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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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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숙손통은 진나라 말기에 활동한 인물로, 여러 군주를 섬기며 시대의 변화에 맞춰 처신을 바꾸었다. 진나라 이세황제에게 아첨하여 박사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항량, 초 의제, 항우를 거쳐 유방에게 귀순했다. 유방을 도와 한나라의 예법과 제도를 정비하는 데 기여했고, 황태자 유방의 폐위를 막는 데도 역할을 했다. 사마천은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사마광은 자기 과시를 위해 고대 의례를 훼손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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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손통
기본 정보
숙손통
숙손통
숙손 (叔孫)
이름통 (通)
가 (賈)
시호문 (文)
출생기원전 265년경
사망기원전 200년경
국적중국
시대진나라, 초한시대, 전한
직업유학자, 정치인
주요 활동예법 제정
생애
초기원래 진나라의 박사(博士)였으나, 진나라가 망하자 항우에게 귀순하였다.
초한대전 시기항우 밑에서 일했으나, 항우를 떠나 유방에게 귀순하였다.
전한 건국 이후유방의 신임을 얻어 예법 제정에 참여하였다.
관직박사 (博士)
봉상 (奉常)
태상 (太常)

2. 생애

숙손통은 진나라 때 문학(文學)으로 징소되어 박사(博士) 임명 조서를 기다렸다. 진승이 산동(山東)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세황제는 박사와 여러 선비들을 불러 이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1]

이세황제가 여러 의견을 듣고 노하여 안색이 변하자, 숙손통은 다른 선비들의 말이 모두 틀렸다고 말했다. 숙손통은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 법령을 정비하여 반란이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며, 진승 등의 행동은 단순한 도적질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1] 이세황제는 숙손통의 말을 옳게 여겨 그에게 상을 내리고 박사로 임명했다.[1]

이후 숙손통은 설 땅으로 달아났는데, 그곳은 이미 초나라에 항복한 뒤였다. 항량이 설군으로 들어오자 숙손통은 그를 따랐고, 항량이 정도(定陶)에서 패하자 회왕을 섬겼다. 회왕이 의제(義帝)가 되어 장사로 옮겨가자, 숙손통은 그대로 남아 항우를 섬겼다.[1]

고조 2년, 한왕 유방이 제후들을 이끌고 초나라의 수도 팽성을 함락시키자 숙손통은 유방에게 항복했다. 유방은 유학자를 싫어했기에, 숙손통은 유학자의 옷을 벗고 초나라 옷을 입어 유방의 환심을 샀다. 숙손통은 유방에게 자신의 제자들 대신 전직 험한 무리들을 추천했는데, 이는 유방이 천하를 다투는 상황에서 유학자보다 싸움에 능한 자들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유방은 숙손통을 박사로 삼고 직사군 칭호를 내렸다.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고 황제로 즉위하자, 숙손통은 조정의 의례와 제도를 정비하는 역할을 맡았다. 당시 대신들은 연회에서 술에 취해 소란을 피우는 등 문제가 많았는데, 숙손통은 유학의 수성(守成) 능력을 활용하여 노나라 유학자들과 함께 새로운 조정 의례를 제정했다.

새로운 의례는 고조 7년 장락궁 완공 기념 연회에서 처음 시행되었는데, 엄격한 절차에 따라 진행되어 연회에서 예법을 잃는 자가 없었다. 고조는 숙손통의 공을 치하하며 봉상으로 임명하고 금 500근을 하사했다. 숙손통은 자신을 따른 유학자들에게도 관직을 내려줄 것을 청했고, 고조는 그들을 모두 낭(郎)으로 삼았다.

고조 9년 숙손통은 태자태부로 옮겨졌다. 고조 12년, 고조가 황태자(혜제)를 조왕 유여의로 바꾸려 하자, 숙손통은 진나라의 사례를 들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숙손통은 황태자를 바꾸는 것이 나라의 근본을 흔드는 일이라며 목숨을 걸고 간언했고, 결국 고조는 황태자 교체 계획을 철회했다.

