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해군특별육전대
1. 개요
상하이 해군특별육전대는 1920년대 상하이의 치안 불안으로 인해 일본 거류민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된 해군 육전대로, 이후 상설 부대로 재편성되었다. 1927년 상하이 조계 경비를 시작으로, 제1차 상하이 사변과 제2차 상하이 사변 등 중일 전쟁 시기까지 상하이 및 화중 지역에서 전투를 수행했다. 태평양 전쟁 중에는 웨이크 섬 방어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1945년 일본의 항복과 함께 해체되었다. 상하이 해군특별육전대는 일반 육전대보다 규모가 컸으며, 장갑차와 기관단총 등 다양한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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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칭 | 상하이 해군 특별 육전대 |
|---|---|
| 원어 명칭 | 上海海軍特別陸戦隊일본어 |
| 창설 | 1932년 6월 1일 |
| 폐지 | 1945년 8월 20일 |
| 국적 | |
| 소속 | |
| 규모 | 특별 육전대 |
| 병과 | 해군 육전대 |
| 인원 | 2,000명 - 2,800명 |
| 위치 | 중화민국 상하이 특별시 훙커우구 |
| 담당 지역 | 상하이, 한커우 |
| 통칭호 | 알 수 없음 |
| 애칭 | 알 수 없음 |
| 표어 | 알 수 없음 |
| 최종 위치 | 알 수 없음 |
| 상급 부대 | 일본 해군 제3함대 |
|---|---|
| 최종 상급 부대 | 알 수 없음 |
| 보충 담당 | 알 수 없음 |
| 주요 지휘관 | 알 수 없음 |
| 지휘관 | 알 수 없음 |
| 참전 | 중일 전쟁 |
|---|
-
제1차 상하이 사변 -
훙커우 공원 사건
훙커우 공원 사건은 1932년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 기념 행사에 폭탄을 투척한 의거로, 한국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고 중국의 임시정부 지원을 이끌어냈으며 윤봉길 의사의 희생은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
제1차 상하이 사변 -
상하이 파견군
상하이 파견군은 제1, 2차 상하이 사변과 상하이 전투 당시 일본군이 상하이에 파견한 부대로, 편성 및 해체를 거쳐 난징 공략전에 참여하여 난징 대학살을 자행, 국제적 비난을 받았으며 중지나 방면군에 병합되어 해체 후 중지나 파견군으로 재편성되었다. -
1932년 설립된 단체 -
731부대
731부대는 제2차 세계 대전 시 일본 제국이 만주국에서 비밀리에 운영한 생물학전 부대로, 한국인, 중국인, 러시아인 등을 대상으로 끔찍한 인체 실험을 자행하며 생물학 무기 개발 및 실전 사용에 관여했지만, 종전 후 관련자들은 미국의 비호 아래 처벌을 피하여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미완으로 남았다. -
1932년 설립된 단체 -
국제 농구 연맹
국제 농구 연맹(FIBA)은 1932년 창설되어 올림픽 농구 종목 채택에 기여하고 FIBA 농구 월드컵 등 주요 국제 대회를 주관하며 각국 농구 협회를 회원으로 둔 농구 종목의 국제적인 관리 기구이다. -
제2차 상하이 사변 -
제10군 (일본군)
제10군은 일본군이 상하이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창설한 부대로, 중국 대륙에 진입하여 난징 공략전에 참여했으나 난징에서 해산되었으며, 사령관은 야나가와 헤이스케 중장이었다. -
제2차 상하이 사변 -
상하이 파견군
상하이 파견군은 제1, 2차 상하이 사변과 상하이 전투 당시 일본군이 상하이에 파견한 부대로, 편성 및 해체를 거쳐 난징 공략전에 참여하여 난징 대학살을 자행, 국제적 비난을 받았으며 중지나 방면군에 병합되어 해체 후 중지나 파견군으로 재편성되었다.
