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미하일 황금 돔 수도원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성 미하일 황금 돔 수도원은 1108년부터 1113년 사이에 키예프 루스의 스뱌토폴크 2세 대공에 의해 건설된 수도원이다. 비잔틴 건축 양식을 따랐으며, 대천사 미카엘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1240년 몽골 제국 침략으로 파괴되었으나 1496년 동방 정교회 수도원으로 복원되었고, 1620년에는 키이우 관구장 주교의 관저로 사용되었다. 18세기에는 우크라이나 바로크 양식으로 개조되었으며, 1934년부터 1936년까지 소련에 의해 철거되었다. 1991년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 재건되었으며, 현재는 우크라이나 정교회(키이우 총대주교청)에 소속되어 교회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우크라이나의 수도원 - 비두비치 수도원
비두비치 수도원은 1070년에서 1077년 사이에 설립된 우크라이나 키이우에 위치한 수도원으로, 루스 역사 편찬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성 미카엘 교회 등 주요 건축물과 문화 예술 작품을 포함한다. - 우크라이나의 수도원 - 키이우 페체르스크 수도원
키이우 페체르스크 수도원은 우크라이나 키이우에 있는 동굴 수도원에서 시작된 역사적인 수도원 단지로, 1051년 또는 1074년에 안토니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동방 정교회 최고위급 수도원인 라브라로도 불리며 유네스코 세계 유산이자 우크라이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 - 키이우의 관광지 - 키이우 페체르스크 수도원
키이우 페체르스크 수도원은 우크라이나 키이우에 있는 동굴 수도원에서 시작된 역사적인 수도원 단지로, 1051년 또는 1074년에 안토니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동방 정교회 최고위급 수도원인 라브라로도 불리며 유네스코 세계 유산이자 우크라이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 - 키이우의 관광지 - 키이우 TV타워
키이우 TV 타워는 1973년 완공된 385m 높이의 철골 격자 구조물로, 키이우 지역의 주요 방송 송신소이자 통신 중계소이며, 2022년 러시아의 침공 당시 미사일 공격을 받았다. - 동방 정교회 수도원 - 비두비치 수도원
비두비치 수도원은 1070년에서 1077년 사이에 설립된 우크라이나 키이우에 위치한 수도원으로, 루스 역사 편찬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성 미카엘 교회 등 주요 건축물과 문화 예술 작품을 포함한다. - 동방 정교회 수도원 - 키이우 페체르스크 수도원
키이우 페체르스크 수도원은 우크라이나 키이우에 있는 동굴 수도원에서 시작된 역사적인 수도원 단지로, 1051년 또는 1074년에 안토니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동방 정교회 최고위급 수도원인 라브라로도 불리며 유네스코 세계 유산이자 우크라이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
성 미하일 황금 돔 수도원 | |
---|---|
지도 | |
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성 미하일 황금 돔 수도원 |
현지 명칭 (언어) | 우크라이나어 |
기타 명칭 | 키예프-미하일로프스키 황금 돔 수도원 |
종파 | 우크라이나 정교회 |
수호 성인 | 대천사 미카엘 |
기념일 | 미상 |
관할 구역 | 키이우 교구 |
위치 | 우크라이나 키이우 8 |
웹사이트 | archangel.kiev.ua |
상세 정보 | |
종류 | 수도원 |
건축 양식 | 우크라이나 바로크 (재건) |
상태 | 활동 중 |
기능적 상태 | 미상 |
문화재 지정 여부 | 국가 중요 건축 기념물 |
재건축가 | 이반 흐리호로비치-바르스키 |
역사 | |
설립 연도 | 1108년–1113년 |
설립자 | 키이우의 스비아토폴크 2세 |
폐쇄 시기 | 미상 |
재건축 완료 연도 | 1999년 |
인물 | |
수도원장 | 아가페투스 |
대주교 | 에피파니우스 1세 (수도 대주교) |
이미지 | |
![]() |
2. 역사
1108년부터 1113년까지 키예프 루스의 스뱌토폴크 2세 대공에 의해 건설되었다.[1] 수도원은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원 건축 양식을 띠고 있으며 수도원 이름은 대천사 미카엘에서 유래된 이름이다.[1] 1240년 몽골 제국의 침공으로 인해 파괴되었지만[3] 1496년 동방 정교회 수도원으로 복원되었다.[3] 1620년에는 키이우 관구장 주교의 관저로 사용되었고[2] 1633년에는 수도원장이 임명되었다.
1108년 스뱌토폴크 2세의 아내가 성녀 바르바라의 유품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키이우로 옮긴 뒤부터 순례지로 널리 알려졌다. 특히 카자크의 수장이었던 이반 마제파는 이 수도원에 은으로 만든 성골함을 기부하기도 했다.[1]
16세기 동안 성 미하일 수도원은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인기 있고 부유한 수도원 중 하나가 되었다.[1] 1523년부터 지기스문트 1세에 의해 자유가 부여되었고, 그는 복원 작업을 장려했다.[3]
1620년, 성 미하일 수도원장 욥 보레츠키는 수도원의 대성당을 재건된 키예프, 갈리치아 및 모든 루스 대교구의 자리로 만들었다.[2] 그의 임기 동안 수도원의 종탑과 식당이 건설되었다.
2. 1. 초기 역사 (12세기~16세기)
1108년부터 1113년까지 키예프 루스의 스뱌토폴크 2세 대공에 의해 건설되었다.[1] 수도원은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원 건축 양식을 띠고 있으며 수도원 이름은 대천사 미카엘에서 유래된 이름이다.[1] 성 미하일의 완공 정확한 날짜는 알려지지 않았으나,[3] 1108년에서 1113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1]1240년 몽골 제국의 침공으로 인해 파괴되었지만[3] 1496년 동방 정교회 수도원으로 복원되었다.[3] 1620년에는 키이우 관구장 주교의 관저로 사용되었고[2] 1633년에는 수도원장이 임명되었다.
1108년 스뱌토폴크 2세의 아내가 성녀 바르바라의 유품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키이우로 옮긴 뒤부터 순례지로 널리 알려졌다. 특히 카자크의 수장이었던 이반 마제파는 이 수도원에 은으로 만든 성골함을 기부하기도 했다.[1] 18세기에는 수도원 내부에 있던 비잔티움 전통 장식을 보존하는 대신에 수도원 외부를 우크라이나 바로크 건축 양식으로 개조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1800년 이후에는 체르니히우 주교의 관저로 사용되었다.
1934년부터 1936년까지 소련에 의해 수도원이 철거되었으며 수도원이 있던 자리에는 정부 청사가 들어섰다. 수도원에 있던 문화재와 귀중품은 러시아 모스크바, 레닌그라드의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1991년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이후부터 수도원 복원 공사가 진행되었다. 수도원 복원 공사는 1999년에 완료되었으며 수도원의 소유권은 키이우 총대주교좌 우크라이나 정교회에 양도되었다.
2001년부터 2004년까지 러시아의 여러 박물관에 있던 수도원의 모자이크 벽화와 문화재가 우크라이나에 반환되었으며 2006년에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있던 수도원의 프레스코 벽화가 키이우에 반환되었다.

