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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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속오군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군사력 강화를 위해 지방에 설치된 군사 조직이다. 조선 초기 양인개병제와 진관 체제의 붕괴, 제승방략의 한계로 인해 임진왜란에서 어려움을 겪은 후, 새로운 군사 편제의 일환으로 중앙의 오군영과 함께 창설되었다. 명나라의 척계광이 저술한 《기효신서》의 영향을 받아 오(伍)를 기본 단위로 하는 편제를 갖추었으며, 포수, 살수, 사수로 구성된 삼수병으로 훈련받았다. 속오군은 점차 양인이 이탈하고 천민 위주로 운영되면서 천예군으로 변질되었고, 병자호란 이후 영장제가 폐지되고 군역보다는 요역에 동원되는 등 그 성격이 변화하였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조선은 기존 군사 제도의 문제점을 절감하고 군제 개편의 필요성을 느꼈다.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에 빠진 뒤 조선은 새로운 군사 편제로 중앙에는 오군영을, 지방에는 속오군을 두기로 하였다. 속오군은 임진왜란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빠른 군대 육성을 위해 명나라 연병교관에게 군사 훈련을 받기도 하였다.[6]
속오법에 의한 1영의 완전 편제는 영장 1명, 파총 5명, 초관 25명, 기총 75명, 대총 225명, 병사 2,475명이었다.[8] 영장은 정3품의 당상관이었으나 조선 초기의 진관체제에 맞추어 인근 지방의 수령이 겸임하였다.[10]
2. 설립 배경
2. 1. 양인개병제와 진관 체제의 붕괴
조선 초기 군사 편제는 양인개병제(良人皆兵制)에 따라 모든 양인이 병역을 지는 것이었다. 16세에서 60세까지의 양인 남성은 정병(正兵)으로 편성되어[2] 8번 2삭상체(八番二朔相遞)로 운영되었다. 여덟 개로 나뉜 번(番)이 번갈아 가며 소집되었고, 한 번 소집되면 2개월을 근무하였다.[3]
그러나 양반들은 관직에 진출하거나 향교에 교원(校員)으로 등록되어 군역에서 빠져나갔다. 부유한 양인들 역시 대립(代立)이나 군포 납부를 통해 군역을 회피했다. 16세기 말이 되자 진관 체제는 유지되기 어려울 정도로 병역 부담이 일부 계층에 집중되어 유명무실해졌다.
조선은 제승방략을 통해 여러 진관에 분산된 병력을 전략적 요충지로 파견하는 방식으로 대응했지만,[4] 임시 방편에 불과했다. 임진왜란 발발 후, 순변사 이일, 경상감사 김수 등은 후방 부대의 지원 없이 일본군과 싸워야 했고, 병력 부족으로 패배했다.[5]
2. 2. 제승방략의 한계와 임진왜란
조선 초기의 군사 편제는 양인개병제(良人皆兵制)에 따라 모든 양인에게 병역을 부과하여 정병으로 삼고 이들을 진관 체계에 따라 배치하는 것이었다. 정병은 16세에서 60세까지의 양인 남성을 대상으로[2] 8번 2삭상체(八番二朔相遞)로 운영되어 여덟 개로 나뉜 번이 번갈아 가며 소집되었고, 한 번 소집되면 2개월을 근무하였다.[3] 그러나 양반들은 각종 관직에 나아가거나 향교에 이름을 올린 교원이라는 명목으로 군역에서 빠졌고, 부유한 양인들도 다른 사람을 대신 세우거나 군포를 대신 내고 빠져나가 16세기 말이 되면 진관 체제가 유지되지 못할 만큼 병역이 일부 계층에게만 과중하게 몰려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조선은 제승방략을 통해 여러 진관에 흩어져 있는 병력을 전략적 요충지로 파견하는 형태로 대응하였지만,[4] 임시 방편일 뿐이었다. 그 결과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순변사 이일, 경상감사 김수 등은 후방 부대의 지원 없이 일본군을 맞아야 했고 중과부적으로 패했다.[5]
2. 3. 군제 개편의 필요성 대두
조선 초기의 군사 편제는 양인개병제(良人皆兵制)에 따라 모든 양인에게 병역을 부과하여 정병으로 삼고 이들을 진관 체계에 따라 배치하는 것이었다. 정병은 16세에서 60세까지의 양인 남성을 대상으로[2] 8번 2삭상체(八番二朔相遞)로 운영되어 여덟 개로 나뉜 번이 번갈아 가며 소집되어 한 번 소집되면 2개월을 근무하였다.[3] 그러나 양반들은 각종 관직에 나아가거나 향교에 이름을 올린 교원이라는 명목으로 군역에서 빠졌고, 부유한 양인들도 다른 사람을 대신 세우거나 군포를 대신 내고 빠져나가 16세기 말이 되면 진관 체제가 유지되지 못할 만큼 병역이 일부 계층에게만 과중하게 몰려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조선은 제승방략을 통해 여러 진관에 흩어져 있는 병력을 전략적 요충지로 파견하는 형태로 대응하였지만[4] 임시 방편일 뿐이었다. 그 결과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순변사 이일, 경상감사 김수 등은 후방 부대의 지원 없이 일본군을 맞아야 했고 중과부적으로 패했다.[5]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에 빠진 뒤 조선은 군제 개편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꼈다.
