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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르나 대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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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미르나 대화재는 1922년 9월 13일부터 22일까지 튀르키예 스미르나(현재 이즈미르)에서 발생한 대규모 화재 사건이다. 이 화재는 그리스-터키 전쟁의 종식 직후에 발생했으며, 아르메니아인 거주 지역에서 시작되어 도시의 광범위한 지역을 휩쓸었다. 화재로 인해 수만 명의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이 사망하고, 수십만 명이 난민이 되었으며, 도시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화재의 원인과 책임에 대한 논쟁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터키 측과 그리스 및 아르메니아 측의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스미르나 대화재는 문학, 영화, 음악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로 다루어졌으며, 역사적 교훈과 과제를 제시하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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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르나 대화재
기본 정보
사건 명칭스미르나 화재
다른 명칭스미르나 대화재
스미르나 재앙
1922년 9월 14일 스미르나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1922년 9월 14일 스미르나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관련 전쟁그리스-튀르키예 전쟁 (1919년~1922년)
그리스인 및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발생 위치스미르나, 그리스 스미르나 점령지 (오늘날의 이즈미르, 튀르키예)
발생 날짜1922년 9월 13일~22일
사망자 수10,000명~125,000명으로 추정
결과80,000명~400,000명의 난민 발생
그리스 및 아르메니아인 지역 파괴
가해자스미르나 화재 책임 참고
배경
관련 사건청년 튀르크당 혁명
오스만 그리스인
폰토스 그리스인
오스만 제국
학살
관련 사건노동 대대
죽음의 행진
폰토스 그리스인 학살
포카이아 학살
아이발리크 철수
이즈미트 학살
1914년 그리스인 추방
삼순 추방
아마시아 재판
구호
관련 단체소아시아 그리스인 구호 위원회
미국 근동 구호 위원회
책임자
관련 인물청년 튀르크당 또는 통일진보위원회
세 명의 파샤: 탈라트, 엔베르, 제말
바하에딘 샤키르
테슈킬라티 마흐수사 또는 특수 조직
누레딘 파샤
토팔 오스만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2. 배경

스미르나 대화재는 1922년 터키군이 스미르나를 점령한 직후 발생했는데, 이 사건의 배경에는 복잡한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요인들이 얽혀 있다.

오스만 제국 말기 스미르나는 다양한 민족과 종교 집단이 공존하는 다문화 도시였다. 기독교 인구와 무슬림 인구 비율은 자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지만, 대체로 그리스인과 터키인 외에도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레반트인 등 다양한 공동체가 함께 살고 있었다.

2. 1. 오스만 제국 시기 스미르나

오스만 제국 시기 스미르나는 1922년 9월까지 다문화적이고 코스모폴리탄적인 중심지였다.[18] 기독교 인구와 무슬림 인구 비율은 자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데, 어떤 자료에서는 그리스인이 다수였다고 하고, 다른 자료에서는 터키인이 다수였다고 한다. 캐서린 엘리자베스 플레밍에 따르면,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스미르나의 그리스인은 15만 명으로, 인구의 절반에 약간 못 미쳤으며, 터키인보다 2:1의 비율로 더 많았다.[19] 터키인과 그리스인 외에도 상당한 규모의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레반트 공동체가 있었다. 트루디 링에 따르면, 제1차 세계 대전 전에는 그리스인만 13만 명이었고, 아르메니아인과 다른 기독교인을 제외한 인구는 25만 명이었다.[20]

오스만 제국의 인구 조사 자료에 따르면, 1906/7년 이즈미르 산자크 (중앙 카자를 포함한 13개 카자)에는 무슬림 341,436명, 그리스 정교 기독교인 193,280명, 아르메니아 그레고리 기독교인 12,273명, 유대인 24,633명, 외국인 55,952명을 포함하여 총 630,124명이 있었다.[21] 1914년 이즈미르 중앙 카자에는 무슬림 100,356명, 그리스 정교 기독교인 73,676명, 아르메니아 그레고리안 10,061명, 아르메니아 가톨릭 813명, 유대인 24,069명이 있었다.[22][23]

1906/7년 및 1914년 오스만 제국의 인구 조사
구분1906/7년 이즈미르 산자크[21]1914년 이즈미르 중앙 카자[22][23]
무슬림341,436명100,356명
그리스 정교 기독교인193,280명73,676명
아르메니아 그레고리 기독교인12,273명10,061명
아르메니아 가톨릭-813명
유대인24,633명24,069명
외국인55,952명-
총계630,124명-



당시 터키 주재 미국 대사였던 헨리 모겐소 시니어는 스미르나 인구의 절반 이상이 그리스인이었다고 언급했다.[24] 당시 스미르나의 미국 영사였던 조지 호턴은 화재 전 스미르나 시에 40만 명이 살고 있었으며, 그 중 16만 5천 명이 터키인, 15만 명이 그리스인, 2만 5천 명이 유대인, 2만 5천 명이 아르메니아인, 2만 명이 외국인(이탈리아인 1만 명, 프랑스인 3천 명, 영국인 2천 명, 미국인 300명)이었다고 기록했다.[25] 대부분의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은 기독교인이었다.[26]

여러 학자들에 따르면, 전쟁 전 스미르나는 아테네보다 더 많은 그리스인이 살았던 중심지였다.[27][28] 당시 오스만 제국 사람들은 많은 그리스인과 비무슬림 인구 때문에 이 도시를 '불신자 스미르나'(''가부르 이즈미르'')라고 불렀다.[20][24][29][31][32][33][34][35]

