과 거리를 두었다.[1]
아베 사후 청화회 사무총장이었던 미쓰즈카는 파벌 회장직에 대한 의욕을 보였다. 가토는 자민당 정조회장 자리에 관심을 보여 파벌 내부 경쟁에서 잠시 이탈했으며, 자신을 대신하여 미쓰즈카를 견제하기 위해 시오카와를 지원했다.
처음에는 미쓰즈카와 가토의 세력이 파벌을 양분하여 비슷한 세력을 형성했지만, 가토가 지지한 시오카와는 파벌 내에서의 인망이 부족하고 암 수술을 받은 직후라 건강 문제가 겹쳐 젊은 의원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결국 시오카와는 차기 파벌 회장직을 둘러싼 경쟁에서 스스로 이탈했고, 이로써 가토는 미쓰즈카보다 열세에 몰렸다. 이에 다케시타파 회장이던 가네마루 신이 청화회의 좌장이던 하세가와 다카시에게 직접 회장이 될 것을 권해 청화회 후계 회장 문제에 개입했다. 다케시타의 지원을 받던 미쓰즈카의 회장 취임을 막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하세가와는 가네마루에게 다른 파벌이 청화회 문제에 왜 개입하냐며 반박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청화회 대부분이 미쓰즈카 지지로 돌아섰다. 와세다대학 출신으로 다케시타 전 비서이자, 모리의 대학 후배인 모리도 미쓰즈카 지지를 표명하면서 미쓰즈카가 청화회 회장으로 결정됐다.[1]
모리는 "나는 가토 씨가 아베 씨의 후계가 되면 후쿠다 다케오 씨의 정신은 사라질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아베 씨의 후계를 누구로 하면 좋을지 결정할 때 시오카와 씨가 하지 않는다면 미쓰즈카 씨 외엔 없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2]
2. 2. 다케시타파의 개입
아베 신타로 사후 청화회(현 자민당 모리 파) 회장 자리를 두고 미쓰즈카 히로시와 가토 고이치가 대립하던 중, 다케시타 노보루 파벌(경세회)의 가네마루 신과 오자와 이치로는 가토를 지지하며 이 분쟁에 개입했다.[2] 이는 리크루트 사건에 연루되지 않고 다케시타의 후원을 받던 미쓰즈카가 요직을 차지하며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가네마루는 청화회 좌장 하세가와 다카시에게 회장직을 제안하며 미쓰즈카의 회장 취임을 막으려 했으나, 하세가와는 다른 파벌의 개입에 반발했다. 이 사건으로 청화회 내 여론은 오히려 미쓰즈카 지지로 기울었고, 모리 요시로마저 미쓰즈카 지지를 표명하면서 미쓰즈카가 청화회 회장으로 결정되었다.[1]
결과적으로 다케시타파의 가네마루와 오자와가 가토를 지지한 것이 청화회 후임 회장 문제를 종결시킨 셈이 되었다.[2] 이때 가토가 오자와의 지지를 받았던 인연은 훗날 가토 그룹이 오자와가 이끄는 신생당 창당에 합류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2. 3. 미쓰즈카의 회장 취임
아베 신타로가 사망한 후, 아베파 사천왕 중 한 명이었던 미쓰즈카 히로시는 청화회 회장직에 대한 의욕을 보였다. 가토 고이치는 자민당 정조회장 자리에 관심을 보여 파벌 경쟁에서 잠시 이탈했고, 자신을 대신하여 시오카와 마사주로를 지원하여 미쓰즈카를 견제하려 했다.[1]처음에는 미쓰즈카와 가토의 세력이 비슷했지만, 시오카와는 파벌 내 인망이 부족하고 건강 문제까지 겹쳐 젊은 의원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결국 시오카와는 경쟁에서 스스로 이탈했고, 가토는 미쓰즈카에 비해 열세에 놓였다. 이에 다케시타 노보루 파벌의 회장 가네마루 신이 청화회 문제에 개입하여 미쓰즈카의 회장 취임을 막으려 했지만, 청화회 대부분은 오히려 미쓰즈카 지지로 돌아섰다. 다케시타 노보루의 비서 출신이자 대학 후배인 모리 요시로도 미쓰즈카 지지를 표명하면서, 미쓰즈카가 청화회 회장으로 결정되었다.[1]
모리는 가토가 아베의 후계자가 되면 후쿠다 다케오의 정신이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미쓰즈카를 지지했다고 밝혔다. 또한 기타가와 마사야스가 모리에게 젊은 의원들이 가토를 반대하고 미쓰즈카와 모리의 연합을 원한다고 말한 것도 영향을 주었다고 회고했다.[2]
3. 미야자와 내각 발족을 전후하여
아베 신타로가 이끌던 자민당 내 파벌인 청화회는 주요 간부 네 명을 아베파 사천왕이라 불렀는데, 시오카와 마사주로, 모리 요시로, 미쓰즈카 히로시, 가토 무쓰키가 그들이었다. 1991년 5월 아베가 사망하면서 파벌 회장 자리를 두고 경쟁이 시작되었다.
