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의
1. 개요
송종의는 1941년 평안남도 중화군 출생으로, 용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제1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육군 법무관, 검사를 거쳐 대검찰청 차장검사,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김영삼 정부에서 법제처장을 지냈다. 퇴임 후에는 밤 농사를 지으며 천고법치문화재단을 설립하여 법조인 후원에 힘썼다.
| 이름 | 송종의 |
|---|---|
| 로마자 표기 | Song Jong-ui |
| 출생일 | 1941년 |
| 직업 | 법조인 |
| 경력 | 대검찰청 차장검사 법제처 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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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출생 -
신영복
신영복은 대한민국의 경제학자, 사회운동가, 대학교수, 저술가로서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수감 생활 중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집필하여 반향을 일으켰고, 출소 후 관계론을 중심으로 사상을 발전시키며 독특한 서체로 민중과 소통했으며,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
1941년 출생 -
도정일
도정일은 영문학자이자 사회운동가로, 경희대학교 교수, 도서관장,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문화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 등을 역임했으나, 2016년 학력 위조 논란 이후 이를 인정했고, 저서로는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등이 있다. -
대한민국의 대검찰청 차장검사 -
박종철 (법조인)
박종철은 1962년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 후 검사로 임용되어 검사장,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 법무부 검찰국장 등을 역임하고 제25대 검찰총장에 취임했으나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사퇴 후 변호사로 활동한 대한민국의 법조인이다. -
대한민국의 대검찰청 차장검사 -
허형구
허형구는 김해 출신의 법조인으로, 검사,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검찰총장 재임 중 봉사하는 검찰상을 정립하고 선거법 위반 사범을 수사했으나 저질 연탄 사건 수사로 경질되었다. -
대한민국의 법제처장 -
박일경
박일경은 일제강점기에 학위를 받고 함평군수, 서울대학교 조교수를 거쳐 법제처장, 문교부 장관 등을 역임했으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받았다. -
대한민국의 법제처장 -
김외숙
2. 생애
1941년 평안남도 중화군에서 태어나 용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63년 제1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육군 법무관을 거쳐 1969년 검사로 임용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한학에 능통하여 검사 시절 '송도사', '한학도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검사로 재직하며 법무부 법무과장, 서울지방검찰청 특수부장, 부산지방검찰청 차장검사, 법무부 기획관리실장, 대검찰청 강력부장, 대전지방검찰청 검사장,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 대검찰청 차장검사 등 주요 보직을 역임했다. 이 과정에서 오대양 집단 자살 사건, 인혁당 사건, 민청학련 사건, 노무현 변호사 구속영장 결재, 형제복지원 사건 등 여러 중요 사건과 관련을 맺었다.
1995년 대검찰청 차장검사를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나려 했으나,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법제처장으로 발탁되어 1998년까지 재직했다. 퇴임 후에는 충청남도 논산시에서 영농조합을 설립하여 밤과 딸기를 재배하는 생활을 시작했으며, 참여정부 시절 법무부 장관 등 요직 제안을 고사하기도 했다. 2015년에는 사재 800을 출연하여 후배 법조인 양성을 위한 천고법치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아 천고법치문화상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검사들에게 국민 눈높이에 맞는 정제된 삶을 강조하기도 했다.
2.1. 초기 생애 및 학업
1941년 평안남도 중화군에서 태어나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손수 4구 라디오를 조립해 클래식을 들을 정도로 공학에 소질이 있었으나,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재학 중 한국전쟁으로 인해 졸업하지 못했다. 이후 고시에 실패한 형을 대신하여 집안의 기대를 받고자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다시 입학했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63년 제1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어릴 때부터 한학을 배워 한시와 시조에 능통했으며, 이로 인해 검사 시절 '송도사', '한학도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966년부터 1969년까지 육군 법무관으로 복무했으며, 이 기간 중인 1967년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귀국하는 수송기 안에서 여수시 인근의 민둥산을 보고 "눈 비벼 다시 보아 민둥산을 알았네 / 이렇게 헐벗었더냐 꿈에 그린 내 조국 / 옷을 입히리라 초록으로 덮으리라…(중략)… / 이 결심 헛되이 마라 천지신명 다 안다"라는 한시를 지으며 헐벗은 조국의 산을 푸르게 가꾸겠다고 다짐했다. 군 복무를 마친 후 1969년 대구지방검찰청 검사로 임용되었다.
