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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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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훈련도감은 임진왜란 중인 1593년, 수도 방어와 국왕 호위를 위해 설치된 조선의 중앙 군사 조직이다.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바탕으로 삼수병 체계를 도입하여, 포수, 사수, 살수를 훈련시켰다. 훈련도감은 임진왜란 이후 상설 기구로 전환되어 후금(청)에 대한 방비를 주요 역할로 삼았으며, 1882년 신식 군대인 별기군 창설과 함께 폐지될 때까지 약 1,000명 규모의 직업 군인 조직으로 유지되었다. 훈련도감은 수도 방어, 국왕 호위, 궁궐 경비, 치안 유지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으며, 군사 훈련 외에도 무기 제조, 성벽 보수, 동전 주조에도 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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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도감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군사 조직 정보
조선의 문장
조선의 문장
명칭훈련도감
영문 명칭Military Training Agency
국가조선
소속조선군
종류수도군
역할훈련 부대
규모10,000명
지휘 구조오군영
주둔지한양
해산1884년
조선 해군의 깃발
깃발
상세 정보
창설 연도1596년

2. 배경

조선은 초기에는 오위제를, 중기에는 진관 체제를 운영했다. 진관 체제는 지역 방어에 유리했지만, 넓은 지역 담당으로 병력 집중과 신속 대응이 어려웠다. 이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게 주요 길목을 쉽게 내주는 원인이 되었고, 조선은 수도 방비와 국왕 호위를 위한 중앙군 필요성을 절감했다.[26][27]

조선은 양인개병제(良人皆兵制)를 통해 모든 건강한 남자를 병사로 삼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군역 대신 돈을 내는 경우가 많아져 16세기 말에는 군사력이 약화되었다.[1]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발발 후, 조선은 새로운 군사 체계의 필요성을 느꼈다. 1593년(선조 26년) 7월, 명나라 장수 낙상지의 진영에서 조선군 포수 훈련이 시작되었고, 이는 훈련도감 설치의 계기가 되었다.[28] 8월, 훈련도감이 설치되고 유성룡이 도제조로 임명되었다.[28]

훈련도감은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바탕으로 삼수병(포수, 사수, 살수) 체계를 도입했다. 척계광은 명나라 남부에서 왜구와 싸우며 이 전법을 고안했고, 조선도 이를 통해 일본에 대한 전술적 우위를 확보하고자 했다.[29] 포수가 주력이었고, 사수와 살수는 보조 역할이었다.[30]

훈련도감의 '도감(都監)'은 고려-조선 시대 임시 기구를 의미한다.[31] 초기에는 임시 기구, 1천여 명 규모였으나,[30] 임진왜란 이후 상설 기구가 되었다.

3. 조직

훈련도감의 최고 지휘관은 명목상 의정부의 삼정승 가운데 한 명이 돌아가며 맡는 도제조(都提調)였고, 호조판서와 병조판서는 당연직 제조(提調)를 겸임했다.[30][38] 훈련도감이 병조가 아닌 의정부 직속 독립 중앙군이라는 것은 도제조가 삼정승이라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실질적인 훈련도감 책임자는 종2품 훈련대장이었다. 초기 훈련대장의 주된 임무는 포수 육성과 전력 유지였으나, 점차 수도와 궁궐 방어로 역할이 변화하면서 훈련대장은 국왕 행행(行幸) 시 도성에 남으면 유도대장(留都大將), 국왕을 수행하면 호위 책임자인 수가대장(隨駕大將)을 맡는 등 근위대장 성격이 강해졌다.[39] 이러한 위상 변화에 따라 훈련대장은 비변사에 배석하여 정치적 발언권을 가졌고,[40] 국왕과 신료 사이의 균형과 견제를 조정하는 위치까지 올랐다.[39]

임진왜란1593년 유성룡의 제안으로 설치된 훈련도감은 1882년 폐지될 때까지 존속했다. 초기에는 전술 훈련용 병서 출판이 기획되었으나, 금속 활자가 일본군에게 약탈당하고 신속한 출판이 필요했기에 목제 활자가 제작되었다. 이 활자는 병서뿐 아니라 자금 마련을 위한 일반 서적 출판에도 활용되었으며, 훈련도감 활자본이라 불린다.