1050년대에 키예프가 키예프 루스 국가의 일부였을 때 대공 이쟈슬라프 1세는 수도원을 테살로니키의 성 데메트리오스에게 헌정하여 성 소피아 대성당 근처에 지었다.[1] 수도원의 수장은 키예프 페체르스크 라브라의 이구멘들이었다.[3]
라브렌티우스 연대기에 실린 1108년의 연대기에 따르면, 이쟈슬라프의 아들 스비아토폴크 2세가 키예프에 석조 교회를 세웠으며,57}} 성 미하일 수도원도 같은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생각된다.[1] 당시의 연대기에는 설립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스비아토폴크가 성 데메트리오스 수도원 구내에 새로운 수도원을 위한 대성당을 지었을 가능성이 높다. 14세기 말 이전에는 성 미하일에 대한 역사적 언급이 없다.[3] 미카엘 대천사에게 헌정된 교회는 이쟈슬라프의 수호성인이었으며,504}} 미카엘이 전쟁 승리의 수호성인이기 때문에 폴로브치에 대한 스비아토폴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지어졌을 수도 있다.[1]
대성당의 돔은 아마도 키예프 루스에서 처음으로 도금된 것이었고,[1] 수도원은 이 때문에 "황금 돔"이라고 불렸을 것이다.[1]
중세 시대에 대성당은 이쟈슬라비치 가문의 통치자들의 매장지가 되었다.[2] 수도원은 아마도 년에 페체르스크 라브라의 통제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3] 성 미하일은 1240년 몽골의 루스 침략 당시 키예프가 점령되었을 때 손상을 입고 약탈을 당했다.[3] 침략과 그 이후의 정치적 폭력 속에서도 살아남았지만,[3] 그 이후 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멈췄다.[3] 1398년에 문서에 다시 언급되었고,[2] 지그문트 1세의 1523년 칙허장은 1470년에 수도원이 버려졌다고 묘사했다.[4] 1482년에는 크림 칸 멩리 1세 기레이의 키예프 습격으로 인해 추가적인 피해를 입었으며,[1] 그 후 버려졌다.[3] 별칭 "황금 돔"이 사용되기 시작하기 직전인 1496년까지 다시 나타났다.[3]
|thumb|1695년 이반 우샤코프 중령의 도시 계획에 묘사된 수도원|alt=수도원이 중앙에 묘사된 키예프 레이아웃]]
16세기 동안 성 미하일 수도원은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인기 있고 부유한 수도원 중 하나가 되었다.[1] 1523년부터 지기스문트 1세에 의해 자유가 부여되었고, 그는 복원 작업을 장려했다.[3]
오스트리아 군인 겸 외교관인 는 1594년에 키예프를 방문했다. 그는 여행 일지를 썼고, 그해 Tagebuch des Erich Lassota von Steblau|lt=Erich Lassotade로 출판되었다.[5] 그는 수도원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5]
{{Blockquote
|text=아름다운 건물이다. 중앙에는 금색 지붕이 있는 둥근 돔이 있다. 성가대는 안쪽으로 향해 있으며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바닥은 작고 다채로운 돌로 깔려 있다. 높은 제단 바로 맞은편 문을 통해 교회에 들어가면 왼쪽에 성스러운 처녀 바르바라의 시신을 담은 나무 상자가 있다. 그녀는 왕의 딸이었고, 12세 정도의 어린 소녀였다. 그녀의 크기로 판단할 수 있다. 그녀의 유해는 발까지 고운 린넨 조각으로 덮여 있었는데, 내가 직접 만져보니 아직 굳고 썩지 않아 부패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에는 나무로 만든 도금된 왕관이 있다.
|author=에리히 라소타 폰 슈테블라우 (번역: Orest Subtelny)
|title=
|source='Habsburgs and Zaporozhian Cossacks' (1594)
}}
17세기에 도시의 대부분의 정교회 성직자와 수도원이 그리스 가톨릭 유니에이트 교회로 개종했지만, 성 미하일 수도원은 정교회 교리를 유지했다.[3] 1612년, 폴란드 왕 지기스문트 3세 바사는 수도원을 유니에이트 교회에 넘겼지만, 그 교회는 수도원과 그 재산을 소유하지 못했다.[1] 1613년에 나무로 된 식당 교회가 세워졌다.[2] 1618년, 종교인 는 수도원에 대한 권력을 확장하려 했다. 이는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자포로제 코사크는 그를 체포하여 비두비치 수도원 맞은편의 도랑에 빠뜨려 익사시켰다.[5]
|thumb|의 1638년 키예프 지도에는 수도원이 맨 위에 표시되어 있다|alt=키예프를 내려다보는 수도원 지도]]
1620년, 성 미하일 수도원장 욥 보레츠키는 수도원의 대성당을 재건된 키예프, 갈리치아 및 모든 루스 대교구의 자리로 만들었다.[2] 그의 임기 동안 수도원의 종탑과 식당이 건설되었다.[5] 보레츠키 아래에서 수녀의 수도원이 현재 키예프 푸니쿨라의 상부 정류장 부지에 수도원 근처에 세워졌다.[4] 이 기간 동안 인쇄소가 세워졌다.[2] 키예프의 지도인 ''테라터지'' (1638)에서 키예프 수도승 가 작성했고, 1651년 네덜란드 그림에서 수도원은 단일 돔으로 표시된다.[4]
중세 대성당 재건 작업은 프랑스 엔지니어 기욤 르 바쇠르 드 보플랑이 그의 Description d'Ukranie프랑스어 (1650)에서 언급했다.[4] 시리아 여행자이자 작가인 알레포의 바울은 1654년 여름에 키예프에 있는 동안 수도원을 방문했다.[6] 그는 교회를 묘사하면서 키예프의 성 소피아 성당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 소피아와 비교하면서 성 미하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6]
{{Blockquote
|text=건물 전체는 나무로 되어 있으며, 웅장하고, 높고, 우아한 교회는 돌과 석회로 만들어졌으며 금으로 빛나는 높은 돔이 있다. 이 교회는 단 하나의 본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리창으로 사방이 밝아진다. 내가 묘사한 세 개의 교회는 모두 동일한 건축 양식과 동일한 시대를 가지고 있다.
}}
2. 2. 중흥기 (17세기~19세기)
1108년부터 1113년까지 키예프 루스의 스뱌토폴크 2세 대공에 의해 건설되었다.[1] 수도원은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원 건축 양식을 띠고 있으며 수도원 이름은 대천사 미카엘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16세기 동안 성 미하일 수도원은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인기 있고 부유한 수도원 중 하나가 되었다.[1]1240년 몽골 제국의 침공으로 인해 파괴되었지만 1496년 동방 정교회 수도원으로 복원되었다. 1620년에는 키이우 관구장 주교의 관저로 사용되었고[2] 1633년에는 수도원장이 임명되었다.
1108년 스뱌토폴크 2세의 아내가 성녀 바르바라의 유품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키이우로 옮긴 뒤부터 순례지로 널리 알려졌다. 특히 카자크의 수장이었던 이반 마제파는 이 수도원에 은으로 만든 성골함을 기부하기도 했다.