미쓰즈카는 리크루트 사건에 연루되지 않아 다케시타 노보루의 지원을 받아 요직을 맡으며 세력을 키웠다. 반면 가토와 모리는 리크루트 사건으로 인해 정치적 입지가 좁아진 상태였다. 미쓰즈카와 가토의 대립은 산로쿠 전쟁, 미쓰즈카와 모리의 대립은 MM 전쟁이라 불렸다.
가토는 자민당 정조회장 자리에 관심을 가지며 파벌 경쟁에서 잠시 물러났고, 시오카와를 내세워 미쓰즈카를 견제하려 했다. 그러나 시오카와는 건강 문제와 파벌 내 인망 부족으로 경쟁에서 이탈했고, 가토는 열세에 놓였다. 가네마루 신이 하세가와 다카시에게 회장직을 권하며 청화회 문제에 개입했지만, 이는 오히려 청화회 의원 대부분이 미쓰즈카를 지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모리까지 미쓰즈카 지지를 표명하면서 미쓰즈카가 청화회 회장으로 결정되었다.
모리는 훗날 "가토 씨가 아베 씨의 후계가 되면 후쿠다 다케오 씨의 정신은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다케시타파의 가네마루와 오자와 이치로가 가토를 지지한 것이 청화회 후임 회장 문제를 매듭지은 셈이 되었다. 훗날 오자와가 자민당을 탈당해 신생당을 만들었을 때 가토 그룹이 합류한 것은 이때의 인연 때문으로 볼 수 있다.[1]
3. 1. 미쓰즈카파
1991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때 미쓰즈카 히로시도 출마했지만 와타나베 미치오에게도 밀려 3위에 그쳤다. 당초 다케시타 노보루파는 후보를 내지 않고 다케시타가 미쓰즈카를, 가네마루 신이 와타나베를 지지했지만 최종적으론 미야자와 기이치 지지로 돌아섰다. 총재 선거에서 승리한 미야자와는 미쓰즈카파에 대한 보복 인사를 계획하여 아무도 입각시키지 않고 당 3역에서도 축출하고자 했으나 후쿠다 다케오가 중재해서 네 명이 입각하고 모리 요시로가 정조회장에 취임하는 것으로 정리됐다. 하지만 미쓰즈카파에게 배분된 각료직은 자치대신, 방위청 장관, 과학기술청 장관, 나카무라 쇼자부로 환경청 장관으로 내각의 핵심 자리는 아니었기에 보복 인사의 성격은 짙게 남아있었다.[1]3. 2. 가토 그룹
가토는 분파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1991년 10월 총재 선거 직전 미쓰즈카파에서 제명됐다. 선거가 끝난 뒤 가토는 후키다 아키라, 고가 잇세이, 야마오카 겐지, 다나부 마사미 등과 함께 정진회를 결성했다. 가토는 미쓰즈카파에서 추가 이탈자를 기대했지만 미쓰즈카파가 내부 단속에 나서면서 추가 이탈자는 거의 없어 중참 의원을 합해 10명 안팎에 불과해 당내 최소 파벌에 머물렀다. 하지만 미야자와 내각에서 다나부가 농림수산대신으로 취임하여 미쓰즈카파에 비하면 좋은 대우를 받았다.[1]4. 그 후
아베 신타로 사후, 자유민주당 내 아베파 사천왕으로 불리던 미쓰즈카 히로시, 모리 요시로, 가토 고이치, 시오카와 마사주로 사이에 후계 다툼이 벌어졌다. 이 중 미쓰즈카와 가토의 대립은 '산로쿠 전쟁'으로 불렸다.[1]
가네마루 신과 오자와 이치로의 지원을 받은 가토는 훗날 오자와가 신생당을 창당했을 때 합류하는 기반을 다졌다.