2.2. 검사 임용 및 군 복무
1941년 평안남도 중화군에서 태어나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재학 중이던 1963년 제1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이후 1966년부터 1969년까지 육군 법무관으로 복무하였는데, 이 기간 중인 1967년에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그는 베트남에서 귀국하던 수송기 안에서 여수시의 민둥산을 보며 나무를 심어 조국의 산을 푸르게 가꾸겠다는 다짐을 담은 한시를 지었다고 한다. 군 복무를 마친 뒤 1969년 대구지방검찰청 검사로 임용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한학을 공부하여 한시와 시조에 능통했기 때문에 검사 시절 '송도사', '한학도사'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2.3. 검사 재직 시절
1963년 제1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1966년부터 1969년까지 육군 법무관을 거쳐 1969년 대구지방검찰청 검사로 임용되었다. 어릴 때부터 한학에 능통하여 검사 시절 '송도사', '한학도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971년 대전지방검찰청 강경지청 검사로 재직할 때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에 밤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이후 법무부 법무과장, 서울지방검찰청 특별수사 제1부 부장검사 등을 거쳤다. 1986년부터 1987년까지 부산지방검찰청 제1차장검사로 재직하던 중, 1987년 2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추모집회 현장에서 체포된 노무현 변호사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를 결재했다. 훗날 참여정부 시절 법무부 장관 등 요직 제안을 고사하며 당시 일을 언급하기도 했다. 또한 문재인 정부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과거사 진상규명 조사가 이루어졌을 때, 당시 부산지검 차장검사였던 송종의는 관련 조사를 거절했다.
법무부 기획관리실장, 대검찰청 형사 제2부장, 강력부장을 역임했다. 1991년 제33대 대전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부임했을 당시, 검찰동우회지에 '오대양 진혼곡'이라는 글을 기고하여 오대양 집단 자살 사건에 대한 심경을 밝히기도 했다.
1993년 제33대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임명되었다. 과거 인혁당 사건에서 검찰관으로 참여했던 경력이 있으며, 서울지검장 재직 당시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이철, 유인태, 장영달, 제정구 의원 등은 박종철 (법조인) 검찰총장 사퇴 후 유력 후보로 거론되던 최명부와 함께 송종의 등 과거 군사정권 시절 공안검사 경력자들을 비판하며 사퇴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1993년 9월 대검찰청 차장검사로 승진했으나, 1995년 사법시험 1기 후배인 김기수 (법조인)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과의 검찰총장 경합에서 밀려 공직에서 물러났다. 당시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심정으로 자유인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남기고 검찰을 떠났다.
주요 경력
| 기간 | 직책 |
|---|---|
| 1969년 | 대구지방검찰청 검사 |
| 1973년 ~ 1974년 | 서울지방검찰청 성동지청 검사 |
| 1981년 ~ 1982년 | 법무부 법무과장 |
| 1983년 ~ 1985년 | 서울지방검찰청 특별수사 제1부 부장검사 |
| 1985년 ~ 1986년 | 전주지방검찰청 차장검사 |
| 1986년 ~ 1987년 | 부산지방검찰청 제1차장검사 |
| 1987년 ~ 1989년 | 법무부 기획관리실장 |
| 1989년 | 대검찰청 형사 제2부 부장 |
| 1989년 ~ 1991년 | 대검찰청 강력부 부장 |
| 1991년 4월 18일 ~ 1992년 7월 28일 | 제33대 대전지방검찰청 검사장 |
| 1992년 |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부장 |
| 1993년 3월 17일 ~ 1993년 9월 20일 | 제33대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 |
| 1993년 9월 18일 ~ 1995년 9월 17일 | 대검찰청 차장검사 |
| 1996년 12월 20일 ~ 1998년 2월 26일 | 제20대 법제처장 |
| 2014년 6월 ~ | 천고법치문화재단 이사장 |
2.4. 법제처장 임명 및 퇴임
대검찰청 차장검사로 재직하던 중, 사법시험 1기 후배인 김기수 (법조인) 당시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과 검찰총장 자리를 두고 경합했다. 김기수가 검찰총장으로 최종 지명되면서 송종의는 공직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하고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심정으로 자유인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남기며 밤 농장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법제처장으로 발탁되어 공직 생활을 이어갔다.