1620년, 성 미하일 수도원장 욥 보레츠키는 수도원의 대성당을 재건된 키예프, 갈리치아 및 모든 루스 대교구의 자리로 만들었다.[2] 그의 임기 동안 수도원의 종탑과 식당이 건설되었다.
18세기에는 수도원 내부에 있던 비잔티움 전통 장식을 보존하는 대신에 수도원 외부를 우크라이나 바로크 건축 양식으로 개조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1712년, 수도원 근처에 살던 성 미하일 수도원의 수녀들은 키이우 포딜 지구의 별도 기관으로 이전되었다. 식당 교회는 1713-1715년에 1676년 화재로 파괴된 키이우 시메온 교회의 벽돌로 우크라이나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졌다.[19]
18세기 말에 수도원의 많은 재산이 매각되었다.[3] 모든 부동산은 예카테리나 2세의 칙령에 따라 1786년에 손실되었다. 그 결과, 수도원에서 지원할 수 있는 수도승의 수가 크게 줄어들었고, 모든 새로운 건축 작업이 중단되었다.

1800년 이후에는 체르니히우 주교의 관저로 사용되었다. 19세기 초, 수도원에는 도서관, 교사 양성 학교, 성가대 학교가 있었다. 1886년에는 1920년대 초까지 운영된 성가 학교가 문을 열었다.[4] 19세기 동안 성 미하일 성당에는 최대 240명의 수도사가 있었다.[3]
1880년대에 러시아 미술사학자 아드리안 프라코프는 성당의 12세기 모자이크와 프레스코 몇 점을 발견하여 청소하고 복원했다. 1888년, 성당에는 열풍 난방 시스템이 설치되었고 새로운 바닥재가 깔렸다. 수도원 구내의 건설 공사는 1902년까지 계속되었다.
2. 3. 소련 시대의 파괴와 재건 (20세기~21세기)
1108년부터 1113년까지 키예프 루스의 스뱌토폴크 2세 대공에 의해 건설된 성 미하일 황금 돔 수도원은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원 건축 양식을 띠고 있었으며, 대천사 미카엘에서 수도원 이름이 유래되었다.[31][32] 1240년 몽골 제국의 침공으로 파괴되었지만 1496년 동방 정교회 수도원으로 복원되었다.[31][32] 1620년에는 키이우 관구장 주교의 관저로 사용되었고 1633년에는 수도원장이 임명되었다. 1108년 스뱌토폴크 2세의 아내가 성녀 바르바라의 유품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키이우로 옮긴 뒤부터 순례지로 널리 알려졌으며, 카자크의 수장이었던 이반 마제파는 이 수도원에 은으로 만든 성골함을 기부하기도 했다.[31][32] 18세기에는 수도원 내부에 있던 비잔티움 전통 장식을 보존하는 대신에 수도원 외부를 우크라이나 바로크 건축 양식으로 개조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1800년 이후에는 체르니히우 주교의 관저로 사용되었다.[31][32]1904년 화재로 식당 교회가 손상되었다.[19] 1906년에는 중세 보물이 성 미하일 문 반대편, italic=no/Trekhsvyatytelskaru 거리(현재 Трьохсвятительська вулицяuk)의 상자에서 발견되었다. 11~12세기로 추정되는 이 보물은 1240년 키예프가 몽골에 의해 약탈당했을 때 숨겨진 것으로 보인다. 보물에서 나온 금 장신구는 현재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다른 조각들은 대영 박물관에 있다.[7]
제1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대성당은 볼셰비키가 발사한 포탄에 맞아 중앙 돔을 지지하는 아치 중 하나가 파괴되는 등 거의 파괴될 뻔했다.[7] 1919년, 수도원 건물은 소비에트 정부에 의해 강제 징수되었고,[7] 1922년에는 당국에 의해 폐쇄되었다. 식당은 프롤레타리아 학생의 집으로 개조되어 숙소로 사용되었고, 다른 건물들은 운전사 훈련 학교를 포함한 다양한 기관에서 사용되었다.[2][25]
1934년부터 1936년까지 소련에 의해 수도원이 철거되었으며, 수도원이 있던 자리에는 정부 청사가 들어섰다. 수도원에 있던 문화재와 귀중품은 러시아 모스크바, 레닌그라드의 박물관으로 옮겨졌다.[31][32] 1934년 1월, 정부는 하르키우에서 키예프로 우크라이나 수도를 이전하기로 결정했고, 4월에는 성 미하일 수도원이 있던 부지에 새로운 정부 청사를 건설하기 위한 공모전이 발표되었다.[4] 대중의 항의를 막기 위해 파괴에 공개적으로 반대할 것으로 여겨진 미술 평론가 Ернст Федір Людвіговичuk, Макаренко Микола Омеляновичuk, Таранушенко Стефан Андрійовичuk가 체포되었다.[4] 6월 26일, 레닌그라드 미술 아카데미의 Фролов, 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ru 감독 하에 12세기 비잔틴 모자이크를 제거하는 작업이 시작되었으며, 이들은 국립 에르미타주 박물관, 트레차코프 미술관, 러시아 국립 박물관으로 분배되었다.[8] 1928년과 1937년 사이에 우크라이나 SSR 물질 문화사 연구소에서 수도원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9]
수도원은 1935년 봄부터 체계적으로 철거되었는데, 이때 성당의 황금 돔이 해체되었고, 1937년 8월 14일에는 성당의 껍데기가 다이너마이트로 폭파되었다. 식당은 그대로 남겨졌고, 수도사들이 사용하던 건물 두 채, 성가대 건물, 종탑 남쪽 벽의 일부, 그리고 수도원의 지하실도 살아남았다.[19][23] 성당과 종탑의 기초, 그리고 수도원 벽의 일부는 완전히 철거되지 않았다.[23]
1938년, 단지의 대부분이 철거된 후, 수도원 부지와 인접 지역에서 발굴이 이루어졌다. 철거된 Трьохсвятительська церква (Київ)uk 부지에는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새로운 본부가 건설되었다.[4] 철거된 수도원 부지에 대한 작업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중단되었지만, 1944년 키예프 해방 이후 재개되었다. 빈 부지는 스포츠 경기장으로 개조되었고,[4] 1970년대 중반까지 식당은 실내 스포츠 시설로 사용되었다.[19]
수도원 재건 아이디어는 1966년 러시아 건축가 표트르 바라노프스키에 의해 처음 제안되었다. 이 제안은 대중의 지지를 받았으며, 새로 설립된 Українське товариство охорони пам'яток історії та культуриuk의 지원을 받았다.[4] 1970년대에는 건축가와 엔지니어들이 수도원 재건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1991년 우크라이나 독립 선언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고려되었으며, 잃어버린 국가 문화 유산 재건의 일환으로 수도원의 전면적인 재건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20]
스웨덴 예술가 카를 페테르 마제르가 1851년 우크라이나를 방문하여 제작한 성 미하일 황금 돔 수도원과 대성당 내부 묘사 등의 건축 도면은 19세기 중반 키예프의 독특한 기록으로,[10] 수도원 재건에 도움이 될 만큼 정확했다.[11] 수도원 파괴 전에 소련 건축 역사가인 Моргілевський Іполит Владиславовичuk가 제작한 문서도 사용되었다.[2]
1991년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이후부터 수도원 복원 공사가 진행되었다. 수도원 복원 공사는 1999년에 완료되었으며 수도원의 소유권은 키이우 총대주교좌 우크라이나 정교회에 양도되었다.[31][32]
수도원은 파괴 당시 가지고 있던 우크라이나 바로크 양식의 추가 요소를 포함하도록 설계되었다. 복원가들은 대성당의 측면 통로(성 바르바라와 알렉산드리아의 성 카테리나에게 헌정됨)와 같이 17/18세기에 건설된 것으로 알려진 수도원 부분에 통합하기 위해 바로크 양식의 이미지를 연구했다. 대성당 내부의 핵심은 11세기에 나타났을 모습으로 계획되었다. 12세기 모자이크와 프레스코의 그림과 사진이 템플릿으로 사용되었으며, 성 소피아 대성당과 성 시릴 교회와 같은 현존하는 루스 및 비잔틴 교회의 내부 스타일이 복제되었다.[31][32]
1992년부터 1995년 사이에 우크라이나 국립 과학 아카데미 고고학 연구소에서 수행한 발굴 작업에서 300개 이상의 무덤이 발견되었고, 11세기의 독특한 조각된 석판이 발견되었다. 1996/1997년 동안 기초가 1년 동안 노출되어 남아있는 기초에 손상을 입혔다. 이 부지는 1997년 5월 24일에 성별되었다.