고조가 죽고 혜제가 즉위한 후에도 숙손통은 봉상으로 남아 종묘 의례 등을 정비하는 일을 계속했다.

2. 1. 진나라 시기

이세황제는 박사와 여러 선비들을 불러 모아 진승의 난에 대해 물어보았다.[1] 박사와 선비 서른 명이 앞으로 나와 "신하된 자로서 사사로이 병사를 가지면 안"되며, "역적이니, 죽어서도 용서받을 수 없"으니 이세황제가 병사를 이끌어 그들을 쳐야 한다고 주장했다.[1] 이세황제가 노하여 안색이 변하자, 숙손통은 나아가 다른 선비들의 말이 모두 잘못됐다고 주장했다.[1] 숙손통은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하여 한 집안이 되게 하였으며, 군현의 성벽을 허물고 무기를 녹여 무기를 쓰지 않겠다는 뜻을 천하에 보였"고, "위로는 밝은 법령이 갖추어져 모두 직책에 충실하고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니" 반란은 일어날 수 없으며, "쥐나 개가 물건을 훔치는 정도"의 일이라고 말했다.[1]

이세황제는 기뻐하며 숙손통의 말을 옳게 여겼다. 다른 선비들에게도 물어보니 어떤 이는 반란이라 하였고, 어떤 이는 도적이라 하였다. 이세황제는 어사(御史)에게 명하여 반란이라고 한 이들은 형리에게 넘기고, 도둑이라고 한 이들은 그대로 두게 하였다.[1] 또 숙손통에게는 비단 스무 필과 옷 한 벌을 내리고, 박사에 임명하였다.[1] 숙손통이 궁궐을 나와 돌아오니, 선비들은 숙손통에게 어떻게 그렇게 아첨을 잘하는지 물었다. 숙손통은 "여러분은 모릅니다. 저는 하마터면 호랑이 입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뻔했습니다."라고 답했다.[1]

2. 2. 초한전쟁 시기

진나라 때 문학(文學)으로 징소되어 박사(博士) 임명 조서를 기다렸다. 몇 년 후 진승이 산동(山東)에서 반란을 일으키니, 이세황제는 박사와 여러 선비들을 불러 모아 물어보았다.

박사와 선비 서른 명이 앞으로 나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세황제가 노하여 안색이 변하니, 숙손통이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세황제는 기뻐하며 숙손통의 말을 옳게 여겼다. 다른 선비들에게도 물어보니 어떤 이는 반란이라 하였고, 어떤 이는 도적이라 하였다. 이세황제는 어사(御史)에게 명하여 반란이라고 한 이들은 형리에게 넘기고, 도둑이라고 한 이들은 그대로 두게 하였다. 또 숙손통에게는 비단 스무 필과 옷 한 벌을 내리고, 박사에 임명하였다. 숙손통이 궁궐을 나와 돌아오니, 선비들은 숙손통에게 어떻게 그렇게 아첨을 잘하는지 물었다. 숙손통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그 후 숙손통은 설 땅으로 달아났으나, 설은 이미 초나라에 항복한 뒤였다. 항량이 설군으로 들어오자 숙손통은 그를 따랐고, 항량이 정도(定陶)에서 패하자 회왕을 섬겼다. 회왕이 의제(義帝)가 되어 장사로 옮기니, 숙손통은 그대로 남아 항우를 섬겼다.[1]

2. 3. 한나라 시기

진나라 때 숙손통은 조정에 소환되었다. 호해 때 진승이 봉기하자, 호해는 유학자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유학자는 "신하에게 미수라는 것은 없습니다. 반란을 하려고 생각한 시점에서 반란을 한 것과 같습니다. 급히 군사를 내어 반란자를 쳐야 합니다"라고 대답했고, 호해는 노했다. 숙손통은 "유학자의 말은 잘못되었습니다. 천하가 한 집안이 되면 성벽을 허물고 무기를 녹여서 사용하지 않는 것을 보였습니다. 명군이 위에 있고 법령이 정비되어 있는데, 어찌 반란자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도둑이 무리를 이룬 것뿐이며, 어찌 근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호해는 진승을 반란이라고 말한 자를 옥에 가두고, 도둑이라고 말한 자는 살려주었다. 숙손통에게는 상을 내리고 수석 박사로 삼았다. 숙손통이 숙소로 돌아가자, 다른 유학자들이 "어째서 추종하는 말을 하는가"라고 말했지만, 숙손통은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겨우 당신들을 호랑이 입에서 탈출하게 한 것을 모르는가"라고 대답했다. 그 후, 도망쳐 고향 설로 돌아갔다.