2. 2. 그리스-터키 전쟁과 스미르나 점령

1922년 9월 8일 금요일 저녁, 헬레네 군은 스미르나에서 철수했다. 다음 날 아침,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군대의 선봉 부대인 터키 기병대가 도시 북쪽 끝에서 진입하여 주요 정부 건물인 ''코낙''에 본부를 설치했다.[36][37] 헬레네 군은 혼란 속에 질서정연하게 철수하지 못했고, 다음 날까지 전투가 이어졌다. 파흐레틴 알타이 장군에 따르면, 9월 10일 터키군은 도시 중심부 남쪽에서 그리스군 병사 약 3,000명과 장교 50명(준장 포함)을 포로로 잡았다.[38]

9월 9일 이즈미르 해방에서 처음으로 터키 국기를 게양한 터키 장교 알리 르자 아크인즈 중위는, 그의 부대가 프랑스 해병대의 경례를 받은 후 터키 투자코을루 공장에서 발사된 총격에 매복당했다고 회고했다. 이 공격으로 기병 3명이 즉사하고 1명이 치명상을 입었다. 세라페틴 대위와 그의 부대가 공장을 포위하여 이들을 구출했다. 세라페틴 대위와 알리 르자 아크인즈 중위는 그리스 병사가 던진 수류탄에 부상을 입었다.[39] 조지 호튼은 수류탄 투척자를 "어떤 바보가 폭탄을 던졌다"고 언급했고, 부대 지휘관은 "머리에 피가 묻은 상처를 입었다"고 했다.[40] 이후 이 기병대가 쓰러진 자리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군사 지휘는 처음에는 Mürsel 파샤가, 그 다음에는 누레딘 파샤가 맡았다.

터키의 도시 점령 초기에는 질서가 유지되었다. 아르메니아와 그리스 주민들은 터키군의 진입을 두려워했지만, 연합군 함대가 폭력을 억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9월 9일 아침, HMS ''아이언 듀크''와 ''킹 조지 V''를 포함한 21척 이상의 연합군 군함이 스미르나 항구에 정박했다.[41][42] 연합 함대의 선원과 해병대는 중립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각 공관과 기관을 경비하기 위해 상륙했다.[43]

그러나 9월 9일부터 터키 군대 내에서 질서와 규율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조직적으로 아르메니아인을 표적으로 삼아 약탈, 납치, 성폭행을 자행했다.[44][45] 스미르나의 대주교 크리소스토모스는 프랑스 군인들이 보는 앞에서 터키 폭도들에게 고문당하고 살해당했는데, 프랑스 군인들은 지휘관의 방해를 받았고 뒤메닐 제독은 이를 승인했다.[44][46] 사람들은 파라다이스와 유럽 구역 등 가능한 모든 곳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일부는 아메리카 컬리지에이트 연구소 등에서 피난처를 찾았지만, 미국인과 유럽인들은 터키 민족 운동 지도자들과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기 위해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을 돌려보내기도 했다. 당시 항구에 있던 네덜란드 증기선 ''시안타르''의 한 장교는 터키군이 그리스 손님을 맞이하던 호텔에 불을 지르고, 호텔 입구 반대편에 기관총을 설치하여 사람들이 탈출하려 할 때 발포했다고 보고했다. 그는 폭도들 때문에 해질녘 이후 승무원의 해상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다고 말했다.[47]

터키군과 불규칙군에 의한 학살 희생자 중에는 외국 시민도 있었다. 9월 9일, 네덜란드 상인 오스카 드 용과 그의 아내가 터키 기병에게 살해되었고,[48] 은퇴한 영국 의사는 하녀의 강간을 막으려다 구타당해 사망했다.[49][50]

3. 스미르나 대화재

불타는 건물과 탈출을 시도하는 사람들


1922년 9월 13일 늦은 오후, 터키 민족주의 군대가 스미르나(현재의 이즈미르)에 진입한 지 4일 후에 최초의 화재가 발생했다.[51] 불길은 도시의 아르메니아 지구(현재 바스마네 자치구)에서 시작되어 빠르게 번졌다.[52]

최초 화재 발생을 목격한 사람 중 한 명은 미국 여자대학 교장 미니 밀스였다. 그녀는 터키 장교가 석유나 벤진이 든 깡통을 들고 집에 들어가 불을 지르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학교 교사와 학생들도 터키 군인들이 불을 지르는 것을 목격했다.[53] 미국 적십자사의 클래플린 데이비스와 스미르나 크레디 퐁시에 은행 이사 몽시외 주베르도 터키인들이 건물에 불을 지르는 것을 목격했다. 병사들은 모든 집을 불태우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답했다.[54]

스미르나 소방대는 화재 진압에 노력했지만, 9월 13일에는 너무 많은 화재가 발생하여 역부족이었다. 소방관들은 터키 군인들이 건물에 불을 지르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55]

불길이 번지면서 사람들은 부두로 대피했다.[52] 미국 해군 함대 참모장 아서 재피 헤번은 부두가 난민들로 가득 차 혼란스러웠다고 묘사했다.[52] 영국 육군 중위 A. S. 메릴은 터키인들이 그리스인들을 공포에 빠뜨려 쉽게 떠나게 하려고 불을 질렀다고 추정했다.[6] 그는 약 182.88m 떨어진 배에서도 화재의 열기가 느껴졌다고 말했다.[58]