경계 벽의 서쪽 끝과 경제문이 먼저 재건되었고, 그 다음 종탑이 재건되었으며, 종탑은 임시 관측 플랫폼으로 사용되었다.[4] 이후 벽의 벽화가 복원되었다.[22] 성당 재건 공사는 1997년 5월 24일에 공식적으로 시작되었고,[3] 1998년 11월부터 1999년 말까지 건설 작업이 계속되었다. 종탑 2층에 삼위일체 성인에게 봉헌된 새 교회가 세워졌다. 이 교회는 같은 이름으로 파괴된 교회와 소련 탄압의 모든 우크라이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1999년에 봉헌되었다.[22]
48.28m 높이의 탑에 있는 새 종들은 1998년 5월 30일에 처음으로 울려 퍼졌다. 무게는 2kg에서 8톤에 이르는 7개의 가장 무거운 종을 포함한 대부분의 종은 우크라이나 서부의 노보볼린스크에서 주조되었다. 성 미하일 황금 돔 수도원 종탑의 카리용을 작동하기 위한 컴퓨터 제어 키보드는 반음계로 조율된 12개의 종을 작동시킨다. 새로운 전자 시계가 설치되었고, 종탑의 종소리는 매 시간마다 울리며, 23개의 잘 알려진 우크라이나 멜로디를 연주할 수 있다.
완공된 성당을 성화하는 의식은 2000년 5월 28일에 열렸다. 참석자 중에는 당시 우크라이나 대통령이었던 레오니드 쿠치마가 있었다. 성당은 1999년 5월 30일에 공식적으로 재개되었고, 내부 장식, 모자이크 및 프레스코화는 2000년 5월 28일에 완성되었다. 측면 예배당은 2001년에 성 바르바라와 성 카테리나에게 봉헌되었다.[31][32]
2001년부터 2004년까지 러시아의 여러 박물관에 있던 수도원의 모자이크 벽화와 문화재가 우크라이나에 반환되었으며 2006년에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있던 수도원의 프레스코 벽화가 키이우에 반환되었다.[31][32]
성 미하일 황금 돔 수도원 역사 박물관은 종탑 1층에 위치해 있다.[13] 이 박물관은 1998년에 설립되어 발굴된 많은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2018년 12월 15일에 신생 우크라이나 정교회가 발족함과 동시에, 이 교회는 그 수좌 대주교의 대성당으로 지정되었다[31][32]
2. 4. 현대 (21세기~)
1991년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이후부터 수도원 복원 공사가 진행되었다.[19] 수도원 복원 공사는 1999년에 완료되었으며 수도원의 소유권은 키이우 총대주교좌 우크라이나 정교회에 양도되었다. 1995년에는 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은 국가 예산을 투입하여 성 미하일 황금 돔 수도원을 복원하기 시작했다.[31][32]2001년부터 2004년까지 러시아의 여러 박물관에 있던 수도원의 모자이크 벽화와 문화재가 우크라이나에 반환되었으며 2006년에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있던 수도원의 프레스코 벽화가 키이우에 반환되었다. 현재는 교회와 박물관으로 기능하고 있다.
2018년 12월 15일에 창설된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본부가 되었다.[14][15] 성 미하일 황금 돔 수도원은 키예프 및 전 우크라이나 관구장의 본부로 사용된다.[14][15] 수도원장은 교구 주교의 직위를 가진다.[16] 키예프 및 전 우크라이나 관구장이자 우크라이나 정교회 수장은 에피파니우스 1세이다.[17]
1992년에 키예프 정교 신학 아카데미가 재개되었을 때, 식당은 키예프 신학 학교의 교회가 되었다.[19]
3. 건축
수도원의 주요 건물 4개는 돔형 대성당, 식당, 호텔 숙소(원래 1858년에 건축), 그리고 수장 숙소(1857년에 처음 건축)였다. 11세기 교회는 대성당의 중심부가 된 곳에 위치해 있었고, 원래 단일 돔이 위치해 있었다. 작은 교회, 아마도 세례당일 가능성이 있는 건물이 대성당 남쪽에 인접해 있었을 것이다. 대성당과 마찬가지로 세례당도 돔으로 덮여 있었을 수 있다.
키예프 페체르스크 라브라의 그림과 관련된 이콘 화가 알리피우스 오브 더 케이브스가 전통적으로 대성당 교회를 장식하는 데 참여한 것으로 여겨진다.
1911년의 석판화는 20세기 초 수도원의 배치를 보여주며, 대성당, 성문이 있는 종탑, 성 니콜라스 십자 교회가 있는 주교관, 성가대원들의 숙소, 식당, 그리고 나이 많은 수도사들을 위한 숙소 등이 묘사되어 있다.
수도원 입구 위에 세워진 3층 종탑은 키예프에서 가장 오래된 벽돌 종탑이었다. 1631년경 보레츠키는 "키예프 시민인 석공 페테르 니메츠"와 벽돌 종탑 건설에 대한 계약을 맺었다. 대신 3층짜리 나무 탑이 세워졌다. 이것은 1716-1720년에 새로운 구조물로 대체되었는데, 금박 돔이 있었고 수도원에 속했던 오스테르의 파괴된 성 조지 교회에서 가져온 벽돌로 만들어졌다. 탑에는 23개의 종이 있었다.
수도원 구역의 남동쪽에는 농장, 정원, 채소 재배 구역이 있었다. 농장 안뜰은 말들을 위한 마구간과 마차고로 둘러싸여 있었다. 구역 내의 다른 건물로는 병원, 재무 건물, 학교 등이 있었다. 수도원 지하실 입구는 경제문 근처에 있었다. 1908년에는 4층짜리 숙소 두 채가 지어져 자체 안뜰이 있는 독립된 구역을 형성했다.