3. 편제
3. 1. 척계광과 《기효신서》
척계광은 16세기 명나라의 무장으로 중국 남부에 출몰한 왜구와의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그가 지은 《기효신서》는 군대의 편성과 군사의 무예를 정리한 책으로 조선의 군사 편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7] 척계광은 《기효신서》 제1권 〈속오편〉에서 오(伍)를 기본 단위로 한 군대 편성을 제안하였다. 오는 한 명의 오장과 네 명의 대원을 묶어 다섯 명으로 구성되며 오늘날 분대의 편성과 닮아 있다. 오를 기초 단위로 한 상급 부대 체계는 다음과 같았다.
| 부대 단위 | 지휘관 | 구성 | 인원 | 비고 |
|---|---|---|---|---|
| 오(俉) | 오장(伍長) | 병사 | 5 인 | |
| 대(隊) | 대총(隊總) | 2 오 + 화병(火兵) 1인 + 대총 | 12 인 | |
| 기(旗) | 기총(旗總) | 3 대 + 기총 | 34 인 | |
| 초(哨) | 초관(哨官)[8] | 3 기 + 초관 | 103 인 | 초관은 종9품 |
| 사(司) | 파총(把摠)[9] | 5초 | 600 인 | 파총은 종4품 |
| 부(部) | 천총(千摠) | 3사 | 17세기 훈련도감 이후 새로 만들어진 편제이다.[8] | |
| 영(營) | 영장(營將) | 5사 또는 2부 | 약 3천 명 | 영장은 정3품[10] |
속오법에 의한 1 영의 완전 편제는 영장 1명, 파총 5명, 초관 25명, 기총 75명, 대총 225명, 병사 2,475명이었다.[8] 영장은 정3품의 당상관이었으나 조선 초기의 진관 체계에 맞추어 인근 지방의 수령이 겸임하였다.[10]
3. 2. 부대 단위
척계광은 《기효신서》 제1권 〈속오편〉에서 오(伍)를 기본 단위로 한 군대 편성을 제안하였다. 오는 한 명의 오장과 네 명의 대원을 묶어 다섯 명으로 구성되며 오늘날 분대의 편성과 닮아 있다. 오를 기초 단위로 한 상급 부대 체계는 다음과 같았다.[7]| 부대 단위 | 지휘관 | 구성 | 인원 | 비고 |
|---|---|---|---|---|
| 오(俉) | 오장(伍長) | 병사 | 5 인 | |
| 대(隊) | 대총(隊總) | 2 오 + 화병(火兵) 1인 + 대총 | 12 인 | |
| 기(旗) | 기총(旗總) | 3 대 + 기총 | 34 인 | |
| 초(哨) | 초관(哨官)[8] | 3 기 + 초관 | 103 인 | 초관은 종9품 |
| 사(司) | 파총(把摠)[9] | 5초 | 600 인 | 파총은 종4품 |
| 부(部) | 천총(千摠) | 3사 | 17세기 훈련도감 이후 새로 만들어진 편재이다.[8] | |
| 영(營) | 영장(營將) | 5사 또는 2부 | 약 3천 명 | 영장은 정3품[10] |
속오법에 의한 1영의 완전 편재는 영장 1명, 파총 5명, 초관 25명, 기총 75명, 대총 225명, 병사 2,475명이었다.[8] 영장은 정3품의 당상관이었으나 조선 초기의 진관 체계에 맞추어 인근 지방의 수령이 겸임하였다.[10]
3. 3. 병종
척계광은 《기효신서》 제1권 〈속오편〉에서 오(伍)를 기본 단위로 한 군대 편성을 제안하였다. 오는 한 명의 오장과 네 명의 대원을 묶어 다섯 명으로 구성되며 오늘날 분대의 편성과 닮아 있다. 오를 기초 단위로 한 상급 부대 체계는 다음과 같았다.| 부대 단위 | 지휘관 | 구성 | 인원 | 비고 |
|---|---|---|---|---|
| 오(俉) | 오장(伍長) | 병사 | 5 인 | |
| 대(隊) | 대총(隊總) | 2 오 + 화병(火兵) 1인 + 대총 | 12 인 | |
| 기(旗) | 기총(旗總) | 3 대 + 기총 | 34 인 | |
| 초(哨) | 초관(哨官)[8] | 3 기 + 초관 | 103 인 | 초관은 종9품 |
| 사(司) | 파총(把摠)[9] | 5초 | 600 인 | 파총은 종4품 |
| 부(部) | 천총(千摠) | 3사 | 17세기 훈련도감 이후 새로 만들어진 편재이다.[8] | |
| 영(營) | 영장(營將) | 5사 또는 2부 | 약 3천 명 | 영장은 정3품[10] |
