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갈리 이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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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갈리 이데아는 19세기 그리스에서 발흥한 민족주의적 구상으로, 모든 민족 그리스인을 통합하여 비잔틴 제국을 부활시키려는 열망을 담고 있다. 오스만 제국 지배 하에서 그리스 민족주의가 발흥하며 나타났으며, 그리스 독립 전쟁 이후 요안니스 콜레티스의 연설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발칸 전쟁에서 그리스의 영토가 확장되었으나, 그리스-터키 전쟁에서 패배하며 스미르나를 잃고 좌절되었다. 20세기 후반까지 그리스 외교 정책에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키프로스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극우 정당인 황금새벽당이 메갈리 이데아를 지지했으나, 현재는 지지율이 감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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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갈리 이데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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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적 배경
오스만 제국 시대에 그리스인들은 밀레트 제도에 따라 종교 공동체인 ''밀레트-이 룸''("로마 공동체")에 속했다.[7] 이 공동체는 그리스인 외에도 불가리아인, 세르비아인, 블라크인 등 다른 동방 정교회 기독교인들을 포함했지만, 그리스인이 종교적 계층 구조를 지배했다.[7]
중세와 오스만 제국 시대에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들은 스스로를 로마 제국의 후손인 ''로마인''으로 여겼으며, 당시 ''그리스인'' 또는 ''헬레네인''이라는 용어는 고대 이교도 민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8][9]
1780년대 후반,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와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는 그리스 계획의 일환으로 그리스 국가 재건을 추진했다. 투르코크라티아 기간 동안, 러시아인들은 그리스인들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해방시킬 유일한 정교회 강국, 즉 "금발 종족"(''크산톤 게노스/xanthon genosel'')으로 여겨졌다.
2. 1. 오스만 제국의 지배와 그리스 민족주의의 발흥
오스만 제국 시대에 그리스인들은 밀레트 제도에 따라 종교 공동체인 ''밀레트-이 룸''("로마 공동체")에 속했다.[7] 이 공동체는 그리스인 외에도 불가리아인, 세르비아인, 블라크인 등 다른 동방 정교회 기독교인들을 포함했지만, 그리스인이 종교적 계층 구조를 지배했다.[7]중세와 오스만 제국 시대에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들은 스스로를 로마 제국의 후손인 ''로마인''으로 여겼으며, 당시 ''그리스인'' 또는 ''헬레네인''이라는 용어는 고대 이교도 민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8][9]
1780년대 후반,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와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는 그리스 계획의 일환으로 그리스 국가 재건을 추진했다. 투르코크라티아 기간 동안, 러시아인들은 그리스인들에게 콘스탄티노플을 해방시킬 유일한 정교회 강국, 즉 "금발 종족"(''xanthon genos'')으로 여겨졌다.
[[File:Subject_Nationalities_of_the_German_Alliance_(1917)_(cropped).jpg|thumb|1917년 소아시아 민족 지도.||||||}}]
3. 전개 과정
그리스 독립 전쟁이 1829년에 끝나고, 대영 제국, 프랑스 왕국,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아 새로운 남부 그리스 국가가 세워졌다. 그러나 독립 전쟁 이후 요안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 치하의 이 새로운 그리스 국가는 당시 국경 밖의 같은 민족의 인구보다 인구가 적었다. 대부분의 민족 그리스인들은 여전히 오스만 제국 국경 내에 거주했다. 열강은 더 큰 그리스 국가가 오스만 제국을 대체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그리스 버전은 열강에 의해 설계되었다.
