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요시로
1. 개요
모리 요시로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937년 이시카와현에서 태어났다.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산케이 신문 기자로 일하다 정치 활동을 시작하여, 1969년 중의원 의원에 당선된 후 여러 요직을 거쳤다. 문부대신, 통상산업대신, 건설대신, 자유민주당 간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2000년에는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 총리 퇴임 후에는 2020 도쿄 올림픽·패럴림픽 조직위원회 회장을 맡았으나, 여성 혐오 발언으로 사임했다. 그는 여러 차례의 실언과 외교적 결례, 정치 자금 스캔들로 비판을 받았으며, 2016년에는 "미움받는 노인" 설문조사에서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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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모리 요시로 |
|---|---|
| 원어 이름 | 森 喜朗 |
| 로마자 표기 | Mori Yoshirō |
| 출생일 | 1937년 7월 14일 |
| 출생지 | 일본 이시카와현 노미시 |
| 정당 | 자유민주당 (세이와카이) |
| 배우자 | 마키 치에코 |
| 자녀 | 모리 유키 후지모토 요코 |
| 학력 | 와세다대학교 (BBA) |
| 웹사이트 | Yoshiro Mori WebSite |
| 직위 | 내각총리대신 |
|---|---|
| 재임 기간 | 2000년 4월 5일 ~ 2001년 4월 26일 |
| 국왕 | 아키히토 |
| 이전 총리 | 오부치 게이조 |
| 다음 총리 | 고이즈미 준이치로 |
| 자유민주당 총재 재임 기간 | 2000년 4월 5일 ~ 2001년 4월 24일 |
| 이전 총재 | 오부치 게이조 |
| 다음 총재 | 고이즈미 준이치로 |
| 건설대신 재임 기간 | 1995년 8월 8일 ~ 1996년 1월 11일 |
| 이전 건설대신 | 노사카 고켄 |
| 다음 건설대신 | 나카오 에이이치 |
| 통상산업대신 재임 기간 | 1992년 12월 12일 ~ 1993년 7월 20일 |
| 이전 통상산업대신 | 와타나베 고조 |
| 다음 통상산업대신 | 구마가이 히로시 |
| 문부대신 재임 기간 | 1983년 12월 27일 ~ 1984년 11월 1일 |
| 이전 문부대신 | 세토야마 미쓰오 |
| 다음 문부대신 | 마쓰나가 히카루 |
| 자유민주당 간사장 | 노나카 히로무 고가 마코토 |
| 내각관방부장관 (정무 담당) 재임 기간 | 1977년 11월 28일 ~ 1978년 12월 7일 |
| 의원 | 중의원 이시카와현 |
|---|---|
| 의원 재임 기간 | 1969년 12월 28일 ~ 2012년 11월 16일 |
| 이전 의원 | 사카타 에이이치 |
| 지역구 | 이시카와현 제1구 (중선거구) |
| 다음 의원 | 사사키 하지메 |
| 지역구 | 2구 |
| 도쿄 올림픽·패럴림픽 조직위원회 회장 재임 기간 | 2016년 8월 21일 ~ 2021년 2월 18일 |
| 이전 회장 | 카를로스 아르투르 누즈만 |
| 다음 회장 | 하시모토 세이코 |
| 국제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 | 토마스 바흐 |
| 조직위원회 의장 재임 기간 | 2014년 1월 24일 ~ 2021년 2월 18일 |
| 이전 의장 | 위원회 설립 |
| 다음 의장 | 하시모토 세이코 |
| 훈장 | 기리카 대수장 |
|---|---|
| 학위 | 상학사 (와세다 대학교, 1960년) |
| 조부 | 모리 키헤이 |
|---|---|
| 아버지 | 모리 시게키 |
| 조카 사위 | 오카다 나오키 |
| 일본 럭비 풋볼 협회 | 명예 회장 |
|---|---|
| 일본 톱 리그 연계 기구 | 명예 회장 |
| 일본 스포츠 협회 | 최고 고문 |
| 전국 경리 교육 협회 | 명예 회장 |
| 일본 물 포럼 | 회장 |
| 아시아 태평양 물 포럼 | 회장 |
| 럭비 월드컵 일본 유치 위원회 | 회장 |
| 럭비 월드컵 일본 유치 위원회 재임 기간 | 2004년 10월 18일 ~ 2019년 11월 2일 |
| 자유민주당 간사장 (1993년 7월~ 1995년 8월) | 고노 요헤이 |
|---|---|
| 자유민주당 간사장 (1998년 7월~ 2000년 4월 5일) | 오부치 게이조 |
|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재임 기간 | 1996년 ~ 1998년 7월 |
|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 하시모토 류타로 |
| 자유민주당 정무 조사 회장 재임 기간 | 1991년 ~ 1992년 |
| 자유민주당 정무 조사 회장 | 미야자와 키이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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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미시 -