터키 군대는 아르메니아인과 그리스인들이 탈출하지 못하도록 부두를 봉쇄했다.[56] 목격자들은 난민들이 불길을 피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고 전한다.[44] 9월 15일경 불길은 다소 사그라들었지만, 터키인들의 폭력 행위는 계속되었다.[57] 화재는 9월 22일에 완전히 진압되었고,[6] 9월 24일, 미국 인도주의자 아사 제닝스가 조직한 함대의 일부인 그리스 선박이 항구에 들어와 난민을 수송했다.[58]

3. 1. 화재의 발생과 확산

1922년 9월 13일 늦은 오후, 터키 민족주의 군대가 스미르나(현재의 이즈미르)에 진입한 지 4일 후에 최초의 화재가 발생했다.[51] 불길은 도시의 아르메니아 지구(현재 바스마네 자치구)에서 시작되었으며, 강한 바람과 미흡한 화재 진압 노력으로 인해 빠르게 번졌다.[52]

1922년 9월 13일, 벨라 비스타에서 촬영된 화재의 시작


미국 여자대학 교장 미니 밀스 양은 화재를 처음 목격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터키 장교가 석유나 벤진이 든 깡통을 들고 집에 들어가 불을 지르는 것을 보았다. 밀스 양뿐만 아니라 학교 교사와 학생들도 터키 군인들이 헝겊을 액체 통에 담갔다가 불타는 집에 던지는 것을 목격했다.[53]

미국 적십자사의 클래플린 데이비스와 스미르나 크레디 퐁시에 은행 이사 몽시외 주베르도 터키인들이 건물에 불을 지르는 것을 목격했다. 주베르가 병사들에게 이유를 묻자, 그들은 "모든 집을 폭파하고 불태우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답했다.[54]

도시 소방대는 화재 진압에 최선을 다했지만, 9월 13일에는 너무 많은 화재가 발생해 역부족이었다. 두 소방관은 법정에서 터키 군인들이 건물에 불을 지르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한 소방관은 "당신들은 당신들의 명령이 있고, 우리는 우리의 명령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르메니아 재산입니다. 우리의 명령은 불을 지르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55]

스미르나 화재의 파노라마 뷰


불길이 번지면서 사람들은 부두로 대피했다.[52] 미국 해군 함대 참모장 아서 재피 헤번 캡틴은 부두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묘사하며, 화재로 인한 압사 사고가 시작되었고, 모든 난민이 해안가로 이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부두가 이미 수만 명의 난민으로 가득 찼으며, 계속해서 사람들이 몰려와 해안 전체가 짐과 사람들로 가득 찼다고 덧붙였다.[52]

헤번은 화재의 열기 때문에 난민들이 사망할까 봐 우려했다.[52] 영국 육군 중위 A. S. 메릴은 9월 14일 아침 부두의 상황을 묘사하며, 터키인들이 그리스인들을 공포에 빠뜨려 쉽게 떠나게 하려고 불을 질렀다고 믿었다.[6] 메릴은 도시 전체가 불타고 항구가 대낮처럼 밝았다고 말했다. 그는 수천 명의 난민들이 부두를 오가며 공황 상태에 빠졌고, 여성과 어린이들의 비명 소리가 고통스러웠다고 덧붙였다. 그는 군중이 너무 빽빽해 바다로만 탈출할 수 있었고, 다행히 바닷바람이 불어 부두 벽이 뜨거워지지 않았지만, 약 182.88m 떨어진 배에서도 열기가 느껴졌다고 말했다. 또한 난민들의 짐에 불이 붙어 거리 전체에 불꽃놀이 사슬을 만들었다고 덧붙였다.[58]

화재를 피해 달아나는 난민들이 가득 찬 보트. 이 사진은 미국 군함에서 촬영되었다.


터키 군대는 아르메니아인과 그리스인들을 화재 구역 안에 가두고 부두를 봉쇄하여 탈출을 막았다.[56] 목격자들은 공포에 질린 난민들이 불길을 피해 물속으로 뛰어들었고, 그들의 비명이 멀리서도 들렸다고 전한다.[44] 9월 15일경 불길이 잦아들었지만, 터키인들의 폭력 행위로 인해 서방과 그리스 해군은 난민들을 신속히 철수시켜야 했다.[57] 화재는 9월 22일에 완전히 진압되었고,[6] 9월 24일, 미국 인도주의자 아사 제닝스가 조직하고 지휘한 함대의 일부인 그리스 선박이 항구에 들어와 승객을 수송했다.[58]

3. 2. 터키군의 역할

터키군이 스미르나를 점령한 초기에는 질서가 유지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1922년 9월 9일부터 터키 군대는 아르메니아인들을 표적으로 삼아 약탈, 납치, 성폭행, 살인을 저지르기 시작했다.[44][45] 그리스 정교회 대주교였던 크리소스토모스는 터키 폭도들에게 고문당하고 살해당했다.[44][46]