군사 훈련원 기병대

3. 1. 병력

훈련도감은 급료를 받는 장번군(長番軍)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번상군(番上軍)은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했다.[30] 훈련도감 병사들은 유민(流民)이나 기민(飢民)을 흡수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모집되었으며, 양인뿐 아니라 천민, 승려도 군사로 채용되었다. 천민들은 훈련도감의 훈국병(訓局兵)이 되는 것을 면천의 기회로 여겼다.[30] 훈국병은 급료로 쌀 여섯 말을 받았으며,[28] 이는 당시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약 240푼이었다. 훈국병들은 급료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왕십리 인근에서 배추를 재배하는 등 부업을 겸하는 것이 관례였다.[36]

훈련도감의 초기 병력은 약 1천 명이었으나, 병자호란 직전에는 5천 명으로 늘었고,[30] 1662년(현종 3년)에는 7천 명까지 증가했다가 이후 조선 후기 내내 5천 명 정도를 유지하였다.[27]

3. 2. 관제

훈련도감의 명목상 수장은 의정부의 삼정승 가운데 한 명이 돌아가며 맡는 도제조(都提調, 정1품)였다.[30] 실질적인 책임자는 훈련대장(종2품)으로, 다른 중앙 관직과 달리 임기가 길어 중앙군의 전력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30] 훈련대장은 비변사에 배석하여 정치적 발언권을 가졌고,[40] 국왕과 신료 사이의 균형을 조정하는 역할도 수행했다.[39] 인조 반정 성공 요인 중 하나는 당시 훈련대장 이흥립을 포섭한 것이었다는 평가가 있다.[30]

부사령관 겸 참모 역할은 중군(종2품)이 맡았다.[42]

정조 시대 훈련도감의 관직 체계는 시기에 따라 정원에 변동이 있었으며, 아래 표와 같다.

훈련도감의 관제
관직품계인원비고
도제조정1품1명의정부 삼정승 가운데 한 명이 겸직
제조정2품2명호조판서와 병조판서가 겸직
훈련대장종2품1명실질적 최고 책임자
중군종2품1명부사령관 및 참모 역할
별장정3품2명좌별장, 우별장
천총정3품2명좌천총, 우천총
국별장정3품3명창덕궁 영숙문(永肅門)과 숭지문(崇智門) 숙위, 국출신 지휘
파총종4품6명사(司)의 지휘관
초관종9품34명초(哨)의 지휘관
종사관종6품6명재정 관리 등 실무 책임자
지구관-10명하급 실무 무관
기패관-20명일반 병사에서 선발한 하급 무관
별무사-68명기마병 관리 하급 무관
국출신-150명숙위 담당 하급 무관
군관-17명명예직
권무군관-50명명예직


  • 별장: 궁궐 방비와 왕 호위를 위한 기마대를 관리했다.[43]
  • 천총: 정3품으로 병사(兵使)나 수사(水使)를 거친 자를 주로 등용했으며, 임기는 평균 1년이었다.[44]
  • 국별장: 궁궐 안팎을 경호하는 숙위(宿衛)를 담당했고,[45] 창덕궁의 영숙문(永肅門)과 숭지문(崇智門)을 지켰다. 임기는 1년으로, 임기 후에는 승진시켜주는 것이 관례였다.[46]
  • 파총: 사(司)의 지휘관이다.[47] 조선 시대 군사 편제는 영(營) - 사(司) - 초(哨) - 기(旗) - 대(隊) - 오(伍) 순이었으며,[48] 파총이 관할하는 사(司)의 최대 편제는 625명이었다.
  • 초관: 각 초(哨)의 지휘관이다.[28]
  • 종사관: 재정 및 군수 등의 관리를 담당했다. 6명 중 4명은 훈련대장이 임명했고, 2명은 병조와 호조에서 파견했다. 순조 시기 화포와 화약 제조 기능이 혁파되면서 4명으로 줄었다.[28]
  • 지구관(知彀官): 원래 활 쏘는 훈련 담당관이었으나, 이후 군사 실무를 담당하는 하급 무관이 되었다.[49]
  • 기패관(旗牌官): 군졸 중 시험으로 선발, 지휘관 명령 전달 및 병졸 훈련 담당 하급 무관이다.[50]
  • 별무사(別武士): 군졸 중 기예가 있는 자를 선발, 기마병 관리 하급 무관이다. 총 68명이었다.[51]
  • 국출신(局出身): 원래 남한산성에서 국왕 호위 병사들이다. 병자호란 이후 국출신으로 불렸다. 이후 국왕 근위대로 숙위 임무를 수행했다. 처음 1,374명이었으나 점차 줄어 1676년(숙종 2년) 1국 당 50명씩 3개 국, 150명 정원이었다. 장용위에서 차출하기도 했으나 순조 시기 혁파, 다시 3국으로 운영되었다.[52]
  • 군관: 군포 등으로 군역을 대신하는 대신 받는 명예직이다. 실제 군역을 서더라도 유명무실한 업무를 받았다.[53]
  • 권무군관: 양반 대상 병역으로,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삼군영에 설치. 양반 자제에게 군관 직책을 준 명예직으로 실제 업무는 없었다. 무관이 되고자 할 때 시험을 간소화해주는 특혜가 있었다.[54]