노미네아가리역
노미네아가리역은 이시카와현 노미시에 있는 IR 이시카와 철도선의 역으로, 섬식 승강장 1면 2선의 지상역이며, 2015년에 데라이역에서 역명이 변경되었고, 2025년부터 쾌속 열차 정차역이 될 예정이다. -
모리 요시로 -
세이와 정책연구회
세이와 정책연구회는 1979년 후쿠다 다케오에 의해 창설되어 여러 총리대신을 배출하며 자민당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비자금 조성 의혹으로 인해 2024년 1월 파벌 해산을 결정했다. -
모리 요시로 -
제2차 모리 내각
제2차 모리 내각은 2000년 4월 5일부터 2001년 4월 26일까지 모리 요시로 총리에 의해 조직된 자민당, 공명당, 보수당의 연립 내각이며, 행정 개혁을 추진했으나 잦은 실언과 스캔들로 지지율이 하락하여 모리 총리가 사퇴하고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후임으로 선출되었다. -
총리 목록 -
한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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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목록 -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이탈리아의 사업가이자 정치인으로, 세 차례에 걸쳐 총리를 역임했으며, 미디어셋 설립, 포르차 이탈리아 창당, 친미 외교 정책, 탈세 및 성 스캔들 등 여러 법적 문제와 논란에 휘말렸다.
2. 주요 경력
다음은 모리 요시로의 주요 경력이다.
| 연도 | 내용 |
|---|---|
| 1937년 | 이시카와현 노미군 네아가리정(지금의 노미시) 출생 |
| 1960년 | 와세다 대학 상학부 졸업, 산케이 신문 입사 |
| 1962년 | 산케이 신문 퇴직, 국회의원 비서로 정치 활동 시작 |
| 1969년 | 제32회 중의원 의원 선거 당선 (이시카와현) |
| 1975년 | 총리부 총무차관 취임 |
| 1977년 | 후쿠다 다케오 내각에서 내각관방 부장관 취임 |
| 1983년 | 제2차 나카소네 내각에서 문부대신 취임 |
| 1992년 | 미야자와 개조 내각에서 통상산업대신 취임 |
| 1995년 | 무라야마 개조내각에서 건설대신 취임 |
| 2000년 4월 5일 | 자유민주당 총재, 제85대 내각총리대신 취임 (오부치 게이조의 후임) |
| 2004년 | 자유민주당 신헌법기초위원회 위원장 |
| 2014년 | 도쿄 올림픽·패럴림픽 경기 대회 조직위원회 회장 |
| 2021년 | 도쿄 올림픽·패럴림픽 경기 대회 조직위원회 회장 사임 |
정계 입문 전, 중의원 의원 시절, 총리 퇴임 후의 내용은 각각 해당 하위 섹션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2.1. 정계 입문 전
1937년 7월 14일, 이시카와현 노미군 네아가리정(지금의 노미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모리 시게키(森茂喜)와 어머니 카오루(薫)는 네아가리정의 정장을 역임했다. 모리는 일곱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와세다 대학 상학부를 졸업하고, 산케이 신문에 입사했다. 기자 시절에는 일본공업신문에서 자동차나 기계 등을 담당했고, 취재처 회사 사장들에게 정보를 얻어 1면 톱 기사를 쓰기도 하고 사장상도 받았다. 1962년 산케이 신문을 퇴직 후 국회의원 비서가 되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모리는 어린 시절부터 럭비에 대한 강한 관심을 가졌다. 와세다대학교 재학 시절 럭비 유니온(rugby union) 클럽에 가입했지만, 위궤양 진단을 받고 4개월 만에 퇴부했다. 그러나 오니시 테츠노스케 감독의 격려로 학업을 계속하여 럭비에 봉사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1961년 11월, 웅변회 시절부터 알고 지낸 마키 치에코(牧千恵子)와 결혼했다.
다음은 정계 입문 전의 주요 이력이다.
2.2. 중의원 의원 시절
1962년, 모리 요시로는 신문사를 떠나 국회 의원의 비서가 되었고, 1969년 총선에서 32세의 나이로 중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는 10번 연속으로 재선되었다. 1980년, 그는 주식회사 리쿠르트의 상장 전 주식을 받고 상장 후 이를 매각하여 약 100만 달러의 이익을 얻은 리쿠르트 사건에 연루되었다.
1969년 12월 제3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된 이후, 정치인으로서의 경력을 본격적으로 쌓기 시작했다. 정치 입문 계기는 농기구 제조업체 이세키농기(井関農機) 취재 중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측근이자 중의원 의원이었던 이마마쓰 지로(今松治郎)를 만난 것이었다. 이마마쓰의 비서를 지낸 후, 제3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구 이시카와 1구에서 출마했다.