1922년 9월 13일, 터키군이 도시로 진입한 지 4일 후, 도시의 아르메니아 지구에서 큰 화재가 발생했다.[51] 미국 여자대학의 교장 미니 밀스는 터키 장교가 건물에 석유나 벤진을 뿌려 불을 지르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증언했다.[53] 미국 적십자사의 클래플린 데이비스와 스미르나 크레디 퐁시에 은행의 이사 몽시외 주베르도 터키군이 건물에 불을 지르는 것을 목격했다.[54] 도시 소방대는 화재 진압에 최선을 다했지만, 터키 군인들이 건물에 불을 지르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나왔다.[55]

터키 군대는 부두를 봉쇄하여 아르메니아인과 그리스인들을 화재 구역 안에 가두었다.[56] 목격자들은 공포에 질린 난민들이 불길을 피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고 전했다.[44]

3. 3. 국제사회의 반응과 구호 노력

화재 발생 4일 후인 1922년 9월 13일 늦은 오후, 스미르나의 아르메니아 지구에서 화재가 시작되었고, 강한 바람과 진압 노력 부족으로 빠르게 번졌다.[51][52] 미국 여자대학 교장 미니 밀스 등 여러 목격자들은 터키 군인들이 석유나 벤진을 사용하여 건물에 불을 지르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53] 미국 적십자사의 클래플린 데이비스와 스미르나 크레디 퐁시에 은행의 이사 몽시외 주베르도 터키인들이 방화하는 것을 목격했다.[54] 도시 소방대는 화재 진압에 최선을 다했지만 역부족이었고, 소방관들은 터키 군인들이 방화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55]

화재가 확산되자 사람들은 부두로 몰려들었다. 미국 해군 함대 참모장 아서 재피 헤번 캡틴은 부두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묘사했다.[52] 영국 육군 중위 A. S. 메릴은 터키인들이 그리스인들을 공포에 빠뜨려 떠나게 하기 위해 불을 질렀다고 믿었다.[6] 그는 아침에 불타는 스미르나의 불빛을 보았고, 항구가 대낮처럼 밝았다고 묘사했다. 또한, 수천 명의 난민들이 부두를 휩쓸고 다녔고, 여성과 어린이들의 비명이 고통스러웠다고 전했다.[58]

터키 군대는 부두를 봉쇄하여 아르메니아인과 그리스인들이 화재 구역 안에 갇히도록 했다.[56] 공포에 질린 난민들은 불길을 피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44] 9월 15일쯤 불길이 잦아들었지만, 터키인들의 폭력 행위는 계속되었고, 서방과 그리스 해군은 난민들을 신속하게 철수시키기 위해 노력했다.[57] 화재는 9월 22일까지 완전히 진압되었고,[6] 9월 24일, 미국의 인도주의자 아사 제닝스가 조직한 함대의 일부인 그리스 선박들이 항구에 들어와 난민들을 수송하기 시작했다.[58]

4. 피해와 결과

성 요한 그리스 묘지의 훼손된 무덤


1922년 9월 17일 화재에 대한 ''뉴욕 타임스''의 헤드라인


1922년 9월 15일 화재 이후 도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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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르나 대화재는 도시 전체의 기반 시설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특히 상업 중심지였던 항구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화재 이전 지역의 40 헥타르는 퀼튀르파크라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이즈미르 국제 박람회를 포함한 터키 최대의 야외 전시 센터 역할을 하고 있다.[59] 이로 인해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하였고, 아나톨리아 에게 해안에 3,000년간 존재했던 그리스인 거주지는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다. 1927년 터키의 첫 인구 조사에서 도시 총 인구는 184,254명이었으며, 이 중 162,144명(88%)이 무슬림이었다.[59]

4. 1. 인명 피해와 난민 발생

화재로 인한 사상자 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최대 125,000명의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6][7][63] 미국의 역사학자 노먼 나이마크는 10,000~15,000명의 사망자를 제시했고,[6] 역사학자 리처드 클로그는 30,000명의 사망자를 제시했다.[44] 존 프리리는 50,000명, 루돌프 룸멜은 100,000명으로 더 많은 사망자를 추정했다.[63]

YMCA와 YWCA의 미국 관리들은 구호 활동을 조직하려 했으나, 터키 군인들에게 강도를 당하고 총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60] 부두에서 터키 군인과 비정규군은 주기적으로 그리스 난민들을 강탈하고, 저항하는 사람들을 구타하고 체포했다.[58] 잘 훈련된 터키 군대가 노인들을 돕고 난민들의 질서를 유지하려 했다는 보고도 있었지만,[58] 이러한 보고는 무자비한 잔혹 행위, 끊임없는 강도, 폭력을 묘사하는 보고에 비해 훨씬 적었다.[57]

미국과 영국의 그리스인 보호 노력은 화재로 인해 끔찍한 피해를 입어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57] 절망하고 공포에 질린 일부 그리스인들은 등에 짐을 진 채 물속으로 뛰어들어 자살했고, 아이들은 짓밟혔으며, 많은 노인들이 기절하여 사망했다.[57] 도시의 아르메니아인들 또한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캡틴 헵번에 따르면 "모든 건강한 아르메니아 남성은 발견되는 즉시 사냥당해 살해되었으며, 심지어 12세에서 15세 사이의 소년들까지 사냥에 참여했다."[57]