1844년 1월 국민 의회에서 요안니스 콜레티스는 "그리스 왕국은 그리스의 일부분으로 극히 작고 가장 가난한 일부이며, 그리스 전체가 아니다. 그리스인은 왕국에 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오아니나, 테살리아, 세레스, 아드리아노플, 콘스탄티노플, 트레비존드, 크레타, 사모스의 사람들, 그리고 그리스의 역사와 관련된 사람들이 사는 모든 지역에 사는 사람들도 그리스인이다."라고 자신의 신념을 표명했다.[24]
메갈리 이데아는 모든 민족 그리스인을 그리스 국가로 통합하고, 비잔틴 제국을 부활시키려는 열망을 담고 있었다. 이는 에피루스, 테살리아,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에게 제도, 크레타, 키프로스, 아나톨리아 일부, 그리고 콘스탄티노플 (수도를 아테네 대신)의 그리스인들에게 적용되었다.
1863년에 덴마크 왕자 빌헬름 게오르크가 왕으로 선출되었을 때, 그리스 국민 의회는 그에게 "그리스 왕"이 *아닌* "헬레네의 왕"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이 칭호는 게오르기오스 1세가 당시 그의 새로운 왕국 국경 내에 살고 있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그리스인의 왕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했다.
그리스 왕국에 처음으로 편입된 추가 지역은 1864년의 이오니아 제도였고, 나중에는 1878년 베를린 조약으로 테살리아가 편입되었다.
3. 1. 그리스 독립 전쟁과 메갈리 이데아의 등장
그리스 독립 전쟁이 1829년에 끝나고, 대영 제국, 프랑스 왕국,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아 새로운 남부 그리스 국가가 세워졌다. 그러나 독립 전쟁 이후 요안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 치하의 이 새로운 그리스 국가는 당시 국경 밖의 같은 민족의 인구보다 인구가 적었다.[10] 대부분의 민족 그리스인들은 여전히 오스만 제국 국경 내에 거주했다. 열강은 더 큰 그리스 국가가 오스만 제국을 대체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그리스 버전은 열강에 의해 설계되었다.[10]1844년 1월 국민 의회에서 요안니스 콜레티스는 "그리스 왕국은 그리스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일부일 뿐이다: 그리스의 가장 작고 가난한 부분이다. 그리스인은 왕국에 거주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이오안니나, 테살로니키 또는 세레스 또는 아드리아노플 또는 이스탄불 또는 트라페준트 또는 크레타 또는 사모스 또는 그리스 역사 또는 그리스 민족에 속하는 다른 어떤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이다..."라고 자신의 신념을 표명했다.[10]
메갈리 이데아는 모든 민족 그리스인을 그리스 국가로 통합하고, 비잔틴 제국을 부활시키려는 열망을 담고 있었다.[10] 이는 에피루스, 테살리아,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에게 제도, 크레타, 키프로스, 아나톨리아 일부, 그리고 콘스탄티노플 (수도를 아테네 대신)의 그리스인들에게 적용되었다.
1863년에 덴마크 왕자 빌헬름 게오르크가 왕으로 선출되었을 때, 그리스 국민 의회는 그에게 "그리스 왕"이 *아닌* "헬레네의 왕"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이 칭호는 게오르기오스 1세가 당시 그의 새로운 왕국 국경 내에 살고 있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그리스인의 왕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했다.[10]
그리스 왕국에 처음으로 편입된 추가 지역은 1864년의 이오니아 제도였고, 나중에는 1878년 베를린 조약으로 테살리아가 편입되었다.
3. 2. 크림 전쟁과 오톤 1세의 퇴위
3. 3. 발칸 전쟁과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의 부상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메갈리 이데아의 주요 지지자였으며, 그의 지도 하에 그리스 영토는 1912~13년의 발칸 전쟁에서 두 배로 확장되었다. 남부 에피루스, 크레타, 레스보스, 키오스, 이카리아, 사모스, 사모트라케, 림노스, 그리고 마케도니아의 대부분이 그리스에 합병되었다.