이 선거는 10명이 난립하는 혼전 양상이었는데, 모리는 거품 후보로 여겨졌다.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자민당 간사장은 모리를 "거품 후보"라고 부르며 공천을 주지 않았다. 자민당 공천은 이미 가득 차 있었고, 모리는 공천을 받지 못해 보수계 무소속으로 출마하게 되었다.
모리는 이마마쓰의 비서를 지낸 인연으로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기시는 흔쾌히 승낙하고 멀리 이시카와까지 지원 유세를 왔다. 지역 내 인기가 상승하여 예상을 뒤엎고 톱으로 당선되었다.
당선 후, 다나카 자민당 간사장은 모리를 당 본부로 불러 돈을 주려고 했다. 모리가 반발하자, 니카이도 스스무(二階堂進)가 "(가입 공천의) 공천료 및 대출금"이라고 설명하며 모리에게 돈을 받게 했다.
같은 선거구에서 오쿠다 케이와도 초선되었고, 두 사람의 라이벌 관계는 "모리오쿠 전쟁"이라고 불리게 된다.
당선 후에는 기시의 권유에 따라 후쿠다파(세이와정책연구회(清和政策研究会)의 전신인 기오이회(紀尾井会))에 입회했다. 후쿠다 다케오 개조내각에서는 내각관방 부장관에 취임하여, 수상 후쿠다 다케오와 관방장관 아베 신타로를 보좌했다.
모리는 1983년과 1984년에 문부대신, 1992년과 1993년에 국제무역산업대신, 1995년과 1996년에 건설대신을 역임했다.
1999년, 모리는 미쓰즈카 히로시가 이끌던 자유민주당(LDP)의 미쓰즈카 파벌(구 아베 파벌)의 지배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모리 요시로의 중의원 의원 시절 주요 이력은 다음과 같다.
| 연도 | 내용 |
|---|---|
| 1969년 12월 | 제3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 |
| 1975년 12월 | 총리부 총무부차관 취임 |
| 1977년 11월 | 내각관방 부장관 취임 |
| 1978년 12월 | 당 정조문교부회장 취임 |
| 1981년 12월 | 중의원 대장위원장 취임 |
| 1983년 12월 | 문부대신 취임 |
| 1987년 11월 | 자유민주당 전국조직위원장 |
| 1991년 1월 | 중의원 의원운영위원장 취임 |
| 1991년 10월 |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취임 |
| 1992년 12월 | 통상산업대신 취임 |
| 1993년 7월 | 자유민주당 간사장 취임 |
| 1995년 8월 | 건설대신 취임 |
| 1996년 11월 |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취임 |
| 1998년 7월 | 자유민주당 간사장 취임 |
| 1998년 12월 | 세이와정책연구회 회장 취임 |
| 2004년 10월 | 자유민주당 신헌법기초위원회 위원장 |
| 2012년 11월 16일 | 중의원 해산으로 중의원 의원 은퇴 |
2.3. 총리 퇴임 후
총리직에서 사퇴한 후, 모리 요시로는 2012년 12월 총선에 출마하지 않고 정계에서 은퇴할 때까지 이시카와현 제2구를 대표하는 중의원 의원으로 남았다. 2004년에는 인도에서 세 번째로 높은 민간인 상인 파드마 부샨(Padma Bhushan)을 수여받았다.
국회의원 은퇴 후에도 정치 활동을 계속하며, 자민당을 중심으로 정계에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2012년 12월 10일, 제4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이바라키현 제7구에서 무소속 전직 의원인 나카무라 기시로(中村喜四郎)의 지원 유세에 참석하여 연설을 했다. 같은 선거구에는 자민당 공천을 받은 현직 의원 나가오카 케이코(永岡桂子)도 출마했는데, 나가오카는 자민당 공인 후보를 지원하지 않고 반대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원한 모리에게 항의했지만, 모리 측은 “이미 의원직을 사퇴했으니 개인의 자유다”라고 일축했다.
총선거 후 발족한 제2차 아베 내각 하에서도 의원 재직 중과 마찬가지로 외교 관련 활동을 계속하여, 2013년 2월, 수상 특사로 러시아를 방문하여 푸틴(プーチン)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다. 푸틴 대통령에게 아베 총리의 친서를 전달하고, 북방 영토(北方領土) 문제를 중심으로 의견을 교환했다. 2013년 5월에 있었던 아베 총리와 푸틴 대통령의 정상 회담을 위한 환경 조성을 도왔다.