스미르나 해안의 난민들


화재는 도시의 그리스, 아르메니아, 레반틴 구역을 완전히 파괴했고, 터키와 유대인 구역만 살아남았다.[44] 약 15만~20만 명의 그리스 난민이 대피했고, 약 3만 명의 건강한 그리스 및 아르메니아 남성이 내륙으로 추방되어 가혹한 환경에서 사망하거나 도중에 처형되었다.[6] 이로써 아나톨리아 에게 해안에 3,000년 동안 존재했던 그리스의 존재는 메갈리 이데아와 함께 갑작스럽게 종말을 맞이했다.[6] 그리스 작가 디미트리스 펜초풀로스는 "1922년은 현대 그리스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해라고 부르는 것이 과장이 아니다"라고 썼다.[6]

스미르나 항구에는 여러 연합국 선박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중립을 이유로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을 태우지 않았다.[64] 군악대는 항구에서 익사하는 사람들의 비명을 잠재우기 위해 큰 음악을 연주했다.[65] 일본 화물선은 모든 화물을 버리고 난민을 태워 피레아스로 데려갔다.[66][67]

많은 난민은 미국 선교사 아사 제닝스가 조직한 구호 함대에 의해 구조되었다.[68] 다른 학자들은 터키인들이 처음에는 외국 선박의 생존자 탑승을 금지했지만, 영국, 프랑스, 미국의 압력으로 17세에서 45세 사이 남성을 제외한 모든 기독교인의 구조를 허용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추방되어 "잔인한 주인의 지배하에 노예 생활을 하는 단기적인 형벌"을 받고 "미스터리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69]

난민의 수는 출처에 따라 다르다. 일부 신문은 스미르나와 주변 지역에서 온 40만 명의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 난민이 적십자의 지원을 받았다고 주장한다.[70] 스튜어트 매튜는 25만 명의 난민이 모두 터키인이 아니었다고 말한다.[10] 노먼 나이마크는 150,000~200,000명의 그리스인 난민이 대피했다고 한다.[6] 에드워드 헤일 비어슈타트와 헬렌 데이비슨 크레이튼은 최소 50,000명의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 난민이 있었다고 말한다.[71] 일부 당대 기록에서도 같은 숫자를 제시한다.[72]

아나톨리아 내륙으로 추방된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 남성의 수와 그에 따른 사망자 수는 출처에 따라 다르다. 노먼 나이마크는 3만 명의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 남성이 추방되어 대부분 잔혹한 환경에서 죽었다고 썼다.[6] 디미트리예 조르제비치는 추방자 수를 25,000명, 노동대 사망자 수를 10,000명으로 추정한다.[73] 데이비드 아불라피아는 최소 10만 명의 그리스인이 아나톨리아 내륙으로 강제 이송되었고, 그들 대부분이 사망했다고 말한다.[74]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는 스미르나에서 태어나 나중에 세계적인 부자가 된 그리스 생존자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전기들은 스미르나 참사 동안 그의 경험을 기록하고 있다. 오나시스 가족은 상당한 재산을 잃었고, 화재 후 그리스로 도망쳐 난민이 되었다. 오나시스는 터키 강제 수용소에 갇힌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남았고,[76][77]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는 데 성공했다. 이 기간 동안 그의 삼촌 3명이 사망했고, 그의 고모 가족은 터키 군인들이 아티라의 한 교회에 불을 질렀을 때 불에 타 죽었다.[75]

4. 2. 도시 파괴와 재건

스미르나 대화재로 도시는 큰 피해를 입었고, 중심부는 완전히 재건되어야 했다. 화재 이전 지역의 40 헥타르는 퀼튀르파크라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이즈미르 국제 박람회를 포함한 터키 최대의 야외 전시 센터 역할을 하고 있다.[59]

1927년 터키의 첫 인구 조사에서 도시 총 인구는 184,254명이었으며, 이 중 162,144명(88%)이 무슬림이었고 나머지는 22,110명이었다.[59]

화재는 도시의 그리스, 아르메니아, 레반틴 구역을 파괴했고, 터키와 유대인 구역만 살아남았다.[44] 상업 중심지였던 스미르나 항구도 불에 타 파괴되었다. 약 15만~20만 명의 그리스 난민이 대피했고, 약 3만 명의 그리스 및 아르메니아 남성은 내륙으로 추방되어 가혹한 환경에서 사망하거나 처형되었다.[6] 이로써 아나톨리아 에게 해안에 3,000년간 존재했던 그리스인 거주 지역은 메갈리 이데아와 함께 종말을 맞았다.[6] 그리스 작가 디미트리스 펜초풀로스는 "1922년은 현대 그리스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해"라고 언급했다.[6]

5. 책임 논란

스미르나 대화재의 책임 소재는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터키군이 아나톨리아기독교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불을 질렀다고 보고 있다.[11] 그러나 터키 측은 그리스인이나 아르메니아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78][79]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마조리 하우스피안 도브킨은 1971년 연구에서 생존자, 연합군, 외교관 등의 증언을 바탕으로 터키군이 조직적으로 도시를 불태웠다고 결론지었다. 나일 퍼거슨, 리처드 클로그 역시 터키군의 책임을 지적했다. 질스 밀턴은 저서 "잃어버린 낙원: 스미르나 1922"에서 터키 군인과 장교들이 직접적인 명령에 따라 방화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80] 마이클 르웰린-스미스는 화재가 "아마도" 터키인에 의해 발생했을 것이라고 보았다.[81]