수도원과 수녀원(수녀들이 이전되기 전)은 모두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수도사들의 숙소가 평행하게 늘어서 있어 서로 분리되어 있었다. 경제문은 18세기 중반의 전통적인 우크라이나 건축 양식으로, 기둥으로 둘러싸이고 장식된 박공벽으로 덮인 아치형 문이었다. 벽에 비스듬하게 위치한 것은 특이하다.
==== 성 미하일 황금 돔 대성당 ====
성 미하일 황금 돔 대성당은 11세기에 페체르스크 라브라 수도원의 성모 승천 대성당을 본떠 비잔틴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그리스 십자 평면에 6개의 기둥, 3개의 네이브와 3개의 앱스를 갖추고 있었다. 1638년과 1651년의 키예프 지도에는 단일 돔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성가대석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는 탑이 주 건물에서 돌출되지 않고 나르텍스 북쪽에 통합되었다. 코사크 사령관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기부금으로 돔을 금으로 덮었다.
17세기와 18세기에는 성당이 개조되어 바로크 양식의 외관을 갖게 되었다. 1715년과 1731년에는 두 개의 측면 통로가 추가되었고, 1746년에는 구조를 약화시키는 아치를 보강하기 위해 플라잉 버트레스(arc-boutants프랑스어)와 그 사이에 단층 방, 서쪽 파사드에 두 개의 높은 돌출부가 추가되었다. 1746년과 1754년 사이에는 대대적인 재건으로 중앙 돔이 4개로 갈라졌고, 이후 7개의 돔 구조가 만들어졌다.
1908년에는 성당에 바닥 난방, 새로운 마루 바닥, 입구 현관이 설치되었다. 1992년 수도원 재건 전 부지 발굴에서 고대 성당의 일부가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었고, 이는 현재 성당 지하 묘지의 일부를 구성한다.
성당은 우크라이나 바로크 양식으로 처음 개조되었을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하기로 결정되었다. 총 면적은 74.5 m2, 높이는 39 m, 중앙 십자가의 높이는 4.2 m이다. 벽과 아치는 벽돌로 지어졌으며, 외부 벽은 파란색, 돌출된 부분은 흰색 또는 금색이다.
내부는 전체적으로 채색되었으며, 중앙 코어는 고대 루스 프레스코 스타일, 측랑은 바로크 스타일이다. 새로운 모자이크는 고제단과 주 돔을 위해 의뢰되었다. 내부 장식, 모자이크, 프레스코는 2000년에야 완공되었다. 2001년과 2004년에는 18점의 예술 작품이 모스크바에서 키예프로 반환되었다.
==== 식당 (사도 요한 신학자 교회) ====
식당 교회는 정교회 수도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단층 건물이다. 원래 정문은 북쪽에 있었고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1787년, 이 교회는 석조 건물로 종탑 위에 도금된 십자가가 있고, 녹색으로 칠해진 철판 지붕과 붉은색으로 칠해진 철제 지붕을 가지고 있다고 묘사되었다. 이코노스타시스 문은 조각되어 금으로 칠해졌다. 1847년 Sparro가 그린 건축 도면에는 세 개의 입구가 있는 건물이 묘사되어 있다. 1824년, 치히린의 아타나시우스 주교 재임 기간 동안, 식당 지붕은 다른 수도원 건물들의 철제 지붕과 마찬가지로 녹색으로 다시 칠해졌다.
1715년에서 1718년까지, 키예프의 요아사프 크로코프스키(Йоасаф (Кроковський)uk) 대주교의 비용으로, 단층의 조각된 나무와 금박을 입힌 이코노스타시스가 식당 교회에 설치되었다. 이 교회는 1676년에 불탄 키예프 쿠드리야브카의 시메온 교회의 벽돌을 사용하여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1880년의 묘사에는 이코노스타시스에 성령과 함께 계신 하느님 아버지, 수태고지, 마리아, 예수 탄생, 4명의 복음사가, 공현, 하느님의 어머니의 교회 봉헌 이미지가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1837년 식당의 개조 중에, 성소는 새로운 벽화로 장식되었다. 1845년까지 벽은 23개의 아이콘으로 장식되었다. 1850년대 자료에는 천장에 물고기와 빵의 기적 그림이 묘사되어 있다.
1904년, 이 사원은 화재로 크게 손상되었지만, 성소는 곧 복원되었다. 소비에트 시대 동안, 종교 그림은 백색으로 칠해졌다. 1937년, 성 요한 신학자의 식당 교회는 수도원 파괴 중 온전하게 남아있는 유일한 성전이었다.
1963년 8월, 바로크 양식의 돔이 없는 철거된 수도원의 보존된 식당은 우크라이나 SSR의 건축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건축가 발렌티나 셰브첸코/Шевченко Валентина Петрівнаuk의 지휘 아래 1976년에서 1981년 사이에 복원되었다. 천장을 재건할 때, 1780년대 남쪽 확장 부분이 제거되었고, 지붕은 바로크 스타일의 지붕널 지붕으로 교체되었다. 1970년대 복원 공사의 일환으로, 제단 부분의 하단에만 보존된 그림이 복원되었다; 이 구성은 예수의 부활, 4명의 복음사가의 이미지, 두 명의 세라핌을 묘사한다. 벽화의 보존된 부분은 고전주의 스타일의 미상의 장인에 의해 제작되었다. 복원 후, 이 건물은 "소피아 박물관"이라고도 알려진 국립 건축 및 역사 보호 구역의 도자기 박물관을 수용하는 데 사용되었다. 1998년, 성소는 복원되었다.
1990년대 초, 우크라이나 독립이 복원되면서, 이 교회는 종교 공동체에 반환되었다. 성 요한 신학자 교회는 키예프에서 우크라이나어로 예배가 열린 최초의 교회 중 하나가 되었다. 1997-1998년, 성 요한 신학자의 식당 교회는 성 미하일 황금 돔 수도원의 건축 앙상블에서 처음으로 복원된 건물이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성소는 지붕과 욕조를 쐐기 모양의 판자로 만든 지붕 재료인 지붕널로 덮어 역사적인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2014년, 존엄 혁명 동안, 이 사원은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즉석 병원으로 사용되었다.
==== 종탑 ====
발굴 당시 종탑의 원래 기초가 낡았고 벽돌 석조의 품질도 좋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다. 따라서 재건축 건물에는 기초가 사용되지 않았다.
재건된 종탑의 건축 양식은 성 소피아 대성당과 비두비치 수도원의 정문 종탑과 유사하다. 바닥은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다. 구조는 48.28m 높이이다. 재건된 벽의 두께는 원래 3.0-4.0m에서 0.51-0.77m로 줄일 수 있었다. 정육면체 형태인 두 번째 층은 네 개의 아치를 가지고 있으며 첫 번째 층보다 더 좁고, 종 시계와 네 개의 창문이 있다. 세 번째 층은 금박 돔으로 장식되어 있다. 원래 시계의 기계 장치는 이미 19세기 중반에 고장났다. 시계 문자반은 없었지만, 1998년 3월에 탑 시계에 문자반이 설치되었다.