2. 역사
1920년대 중반, 군벌 간의 다툼으로 상하이 주변 정세가 불안해지자 일본은 구레 진수부 등에 특별 육전대를 신속히 파견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1927년 2월, 국민당의 북벌로 상하이 근처에서 국민당과 북양정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은 경순양함 덴류와 구레 진수부 특별 육전대 1개 대대(300명)를 상하이에 파견했다. 3월에는 사세보 진수부와 요코스카 진수부에서 각각 1개 대대(총 500명)를 파견, 함선 육전대와 함께 우에마츠 렌마 대좌 지휘 아래 5개 대대(1,400명) 규모의 연합 육전대를 편성했다. 이후에도 증파가 계속되어, 최대 규모는 특별 육전대 2,300명과 함선 육전대 2,000명에 달했다. 이들은 영국군, 미국군, 프랑스군과 함께 상하이 조계 경비를 담당했으며, 상하이 쿠데타 당시 패잔병의 무장 해제 및 조계 침입 저지 임무를 수행했다.
1927년 9월, 상하이 주변 전투가 끝나고 정세가 안정되자 대부분의 육전대는 일본으로 철수했다. 하지만 경비 강화를 위해 특별육전대 일부가 제1견외함대 소속 "상하이 육전대"로 남았다. 상하이 육전대는 훙커우구에 본부를 설치하고, 비커스-크로슬리 장갑차 등을 배치했다. 1932년 1월, 제1차 상하이 사변이 발발하자 상하이 육전대는 제3함대에 편입되어 함대 직속 부대가 되었고, 중국 19로군과 전투를 벌였다.
1932년 10월 1일, 해군특별육전대령 제정으로 상하이 육전대는 "상하이 특별육전대"로 재편성되어 상설 부대가 되었다.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을 계기로 일본군이 상하이 전투(제2차 상하이 사변)를 일으켰고, 해군 소장의 지휘 아래 상하이 특별육전대는 상하이 파견군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상하이 특별육전대는 화중 지방에서 일본 해군의 주력 전투 부대로서 일본 육군과 협력하여 국민당군과의 전투를 계속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옥음방송과 이후 연합국의 일본 열도 상륙 및 점령에 따라 상하이 해군특별육전대는 중국 국민당에 항복하고 무장해제되었다. 이후, 일본으로 귀환하기 전에 부대는 해체되었다.
2.1. 기원
1920년대 중반, 군벌 간의 다툼으로 상하이 주변 정세가 나빠지자, 일본은 지상 부대가 부족할 수 있다는 우려를 하게 되었다. 이에 구레 진수부 등에서는 특별 육전대를 빠르게 파견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1927년 2월, 국민당의 북벌로 상하이 근처에서 국민당과 북양정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이에 일본은 경순양함 덴류와 구레 진수부 특별 육전대 1개 대대(300명)를 상하이에 파견했다. 3월에는 사세보 진수부와 요코스카 진수부에서도 각각 1개 대대(총 500명)를 파견, 함선 육전대와 함께 방호순양함 도네 함장 우에마츠 렌마 대좌 지휘 아래 5개 대대(1,400명) 규모의 연합 육전대를 편성했다. 이후에도 증파가 계속되어, 최대 규모는 특별 육전대 2,300명과 함선 육전대 2,000명에 달했다.
이들은 영국군 6,600명, 미국군 2,800명, 프랑스군 500명과 함께 상하이 조계 경비를 담당했으며, 상하이 쿠데타 당시 패잔병의 무장 해제 및 조계 침입 저지 임무를 수행했다.
2.2. 상하이 주둔
1927년 9월, 상하이 주변 전투가 끝나고 정세가 안정되자 대부분의 육전대는 일본으로 철수했다. 하지만 경비 강화를 위해 특별육전대 일부가 제1견외함대 소속 "상하이 육전대"로 남았다. 상하이 육전대는 훙커우구에 본부를 설치하고, 비커스-크로슬리 장갑차 등을 배치했다. 1932년 1월, 제1차 상하이 사변이 발발하자 상하이 육전대는 중국 19로군과 전투를 벌였다. 상하이 육전대는 제3함대에 편입되어 함대 직속 부대가 되었고, 육군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상하이 조계를 방어했다.
2.3. 상설화
제1차 상하이 사변 이후, 1932년 10월 1일 해군특별육전대령 제정으로 상하이 육전대는 "상하이 특별육전대"로 재편성되어 상설 부대가 되었다. 상하이 특별육전대는 2개 대대, 약 2,000명 규모였다.