북방 영토 문제에 대해서는 2013년 11월 삿포로시에서 개최된 「요미우리 비즈니스 포럼 2013」 강연회에서, 총리 재임 중이던 2001년 자신이 푸틴 대통령에게 제안했던 「하보마이 군도(歯舞諸島)·시코탄섬(色丹島) 반환」과 「쿠나시르섬(国後島)·에토로푸섬(択捉島)의 귀속 확인」을 분리하여 협의하는 「병행 협의」 방식에 대해 언급하면서, “영원히 금과옥조처럼 4개 섬 전부 반환에서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다고 말하면 정부가 움직이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같은 해 3월에는 바티칸에 파견되어 신로마 교황 프란치스코 (로마 교황)(フランシスコ)의 취임식에 정부 대표로 참석했고, 4월에는 영국의 마가렛 대처(マーガレット・サッチャー) 전 총리의 장례식에 특파 대사로 참석했다. 6월에는 제5회 아프리카 개발 회의 부의장 겸 일본 정부 대표를 역임했다.
2013년 6월, 자서전 『나의 이력서 모리 기로 회고록』(私の履歴書 森喜朗回顧録)을 출판했다. 같은 해 7월 도쿄에서 열린 출판 기념회에서는 아베 총리로부터 “모리 전 총리는 나에게 있어 정치의 스승이다. 존 F. 케네디(ジョン・F・ケネディ) 대통령에게 ‘러닝 프레지던트(学びつつある大統領)’, 배우는 대통령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모리 씨는 ‘티칭 프라임 미니스터(教えながら首相としての役割を果たした)’. 주위에 가르치면서 총리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칭찬을 받았다.
2002년 7월에는 제2대 재단법인 일본프로스포츠협회 회장에 취임했고, 2003년 12월에는 제7대 공익재단법인 일인협회 회장에 취임했다. 2004년 10월에는 자유민주당 신헌법기초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2006년 10월 19일에는 세이와정책연구회 회장을 사임하고, 26일에는 세이와정책연구회 명예회장에 취임했다. 2010년 12월 11일에는 세이와정책연구회를 탈퇴하고 “회우”가 되었다. 2014년 1월 14일부터 2021년 2월 12일까지 도쿄올림픽·패럴림픽경기대회조직위원회 회장을 역임했다.
3. 정치 활동
1969년 총선에서 32세의 나이로 중의원에 당선된 후, 10번 연속으로 재선되었다. 이시카와현 제2구에서 13선을 했다. 사회당, 공명당, 민사당, 공산당 등 여러 정당에서 10명이 난립하는 혼전 양상에서, 모리는 다나카 가쿠에이 자민당 간사장에게 "거품 후보"라고 불리며 공천을 받지 못했지만,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지원 유세로 지역 내 인기를 얻어 당선되었다.
1983년과 1984년에는 문부대신을, 1992년과 1993년에는 국제무역산업대신, 1995년과 1996년에는 건설대신을 역임했다. 1999년에는 자유민주당 (LDP) 미쓰즈카 파벌(구 아베 파벌)의 지배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자민당 내 '킹메이커'로 불렸다. 2009년 8월 30일 총선에서는 의원 비서 출신인 민주당의 다나카 미에코에게 패배가 예상될 정도로 밀렸다.
정치 입문 계기는 농기구 제조업체 이세키농기 취재 중 기시 노부스케의 측근이자 중의원 의원이었던 이마마쓰 지로를 만난 것이었다. 1969년 제3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구 이시카와 1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된 이후, 모리와 오쿠다 케이와의 라이벌 관계는 "모리오쿠 전쟁"이라고 불리게 된다.
다음은 정치 활동 연혁이다.
| 연도 | 내용 |
|---|---|
| 1959년 | 자유민주당 학생부 입당 |
| 1963년 | 중의원 의원 이마마쓰 지로의 비서 |
| 1969년 | 제3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 |
| 1975년 | 총리부 총무부차관 취임 |
| 1977년 | 내각관방 부장관 취임 |
| 1978년 | 당 정조문교부회장 취임 |
| 1981년 | 중의원 대장위원장 취임 |
| 1983년 | 문부대신 취임 |
| 1987년 | 자유민주당 전국조직위원장 |
| 1991년 | 중의원 의원운영위원장,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취임 |
| 1992년 | 통상산업대신 취임 |
| 1993년 | 자유민주당 간사장 취임 |
| 1995년 | 건설대신 취임 |
| 1996년 |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취임 |
| 1998년 | 자유민주당 간사장, 세이와정책연구회 회장 취임 |
| 2000년 | 제85대 내각총리대신 취임 |
| 2001년 | 제6대 세이와정책연구회 회장 취임 |
| 2004년 | 자유민주당 신헌법기초위원회 위원장 |
| 2006년 | 세이와정책연구회 회장 사임 및 명예회장 취임 |
| 2010년 | 세이와정책연구회 탈퇴, “회우”가 됨 |
| 2012년 | 중의원 해산으로 중의원 의원 은퇴 |
| 2014년~2021년 | 도쿄올림픽·패럴림픽경기대회조직위원회 회장 |
3.1. 초기 정치 경력 (1969년 - 2000년)
1937년 이시카와현 노미군 네아가리정(지금의 노미시)에서 태어나, 1960년 와세다 대학 상학부를 졸업했다. 같은 해 산케이 신문에 입사했으나, 1962년 퇴직 후 국회의원 비서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1969년 제32회 중의원 의원 선거에 구 이시카와 1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시 다나카 가쿠에이 자민당 간사장은 모리를 "거품 후보"라 불렀지만,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지원 유세 등에 힘입어 1위로 당선되었다.