3. 1. 성 미하일 황금 돔 대성당
성 미하일 황금 돔 대성당은 11세기에 페체르스크 라브라 수도원의 성모 승천 대성당을 본떠 비잔틴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3] 그리스 십자 평면에 6개의 기둥, 3개의 네이브와 3개의 앱스를 갖추고 있었다.[3] 1638년과 1651년의 키예프 지도에는 단일 돔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성가대석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는 탑이 주 건물에서 돌출되지 않고 나르텍스 북쪽에 통합되었다.[3] 코사크 사령관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기부금으로 돔을 금으로 덮었다.[2]17세기와 18세기에는 성당이 개조되어 바로크 양식의 외관을 갖게 되었다.[2] 1715년과 1731년에는 두 개의 측면 통로가 추가되었고,[2] 1746년에는 구조를 약화시키는 아치를 보강하기 위해 플라잉 버트레스(arc-boutants프랑스어)와 그 사이에 단층 방, 서쪽 파사드에 두 개의 높은 돌출부가 추가되었다.[2] 1746년과 1754년 사이에는 대대적인 재건으로 중앙 돔이 4개로 갈라졌고, 이후 7개의 돔 구조가 만들어졌다.[29]
1908년에는 성당에 바닥 난방, 새로운 마루 바닥, 입구 현관이 설치되었다.[4] 1992년 수도원 재건 전 부지 발굴에서 고대 성당의 일부가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었고, 이는 현재 성당 지하 묘지의 일부를 구성한다.[20]
성당은 우크라이나 바로크 양식으로 처음 개조되었을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하기로 결정되었다.[29] 총 면적은 74.5 m2, 높이는 39 m, 중앙 십자가의 높이는 4.2 m이다.[29] 벽과 아치는 벽돌로 지어졌으며, 외부 벽은 파란색, 돌출된 부분은 흰색 또는 금색이다.[29]
내부는 전체적으로 채색되었으며, 중앙 코어는 고대 루스 프레스코 스타일, 측랑은 바로크 스타일이다.[3] 새로운 모자이크는 고제단과 주 돔을 위해 의뢰되었다.[3] 내부 장식, 모자이크, 프레스코는 2000년에야 완공되었다.[3] 2001년과 2004년에는 18점의 예술 작품이 모스크바에서 키예프로 반환되었다.[3]
3. 2. 식당 (사도 요한 신학자 교회)
식당 교회는 정교회 수도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단층 건물이다. 원래 정문은 북쪽에 있었고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1787년, 이 교회는 석조 건물로 종탑 위에 도금된 십자가가 있고, 녹색으로 칠해진 철판 지붕과 붉은색으로 칠해진 철제 지붕을 가지고 있다고 묘사되었다.[19] 이코노스타시스 문은 조각되어 금으로 칠해졌다. 1847년 Sparro가 그린 건축 도면에는 세 개의 입구가 있는 건물이 묘사되어 있다.[19] 1824년, 치히린의 아타나시우스 주교 재임 기간 동안, 식당 지붕은 다른 수도원 건물들의 철제 지붕과 마찬가지로 녹색으로 다시 칠해졌다.[21]
1715년에서 1718년까지, 키예프의 요아사프 크로코프스키(Йоасаф (Кроковський)uk) 대주교의 비용으로, 단층의 조각된 나무와 금박을 입힌 이코노스타시스가 식당 교회에 설치되었다. 이 교회는 1676년에 불탄 키예프 쿠드리야브카의 시메온 교회의 벽돌을 사용하여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21] 1880년의 묘사에는 이코노스타시스에 성령과 함께 계신 하느님 아버지, 수태고지, 마리아, 예수 탄생, 4명의 복음사가, 공현, 하느님의 어머니의 교회 봉헌 이미지가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1837년 식당의 개조 중에, 성소는 새로운 벽화로 장식되었다.[19] 1845년까지 벽은 23개의 아이콘으로 장식되었다. 1850년대 자료에는 천장에 물고기와 빵의 기적 그림이 묘사되어 있다.[19]
1904년, 이 사원은 화재로 크게 손상되었지만, 성소는 곧 복원되었다.[21] 소비에트 시대 동안, 종교 그림은 백색으로 칠해졌다.[21] 1937년, 성 요한 신학자의 식당 교회는 수도원 파괴 중 온전하게 남아있는 유일한 성전이었다.[21]
1963년 8월, 바로크 양식의 돔이 없는 철거된 수도원의 보존된 식당은 우크라이나 SSR의 건축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건축가 발렌티나 셰브첸코/Шевченко Валентина Петрівнаuk의 지휘 아래 1976년에서 1981년 사이에 복원되었다.[21] 천장을 재건할 때, 1780년대 남쪽 확장 부분이 제거되었고, 지붕은 바로크 스타일의 지붕널 지붕으로 교체되었다.[21] 1970년대 복원 공사의 일환으로, 제단 부분의 하단에만 보존된 그림이 복원되었다; 이 구성은 예수의 부활, 4명의 복음사가의 이미지, 두 명의 세라핌을 묘사한다.[21] 벽화의 보존된 부분은 고전주의 스타일의 미상의 장인에 의해 제작되었다.[21] 복원 후, 이 건물은 "소피아 박물관"이라고도 알려진 국립 건축 및 역사 보호 구역의 도자기 박물관을 수용하는 데 사용되었다. 1998년, 성소는 복원되었다.[19]
1990년대 초, 우크라이나 독립이 복원되면서, 이 교회는 종교 공동체에 반환되었다.[21] 성 요한 신학자 교회는 키예프에서 우크라이나어로 예배가 열린 최초의 교회 중 하나가 되었다.[21] 1997-1998년, 성 요한 신학자의 식당 교회는 성 미하일 황금 돔 수도원의 건축 앙상블에서 처음으로 복원된 건물이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성소는 지붕과 욕조를 쐐기 모양의 판자로 만든 지붕 재료인 지붕널로 덮어 역사적인 모습으로 복원되었다.[21]
2014년, 존엄 혁명 동안, 이 사원은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즉석 병원으로 사용되었다.[21]
3. 3. 종탑
발굴 당시 종탑의 원래 기초가 낡았고 벽돌 석조의 품질도 좋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다. 따라서 재건축 건물에는 기초가 사용되지 않았다.재건된 종탑의 건축 양식은 성 소피아 대성당과 비두비치 수도원의 정문 종탑과 유사하다. 바닥은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다.[2] 구조는 48.28m 높이이다. 재건된 벽의 두께는 원래 3.0-4.0m에서 0.51-0.77m로 줄일 수 있었다.[23] 정육면체 형태인 두 번째 층은 네 개의 아치를 가지고 있으며 첫 번째 층보다 더 좁고, 종 시계와 네 개의 창문이 있다.[23] 세 번째 층은 금박 돔으로 장식되어 있다.[23] 원래 시계의 기계 장치는 이미 19세기 중반에 고장났다. 시계 문자반은 없었지만, 1998년 3월에 탑 시계에 문자반이 설치되었다.[24][22]
4. 예술
고대 대성당 내부에는 12세기의 프레스코화와 모자이크가 있었다.[3] 1880년대 프라호프는 미콜라 무라슈코의 드로잉 학교에서 선발된 키예프 예술가 팀을 구성하여 1882년 대성당 모자이크의 사본을 제작하고, 1884년에는 새로 발견된 모자이크를 그렸으며, 1888년에는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프레스코화의 그림을 그렸다.