1영의 완전 편제는 영장 1명, 파총 5명, 초관 25명, 기총 75명, 대총 225명, 병사 2,475명이었다.[8] 영장은 정3품의 당상관이었으나 조선 초기의 진관 체계에 맞추어 인근 지방의 수령이 겸임하였다.[10]
속오군은 포수(砲手), 살수(殺手), 사수(射手)의 삼수병(三手兵)으로 구분되어 각각 특기에 맞는 훈련을 받았다.[11]
3. 4. 지휘 체계
한 진영의 속오군을 지휘하는 사람은 정3품의 영장이었다. 영장은 진관 절제사 또는 동첨도위를 겸하여 기존의 진관 체계가 가지고 있던 방어 체계를 담당하였고, 각도의 감병사와 관찰사의 지휘를 받았다. 실제 여러 산성이나 진에 배속된 부대는 초 단위가 기본이었기 때문에 훈련과 임무 수행은 초 단위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12]4. 천예군으로의 변질
병자호란 이후 속오군은 양인이 빠져나가고 천민만 남아 천예군으로 변질되었다. 영조 초에는 양인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천민들만 소집되었으며, 이들은 군역보다는 각종 공사에 동원되는 요역의 형태로 복무했다.[11] 조선 후기 기본 법전인 《속대전》에서는 속오군을 아예 천예군으로 지칭하고 있다.[12]
4. 1. 양인 이탈과 천민 중심의 운영
속오군은 기존의 정병이 지던 군역 외에 별도의 소집과 훈련을 거치는 제도여서 군역 가중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그 결과 점차 양인은 속오군에서 빠져나가고 천민만이 남는 형국이 되었고 소진 훈련의 횟수도 줄어들었다. 병자호란 뒤 청나라의 군축 압박 속에 영장제가 폐지되었고[12], 영조 초에 이르면 양인은 모두 빠져나가고 천민만이 소집되었으며 군역보다는 각종 공사 등에 동원되는 요역의 모습을 띄게 되었다.[11] 그 결과 조선 후기의 기본 법전인 《속대전》에서는 아예 속오군을 천예군이라 지칭하기에 이른다.[12]4. 2. 병자호란 이후의 변화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의 군축 압박 속에 영장제가 폐지되었고[12], 영조 초에는 양인이 모두 빠져나가고 천민만이 소집되어 군역보다는 각종 공사 등에 동원되는 요역의 모습을 띄게 되었다.[11] 그 결과 조선 후기 기본 법전인 《속대전》에서는 아예 속오군을 천예군이라 지칭하기에 이른다.[12]4. 3. 《속대전》의 기록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의 군축 압박 속에 영장제가 폐지되었고,[12] 영조 초에 이르면 양인은 모두 빠져나가고 천민만이 소집되었으며, 군역보다는 각종 공사 등에 동원되는 요역의 모습을 띄게 되었다.[11] 그 결과 조선 후기의 기본 법전인 《속대전》에서는 아예 속오군을 천예군이라 지칭하기에 이른다.[12]참조
[1]
웹사이트
군제
http://encykorea.aks[...]
[2]
웹사이트
누가 노인인가
http://contents.hist[...]
[3]
웹사이트
정병
http://dh.aks.ac.kr/[...]
[4]
웹사이트
진관체제의 변화와 제승방략
http://contents.hist[...]
[5]
웹사이트
군역
http://encykorea.aks[...]
[6]
논문
조선 선조대 束伍軍의 편성과 明 鍊兵敎師의 역할
https://www.kci.go.k[...]
[7]
웹사이트
기효신서
https://www.nfm.go.k[...]
국립민속박물관
[8]
웹사이트
초관
http://dh.aks.ac.kr/[...]
[9]
웹사이트
파총
http://dh.aks.ac.kr/[...]
[10]
웹사이트
영장
http://dh.aks.ac.kr/[...]
[11]
웹사이트
속오군
http://contents.hist[...]
[12]
웹사이트
속오군
http://encykorea.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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