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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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손진태는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시기에 활동한 민속학자이자 역사학자이다.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민속학회를 창설하여 학회지 《조선민속》을 창간했으며,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 강사, 보성전문학교 도서관장을 역임했다. 광복 후 서울대학교 교수를 거쳐 문교부 차관보와 서울대학교 학장을 지냈으나 한국 전쟁 중 납북되었다. 그는 신민족주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국 역사를 연구하여 《조선 민족문화의 연구》, 《조선 민족사 개론》 등을 저술했으나,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 논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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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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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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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손진태 |
출생일 | 1900년 12월 28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조선 경상남도 동래군 |
국적 | 한국 |
직업 | 역사학자 민속학자 |
학력 | 와세다 대학 |
학문 활동 | |
분야 | 역사학 민속학 |
기타 | |
웹사이트 | 한국과학기술학술대회 |
참고 자료 | Young Jean Lee’s Unsafe Spaces (Published 2018) |
2. 생애
손진태는 1927년 와세다 대학교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1930년부터 동양문고 사서로 근무하며 학문 활동을 시작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조선민속학회 창설(1932년), 학회지 《조선민속》 창간(1933년), 진단학회 발기 참여(1934년) 등 민족 문화 연구에 힘썼다. 또한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 강사(1934년), 보성전문학교 도서관장(1937년)을 지내며 교육에도 기여했다.
광복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교수(1946년~1948년) 및 학장(1949년, 1950년)을 역임하고, 문교부 차관보 겸 편수국장(1948년~1949년)으로 활동했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 민족문화의 연구》, 《조선 민족사 개론》 등이 있다. 한국 전쟁 중이던 1950년 9월 납북되었으며, 1960년대 중반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2. 1. 학창 시절과 민속학 연구
1927년 와세다 대학교 법문학부를 졸업했다. 이후 1930년부터 1934년까지 동양문고 사서로 근무했다. 1932년 조선민속학회를 창설하였고, 1933년에는 학회지 《조선민속》을 창간했다. 1934년에는 진단학회의 발기인 가운데 한 명으로 참여했으며, 같은 해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 강사를 맡았다. 1937년에는 보성전문학교 초대 도서관 관장을 지냈다.2. 2. 교육 활동과 저술
1927년 와세다 대학교 법문학부를 졸업한 후, 1930년부터 1934년까지 동양문고 사서로 근무하며 학문 연구의 기반을 다졌다. 일제 강점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민족 문화 연구에 힘써 1932년 조선민속학회를 창설하고 이듬해인 1933년에는 학회지 《조선민속》을 창간했다. 1934년에는 진단학회 창립에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같은 해인 1934년부터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에서 강사로 활동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고, 1937년에는 보성전문학교 초대 도서관 관장을 맡아 교육 환경 개선에도 기여했다.
광복 이후에는 학계와 교육 행정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1948년부터 1949년까지는 문교부 차관보 겸 편수국장으로 교육 정책 수립에 참여했다. 이후 1949년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학장, 1950년에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장을 역임하며 대학 발전에 기여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 민속학과 역사학 연구의 중요한 성과로 평가받는 《조선 민족문화의 연구》와 《조선 민족사 개론》 등이 있다.
한국 전쟁 중이던 1950년 9월에 납북되어 안타깝게 학문 활동을 이어가지 못했으며, 1960년대 중반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2. 3. 광복 이후 활동과 납북
광복 이후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 교수를 지냈다. 이후 정부 수립과 함께 1948년부터 1949년까지 문교부 차관보 겸 편수국장을 역임했다. 다시 학계로 돌아와 1949년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학장, 1950년에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장을 맡았다.