대성당이 철거되었을 때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는 거의 파괴를 면했다.[27] 살아남은 일부는 1935년 키예프-페체르스크 라브라에서 열린 "봉건적 착취자들을 위한 종교" 전시회에 전시되었다.[25] 제2차 세계 대전 중, 소련이 모스크바로 가져가지 않은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는 나치에 의해 독일로 옮겨졌다가, 전쟁이 끝난 후 소련으로 반환되었다.[3]
1934년 대성당의 모자이크를 제거할 때 프레스코가 다시 발견되었다. 일부는 반출되어 키예프와 모스크바의 박물관에 분산되었다. 전쟁 후 살아남은 작품들은 노브고로드와 레닌그라드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박물관으로 반환되었다.
본 제단 위에는 최후의 만찬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을 묘사한 모자이크가 있었다.
성찬 모자이크 외에, 대성당의 철거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모자이크는 성 데메트리우스, 성 스테판, 사도 유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27] 일부 모자이크는 모스크바의 트레티야코프 미술관과 성 소피아 대성당에 보관되었다. 성 소피아에 있던 물건들은 나치가 키예프를 점령한 후 약탈당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미국인들은 이를 소련 당국에 반환했다. 그 후, 이들은 성 소피아에 다시 설치되었다.[3]
파울루스 오브 알레포는 1654년에 자신이 본 대성당의 성막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Blockquote
|text=왼쪽 성가대 뒤편에는 당신이 들어갈 때 왼쪽을 향하고 있는 아름다운 성막이 있습니다. 위에서 아래까지 이르는 철제 접이식 문이 있으며, 마치 성 소피아에서 묘사한 것처럼 칠해진 꽃과 천사, 성인의 모습으로 다양하게 장식된 칸으로 아름답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author=파울루스 오브 알레포
|source=''마카리우스의 여행기'' (1829년 원본에서 번역)
}}
대성당의 다른 주목할 만한 예술 작품으로는 안나와 엘리자베타가 기증한 별, 버클, 다이아몬드 반지가 장식된 성 바르바라의 이콘, 진주와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금 램프, 1701년 헤트만 마제파가 의뢰한 은 촛대 5개가 있었다.
4. 1. 모자이크와 프레스코
고대 대성당 내부에는 12세기의 프레스코화와 모자이크가 있었다.[3] 1880년대 프라호프는 미콜라 무라슈코의 드로잉 학교에서 선발된 키예프 예술가 팀을 구성하여 1882년 대성당 모자이크의 사본을 제작하고, 1884년에는 새로 발견된 모자이크를 그렸으며, 1888년에는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프레스코화의 그림을 그렸다.대성당이 철거되었을 때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는 거의 파괴를 면했다.[27] 살아남은 일부는 1935년 키예프-페체르스크 라브라에서 열린 "봉건적 착취자들을 위한 종교" 전시회에 전시되었다.[25] 제2차 세계 대전 중, 소련이 모스크바로 가져가지 않은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는 나치에 의해 독일로 옮겨졌다가, 전쟁이 끝난 후 소련으로 반환되었다.[3]
1746년부터 1754년까지 재건축 작업 중 대성당 통로의 침하로 인해 주 돔이 넷으로 쪼개졌고, 이후의 수리 작업으로 인해 많은 프레스코가 손상되었다.[4] 19세기 초, 대성당 내부는 유성 페인트로 장식되었다. 1888년에는 이콘 스탠드를 해체한 후 석고층 아래 숨겨져 있던 12세기 프레스코 여러 점이 프라호프에 의해 발견되어 청소되었다. 1889년에는 이콘 스탠드 위의 프레스코가 덧칠되었다.
메달리온에는 성 세바스찬의 반신상과 함께 세바스테의 40인 순교자의 이름, 성 바르바라, 대천사 가브리엘, 마리아, 대제사장 즈가리야, 예언자 사무엘 등이 묘사되었다.
1934년 대성당의 모자이크를 제거할 때 프레스코가 다시 발견되었다. 일부는 반출되어 키예프와 모스크바의 박물관에 분산되었다. 대성당을 해체하기 전 비계가 설치되지 않아 돔의 프레스코는 구원받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키예프의 프레스코 대부분은 전쟁 중에 독일로 옮겨져 손상되거나 분실되었다. 전쟁 후 살아남은 작품들은 노브고로드와 레닌그라드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박물관으로 반환되었다.
본 제단 위에는 최후의 만찬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을 묘사한 모자이크가 있었다. 알레포의 바울은 1654년에 그가 본 모자이크를 묘사했다.
모자이크는 먼지와 그을음으로 뒤덮여 프라호프에 의해 재발견되기 전까지 많은 부분이 숨겨져 기록되지 않았다. 1888년, 교구의 승인을 받아 그는 비누와 기름 혼합물을 사용하여 모자이크를 청소하고, 반죽 같은 석고 패치로 큐브 사이의 먼지를 제거했다.[26] 프라호프의 팀은 모든 모자이크의 스케치를 했다. 그의 작업은 미술사학자 니코딤 콘다코프의 관심을 끌었다. 콘다코프는 성 소피아 대성당의 "그리스" 모자이크와 성 미카엘의 인물들이 성 소피아의 정적이고 양식화된 인물들보다 더 유동적이라고 주장하며, 이것이 비잔틴 장인 외에 러시아 장인들이 고용되었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1899년, 미술사학자 드미트리 아날로프와 고고학자 에고르 레딘은 성 소피아 대성당과 성 미카엘의 성찬을 묘사한 모자이크의 유사점을 지적했다.
성찬 모자이크 외에, 대성당의 철거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모자이크는 성 데메트리우스, 성 스테판, 사도 유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27] 성 데메트리우스의 모자이크는 북동쪽 기둥의 남쪽 가장자리, 본당의 동쪽 아치 아래에 있었다. 1936년, 이 모자이크는 제거되어 시멘트로 고정된 후 키예프 러시아 미술관으로 옮겨졌다.[28] 일부 모자이크는 모스크바의 트레티야코프 미술관과 성 소피아 대성당에 보관되었다. 성 소피아에 있던 물건들은 나치가 키예프를 점령한 후 약탈당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미국인들은 이를 소련 당국에 반환했다. 그 후, 이들은 성 소피아에 다시 설치되었다.[3]
4. 2. 이콘
묘소 뒤에는 1718년 자포로지 코사크 귀족 이반 스코로파츠키가 기증한 나무로 된 5단 금과 은도금 이콘 제단벽이 있었다.[3] 1631년 성당에 설치된 이콘 제단벽을 대체한 이 이콘 제단벽은[2] 체르니히우 장인 흐리호리 페트로프가 제작했으며, 키이우 사제 스테판 루벤스키가 이콘을 그렸다.[2]
1888년 개축 공사 중 이콘 제단벽은 대리석 제단 벽으로 교체될 예정이었다. 자금 부족으로 상위 3단이 제거되어 2단 이콘 제단벽으로 남았으며, 이는 20세기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 1880년대에 부분적으로 해체한 건축가 Volodymyr Nikolaev/Ніколаєв Володимир Миколайовичuk가 이콘 제단벽 스케치를 그렸으며, 전체 이콘 제단벽은 마저가 그린 1851년 그림에서 부분적으로 보인다.