1998년 3월, 문민정부의 마지막 법제처장으로서 퇴임하였다. 퇴임 시에는 ‘귀거래혜(歸去來兮) 영고무상(榮枯無常) 산수자한(山水自閑) 좌간부운(座看浮雲)’이라는 한시를 남기며 퇴임사를 대신했다. 이는 "돌아가네, 영화와 쇠락이 무상하니 자연에서 한가로이 뜬구름 바라보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퇴임 후에는 법전을 비롯한 모든 법률 관련 서적을 정리하여 고물상에 넘겼으며, 운영하던 영농조합 사무실에는 ‘천목헌(天目軒)’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그의 서재와 집에는 불경, 고서, 역사서 등만이 남게 되었다.
2.5. 퇴임 이후
대검찰청 차장검사 시절, 사법시험 1기 후배인 김기수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과 검찰총장 자리를 두고 경합했으나 김기수가 지명되면서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때 그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심정으로 자유인으로 돌아간다”며 밤 농장으로 돌아갈 뜻을 밝혔다. 그러나 이후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법제처장에 임명되었다.
1998년 3월 문민정부의 마지막 법제처장으로 퇴임하면서 ‘귀거래혜(歸去來兮) 영고무상(榮枯無常) 산수자한(山水自閑) 좌간부운(座看浮雲)’(돌아가네, 영화와 쇠락이 무상하니 자연에서 한가로이 뜬구름 바라보리)라는 한시로 퇴임사를 대신했다. 퇴임 후에는 법전을 비롯한 법률 서적을 정리하고,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의 영농조합 사무실에 ‘천목헌(天目軒)’이란 액자를 걸어두고 서재와 집에 불경과 고서, 역사서만 소장하며 본격적으로 영농 생활에 들어갔다. 그는 이곳에서 영농조합을 통해 밤과 딸기를 재배했다.
참여정부 시절 법무부 장관, 부패방지위원장 등 여러 요직에 추천되었으나 스스로 고사했다. 그는 "총리를 빼고는 다 거론됐다"고 말하며, 노무현 대통령과의 관계에 대해 "악연이 있다. 부산지검 시절 그렇게 구속시키려고 했는데, 그때 구속시켰어야 했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는 1987년 2월 박종철 추모집회 현장에서 체포된 노무현 변호사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서를 당시 부산지방검찰청 차장검사였던 송종의가 결재했던 일과 관련이 있다.
2015년에는 사재 800을 출연하여 후배 법조인들을 후원하기 위한 천고법치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했다. 이 재단은 법치주의 확립과 국법질서 수호에 기여한 법조인에게 천고법치문화상을 시상한다. 중앙선데이와의 인터뷰에서는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검사들이 더욱 정제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재인 정부 시기에는 형제복지원 사건이 과거사 진상규명 사건에 포함되면서 당시 부산지방검찰청 차장검사였던 송종의에 대한 조사가 시도되었으나, 그는 조사를 거절했다.
3. 저서
* 미국으로 간 딸에게 쓴 편지들을 모은 '밤나무 검사가 딸에게 쓴 인생 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