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구성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상구성은 전한 무제 때 활약한 관료이다. 기원전 91년 무고의 난 진압에 기여하여 투후에 봉해졌으며, 흉노 정벌에 참여했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대홍려와 어사대부를 역임했으며, 기원전 87년에 자결했다. 그의 죽음에 대한 배경은 《한서》에 두 가지 상반된 기록으로 전해진다.

상구성
📚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기원전 87년 사망 - 전한 무제
    전한의 제7대 황제인 전한 무제는 54년간 재위하며 유교 기반 중앙집권 강화, 흉노 정벌을 통한 영토 확장, 소금과 철의 전매제 등 경제 개혁을 추진하여 전한의 최전성기를 이끌었으나, 과도한 군사 지출, 사치스러운 생활, 무고의 난 등 부정적인 면모도 보였다.
  • 기원전 87년 사망 - 효소태후
    효소태후는 전한 무제의 후궁으로 소제의 어머니이며, 무제의 총애를 받아 아들을 낳았으나 외척의 발호를 우려한 무제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소제가 즉위한 후 태후로 추존되었다.
  • 중국에 관한 - 신도가
    신도가는 전한 시대의 무관 출신으로, 항우와의 싸움과 영포의 난에 참여하고 혜제 때 회양태수를 거쳐 승상에 올랐으며, 청렴한 성품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던 등통을 처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조조와의 갈등 끝에 죽음을 맞이하여 절후의 시호를 받았다.
  • 중국에 관한 - 카자흐인
    카자흐인은 15세기 카자흐 칸국 건국 이후 명칭이 사용된 튀르크계 중앙아시아 북부 유목민족으로, "자유로운 자"를 뜻하는 카자흐라는 명칭은 권위에 저항하는 집단을 지칭하는 용어에서 유래했으며, 카자흐 초원을 중심으로 실크로드 무역을 통해 번성했고, 유목 생활과 튀르크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현재 여러 국가에 디아스포라가 거주하고 있다.
  • 기원전 2세기 중국 사람 - 신도가
    신도가는 전한 시대의 무관 출신으로, 항우와의 싸움과 영포의 난에 참여하고 혜제 때 회양태수를 거쳐 승상에 올랐으며, 청렴한 성품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던 등통을 처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조조와의 갈등 끝에 죽음을 맞이하여 절후의 시호를 받았다.
  • 기원전 2세기 중국 사람 - 사마천
    사마천은 중국 전한 시대의 역사가, 천문학자, 역법가로서 중국 최초의 통사로 평가받는 『사기』를 저술하여 기전체를 확립하고 역사 서술과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이릉 변호 사건으로 궁형을 받는 고난을 겪었으며 태초력 제정에도 참여하는 등 천문학과 역법에도 업적을 남겼다.

2. 생애

정화 2년(기원전 91년), 무제의 태자 유거가 자신을 무제에게 참소한 강충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무고의 난). 조정에서는 곧 진압에 나섰는데, 이때 대홍려 상구성은 힘써 싸운 끝에 장광(張光)을 사로잡았다. 진압 후 상구성은 공로를 인정받아 투후(秺侯)에 봉해졌다.

정화 3년(기원전 90년), 흉노가 변경을 노략질하니 조정에서 이를 물리치려 하였다. 이때 상구성은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하로 출진하였는데, 흉노의 호록고선우가 몸소 정예를 이끌고 고저수(姑且水)를 건너니 상구성은 이를 추격하였지만 결국 물리치지 못하고 돌아갔다.

후원 2년(기원전 87년), 상구성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상구성이 죽은 배경으로는 두 가지 기록이 전해진다. 《한서》 권17에서는 첨사로서 문제의 종묘에 있었을 때 술에 취하여 술주정을 부렸기 때문이라고 하였고, 권19에서는 무고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자치통감고이》(資治通鑑考異)에서는 상구성은 첨사를 지낸 적이 없다면서 전자의 기록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였다.

2.1. 무고의 난 진압 (기원전 91년)

정화 2년(기원전 91년), 무제의 태자 유거가 자신을 무제에게 참소한 강충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무고의 난). 조정에서는 곧 진압에 나섰는데, 이때 대홍려 상구성은 힘써 싸운 끝에 장광(張光)을 사로잡았다. 진압 후 상구성은 공로를 인정받아 투후(秺侯)에 봉해졌다.

2.2. 흉노 정벌 (기원전 90년)

정화 3년(기원전 90년), 흉노가 변경을 노략질하니 조정에서 이를 물리치려 하였다. 이때 상구성은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하로 출진하였는데, 흉노의 호록고선우가 몸소 정예를 이끌고 고저수(姑且水)를 건너니 상구성은 이를 추격하였지만 결국 물리치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에 흉노에서는 대장과 이릉이 3만여 기병을 이끌고 상구성을 추격하였고, 9일 동안 싸웠다. 상구성은 선전하였고, 흉노는 포노수(蒲奴水)에 이르러 전황이 불리하다고 여기고 물러났다.

2.3. 죽음 (기원전 87년)

후원 2년(기원전 87년), 상구성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상구성이 죽은 배경으로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기록이 전해진다. 《한서》 권17에서는 첨사로서 문제의 종묘에 있었을 때 술에 취하여 술주정을 부렸기 때문이라고 하였고, 권19에서는 무고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자치통감고이》(資治通鑑考異)에서는 상구성은 첨사를 지낸 적이 없다면서 전자의 기록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였다.

3. 관직

상구성은 전한 무제 때의 관리로, 대홍려어사대부를 역임하였다.

👆
좌우로 밀어서 보기
직책재임 기간전임자후임자
전한대홍려기원전 103년 ~ 기원전 91년 9월호충국전천추
전한어사대부기원전 91년 9월 ~ 기원전 87년 6월포승지상홍양
전한의 투후기원전 91년 ~ 기원전 87년 6월(첫 봉건)(1년 후) 투경후 김일제

3.1. 대홍려 (기원전 103년 ~ 기원전 91년)

상구성은 전한 무제 때 대홍려를 지냈다. 기원전 103년에 대홍려가 되었고, 기원전 91년 9월까지 재임하였다.

3.2. 어사대부 (기원전 91년 ~ 기원전 87년)

상구성은 전한 무제 때의 관리로, 대홍려어사대부를 역임하였다. 기원전 91년, 포승지의 뒤를 이어 어사대부가 되었고, 기원전 87년에 사망할 때까지 그 직위를 유지하였다. 상홍양이 상구성의 뒤를 이어 어사대부가 되었다.

4. 출전

상구성은 전한 무제 때의 인물로, 대홍려어사대부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
좌우로 밀어서 보기
관직임기전임자후임자
대홍려기원전 103년 ~ 기원전 91년 9월호충국전천추
어사대부기원전 91년 9월 ~ 기원전 87년 6월포승지상홍양
투후기원전 91년 ~ 기원전 87년 6월(첫 봉건)투경후 김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