1908년에 글을 쓴 교회 역사가 Leonid Ivanovich Denisov/Арсений (Денисов)ru는 성당의 이콘 제단벽에 1817년 차르 알렉산드르 1세가 교회에 기증한 다이아몬드와 기타 보석으로 장식된 대천사 미카엘의 황금 이콘이 있었다고 묘사했다. 이콘 제단벽은 성당이 철거되기 직전에 파괴되었다.
5. 유물
이 수도원은 여러 해 동안 헤트만과 다른 후원자들의 후원을 받았다. 순례자들에게 이 수도원의 주요 매력은 성 바르바라의 유물이었는데, 1108년 스뱌토폴크 2세의 아내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키예프로 가져온 것으로 전해진다.[29] 전설에 따르면, 성 바르바라의 유물은 몽골족이 키예프를 점령했을 때 계단 아래에 숨겨졌다.[29] 한때, 그들은 1701년 헤트만 이반 마제파가 기증한 은제 성유물함에 보관되었다.[29]
1870년, 약 10만 명의 순례자들이 유물을 보기 위해 수도원을 방문했다.[29] 1917년 러시아 혁명 이전에는 수도사들이 제작하고 축복한 성 바르바라의 반지가 매우 인기가 있었다. 이 반지는 행운을 가져다주고 마법으로부터 착용자를 보호한다고 전해졌지만, 질병과 급사에 대한 효능도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29] 수도원이 파괴된 후 성인의 유물은 도시의 여러 장소에 보관되었으며, 현재는 성 볼로디미르 대성당에 보관되어 있다.
6. 박물관
7. 갤러리
참조
[1]
웹사이트
Zlatoverkhy Mikhailovsky monastyr
http://gatchina3000.[...]
2007-10-26
[2]
웹사이트
Свято-Михайлівський Золотоверхий монастир
https://vue.gov.ua/%[...]
State Scientific Institution "Encyclopedic Publishing House"
2023-09-12
[3]
웹사이트
Saint Michael's Golden-Domed Monastery
https://www.encyclop[...]
Canadian Institute of Ukrainian Studies
2023-08-16
[4]
웹사이트
Михайловський Золотоверхий монастир, 12–20 ст.
https://pamyatky.kie[...]
2023-09-10
[5]
웹사이트
Erich Lassota von Steblau
https://www.geschkul[...]
Free University of Berlin
2023-08-28
[6]
웹사이트
Paul of Aleppo
https://www.encyclop[...]
Canadian Institute of Ukrainian Studies
2023-09-01
[7]
웹사이트
Armlet
https://www.britishm[...]
British Museum
2023-08-11
[8]
웹사이트
The Transfer to the Ukraine of Fragments of Frescoes from Kyiv's Mikhailovo-Zlatoverkh Monastery
http://www.hermitage[...]
The State Hermitage Museum
2017-04-05
[9]
웹사이트
Дослідження Михайлівського Золотоверхого Монастиря 1920–1960–х: неопублікована археологія
https://iananu.org.u[...]
Institute of Archeology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of Ukraine
2023-09-05
[10]
웹사이트
Музейний експонат як художній документ епохи
https://www.gallery.[...]
The Poltava Art Museum (Art Gallery)
2018-01-21
[11]
웹사이트
1999 р. Програма мальовань інтер'єру Михайлівського собору
https://www.pslava.i[...]
M. Zharkykh
2024-01-08
[12]
뉴스
Колокола Михайловcкого Златоверхого монастыря
https://on-v.com.ua/[...]
2013-06-24
[13]
웹사이트
Музеї Києва: Музей історії Михайлівського монастиря
http://primetour.ua/[...]
PrimeTour
2023-09-08
[14]
뉴스
Факти ICTV – Михайлівський Золотоверхий стане кафедральним собором єдиної УПЦ
https://fakty.com.ua[...]
2018-12-16
[15]
웹사이트
St. Michael's Golden Domed Cathedral will be the main temple of the OCU
https://risu.org.ua/[...]
Religious Information Service of Ukraine
2018-12-16
[16]
웹사이트
Filaret to head Kyiv Diocese, Metropolitan Symeon elected Chief Secretary of the OCU, the Synod decides
https://risu.org.ua/[...]
Religious Information Service of Ukraine
2019-02-09
[17]
뉴스
World Digest: Dec. 15, 2018: Ukrainian church leaders approve split from Russians
https://www.washingt[...]
2018-12-15
[18]
웹사이트
Governor
http://www.archangel[...]
St. Michael's Golden-roofed Men's Monastery in Kyiv
2023-08-31
[19]
뉴스
Трапезній церкві Михайлівського золотоверхого — 310: чим унікальна ця святиня
https://vechirniy.ky[...]
2023-05-21
[20]
뉴스
Historic St. Michael's Golden-Domed Sobor is rebuilt
http://www.ukrweekly[...]
Kyiv Press Bureau
1998-11-29
[21]
웹사이트
Трапезній церкві Михайлівського золотоверхого — 310: чим унікальна ця святиня
https://df.news/2023[...]
2023-05-21
[22]
웹사이트
Київ. Дзвіниця Михайлівського монастиря (Михайлівська площа)
https://kpi.ua/kyiv-[...]
National Technical University of Ukraine "Ihor Sikorsky Kyiv Polytechnic Institute"
2023-09-10
[23]
웹사이트
Дзвіниця зі Святою брамою, 1997–98
https://pamyatky.kie[...]
2023-09-09
[24]
웹사이트
The bell tower of St. Michael's Monastery (St. Michael's Square)
https://kpi.ua/en/ky[...]
Igor Sikorsky Kyiv Polytechnic Institute
2024-05-13
[25]
웹사이트
We continue to acquaint you with the collection of the Preserve
https://kplavra.kyiv[...]
National Reserve "Kyiv-Pechersk Lavra"
2023-09-06
[26]
웹사이트
Вздорнов Г. И. История открытия и изучения русской средневековой живописи. XIX век
https://www.icon-art[...]
2023-09-04
[27]
웹사이트
Церковь Архангела Михаила, Киев, Украина
https://www.icon-art[...]
2023-09-04
[28]
웹사이트
Дмитрий Солунский
https://www.icon-art[...]
2023-09-04
[29]
뉴스
Путем Европы. Как восстанавливали Михайловский собор в Киеве
https://korresponden[...]
2016-03-25
[30]
문서
2018年まで、ウクライナ正教会・キエフ総主教庁の管轄であった。
[31]
웹사이트
Факти ICTV - Михайлівський Золотоверхий стане кафедральним собором єдиної УПЦ
https://fakty.com.ua[...]
2018-12-17
[32]
웹사이트
Михайлівський Золотоверхий собор буде головним храмом ПЦУ
https://risu.org.ua/[...]
2018-12-1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