당선 후 기시의 권유로 후쿠다파(세이와정책연구회(清和政策研究会)의 전신인 기오이회(紀尾井会))에 입회했다. 1975년 총리부 총무부장관, 1977년 후쿠다 다케오 내각에서 내각 관방부장관을 역임했다. 1983년 제2차 나카소네 내각에서 문부대신에 취임했으며, 1992년 미야자와 개조 내각에서 통상산업대신, 1995년 무라야마 개조내각에서 건설대신으로 취임했다.
1999년에는 미쓰즈카 히로시가 이끌던 자유민주당 (LDP)의 미쓰즈카 파벌(구 아베 파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2000년 4월 5일, 오부치 게이조가 혼수상태에 빠지자 그의 뒤를 이어 자유민주당 총재 및 제85대 총리대신으로 취임하게 된다.
3.2. 내각총리대신 재임 (2000년 - 2001년)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2000년 4월 2일 뇌졸중과 뇌출혈로 쓰러져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자, 내각은 긴급회의를 열고 총사퇴하였다. 당시 자유민주당(자민당) 사무총장이었던 모리는 만장일치로 당수로 선출되었고, 자민당, 신공명당, 신보수당의 지지를 얻어 2000년 4월 5일 총리대신에 취임했다. 모리는 오부치 내각을 유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전임자의 급병으로 인한 취임이었고, 총재가 되기 위한 공식적인 준비 없이 등판했기 때문에 "솔직히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고 회고했다.
정책 면에서는 고이즈미 정권의 정치 목표를 계승하는 것을 중시했다. 오키나와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경기 회복을 목표로 했다. 러시아와의 외교, 교육기본법 문제 등도 고이즈미와 모리가 마지막으로 이야기했던 4월 1일에 정치 과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총리로서 첫 해외 방문지로 러시아를 선택하여, 푸틴 대통령과 함께 시베리아의 일본인 묘지를 방문했다. 중앙일보는 이를 계산된 행동으로 평가하며, 푸틴 대통령이 동방경제포럼에서 "우리의 과거가 미래로 나아가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발언한 것을 언급했다.
소신 표명 직후 전립선에 암이 발견되었다. 모리는 항암제로 증세를 억제하며 암 진단을 숨긴 채 총리직을 수행했다. 4년 후 론자(論座)에서의 증언에서는 암을 이유로 "취임 당시부터 1년 만에 사임할 것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3.3. 총리 퇴임 이후 (2001년 - 현재)
모리 요시로는 총리 퇴임 후 2012년 12월 총선에 출마하지 않고 정계에서 은퇴할 때까지 이시카와현 제2구를 대표하는 중의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2004년에는 인도 정부로부터 민간인에게 수여되는 세 번째로 높은 훈장인 파드마 부샨(Padma Bhushan)을 받았다.
총리 퇴임 후에도 모리는 정치, 외교,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특히 세이와 정책 연구회(세이와카이)의 오너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유지하며,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후쿠다 야스오 등 후임 총리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2009년에는 니코니코 동화 전국 투어에 게스트로 출연하여 당시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의 정책을 비판하기도 했다. 2010년에는 일인협회 회장으로서 인도 뉴델리를 방문하여 맨모한 싱 총리를 예방하고, 닛산-르노 공장 개소식에 참석하는 등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펼쳤다.
2010년 이시카와현 지사 선거에서는 자신의 친척을 입후보시키려 했으나 자민당 내 조정 실패로 무산되면서 영향력 감소를 지적받기도 했다. 같은 해, 타카진노 소데마데잇테이이인카이에 출연하여 미일핵반입문제에 대해 "필요에 따라 말할 수 없는 일도 있다"는 입장을 밝히고, 도요타 대규모 리콜 문제에 대해서는 민주당의 태도를 비판하며 자민당의 물밑 설득 작업을 공개하기도 했다.