노먼 나이마크는 터키 구역이 화재에서 제외된 점을 들어 터키의 책임을 시사했다. 다만, 도시를 불태우는 것이 터키의 이익에 반했을 수 있다는 점을 들어 그리스인이나 아르메니아인에게도 책임이 있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82] 그는 그리스군의 철수 시점과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군대의 도시 진입 시점, 그리고 화재 발생 시점을 고려하여 "화재는 거의 확실히 터키 군대에 의해 고의적으로 발생했다"고 결론 내렸다.[85]

반면, 히스 W. 로리와 저스틴 매카시는 호턴과 하우스피안의 연구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86] 이들은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부정으로 비판받기도 했다.[87][88][89][90]

당시 스미르나에 있었던 터키 작가 팔리흐 르프키 아타이와 터키 교수 비레이 콜루오을루 키를르는 터키 민족주의 세력의 책임을 인정했다. 레이라 네이지는 터키군이 화재 진압에 소극적이었거나, 때로는 화재 자체에 책임이 있다고 지적한다.[92]

5. 1. 터키 측 주장

스미르나 대화재에 대해 터키 측은 주로 그리스인이나 아르메니아인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으나,[78][79] 이는 사실과 다르다는 주장이 많다.

노먼 나이마크는 터키 지역이 화재에서 제외되었다는 점을 들어 터키의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화재로 인해 그리스인들이 스미르나를 떠나게 만드는 것이 터키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점도 지적했다.[82] 그리스군은 1922년 9월 9일 스미르나에서 철수했고,[83]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와 그의 군대가 도시에 진입한 것은 4일 후인 1922년 9월 13일이었다는 점에서,[84] 터키군의 개입은 거의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터키 작가 팔리흐 르프키 아타이와 터키 교수 비레이 콜루오을루 키를르는 스미르나 파괴의 책임이 터키 민족주의 세력에 있다고 인정했다. 레이라 네이지는 지역 서사에서 터키군이 화재 진압에 소극적이거나, 심지어 화재 자체에 책임이 있다고 지적한다.[92]

5. 2. 그리스 및 아르메니아 측 주장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화재가 아나톨리아의 기독교인들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 터키 군인들에 의해 발생했다고 본다.[11] 그러나 스미르나 대화재의 발화 책임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문제는 계속 논쟁의 대상이며, 터키 측은 주로 그리스인이나 아르메니아인에게 책임을 돌리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78][79]

마조리 하우스피안 도브킨은 1971년 연구 "스미르나 1922"에서 터키군이 조직적으로 도시를 불태우고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 기독교인들을 살해했다고 결론지었다. 그녀의 연구는 생존자, 철수 중 스미르나에 파견된 연합군, 외국 외교관, 구호 요원 및 터키인 목격자들의 광범위한 증언을 바탕으로 한다. 역사가 나일 퍼거슨의 연구도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역사가 리처드 클로그는 도시를 점령한 후 터키인들이 불을 질렀다고 단호하게 말한다.[44] 질스 밀턴은 그의 저서 "잃어버린 낙원: 스미르나 1922"에서 주로 영국 출신인 스미르나의 레반트 가족의 원본 자료(인터뷰, 미출판 서신 및 일기)를 통해 스미르나 화재 문제를 다룬다.[80] 저자는 터키 군인과 장교들이 불을 질렀으며, 아마도 직접적인 명령에 따라 행동했을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영국 학자 마이클 르웰린-스미스는 소아시아의 그리스 행정부에 대해 글을 쓰면서 화재가 "아마도" 터키인에 의해 발생했으며, "증거가 제시하는 바에 따르면"이라고 결론지었다.[81]

스탠퍼드 역사학자 노먼 나이마크는 화재 책임에 관한 증거를 평가했다. 그는 화재를 통해 그리스인들이 스미르나를 떠나도록 겁을 주는 것이 터키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미국 육군 중위 메릴의 견해에 동의하며, 터키 분기가 화재에서 제외되었다는 "이상한" 사실을 터키의 책임성을 시사하는 요인으로 지적한다. 그는 또한 도시를 불태우는 것이 터키의 이익에 반하고 불필요했을 수 있으며, 그리스인과/또는 아르메니아인에게 책임이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들이 "그들만의 좋은 이유"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리스의 후퇴 역사"와 "점령 첫날의 아르메니아 공격"을 지적했다.[82] 그러나, 그리스군은 1922년 9월 9일 스미르나에서 철수했으며,[83]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와 그의 군대가 도시에 진입했고, 화재는 4일 후인 1922년 9월 13일에 시작되었다.[84]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마크는 "화재는 거의 확실히 터키 군대에 의해 고의적으로 발생했다"고 결론 내린다.[85]

호턴과 하우스피안은 히스 W. 로리와 저스틴 매카시에 의해 비판을 받는데, 로리는 호턴이 매우 편견을 가지고 있으며 하우스피안은 자료를 매우 선택적으로 사용한다고 주장한다.[86]

당시 스미르나에 있었던 터키 작가이자 언론인 팔리흐 르프키 아타이와 터키 교수 비레이 콜루오을루 키를르가 1922년 스미르나 파괴의 책임은 터키 민족주의 세력에 있다고 동의했다.