발칸 전쟁에서 그리스가 승리한 후, 오스만 제국은 제국에 거주하는 그리스계 민족을 박해하기 시작했고, 이는 그리스인 학살의 민족 청소로 이어졌다. 이러한 박해는 오스만 제국이 1914년 말 동맹국에 가담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까지 계속되었다. 그리스는 1917년까지 중립을 유지하다가 연합국에 합류했다. 터키의 잔혹 행위에 대한 난민 보고서와 제1차 세계 대전의 연합국 승리는 메갈리 이데아의 더 큰 실현을 약속하는 듯했다. 그리스는 스미르나와 그 배후지를 보호령으로 하여 소아시아에 발판을 마련했다. 5년간의 그리스 행정 이후, 해당 영토가 오스만 제국의 통제로 되돌아갈지, 아니면 그리스에 합류할지를 결정하기 위한 국민 투표가 열릴 예정이었다. 그리스는 또한 임브로스와 테네도스 섬, 서 및 동트라키아를 획득했으며, 국경은 콘스탄티노플 성벽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그어졌다.

3. 4. 그리스-터키 전쟁과 메갈리 이데아의 좌절

세브르 조약에 따라 스미르나를 장악하려는 그리스의 노력은 연합군에 저항하는 터키 혁명가들에 의해 좌절되었다.[14] 터키는 결국 승리하여 그리스-터키 전쟁 (터키 독립 전쟁의 일부) 동안 아나톨리아에서 그리스인들을 몰아냈다.[14] 전쟁은 그리스가 동 트라키아, 임브로스, 테네도스, 스미르나를 신생 터키 공화국에 양도하는 내용을 담은 로잔 조약으로 종결되었다.[14]

그리스군은 앙카라를 향해 진격했지만, 1921년 3월, 그리스 국내의 정치적, 군사적 상황의 악화에 따라 소아시아의 그리스인들을 국제 연맹 보호 하에 두는 평화적 타협안을 수용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전황이 호전된 튀르키예군은 8월 26일에 반격을 시작했고, 이에 격파된 그리스군은 소아시아를 잃고, 9월 8일에 스미르나에서 철수하게 되었다.[38] 그 후, 스미르나에서는 대화재가 발생하여, 3만 명의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기독교도들이 학살되었다.[38] 이것은 후에 ""라고 불리게 된다. 2500년 동안 이어진 소아시아에서의 그리스인의 역사에 종지부가 찍히고 "메갈리 이데아"도 스미르나와 함께 잿더미가 되었다.[39]
추가적인 영토 분쟁을 피하기 위해 그리스와 터키는 "인구 교환"에 참여했다. 분쟁 중 이미 151,892명의 그리스인이 소아시아에서 도망쳤다. 로잔 조약은 터키에서 1,104,216명의 그리스인을 이주시켰고,[11] 380,000명의 터키인이 그리스 영토를 떠나 터키로 이주했다.[11] 이러한 이동은 대(大)그리스의 개념을 추구하려는 의지를 종식시켰고, 소아시아에서 3000년 동안 지속된 그리스인의 거주를 끝냈다. 그 후 1923년에 그리스와 튀르키예의 주민 교환이라는 형태로 강제 이주에 이르게 된다.
4. 현대적 의의와 영향
오늘날에는 튀르키예의 행동을 그리스인 학살이라고 비판하는 움직임도 보인다. 이메이아 섬은 현재 그리스-튀르키예 간의 분쟁 지역이며, 키프로스는 독립 이후 그리스계 주민과 튀르키예계 주민의 대립이 계속되어 왔지만, 1974년 쿠데타를 계기로 튀르키예군이 상륙했다. 그 이후 키프로스 섬은 튀르키예계의 북키프로스 튀르키예 공화국과 그리스계의 키프로스 공화국에 의해 국토가 분단되어 있다(자세한 내용은 키프로스 분쟁 참조).[15][22]
또한, 그리스의 극우 정당 황금새벽당은 메갈리 이데아의 영토 회복을 주장하고 있다.[18]
4. 1. 키프로스 문제와 터키와의 갈등
메갈리 이데아는 20세기 후반까지 그리스 외교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15] 특히 키프로스 문제는 메갈리 이데아의 잔재로 볼 수 있다.1946년 파리 평화 회의에서 그리스는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소련 대표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데카니제 제도를 확보하며 영토를 확장했다.[16] 그러나 영국 식민지였던 키프로스는 그리스와 터키 간의 "불화의 씨앗"이 되어, 1930년대 케말-베니젤로스 협정 이후의 긍정적인 양국 관계를 종식시켰다.