미쓰즈카는 1996년 하시모토 류타로 내각에서 대장대신을 맡았으나, 야마이치 증권과 홋카이도척식은행 파산 등 금융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대장성 접대 부패 사건으로 사임했다. 이후 파벌 회장직은 모리에게 넘어갔다.
가토는 1993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후 자민당을 탈당하여 오자와가 이끄는 신생당에 합류했다. 이후 신진당, 자유당 등에서 오자와와 함께 활동했다. 1996년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오카야마현 제4구에서 하시모토와 경쟁했으나 패배하고 비례대표로 당선되었다.
2000년 6월 총선에 불출마하며 정계에서 은퇴한 가토는 2006년에 사망했고, 미쓰즈카는 2003년 총선 불출마 후 2004년에 사망했다.
모리는 2000년 청화회 출신 총리대신이 되었고, 이후 청화회에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후쿠다 야스오가 연이어 총리대신을 배출했다. 가토의 사위 가토 가쓰노부는 헤이세이 연구회 소속이면서도 아베 신조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주요 직책을 역임했다.
4. 1. 미쓰즈카와 모리
1996년 11월, 미쓰즈카 히로시는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 아래에서 대장대신(현재의 기획재정부 장관)에 취임했다.[1] 그러나 1997년 11월 야마이치 증권, 홋카이도척식은행의 파산 등 전례 없는 금융 위기에서 뚜렷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대장성 접대 부패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임해야 했다. 그 때문에 이듬해에는 파벌 회장 자리를 모리 요시로에게 양도하고 정계의 최전선에서 물러나 총리대신으로 가는 길이 막혔다.2000년 이후 청화회에서는 모리 요시로에 이어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후쿠다 야스오가 연이어 총리대신에 취임하며 청화회 출신 총리 시대를 열었다.
4. 2. 가토와 오자와
1993년 7월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직후 가토 고이치는 자유민주당을 탈당, 오자와 이치로가 창당한 신생당에 합류했다.[2] 같은 해 하타 쓰토무 내각에서 농림수산대신으로 취임했다. 연립 정권이 무너진 뒤에도 오자와와 함께 신진당, 자유당에서 활동했다.[2] 1996년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오카야마현 제4구에서 하시모토 류타로와 경쟁했으나, 하시모토가 지역구에서 당선되고 가토는 비례대표로 부활했다.[2]2000년 6월 총선에 불출마하며 정계를 은퇴한 가토는 2006년 2월 28일 사망했다.[2] 그의 사위 가토 가쓰노부는 헤이세이 연구회 소속이나 아베 신조의 측근으로 활동, 내각관방 부장관, 후생노동대신, 자민당 총무회장 등 요직을 역임했다.[2]
5. 평가 및 영향
산로쿠 전쟁은 아베 신타로 사후 그의 파벌인 청화회(현 아베파)의 후계 구도를 둘러싸고 벌어진 권력 투쟁으로, 일본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아베파 사천왕으로 불리던 미쓰즈카 히로시, 가토 무쓰키, 모리 요시로, 시오카와 마사주로 간의 대립은 자민당 내 파벌 정치의 역학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리크루트 사건으로 인해 가토와 모리가 주춤하는 사이, 다케시타 노보루의 지원을 받은 미쓰즈카가 세력을 확장했다. 미쓰즈카와 가토의 대립은 '산로쿠 전쟁'으로 불렸으며, 미쓰즈카와 모리의 대립은 'MM 전쟁'으로 불렸다.
가네마루 신과 오자와 이치로 등 다케시타파의 개입은 청화회 후계 문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가네마루와 오자와는 가토를 지지했지만, 이는 오히려 청화회 내에서 미쓰즈카에 대한 지지를 결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미쓰즈카가 청화회 회장으로 결정되었고, 이는 훗날 오자와가 신생당을 창당했을 때 가토 그룹이 합류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파벌 간 권력 투쟁은 자민당의 정책 결정 과정과 일본 정치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장기적으로는 아베 신조 정권의 등장과 우경화 정책 추진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참조
[1]
기타
[2]
서적
90年代の証言 森喜朗 自民党と政権交代 (90年代の証言)
[[朝日新聞社]]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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