설은 이미 초에 항복했고, 항량이 설에 오자 숙손통은 그를 따랐다. 항량이 패배하자 의제를 따랐고, 항우가 의제를 장사로 옮기자, 숙손통은 항우를 섬겼다. 고조 2년, 한왕 유방이 제후들을 이끌고 초의 수도 팽성을 함락시키자, 숙손통은 유방에게 항복했다. 유방은 유학자를 미워했기에, 숙손통은 유학자의 옷을 버리고 초의 옷을 입었으므로, 유방은 기뻐했다.

숙손통은 한에 귀순하자, 제자를 100명 이상 거느리고 있었지만, 그들을 유방에게 추천하지 않고, 전직 험한 무리들만을 추천했다. 제자가 "저희들을 추천하지 않고 악인들만 추천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한왕은 지금 막 천하를 다투며 싸우고 있는데, 유학자가 싸울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싸움에 도움이 되는 자들을 추천하는 것이다. 너희들을 잊은 것은 아니다. 잠시 기다려라"라고 대답했다.

유방은 숙손통을 박사로 삼고, 직사군의 칭호를 내렸다.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고, 제후들이 그를 황제로 옹립하자, 숙손통이 그 의례와 제도를 정비했다.

고조 유방은 진나라의 법률을 폐지하고 간소하게 했기에, 대신들은 조정에서의 연회 때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고, 술에 취해 고함을 지르거나 기둥에 칼을 휘두르는 등 고조는 이것 때문에 고민했다. 숙손통은 "유학자는 진취에는 도움이 되지 않지만 수성에는 도움이 됩니다. 노나라의 유학자와 저의 제자들로 하여금 조정에서의 의례를 제정하게 합시다"라고 건의했다. 고조가 "(예법이 자신에게) 어렵지 않겠는가?"라고 묻자, "예는 왕조와 함께 변하는 것입니다. 옛 예와 진나라의 예를 발췌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고, 고조는 "나도 할 수 있게 해 줘라. 어렵게 하지 마라"라고 말했다.

숙손통은 노나라의 유학자들을 불렀다. 그중에 "귀공은 지금까지 여러 주군을 섬기며 그때마다 아첨하며 지위를 얻어왔다. 지금은 천하가 통일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은 자도 묻히지 않았는데, 예법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 예라는 것은 백 년 동안 덕을 쌓아야 비로소 할 수 있는 것이다. 귀공의 행위는 옛것에 부합하지 않는다. 나를 더럽히지 말아 달라"라고 거부하는 자가 있었지만, 이것을 들은 숙손통은 "시세를 알지 못하는 시골 유학자일 뿐이다"라고 비웃었다.

새로운 의례를 제정하고, 고조에게 보이자, "이 정도면 나도 할 수 있겠다"라고 말했으므로, 신하들에게 그 의례를 배우게 했다. 고조 7년, 장락궁이 완성되고, 제후, 군신들과 조정에서 축하 연회를 거행하자, 이 의례에 따라 의식이 거행되었다. 제후왕 이하 모두 고조를 두려워하고 존경했으며, 의례대로 하지 않는 자는 어사가 강제로 퇴장시켰기 때문에, 연회 때에도 예법을 잃는 자는 없었다. 고조는 "나는 처음으로 황제의 존귀함을 알았다"라고 말하고, 숙손통을 봉상으로 삼고 500근을 하사했다. 숙손통은 "저를 따랐던 제자들과 유학자들이 이 제도를 함께 만들었으니, 그들에게 관직을 내려 주십시오"라고 청했으므로, 고조는 모두를 낭으로 삼았다. 숙손통은 받은 금을 유학자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유학자들은 "숙손 선생은 성인이다. 시세에 맞는 일을 할 줄 안다"라고 기뻐했다.