4. 재정

초창기 훈련도감은 군인들에게 정기적인 훈련을 제공하고, 일정한 시기는 아니었지만 매달 봉급을 지급했다. 군인들을 평가했으며, 의복비와 같은 수당을 지급했다. 또한, 군인들의 아내에게 식량을 지급했다('처료(妻料)'). 그러나, 훈련도감 자체가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된 군영이었기 때문에 이를 유지하기 위한 일관된 재정적 조치가 없었다. 따라서, 안정적인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정부는 생산을 확대하고 순조 재위 말년에 '삼수량(三手糧)'으로 알려진 자급자족 시스템을 구축하려 했다.[2]

그러나 '삼수량' 시스템의 시행에도 불구하고 정규 군인들의 봉급을 유지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훈련도감의 모든 군대는 예비군에 속했기 때문에, 그들이 받는 월급은 국가 재정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군대를 감축하고 심지어 훈련도감을 폐지하려는 논의가 여러 차례 있었다.[1] 따라서, 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6개 도에서 37,194명의 군인에게 포(砲)를 지키는 '포보(砲保)' 임무를 부여하고, 추가로 7,000명의 군인에게 보급을 보호하는 '향보(餉保)' 임무를 부여했다. 이들에게서 보상으로 짚단 2개 또는 쌀 12를 징수했다. 또한, 훈련도감의 군인 수를 줄이고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장기간 근무하는 '장번(長番)'을 대체하는 훈련 부대를 설립했다. 그러나 이는 '금위영'의 창설로 이어졌고, 훈련도감이 오군영 체제가 수립된 후에도 핵심 방어 기지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군사비를 효과적으로 줄이지 못했다.[2]

영조 재위 기간 동안 군대는 '균역청'을 통해 자금을 지원받았으며, 이를 통해 가구당 말 공급의 부담을 짚 1단으로 줄였다. 이러한 재정적 기반을 바탕으로 기병에게 쌀 10두와 보리 9두를 지급했고, 말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보리 9두를 지급했다. 그러나 군인들이 처음 훈련도감에 들어올 때는 보리 4두만 지급받았으며, 평가를 통해 보리 7두에서 9두 사이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보리 9두 이상은 지급받지 못했다.[2]

5. 임무

훈련도감은 수도 방어, 국왕 호위, 궁궐 경비, 치안 유지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 왕이 행차할 때 호위 임무를 수행했으며, 도성 내외의 방어를 담당했다. 무기 제조, 성벽 보수, 동전 주조 등에도 관여했다.[1]

훈련도감은 조선 후기 5군영 중 하나로, 모든 병력이 급여를 받는 전문 군인으로 복무했기 때문에 정예 부대로 인정받았다.[1] 이들은 "급료병"으로 불렸으며, 왕의 호위병 역할뿐만 아니라 수도와 국경의 방어자 역할도 수행하여 5군영의 핵심이 되었다.[4]

주요 임무는 왕의 어좌(전좌) 주변을 경비하고, 궁궐 문을 순찰하며, 궁궐 내부 경비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왕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 훈련도감이 그의 안전을 책임졌고, 왕이 사신을 맞이하거나, 왕릉에 참배하거나, 온천에 행차할 때 행렬을 이끌었다. 또한 행렬이 잠시 멈출 때 왕의 가마를 사방으로 호위하는 역할도 했다.[1]

훈련도감 군인들은 군사적 임무 외에도 중요한 정부 시설을 경비하고, 공공 질서를 유지하며, 법 집행을 지원했다. 또한 의례 행사에 참여하여 왕권의 상징으로 봉사하기도 했다.[1]

한양(서울)은 정부 관료들이 거주하는 곳이었으므로, 그 방어를 보장하는 것이 필요했다. 훈련도감의 설립과 이후 어영청, 금위영의 설치로 이 3개 군영(삼군영)은 수도의 각 구역을 경비하는 책임을 맡았다. 훈련도감 군인들은 시간과 상관없이 방어 시설에 주둔하며 도적을 체포하고 공공 질서를 유지했다. 또한 화재를 예방하는 역할도 했다.[1]

숙종 시기에는 삼군문(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이 수도 방어를 분담했으며, 훈련도감은 수도의 북서쪽 방어를 담당했다. 숙정문(동쪽)에서 창의문까지, 서쪽으로는 돈의문까지를 관할했다. 이 지역은 평안도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북쪽 침략에 가장 가까웠고, 북한산성과 연결되는 중요한 지역이었다.[1]