2010년 프랑스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트피시에를 수여받았으며, 일본 워터 포럼 회장으로서의 활동과 개발도상국의 수자원 및 위생 개선 활동 지원 공로를 인정받았다. 같은 해 자유민주당 참의원 의원회장 선거에서는 자신이 소속된 세이와 정책 연구회 후보를 지지했으나, 아베 신조 등의 반대로 실패하고, 이로 인해 세이와 정책 연구회를 탈당하게 되었다.
2011년 일본체육협회 회장직에서 물러난 후, 2020년 하계 올림픽 도쿄 유치위원회 평의회 의장에 취임하여 올림픽 유치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2012년에는 국회의원직 은퇴를 선언하고 정계에서 물러났지만, 이후에도 자민당을 중심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했다.
2013년에는 러시아를 방문하여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회담하고, 아베 신조 총리의 친서를 전달하는 등 외교 특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북방 영토 문제에 대해서는 "4개 섬 전부 반환"만을 고집하지 않고 유연한 협상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교황 프란치스코의 취임식과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장례식에 정부 대표로 참석하는 등 국제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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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에는 도쿄 올림픽·패럴림픽 경기 대회 조직위원회 회장에 취임하여 올림픽 준비를 총괄했다. 2015년에는 일본재단 패럴림픽 서포트센터 최고 고문에 취임했다.
2013년 홋카이도 여객철도(JR 홋카이도)의 경영난에 대해 동일본 여객철도(JR 동일본)에 지원을 요청하는 등 지역 경제 문제에도 관심을 보였다. 같은 해 이시카와현으로부터 명예현민 칭호를 수여받았다.
2015년 좌폐 암 제거 수술을 받았으며, 2017년 봄 욱일대수장을 수상했다. 2019년 일본 럭비 협회 명예회장직을 사임했다.
2021년 2월, 여성 멸시 발언으로 논란이 되자 도쿄 올림픽·패럴림픽 경기 대회 조직위원회 회장직에서 사임했다.
4. 논란 및 비판
모리 요시로는 여러 논란과 비판에 휩싸인 인물이다.
1984년 임시교육심의회 설치 당시, 일본교직원조합(약칭 일교조)과 일본사회당은 일교조 대표를 위원으로 포함할 것을 요구했지만, 모리는 "특정 단체를 대표하는 사람을 포함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거부했다. 결국 자민당은 공명당, 민사당과 수정 협의를 통해 일교조를 제외하는 방침으로 법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논의된 내용은 입시 제도, 학제, 유보일원화(유치원과 보육원의 통합), 극단적인 학력 사회 완화 등이었다.
1988년 리쿠르트 사건으로 두 번째 입각 직전에 일시 자숙해야 했다. 아베 신타로에게 리쿠르트의 에가미 히로마사를 소개한 것이 모리라는 의혹이 있었지만, 모리 자신은 부인했다. 1990년 총선 이후 제2차 가이후 내각 조각 당시, 가이후 슌스케 수상은 리쿠르트 관련 의원은 입각시키지 않겠다고 공언했음에도 아베는 모리를 입각 후보로 추천했다. 이는 모리를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의도였다는 지적이 있다. 결국 모리는 입각을 사퇴했다.
모리 요시로는 잦은 실언으로 비판받았으며, 수상 시절에는 그의 실언이 유행어가 될 정도였다.
2023~2024년 일본 정치자금 스캔들에 모리 요시로가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 스캔들은 자유민주당 내 주요 파벌인 세이와 정책연구회의 정치자금 문제와 관련이 있으며, 모리 요시로는 이 파벌의 전 회장이었다. 기시다 후미오 현 총리는 모리 전 총리를 증인으로 채택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4.1. 실언 및 외교적 결례
모리 요시로는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잦은 실언과 외교적 결례로 언론의 집중적인 비판을 받았다. 취임 전부터 일본 언론은 그를 "벼룩의 심장과 상어의 두뇌를 가진 인물"로 묘사했다.
* 2000년 1월, 1969년 선거 운동 당시 "차에서 내려 농부들에게 인사를 했더니 모두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치 제가 에이즈에 걸린 것 같았다"라고 농담했다.
* 2000년 2월, 미국 Y2K 문제에 대한 질문에 "정전이 되면 살인자들이 항상 나타난다. 그런 사회다"라고 답했다.
* 오부치 게이조 장례식에서 영전 앞에 제대로 절하지 않아 일본 전통 장례 의식에 어긋난다는 비판을 받았다.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등 다른 참석자들은 모두 올바르게 의례를 행했다.
* 2000년 5월, 신도 신자 모임에서 일본을 "천황을 중심으로 한 신성한 나라"라고 묘사하여 논란이 되었다. 이는 일본 제국 시대 천황을 신격화했던 과거를 연상시킨다는 비판을 받았다. 며칠 후, 일본 공산당에 대해 "일본의 안보를 확보하고 국체(Kokutai)를 방어할 수 있는지" 질문하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거의 사용되지 않던 용어를 사용했다.