5. 3. 제3자 (중립적) 관점

스미르나 대화재에 대한 제3자적 관점은 다양하게 제시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터키 군인들이 화재를 일으켰다고 보지만,[11] 화재 책임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존재한다. 터키 측은 그리스인이나 아르메니아인에게 책임을 돌리기도 하고,[78][79] 다른 출처에서는 터키의 소극적인 태도가 화재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78]

스미르나 화재에 대한 여러 연구가 발표되었다. 마조리 하우스피안 도브킨 교수는 1971년 연구에서 터키군이 조직적으로 도시를 불태우고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을 살해했다고 결론지었다. 이 연구는 생존자, 연합군, 외교관 등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다.[44] 나일 퍼거슨과 리처드 클로그도 터키군의 책임을 지적했다. 질스 밀턴은 "잃어버린 낙원: 스미르나 1922"에서 터키 군인과 장교들이 직접적인 명령에 따라 불을 질렀을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80] 마이클 르웰린-스미스는 화재가 "아마도" 터키인에 의해 발생했을 것이라고 보았다.[81]

노먼 나이마크는 화재 책임에 대한 증거를 평가하면서, 터키 구역이 화재에서 제외된 점을 들어 터키의 책임을 시사했다. 그러나 그는 도시를 불태우는 것이 터키의 이익에 반했을 수 있다는 점을 들어 그리스인이나 아르메니아인에게도 책임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82] 그는 그리스군의 철수,[83]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군대의 도시 진입, 그리고 화재 발생 시점[84]을 고려하여 "화재는 거의 확실히 터키 군대에 의해 고의적으로 발생했다"고 결론 내린다.[85]

히스 W. 로리와 저스틴 매카시는 호턴과 하우스피안의 연구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으며,[86]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부정으로 비판받기도 했다.[87][88][89][90]

터키 작가 팔리흐 르프키 아타이와 터키 교수 비레이 콜루오을루 키를르는 스미르나 파괴의 책임이 터키 민족주의 세력에 있다고 동의했다. 레이라 네이지는 터키군이 화재 진압에 소극적이었거나, 때로는 화재 자체에 책임이 있다고 지적한다.[92]

6. 역사적 유산과 기억

스미르나 대화재는 20세기 초 그리스-터키 전쟁의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오늘날까지도 다양한 방식으로 기억되고 있다. 특히 이 사건은 그리스인아르메니아인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으며, 그들의 후손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역사적 비극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일리노이 홀로코스트 박물관과 소아시아 및 폰토스 헬레니즘 연구 센터는 2022년 9월 18일 스미르나 화재와 그리스인 학살을 기리는 100주년 기념 교육 행사를 개최하여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희생자들을 추모했다.[110]

6. 1. 문학과 예술 속의 스미르나 대화재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단편 소설집 ''우리 시대에''에 수록된 "스미르나의 부두에서"(1930)는 스미르나 대화재를 암시한다. 소설 속에는 "이상한 점은, 그가 말하길, 그들이 매일 밤 자정에 어떻게 비명을 질렀는가 하는 것이었다. ... 우리는 항구에 있었고 그들은 부두에 있었고 자정에 그들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들을 조용하게 하려고 조명탄을 비추곤 했다. 그건 항상 효과가 있었다."라는 구절이 등장한다.[94]

로버트 바이런의 여행기 ''거울 속의 유럽''(1926)에는 화재의 책임을 터키인에게 돌리는 목격자 보고서가 포함되어 있으며,[93] 에릭 앰블러의 소설 ''디미트리오스의 가면''(1939) 3장 시작 부분에는 스미르나에서의 사건들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95] 에드워드 휘트모어의 ''시나이 태피스트리''(1977) 마지막 부분[96]과 프레드 머스타드 스튜어트의 소설 ''타이탄''(1985)의 일부도[97] 스미르나 화재를 배경으로 한다.

수산나 드 브리스의 ''푸른 리본 쓴 쓴 빵''(2000)은 스미르나와 테살로니키에 상륙한 그리스 난민들에 대한 이야기이며,[98] 미국인 제프리 에우제니데스의 소설 ''미들섹스''(2002)는 스미르나 화재로 시작된다.[99] 메흐메트 코랄의 ''İzmir: 13 Eylül 1922''(이즈미르: 1922년 9월 13일)(2003?)는 이 주제를 다루었으며,[100][101] ''Πολλές ζωές στη Σμύρνη''(이즈미르의 많은 삶)이라는 제목으로 그리스어로도 출판되었다.[102]

루이 드 베르니에르의 소설 ''날개 없는 새들''(2004)의 일부는 스미르나 화재와 그 여파를 다루며,[104] 파노스 카르네지스의 2004년 소설 ''미로''는 스미르나 화재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을 다룬다.[105] 호메로 아리디스의 ''불타는 스미르나''(2021)는 스미르나 참사 당시 그리스 군대 대위였던 저자의 아버지 니키아스 아리디스의 기록과 기억에서 영감을 받은 역사 소설이다.[108]

디아만다 갈라스는 스미르나 출신 가문의 후손으로, 그의 앨범 ''Defixiones: Will and Testament''(2003)는 스미르나에서 그리스인에게 저지른 터키의 잔혹 행위에서 직접적으로 영감을 받았다.[103]

그리스 영화 ''1922''(1978)는 터키 군대가 도시에 진입한 후 포로로 잡힌 그리스계 사람들의 고통을 묘사하며, ''스미르나, 나의 사랑''(2021)은 스미르나의 부유한 그리스인 가족의 삶과 스미르나 참사 이후 그들의 고통과 탈출을 따라간다.