훈련도감은 조총과 화약과 같은 무기를 제조하고, 북한산성을 포함하여 경비하는 지역을 유지하고 수리했다. 성벽이 손상되면, 그들이 수리를 책임졌다. 훈련도감은 동전 주조에도 참여했는데, 이는 그들이 동전 생산에 필요한 금속, 숙련된 장인, 그리고 주조된 동전을 보호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며, 이는 수입원이 되었다.[1]

6. 훈련

1593년 8월(선조 26년), 훈련도감 설치가 확정되었다. 훈련도감은 처음에는 정식 군영이 아닌 임시 기구로 설치되었다. 주로 대포를 사용하는 포병대가 가장 먼저 편성되었고, 이어 검술가(살수, 殺手)와 뛰어난 궁수(사수, 射手)가 포함되었다. 선조는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궁술, 포술, 무술 훈련 방안을 논의하고 훈련했다.[4] 훈련도감의 훈련 방법은 척계광(戚繼光)의 병서 《기효신서(紀效新書)》에 묘사된 포술(포법, 砲法), 궁술(사법, 射法), 검술(감법, 砍法)의 삼수기법(三手技法)을 기반으로 했다.[4] 평양성 전투에서 화기(火器)의 효과를 인식한 조선은 화기의 생산과 운용에 힘썼으며, 이에 맞는 군사 전술을 모색했다.[4]

1593년 9월, 선조와 류성룡이 훈련도감을 설치하면서 단일 군사 캠프로 시작되었다. 이때 명나라 장군 척계광이 저술한 "기효신서"를 참고하여 삼수병(三手兵) 체제(총, 활, 칼, 창을 사용하는 병사)가 형성되었다.[5] 훈련도감은 군대를 부대와 중대로 세심하게 나누었다. 중대에는 궁수, 조총병, 검객, 창병 분대가 있었다. 훈련도감은 한국 각 지역에 군사 사단을 설치하고 성에 대대를 주둔시켰다. 양반과 노비가 징집 대상이었다. 모든 남성은 무기를 훈련하고 익숙해지기 위해 군 복무를 해야 했다.[3] 이 무렵, 무술 학자 한교(韓嶠)는 척계광기효신서를 바탕으로 무술 교범 무예제보를 저술했다.[3]

훈련도감의 병사들은 엄격한 군사 훈련을 받았다. 그들은 다양한 무술, 궁술, 승마 및 기타 군사 기술을 훈련받았다. 훈련도감의 목적은 전쟁이나 비상시 동원할 수 있는 숙련된 상비군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훈련도감의 병사들은 정예 부대로 간주되었으며, 일반 병사보다 더 높은 수준의 규율과 기술을 갖추도록 기대되었다.[1]

신병 훈련 기관의 훈련 교범

7. 무예청

정조의 수원 화성 행차를 수행하는 무예별감


무예청(武藝廳)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위했던 군사 훈련 기관인 훈련도감의 부서였다. 무예청은 다섯 개의 궁궐을 경비하고 국왕을 근접 경호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무술에 숙련된 사람들로 구성된 조직이었다. 무예청 소속 장교들은 무예별감 또는 무감(武監)이라고 불렸으며,[9] 무관(武官)으로도 알려져 있었다.[10]

무예청의 설립 과정은 순조의 저서인 『순제고(純齋稿)』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무예청은 훈련도감에서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가진 인재들을 선발하여 구성되었다.[11][12]

8. 해체

1882년(고종 19년) 별기군이라는 신식 군대가 창설되면서 훈련도감은 폐지되었다. 훈련도감 군인들은 신식 군대에 반대하고 대원군을 지지하며 임오군란을 일으켰으나, 이 반란은 빠르게 진압되었다.[1]

