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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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현수는 여산 송씨 출신으로, 조선 세조의 친구였으며 단종의 장인이자 정순왕후의 아버지이다. 1445년 관직에 오른 후 딸이 단종의 왕비로 간택되면서 동지돈녕부사에 봉해졌다.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처형되었으나, 숙종 때 복권되었고 정조 때 장릉 배식단에 배향되었다. 정민(貞愍)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후손이 등용되었다.

송현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여량부원군 송현수
원어명礪良府院君 宋玹壽
직책
직책조선국 풍저창부사
임기1448년 2월 29일 ~ 1454년 2월 23일
군주조선 세종대왕 이도
군주조선 문종 이향
군주조선 단종 이홍위
섭정왕세자 이향
섭정황보 인
섭정김종서
섭정수양대군 이유
경력동지돈녕부사
개인 정보
배우자여흥부부인 민씨
자녀정순왕후(딸)
자녀송거(아들)
본관여산
부모송복원(부)
출생일?
정당무소속
사망일1457년 음력 10월 21일
사망 장소조선 경기도 과천에서 사형(교살)됨.
국적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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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송현수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세종의 아들인 영응대군의 처남이자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의 아버지이다. 즉, 단종의 국구(國舅)이다. 젊은 시절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과 친구 사이였고, 여동생이 영응대군에게 시집가면서 왕실과 인연을 맺었다. 딸이 단종의 왕비로 간택되면서 국구로서 돈녕부의 요직을 맡았다.

계유정난 이후 세조가 왕위에 올랐으나, 송현수는 단종의 장인이라는 이유로 정치적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세조의 비호 아래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1457년, 사육신 등이 주도한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결국 세조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의 죽음은 단종의 비극적인 최후와도 연결된다.

사후 약 240년이 지난 숙종 대에 단종이 복위되면서 송현수 역시 복권되었고, 정조 때에는 장릉 배식단에 배향되고 정민(貞愍)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2.1. 출신과 국구 시절

생년은 명확하지 않다. 여산 송씨 지신공파의 후손으로, 지중추원사를 지낸 송복원의 아들이다. 그는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과 친구 사이였으며, 그의 여동생은 세종의 여덟째 아들인 영응대군의 부인(대방부부인 송씨)이었다. 이러한 인연 덕분에 특별한 관직 없이 지내다가 1445년(세종 27년)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가 전구부승(典廐副丞)이 되었다.

풍저창 부사로 재직하던 1454년(단종 2년) 음력 1월, 그의 딸이 단종의 왕비(정순왕후)로 간택되어 책봉되면서 송현수는 국구(國舅)가 되어 동지돈녕부사에 임명되고 여랑군(礪良君)에 봉해졌다. 같은 해 음력 6월 1일에는 지돈녕부사로 승진하였고, 다시 음력 12월 2일에는 판돈녕부사가 되었다. 그러나 계유정난 이후 세조가 즉위하자, 상왕이 된 단종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군사 관련 업무를 맡거나 당상관의 지위에 있다는 비판을 받아 탄핵되었다. 하지만 당시 권력을 장악한 세조의 비호 아래 별다른 처벌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2.2. 단종 복위 운동과 죽음

`세조실록`에 따르면, 처음에는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한 것으로 의심받았으나, `세조`가 직접 그를 위로했다고 한다. 그러나 1457년(세조 3년) 음력 6월 21일,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되면서 송현수도 결국 투옥되었다.

당시 `권완`은 "상왕(`단종`)을 다시 세우려 한 것은 매우 좋은 일이었으나, 다만 이 일이 쉽지 않았다. 송현수와 연락하며 반란을 모의하였다."라고 증언했다. 이 증언으로 송현수는 장형 100대에 처해지고 먼 지방의 관노가 되었으며, 그의 가족들도 같은 곳의 노비 신세가 되었다. `세조실록`에는 이때 여러 차례 대간에서 송현수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세조`가 듣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결국 같은 해 음력 10월 21일, `세조`는 복위 운동에 가담했던 `금성대군` 및 송현수 등의 처형을 명했고, 송현수는 이때 죽음을 맞이했다. 실록에는 `단종`이 이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세종`의 부마이자 `정현옹주`의 남편인 `윤사로`는 `계유정난`의 공신이 되자 포상으로 송현수의 딸을 요구하는 비정한 모습을 보였는데, 당시 사관은 이를 실록에 기록하며 윤사로를 비판하였다.

2.3. 사후 복권과 평가

송현수의 조카인 송영은 예종 때 감찰로 있었는데, 역도의 무리라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예종의 재가까지 내려졌으나 결국 파직되지는 않았다. 이후 1475년(성종 6년)에는 송현수의 아들 송거가 과거에 응시하는 것이 특별히 허락되었다. 이때를 비롯하여 대간에서 여러 차례 송현수의 일족에 대해 탄핵하였으나 성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1767년(영조 43년)에는 영조가 송현수의 후손을 찾아보라는 명을 내렸다. 이때 나주에 살던 송익량이라는 사람이 송현수의 후손이라고 거짓말을 했다가 발각되어 곤장 60대를 맞는 일도 있었다.

송현수가 사망한 지 약 240여 년이 지난 1698년(숙종 24년), 단종이 복위되면서 송현수도 함께 복권되었다. 이와 함께 그의 관향인 여산도 군에서 부로 승격되었다. 이듬해부터는 송현수와 그의 부인 민씨에 대한 제사를 다시 지내게 되었다. 당시 숙종은 과천에 있던 송씨의 선산에 사람을 보내 그의 묘를 찾게 하였으나, 송현수의 무덤과 후손은 찾지 못했다. 부인 민씨의 묘는 비석에 희미하게 남은 글씨로 겨우 식별할 수 있어 이때 무덤을 수리하였다.

정조 때인 1791년(정조 15년) 음력 2월에는 장릉 배식단의 정단에 배향될 32명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으며, 정민(貞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같은 해 음력 9월에는 그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고 작은 표석을 세웠으며, 묘지기 2명을 두었다. 또한 그의 후손을 등용하도록 하였다.

3. 가족 관계

* 본관: 여산 송씨 지신공파
* 조부: 송계성 (宋繼性)
* 아버지: 송복원 (宋復元, 생몰년 미상) - 지중추원사
남동생: 송정수 (宋玎壽)
* 조카: 송영 (宋瑛, ? ~ 1495년)
여동생: 대방부부인 송씨 (帶方府夫人, ? ~ 1507년) - 세종의 8남 영응대군의 부인
* 장인: 민소생 (閔紹生) - 여흥 민씨, 한명회의 장인 민대생의 동생
* 부인: 여흥부부인 민씨 (驪興府夫人 閔氏)
아들: 송거 (宋琚)
: 정순왕후 (定順王后, 1440년 ~ 1521년)
사위: 단종 (端宗, 1441년 ~ 1457년) - 조선 제6대 왕

4. 기타

세종의 부마이자 정현옹주의 남편인 윤사로는 공신이 된 후 송현수의 딸을 상으로 받기를 원했다. 당시 사관은 실록에 이 사실을 기록하며 윤사로의 행동을 비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