마리아 일리우가 제작한 2012년 다큐멘터리 영화 "스미르나: 코스모폴리탄 도시의 파괴 – 1900–1922"[106], 마이크 다메르기스가 제작한 2022년 다큐멘터리 ''스미르나: 천국이 불타고 있다, 아사 K. 제닝스 이야기''(칸 영화제(2022년 5월)에서 최고의 역사 영화상 수상)[109], 에즈기 외즈바칼로울루의 2022년 단편 애니메이션 ''Fuar: 반기억''(스미르나의 폐허를 그린 흑백 이미지와 이후 그 자리에 건설된 도시 공원의 다채로운 애니메이션 인상 병치)등 다양한 영상 매체에서도 스미르나 대화재를 다루고 있다.

델리 사르키스 사르키시안의 스미르나 화재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는 엘렌 사르키시안 체스넛의 ''그가 지닌 상처, 딸이 아르메니아 대량 학살을 마주하고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다''(2014)에 실려 있다.[107]

일리노이 홀로코스트 박물관과 소아시아 및 폰토스 헬레니즘 연구 센터는 2022년 9월 18일 스미르나 화재와 그리스인 학살을 기리는 100주년 기념 교육 행사를 개최했다.[110]

6. 2. 기념과 추모

현대 이즈미르에 있는 "조국과 명예" 기념비와 투자코글루 제분 공장

  • 로버트 바이런의 여행기 ''거울 속의 유럽''(1926)에는 화재의 책임을 터키인에게 돌리는 목격자 보고서가 포함되어 있다.[93]
  •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단편 소설 모음집 ''우리 시대에''에 수록된 단편 소설 "스미르나의 부두에서"(1930)는 스미르나 화재를 암시한다.
  • 에릭 앰블러의 소설 ''디미트리오스의 가면''(1939)은 제3장의 시작 부분에서 스미르나에서의 사건들을 자세히 묘사한다.[95]
  • 에드워드 휘트모어의 ''시나이 태피스트리''(1977)의 마지막 부분은 스미르나 화재 동안 일어난다.[96]
  • 그리스 영화 ''1922''(1978)는 터키 군대가 도시에 진입한 후 포로로 잡힌 그리스계 사람들의 고통을 묘사한다.
  • 프레드 머스타드 스튜어트의 소설 ''타이탄''(1985)의 일부는 스미르나 화재 동안 일어난다.[97]
  • 수산나 드 브리스의 ''푸른 리본 쓴 쓴 빵''(2000)은 스미르나와 테살로니키에 상륙한 그리스 난민들에 대한 이야기이다.[98]
  • 미국인 제프리 에우제니데스의 소설 ''미들섹스''(2002)는 스미르나 화재로 시작된다.[99]
  • 메흐메트 코랄의 ''İzmir: 13 Eylül 1922'' ("이즈미르: 1922년 9월 13일")(2003?)는 이 주제를 다루었으며,[101] 아테네/그리스의 케드로스에 의해 그리스어로도 출판되었다(제목: Πολλές ζωές στη Σμύρνη (이즈미르의 많은 삶)).[102]
  • 그리스계 미국인 싱어송라이터 디아만다 갈라스의 앨범 ''Defixiones: Will and Testament''(2003)는 스미르나에서 그리스인에 저지른 터키의 잔혹 행위에서 직접적으로 영감을 받았다. 갈라스는 스미르나 출신 가문의 후손이다.[103]
  • 루이 드 베르니에르의 소설 ''날개 없는 새들''(2004)의 일부는 스미르나 화재와 그 여파를 다룬다.[104]
  • 파노스 카르네지스의 2004년 소설 ''미로''는 스미르나 화재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을 다룬다.[105]
  • 마리아 일리우가 제작한 2012년 다큐멘터리 영화 "스미르나: 코스모폴리탄 도시의 파괴 – 1900–1922".[106]
  • 델리 사르키스 사르키시안의 스미르나 화재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는 엘렌 사르키시안 체스넛의 ''그가 지닌 상처, 딸이 아르메니아 대량 학살을 마주하고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다''(2014)에 실려 있다.[107]
  • 호메로 아리디스의 ''불타는 스미르나''(2021)는 스미르나 참사 당시 그리스 군대 대위였던 저자의 아버지 니키아스 아리디스의 기록과 기억에서 영감을 받은 역사 소설이다.[108]
  • 그리스 영화 ''스미르나, 나의 사랑''(2021)은 스미르나의 부유한 그리스인 가족의 삶과 스미르나 참사 이후 그들의 고통과 탈출을 따라간다.
  • 에즈기 외즈바칼로울루의 2022년 단편 애니메이션 ''Fuar: 반기억''은 스미르나의 폐허를 그린 흑백 이미지와 이후 그 자리에 건설된 도시 공원의 다채로운 애니메이션 인상을 병치한다.
  • 마이크 다메르기스가 제작한 2022년 다큐멘터리 ''스미르나: 천국이 불타고 있다, 아사 K. 제닝스 이야기''는 칸 영화제(2022년 5월)에서 최고의 역사 영화상을 수상했다.[109]
  • 일리노이 홀로코스트 박물관과 소아시아 및 폰토스 헬레니즘 연구 센터는 2022년 9월 18일 스미르나 화재와 그리스인 학살을 기리는 100주년 기념 교육 행사를 개최했다.[11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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