참조

[1] 웹사이트 조선 후기 최고의 정예부대 http://contents.hist[...]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 웹사이트 훈련도감 http://contents.hist[...]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3] 웹사이트 훈련도감(訓鍊都監) http://encykorea.aks[...]
[4] 웹사이트 임란의 경험에서 나온 조선 후기의 수도 방어 체제 http://contents.hist[...]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023-11-01
[5] 뉴스 도성을 지켰던 삼군영 군인은 모두 몇 명? https://www.koya-cul[...] Woori Culture Newspaper 2023-11-01
[6] 뉴스 ‘한양을 지켜라’ 조선 삼군영 군인의 삶 엿보기 http://www.sijung.co[...] Sijeong Ilbo 2023-11-01
[7] 뉴스 ‘한양을 지켜라~ 삼군영 소속 한 군인 집안의 고군분투기 https://www.seoulcit[...] Seoul City 2023-11-01
[8] 웹사이트 영조 개천을 치다 https://www.sisul.or[...] Seoul Facilities Corporation 2023-11-01
[9] 웹사이트 무예청(武藝廳)이란? https://sippalki.com[...] sippalki.com 2023-10-24
[10] 웹사이트 무예별감 (武藝別監) https://encykorea.ak[...]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2023-10-24
[11] 웹사이트 [신성대 칼럼] 여성들도 병역을 허(許)하라? http://www.ggdaily.k[...] Gyeonggi Daily 2023-10-24
[12] 웹사이트 무예별감 (武藝別監) https://www.doopedia[...] Doopedia 2023-10-27
[13] 웹사이트 훈련도감[訓練都監] https://terms.naver.[...] NAVER 2021-02-25
[14] 웹사이트 訓練都監 https://ko.wikisourc[...] 위키소스 2021-02-25
[15] 웹사이트 分類補註李太白詩文集 https://www.tcl.gr.j[...] 天理大学附属天理図書館
[16] 웹사이트 武芸諸譜翻訳続集 https://www.museum.g[...] 한국国立中央博物館
[17] 웹사이트 순라군 https://encykorea.ak[...]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8] 웹사이트 훈련도감 http://dh.aks.ac.kr/[...] 실록위키
[19] 논문 훈련 도감을 설치하고 유성룡을 도제조로 삼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1594-02-01
[20] 웹사이트 삼수병 http://contents.hist[...] 우리역사넷
[21] 웹사이트 오군영 http://contents.hist[...] 한국사연대기
[22] 웹사이트 한양을 지켜라_삼군영 소속 한 군인 집안의 고군분투기 https://museum.seoul[...] 서울역사박물관
[23] 웹사이트 임오군란 https://encykorea.ak[...]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4] 논문 훈련 도감을 혁파하도록 하다 https://sillok.histo[...] 조선왕조실록 1882-10-02
[25] 웹사이트 오위도총부 https://encykorea.ak[...]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6] 웹사이트 진관 체제 http://contents.hist[...] 우리역사넷
[27] 웹사이트 훈련도감 http://contents.hist[...] 우리역사넷
[28] 웹사이트 훈련도감 https://encykorea.ak[...] 한국문화대백과사전
[29] 웹사이트 삼수병(三手兵) http://dh.aks.ac.kr/[...] 실록위키
[30] 웹사이트 훈련도감 http://contents.hist[...] 한국사연대기
[31] 웹사이트 도감 https://encykorea.ak[...]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2] 웹사이트 누가 노인인가 http://contents.hist[...] 우리역사넷
[33] 웹사이트 정병 http://dh.aks.ac.kr/[...] 실록위키
[34] 웹사이트 삼수미(三手米) http://dh.aks.ac.kr/[...] 실록위키
[35] 웹사이트 화폐박물관 제1전시실 https://museum.komsc[...] 한국조폐공사박물관
[36] 웹사이트 임오군란 참가층의 구성원과 동원조직 http://contents.hist[...] 신편한국사
[37] 웹사이트 무록관 https://encykorea.ak[...]
[38] 웹사이트 제조 https://encykorea.ak[...]
[39] 웹사이트 훈련대장 http://dh.aks.ac.kr/[...]
[40] 웹사이트 비변사 https://encykorea.ak[...]
[41] 웹사이트 등단록 https://encykorea.ak[...]
[42] 웹사이트 중군 http://people.aks.ac[...]
[43] 웹사이트 별장 http://dh.aks.ac.kr/[...]
[44] 웹사이트 천총 http://people.aks.ac[...]
[45] 웹사이트 숙위 http://dh.aks.ac.kr/[...]
[46] 웹사이트 국별장 https://encykorea.ak[...]
[47] 웹사이트 파총 https://encykorea.ak[...]
[48] 웹사이트 군제 https://encykorea.ak[...]
[49] 웹사이트 지구관 http://dh.aks.ac.kr/[...]
[50] 웹사이트 기패관 http://dh.aks.ac.kr/[...]
[51] 웹사이트 별무사 http://dh.aks.ac.kr/[...]
[52] 웹사이트 국출신 http://dh.aks.ac.kr/[...]
[53] 웹사이트 군관 http://dh.aks.ac.kr/[...]
[54] 웹사이트 권무군관 http://dh.aks.ac.kr/[...]
[55] 문서 훈련도감 폐지 후에 대한제국 의 무관학교 건물로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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