* 2000년 총선 기간 중, 유권자 절반이 투표할 후보를 결정하지 못했다는 보도에 "그냥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으면 된다"고 말했다.
* 2000년 10월,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와의 대화에서 1997년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다른 곳에서 "발견되도록" 조작해 북일 관계 정상화를 꾀하자는 제안을 했다고 말해 외무성과 자민당 보수파의 반발을 샀다.
* 2000년 12월, 주간 현대(Shukan Gendai)에 고위급 야쿠자와 술을 마시는 사진이 실렸다.
* 2001년 2월, 미국 잠수함 그린빌이 일본 어선 에히메 마루를 침몰시킨 사건 소식을 듣고도 골프를 계속해 비난받았다.
* 2000년 제26차 G8 정상회의에서 빌 클린턴에게 "How are you?"를 "Who are you?"로 잘못 말하고, 클린턴이 "저는 힐러리 클린턴의 남편입니다"라고 하자 "Me too"라고 답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스노프스(Snopes.com)는 근거 없는 농담이라고 밝혔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비슷한 농담의 대상이 된 적 있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 방송 공사 등 일부 언론은 이를 보도했다.
* 2003년 6월, "아이를 하나도 낳지 않은 여성이 자유를 만끽하고 늙어서 세금으로 돌봐야 한다는 것은 이상하다"라고 발언해 비판받았다.
* 2007년, 방위성 인사 갈등에 대해 고이케 유리코 방위상을 "무사의 품격이 없다"고 비판했다.
*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아사다 마오가 넘어지자 "중요한 순간에는 반드시 넘어진다"고 말했다.
* 2016년, 일본 선수단이 국가를 제창하지 않은 것에 대해 비판했으나, 실제로는 독창이었고 오해였다.
* 2021년, 도쿄 올림픽 성화 봉송 관련 "유명인은 논(의 길가)을 달리면 좋지 않을까"라고 발언하여 다무라 준이 성화 봉송 주자를 사퇴했다.
* 2021년 2월, JOC 임시 평의원회에서 "여성이 많이 들어있는 이사회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여성 혐오 발언으로 국제적 비판을 받고 사임했다.
*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젤렌스키 대통령은 많은 우크라이나 국민을 괴롭히고 있다"고 발언하고, 일본 언론 보도와 기시다 후미오 총리 외교 정책을 비판했다.
* 2023년, "이렇게 우크라이나에 힘을 쏟아도 괜찮은가. 러시아가 패배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며 일러 관계 붕괴를 우려했다.
4.2. 여성 멸시 발언
2021년 2월 3일, 일본 올림픽 위원회(JOC) 임시 평의원회에서 모리 요시로는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 여성 이사를 4할로 하는 것은 문부과학성이 시끄럽게 말합니다. 하지만 여성이 많이 들어있는 이사회는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 럭비 협회는 지금까지의 두 배 시간이 걸립니다. [...] 여성은 경쟁 의식이 강합니다. 누군가 한 명이 손을 들면, 자신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두 발언합니다. [...] 여성을 반드시 늘려야 할 경우에는 발언 시간을 어느 정도 제한하지 않으면 좀처럼 끝나지 않아서 곤란하다고 [...] 우리 조직위원회에 여성은 [...] 모두 분수를 지키고 있습니다. 모두 경기 단체 출신으로 국제적인 큰 자리를 밟으신 분들뿐입니다. 그래서 말씀도 제대로 된 적절한 내용이 집약되어 매우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
이 발언은 트위터 등 SNS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뉴욕 타임즈, 워싱턴 포스트, 로이터 통신, AFP 통신 등 해외 언론에서도 비판적으로 보도되었다. 유럽 각국·유럽 연합의 주일 대사관과 도요타 자동차, JR 동일본 등 도쿄 올림픽 파트너(스폰서) 각사에서도 비판과 유감의 코멘트가 이어졌다. 일본 스포츠와 젠더 학회는 2021년 2월 4일 긴급 성명을 발표했다.
2021년 2월 4일, 모리 요시로는 마이니치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반론으로 여성의 수만 늘리는 것은 생각해볼 문제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여성을 멸시하는 의도는 전혀 없다"고 해명했다. 같은 날 열린 기자회견에서는 자신의 사임은 부정했지만, "(이번 발언에 대한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 철회하겠다"고 답했다. "여성의 이야기가 길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최근 여성의 이야기를 듣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백악관 젠 사키 대변인은 2021년 2월 12일 기자회견에서 "모리 씨의 발언은 용납할 수 없다"고 언급하며, "추가 대응에 대해서는 팀과 협의하겠다"고 말했다.