손진태는 강사 시절 민족사학 및 사회경제사학 학자들과 교류하며, 특히 안재홍의 역사학에 영향을 받았다.[2] 그는 실증주의 역사학의 방법론도 접했지만, 민족사학의 관점에서 한국사를 새롭게 체계화하려는 시도를 통해 신민족주의 이론을 정립했다.[2] 이 이론은 그의 주요 저서인 《조선민족사개론》(1948)과 《국사대요》(1949)의 바탕이 되었다.[2] 그의 신민족주의는 폐쇄적이고 차별적인 기존 민족주의를 비판하며, 세계적으로 개방적이고 국내적으로 평등한 '민주주의적 민족주의'를 지향했다.[2] 이러한 역사관은 민족 내부의 사회 발전과 외부 민족과의 관계를 통합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로 평가받는다.[2]
한국 전쟁 중이던 1950년 9월에 납북되었으며, 1960년대 중반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3. 역사 연구 및 평가
그러나 그의 학문 활동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어로 작품 활동을 하며 '내선일체' 이념을 뒷받침했다는 지적이 있으며, 이는 그의 학문적 평가에 논쟁의 여지를 남긴다.민속학자 손진태, 비평가 조연현도 '친일 작품'
3. 1. 신민족주의 역사관
강사로 활동하던 시기, 손진태는 민족사학 및 사회경제사학 분야의 여러 학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특히 안재홍의 역사학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2] 그는 당시 실증주의 역사학자들과도 교류했지만, 민족의 역사 이론, 즉 민족사관에 기초하여 한국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종합하고 체계화하려는 목표를 세웠다.[2] 이러한 노력은 신민족주의 이론으로 구체화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민족사개론》(1948)과 《국사대요》(1949)를 저술하였다.[2]
손진태가 제시한 신민족주의 이론은 기본적으로 안재홍의 이론과 유사한 맥락을 가진다. 그는 전통적인 민족주의가 민족 내부에 차별을 내포하고 있으며,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민족주의는 자본가의 이익을 옹호하는 경향이 있어 쇄국적이고 배타적이며 독선적인 성격을 벗어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형태의 민족주의는 민족사가 세계사의 일부로 편입되고 민족이 세계 속에서 상호작용하는 현대 국제사회에서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고 보았다.[2] 따라서 그는 세계 여러 민족에 대해서는 개방적이고 세계적인 태도를 취하며, 국내의 다양한 사회 계층에 대해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평등하고 친화적인 관계를 지향하는 새로운 민족주의를 주장했다. 이를 '민주주의적 민족주의', 즉 '신민족주의'라고 명명했다.[2]
손진태의 신민족주의 역사 이론은 다음과 같이 평가받는다.[2]3. 2. 학계 평가
손진태는 강사 시절 민족사학 및 사회경제사학의 여러 학자들과 교류했으며, 특히 안재홍의 역사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또한 당대 실증주의 역사학자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나, 그는 민족사학의 역사 이론, 즉 민족사관을 바탕으로 기존 역사학을 새롭게 종합하고 체계화하고자 했다. 이러한 노력은 신민족주의 이론에 기반한 한국사 연구로 이어져 《조선민족사개론》(1948)과 《국사대요》(1949)를 저술하는 결실을 맺었다.
그의 신민족주의 이론은 안재홍의 이론과 기본적인 맥락을 같이한다. 그는 전통 사회의 민족주의가 민족 내부의 차별을 내포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민족주의는 자본가의 이익을 옹호하며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경향을 벗어나기 어렵다고 보았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현대 국제사회에서 유지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세계 여러 민족에 대해 개방적이고 세계적이며, 국내 사회 계층 간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평등하고 친화적인 관계를 지향하는 '민주주의적 민족주의', 즉 신민족주의를 제창했다.
손진태가 도달한 민족사 이론은 대내적으로는 민족 구성원 전체의 계급적 모순과 의식 문제를 사회 발전의 틀 안에서 파악하고, 대외적으로는 다른 민족과의 투쟁 및 문화 교류를 통한 민족 문화의 성장을 국내 사회 발전 논리와 연결하여 민족 전체의 성장과 발전 과정 속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로 평가받는다.[2]
한편, 그의 학문 활동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박 교수는 손진태가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어로 작품 활동을 하며 '내선일체' 이념을 꾸준히 뒷받침하는 글을 썼다고 지적하며, 이는 '민속학 1세대'라는 그의 명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평가했다. 민속학자 손진태, 비평가 조연현도 '친일 작품'
4. 친일 행적 논란
손진태의 학문적 활동 중 일부는 일제강점기 당시의 행적과 관련하여 친일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특히 그가 일본어로 작품을 발표하고 민속 관련 글을 쓴 활동 일부가 결과적으로 '내선일체'와 같은 일본 제국주의 이념에 동조하거나 이를 뒷받침했다는 비판적 시각이 존재한다. 이러한 평가는 그의 학문적 업적과는 별개로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4. 1. 친일 행적 내용
오마이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한 연구는 경상남도 지역 문인들의 친일 행적을 분석하면서 손진태를 언급하였다. 이 연구는 손진태가 김병호 등과 함께 일본어로 작품을 쓴 '내지(內地, 일본 본토) 문단' 활동 문인으로 분류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특히, 민속학 분야의 주요 인물로 평가받는 손진태가 '친일 작품'을 썼다는 점을 새롭게 제기했다. 손진태는 1926년부터 1942년까지 평론, 민요 번역, 민속 관련 글을 발표했는데, 이 활동이 결과적으로 '내선일체' 이념을 꾸준하게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로 해당 연구는 손진태를 '민속학의 1세대'로 평가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민속학자 손진태, 비평가 조연현도 '친일 작품' - 오마이뉴스
4. 2. 비판적 시각
손진태는 일제강점기 시기 친일 행적으로 인해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박아무개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손진태는 일본어로 작품을 발표하며 일본 본토 문단에서 활동했으며, 그의 평론, 민요 번역, 민속 관련 저술 활동 중 일부는 '내선일체' 이념을 꾸준히 뒷받침한 성격을 띠었다고 평가된다. 이러한 행적 때문에 손진태를 '민속학의 1세대'로 평가하는 것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참조
[1]
뉴스
Young Jean Lee’s Unsafe Spaces (Published 2018)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2018-07-18
[2]
서적
글로벌 세계 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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