고조 9년, 태자태부로 옮겨졌다. 고조 12년, 고조가 황태자(혜제)를 조왕 유여의로 바꾸려 하자, 숙손통은 "옛날, 진나라 헌공은 태자를 폐위시켜 나라가 혼란해졌고,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진나라는 부소를 일찍 세우지 않았기에 호해가 거짓으로 후계자가 되어 멸망에 이르렀다는 것을 폐하도 아실 것입니다. 지금, 황태자는 어질고 효행이 있다고 칭찬이 자자합니다. 또한 여후는 폐하와 고난을 함께 한 분입니다. 어찌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적자를 폐하고 소자를 세우려 하신다면, 먼저 저를 처형하십시오"라고 간언했다. 고조는 "농담으로 한 말이다"라고 말했지만, 숙손통은 더욱 "태자는 천하의 근본입니다. 근본이 흔들리면 천하 전체가 크게 흔들립니다. 천하를 농담거리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고조는 "알았다"라고 말했다. 그 후, 장량의 계책에 따라 황태자가 사고를 데리고 오자 고조는 폐태자를 그만두었다.

그 해에 고조가 죽자 황태자가 즉위했다. 혜제는 숙손통을 봉상으로 삼고, 종묘의 의례 등을 정하게 했다.

3. 평가

숙손통은 진나라전한 교체기의 인물로, 유학자이면서도 시세에 맞는 처세로 한나라 건국에 기여했다. 그의 전기는 분서갱유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그가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100명이 넘는 제자들을 한나라 조정에 등용시킨 점을 보여준다.[1]

성명숙손통
시대진나라 - 전한
생몰년불명
자·별호숙손하 (별명)
본관·출신지노군 설현
직관박사 (진나라전한) → 태상 (전한)
태자태부 (전한) → 태상 (전한)
작위·호직사군 (전한)
진영·소속호해 → 항량 → 의제 → 항우
유방 → 혜제
가족·일족불명



사마천은 숙손통을 상황 판단 능력과 대국적인 안목을 가진 인물로 평가했지만,[1] 사마광은 그가 한나라 조정 의례를 만든 것을 자기 과시욕으로 해석하고, 고대 의례가 사라지게 된 점을 비판했다.[1]

3. 1. 긍정적 평가

사마천은 숙손통이 상황에 맞춰 적응하고 큰 그림을 볼 줄 안다고 칭찬했다.[1] 그러나 사마광은 숙손통이 한나라 조정 의례를 조직한 것을 자기 과시로 비판하며 고대 의례가 사라졌다고 지적했다.[1] 숙손통은 진나라의 고전 지식 탄압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100명 이상의 제자를 한나라 조정에 데려왔다.[1]

3. 2. 부정적 평가

사마천은 숙손통이 상황에 맞춰 적응하고 큰 그림을 볼 줄 안다고 칭찬했지만,[1] 사마광은 숙손통이 한나라 조정 의례를 조직한 것을 자기 과시로 비판하며 고대 의례가 사라졌다고 지적했다.[1]

4. 작품


  • 미야자키 마사미쓰의 소설 《장성의 그늘 만천의 별》 (분게이슌주)

참조

[1] 서적 The Stele Inscriptions of Ch'in Shih-huang: Text and Ritual in Early Chinese Imperial Representation 2000
[2] 서적 The Stele Inscriptions of Ch'in Shih-huang: Text and Ritual in Early Chinese Imperial Representation 2000
[3] 서적 The Stele Inscriptions of Ch'in Shih-huang: Text and Ritual in Early Chinese Imperial Representation 2000
[4] 웹사이트 「しゅくそん つう」とも読まれる。 https://kotobank.jp/[...]
[5] 서적 초한춘추
[6] 문서 왕선겸은 하를 숙손통의 자 (이름)|자로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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