2.4. 중일 전쟁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을 빌미로 일본군이 상하이 전투(제2차 상하이 사변)를 일으켰다. 해군소장의 지휘 아래 상하이 특별육전대는 상하이 파견군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상하이 특별육전대는 화중 지방에서 일본 해군의 주력 전투 부대로서 일본 육군과 협력하여 국민당군과의 전투를 계속하였다. 웨이크섬에 파견된 제65경비대는 상하이 특별육전대에서 차출된 1개 대대로 편성되었다.
2.5. 태평양 전쟁과 해체
1945년 8월 15일 옥음방송과 이후 연합국의 일본 열도 상륙 및 점령에 따라 상하이 해군특별육전대는 중국 국민당에 항복하고 무장해제되었다. 이후, 일본으로 귀환하기 전에 부대는 해체되었다.
3. 편제 및 장비
상하이 해군특별육전대는 시기에 따라 편성이 달랐고, 일반적인 특별육전대보다 규모가 컸다. 소규모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장갑차를 갖춘 전차대를 보유했고, 시가전에 적합한 윤형 장갑차를 많이 장비했다. MP18/28(베르그만식) 기관단총 등도 일본군 중 일찍부터 장비했다.
제2차 상하이 사변 초기 상하이 지역 총병력은 2,400명(증원 인원과 함선 육전대 400명 포함), 한커우 부대는 300명(증원 인원 100명 포함)이었다. 상하이 지역 부대는 사령부 대대와 제1~6대대로 편성되었으며, 이 중 제4대대는 포대였다. 주요 장비는 다음과 같았다.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4월에는 4,141명의 병력과 15cm 박격포 7문, 12cm 고각포 20문, 8cm 고각포 8문, 75mm 야전 고사포 4문, 경전차 3량, 장갑차 7량을 보유했다. 장갑차량으로는 89식 중전차 2량, 카덴 로이드 콩전차 1량, 스미다식 장갑 자동차 3량, 93식 장갑 자동차 3량, 비식 장갑 자동차 1량이 있었다. 이 외에도 8cm 박격포 40문(최소 28문은 3식 8cm 박격포) 등도 있었다.
4. 역대 지휘관
| 순 | 이름 | 계급 | 취임 | |
|---|---|---|---|---|
| 상하이 육전대 지휘관 | ||||
| 1 | 마츠모토 타다사 | 대좌 | 1927년 8월 20일 | |
| 2 | 시바야마 마사오 | 대좌 | 1929년 12월 7일 | |
| 3 | 사메지마 토모시게 | 대좌 | 1931년 12월 1일 | |
| 4 | 우에마츠 토마 | 소장 | 1932년 2월 4일 | |
| 5 | 스기사카 테이지로 | 대좌 | 1932년 6월 6일 | |
| 상하이 해군특별육전대 사령관 | ||||
| 6 | 스기사카 테이지로 | 대좌 | 1932년 10월 1일 | |
| 7 | 우노 세키조 | 소장 | 1933년 11월 15일 | |
| 8 | 아라키 사다아키 | 소장 | 1934년 11월 15일 | |
| 9 | 곤도 에이지로 | 소장 | 1935년 12월 2일 | |
| 10 | 오코우치 덴시치 | 소장 | 1936년 11월 16일 | |
| 11 | 시시도 요시노부 | 소장 | 1938년 4월 25일 | |
| 12 | 타케다 모리하루 | 소장 | 1939년 11월 15일 | |
| 13 | 마키타 카쿠사부로 | 소장 | 1941년 9월 15일 | 상하이 방면 근거지대 사령관 겸임 |
| 14 | 오노 이치로 | 소장 | 1942년 2월 14일 | 상하이 방면 근거지대 사령관 겸임 |
| 15 | 하타케야마 코이치로 | 소장 | 1943년 6월 1일 | 상하이 방면 근거지대 사령관 겸임 |
| 16 | 스즈키 쵸조 | 소장 | 1944년 3월 20일 | 상하이 방면 근거지대 사령관 겸임 |
| 17 | 카츠노 미노루 | 소장 | 1944년 8월 18일 | 상하이 방면 근거지대 사령관 겸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