결국 모리 요시로는 2021년 2월 12일, 이사회와 평의원회의 합동 간담회에서 여성 멸시 발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을 표명했다. 그는 "저 자신은 여성을 멸시하는 마음은 전혀 없다"고 발언의 내용을 부정하며, "해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 다소 의도적인 보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후임으로는 하시모토 세이코가 취임했다.
이러한 일련의 발언에 대해 모리 요시로를 옹호하는 시각도 있었다. 일본 올림픽 위원회(JOC) 위원장 야마시타 야스히로는 스포츠 기본법, 국가 훈련 센터(NTC), 럭비 월드컵 등의 공적을 언급하며 옹호했다. 또한, 사임 방침이 보도된 후, 트위터에서는 “#모리 요시로 감사합니다” 해시태그가 많이 게시되었다.
4.3. 정치 자금 스캔들
2023~2024년 일본 정치자금 스캔들에 모리 요시로 전 총리가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 스캔들은 자민당 내 주요 파벌인 청화정책연구회(세이와 정책연구회)의 정치자금 문제와 관련이 있으며, 모리 요시로는 이 파벌의 전 회장이었다. 기시다 후미오 현 총리는 모리 전 총리를 증인으로 채택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5. 한국과의 관계
모리 요시로는 자유민주당 소속 정치인으로, 총리 재임 전후 여러 직책을 맡으며 한국과 관련된 정책 결정에 관여했다.
무라야마 개조내각에서 건설대신으로 재직 시, 한신·아와지 대지진의 경험을 바탕으로 건축물 내진화를 촉진하는 법률 제정에 힘썼다. 이 법은 특히 초·중등학교의 내진 안전에 중점을 두었다.
1995년에는 미국 측과 차세대 지원 전투기(FS-X) 공동 개발 및 주일미군 주둔 경비 확보를 위한 협의를 진행했다. 당시 오키나와 미군병사 소녀 강간 사건으로 주일미군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1996년도 방위 예산은 전년 대비 2.58% 증가하여 버블 붕괴 이후 최대 증가율을 기록했다.
총리 퇴임 후에도 정치 활동을 지속하며, 2013년에는 아베 신조 총리의 특사로 러시아를 방문하여 푸틴 대통령과 쿠릴 열도 분쟁 (북방 영토 문제)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그는 하보마이 군도와 시코탄섬 반환, 쿠나시르섬과 에토로후섬의 귀속 확인을 분리하여 협의하는 방식을 제안하며, 양국 간 경제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6. 평가
모리 요시로는 잦은 실언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총리 재임 시절에는 "실언"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될 정도였으며, 퇴임 후에도 그의 발언은 종종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 2016년 주간포스트 설문조사에서 "미움받는 노인" 2위를 차지했고, 30대 이상 남성 전 계층에서 1위를 기록했다. "무능하면서도 거물인 체하는 것이 이해할 수 없다. 백해무익한 인물"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 2018년 주간포스트의 정치기자, 평론가, 학자 52명 실명 설문조사 "전후 역대 최악의 총리대신"에서 무라카미 마사쿠니는 "총리로 추대했던 것은 큰 실수였다. '신의 나라' 발언 등 분위기를 읽지 못하며, 사임 후에도 뻔뻔하게 큰 체면으로 올림픽 조직위원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고 모리를 비판했다.
7. 역대 선거 결과
| 선거명 | 선거구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 순위 | 당락 | 비고 |
|---|---|---|---|---|---|---|---|
| 1969년 제32회 총선거 | 이시카와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64,595 | 18.23 | 1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72년 제33회 총선거 | 이시카와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78,221 | 21.14 | 1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76년 제34회 총선거 | 이시카와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107,657 | 32.91 | 1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79년 제35회 총선거 | 이시카와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111,297 | 39.44 | 1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80년 제36회 총선거 | 이시카와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116,366 | 31.58 | 1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83년 제37회 총선거 | 이시카와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112,384 | 34.86 | 1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86년 제38회 총선거 | 이시카와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147,768 | 39.13 | 1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90년 제39회 총선거 | 이시카와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129,515 | 32.10 | 2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93년 제40회 총선거 | 이시카와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136,950 | 36.30 | 2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96년 제41회 총선거 | 이시카와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105,586 | 51.66 | 1 | 당선 | |
| 2000년 제42회 총선거 | 이시카와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142,457 | 64.44 | 1 | 당선 | |
| 2003년 제43회 총선거 | 이시카와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114,541 | 55.62 | 1 | 당선 | |
| 2005년 제44회 총선거 | 이시카와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129,785 | 57.63 | 1 | 당선 | |
| 2009년 제45회 총선거 | 이시카와현 제2구 | 자유민주당 | 123,490 | 50.20 | 1 | 당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