1955년, 조지 그리바스 대령은 영국군을 몰아내고 그리스와의 통합(''에노시스'')을 추진하기 위한 시민 불복종 운동을 시작했다. 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 그리스 총리는 이 생각에 부정적이지 않았으며, 그리스계와 터키계 주민 간의 의견 불일치가 심화되었다. 1955년 9월, ''에노시스'' 요구에 대한 대응으로 이스탄불 포그롬이 발생하여 4,000개의 상점, 100개의 호텔과 식당, 70개의 교회가 파괴되거나 손상되었고,[17] 터키에서 그리스로의 대규모 이주가 발생했다.

1959년 취리히 및 런던 협정으로 키프로스는 독립했지만, 1960년부터 민족 간 충돌이 발생하여 1964년 유엔 키프로스 평화 유지군이 파견되었다. 군사 정권은 1974년 7월 키프로스 대통령 마카리오스 3세를 전복하고 ''에노시스''를 추진했다. 이는 터키의 군사 개입을 초래하여 키프로스 분단으로 이어졌고, 1983년 북키프로스는 독립을 선언했지만 터키만이 이를 인정하고 있다.
오늘날 터키의 행동을 그리스인 학살이라고 비판하는 움직임도 보인다. 은 현재 그리스-터키 간의 분쟁 지역이며, 키프로스 분쟁은 계속되고 있다. 그리스의 극우 정당 황금새벽당은 메갈리 이데아의 영토 회복을 주장하고 있다.
4. 2. 극우 민족주의의 부활과 한계
극우 민족주의 정당 황금새벽당은 2010년부터 2019년까지 선거에서 지지를 받았으며, 메갈리 이데아를 지지했다.[18] 당 대표 니콜라오스 미할로리아코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스미르나, 트레비존드를 언급하며 내년에 이들 지역에서 다시 만나자는 소원을 빌었다.[18] 그는 테살로니키 시장 야니스 부타리스가 아타튀르크의 이름을 거리에 붙이려는 것에 대해 비판했다.[19][20] 2013년 1월에는 황금새벽 지지자들이 코모티니에서 터키 영사 오스만 일한 세네르의 차량을 공격하고 반터키주의 시위 동안 아타튀르크에게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21] 미할로리아코스는 또한 북에페이로스의 "해방"을 요구했으며, 황금새벽과 사이프러스의 전 파트너 ELAM은 에노시스를 지지한다.2015년, 황금새벽 당원과 지도자 প্রায় 100명이 살인 및 갈취를 포함한 다양한 혐의로 체포되었다.[22] 2019년에는 당의 지지율이 2% 미만으로 급락했고, 2020년 10월, 미할로리아코스를 포함한 황금새벽의 지도자 대부분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22] 2023년 현재, 이 정당은 그리스 의회나 유럽 의회에 남아있는 당원이 없다.[22]
오늘날 튀르키예의 행동을 그리스인 학살이라고 비판하는 움직임도 보인다. 이메이아 섬(Imia/Kardak)은 현재 그리스-튀르키예 간의 분쟁 지역이며, 키프로스는 독립 이후 그리스계 주민과 튀르키예계 주민의 대립이 계속되어 왔지만, 1974년 쿠데타를 계기로 튀르키예군이 상륙하여 북키프로스 튀르키예 공화국과 키프로스 공화국으로 국토가 분단되었다 (키프로스 분쟁 참조).
4. 3. 대한민국에 대한 시사점
5. 평가와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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