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라우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투라우는 현재 벨라루스 남부에 위치한 도시로, 드레고비치족의 고대 수도였으며 980년에 처음 언급되었다. 키예프 루스 시대에는 중요한 무역 중심지였으며, 1005년에는 벨라루스에 최초의 로마 가톨릭 주교구가 설립되기도 했다. 1320년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편입된 후, 1793년 러시아 제국에 병합되었고, 19세기에는 지방 도시로 남았다. 20세기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의 점령과 홀로코스트로 유대인 공동체가 파괴되는 아픔을 겪었으며, 현재는 채소 통조림 및 유제품 생산 공장이 있는 도시이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호멜주 - 라하초우
라하초우는 1142년 처음 언급된 벨라루스 호멜 주의 도시로, 역사적으로 여러 국가를 거쳐 러시아 제국에 합병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후 벨라루스 독립과 함께 유제품 공장을 중심으로 경제 성장과 함께 역사 및 문화 유적지를 보존하고 있다. - 호멜주 - 스베틀라호르스크
스베틀라호르스크는 산업 및 주거 지역으로 나뉘고 화력 발전소와 화학 공장 등의 주요 산업과 동방 정교회 중심의 종교, 다양한 명소가 있는 도시로, 체르노빌 사고의 영향과 여러 도시와의 자매 결연이 특징이다. - 벨라루스의 도시 - 흐로드나
흐로드나는 벨라루스 북서부 네만 강 유역에 위치한 도시로, 다양한 정권의 지배를 거치며 역사적, 문화적 중요성을 지니고, 중세 시대부터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이자 폴란드 국왕들의 거주지, 현재는 벨라루스의 주요 도시로서 관광 도시의 발전을 추구하고 있다. - 벨라루스의 도시 - 핀스크
핀스크는 벨라루스 남서부 브레스트 주에 위치한 도시로, 복잡한 역사를 거치며 전쟁의 영향으로 파괴와 재건을 반복했고, 현재는 벨라루스 공화국의 교통 요충지이다.
투라우 - [지명]에 관한 문서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투로프 |
다른 이름 | 투라우 |
별칭 | 해당 없음 |
![]() | |
![]() | |
![]() | |
국가 | 벨라루스 |
지역 | 호멜 주 |
지구 | 지트카비치 지구 |
유형 | 도시 |
설립 | 정보 없음 |
면적 (총) | 정보 없음 |
면적 (토지) | 정보 없음 |
면적 (물) | 정보 없음 |
고도 | 정보 없음 |
시간대 | MSK |
UTC 오프셋 | +3 |
우편 번호 | 247980 |
지역 번호 | +375 2353 |
차량 번호판 코드 | 3 |
인구 | |
인구 (2024년) | 2,752명 |
지리 좌표 |
2. 역사
투라우는 드레고비치족의 고대 수도로, 980년 과거 연대기에 처음 언급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투르 공작이 건설했으며, 슬라브어로 오록스를 뜻하는 "투르"에서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바랑기아에서 그리스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키예프 루스의 중요한 무역 중심지였으며, 다양한 공예가 발달했다. 투라우의 키릴과 투라우의 라브렌티의 주교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1005년에는 벨라루스 최초의 로마 기독교 주교구가 설치되었고, 11세기에는 벨라루스에서 가장 오래된 서적 『투로프복음서(be)』가 쓰여졌다. 12세기에는 2개의 수도원과 85개의 교회가 있었다.
12세기의 봉건적 갈등, 1320년 리투아니아 대공국 합병, 1502년과 1521년 타타르족 침략, 대홍수 시기 모스크바 점령 등 여러 사건을 겪으며 중요성이 감소했다. 1667년에는 1648년의 401가구 중 111가구만 남았다.
1793년 제2차 폴란드 분할 이후 러시아 제국에 병합되어 19세기 대부분을 작고 지방적인 도시로 남았다. 1897년에는 2252명의 유대인이 거주했다. 1940년 폴레시예 주의 한 구역이 되었고, 1941년 나치 독일군에 점령되었으나, 주민들의 반파시스트 조직 활동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홀로코스트로 유대인들이 살해되었고, 1944년 7월 5일 해방되었다. 1962년 도시형 집락으로 개편되었다가 2004년 다시 시로 승격되었다.
1810년, 투라우에 나무로 된 모든 성도 정교회가 건설되었다. 이 교회는 오늘날까지 보존되었으며, 재건된 적이 없다. 교회 내부에는 성 니콜라스의 눈물 흘리는 성상과 전설과 이야기가 담긴 두 개의 오래된 기독교 십자가가 보관되어 있다.[7]
2. 1. 키예프 루스 시대 (9세기 - 13세기)
투라우는 현대 벨라루스인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드레고비치족의 고대 수도였다. 980년 과거 연대기에 처음 언급되었으며, 폴레시에 지역에 속한다. 전설에 따르면 투르 공작이 건설했으며, 슬라브어로 오록스를 뜻하는 "투르"에서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이 도시는 발트 해에서 비잔틴 제국으로 이어지는 주요 무역로에 인접하여 키예프 루스 내에서 중요한 무역 중심지였다. 투라우 공작은 키예프 루스의 왕위를 놓고 경쟁하기도 했다.투라우는 도시의 전략적 위치 덕분에 다양한 공예가 발달했으며, 투라우의 키릴과 투라우의 라베렌티의 주교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1005년에는 벨라루스 영토에 최초의 로마 기독교 주교구가 투라우에 설립되었다. 12세기의 여러 봉건적 갈등으로 투라우는 중요성과 자율성을 잃었다.
1005년, 투라우에 그리스 정교회 관구가 설치되었다. 11세기에는, 이 지역 출신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키릴 투라우스키에 의해 벨라루스에서 가장 오래된 서적인 『투로프복음서(be)』가 쓰여졌다. 12세기에는 투라우 공국에 2개의 수도원과 85개의 교회가 있었다.
1158년, 루스 제후들의 항쟁(ru) 중 투라우와 핀스크는 10주 동안 포위되었는데, 이는 루스 제후들의 전투에서 가장 장기간의 포위전이었다. 1961년 조사에 따르면, 1230년경에는 투라우에 지진이 발생하여 도시가 피해를 입었다. 1246년 말에는 투라우를 포함한 남부 벨라루스에서 몽골 제국 군과의 전투가 벌어졌다.[7]
키예프 루스 시대, 투라우는 상기된 교역로를 통해 중요한 교역 중심지였으며, 투로프 공의 지위에는 류리크 왕조 출신이 임명되었다. 또한, 전략적으로 중요한 거점이었으며, 모든 산업이 발전했다. 1180년대에는 투로프 공국에서 핀스크 공국이 분리, 독립했다.
2. 2. 리투아니아 대공국 시대 (14세기 - 18세기)
1320년 투라우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합병되어 민스크 공작과 밀접하게 동화되었다.[8] 1430년 스비트리가일라가 도시의 지배자가 되었고,[8] 15세기 말에는 미할 글린스키가 투라우를 지배했다.[8] 1502년 타타르족의 침략으로 도시가 파괴되자,[8] 1508년 글린스키는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도망쳤다. 이후 투라우는 콘스탄틴 오스트로스키 가문에 의해 몰수되어 재건을 시작했지만, 1521년 타타르족에 의해 다시 파괴되었다.[8] 오스트로스키 가문은 1세기 이상 투라우를 소유하다가 지참금으로 사피에하 가문, 포토츠키 가문에게 넘겨졌다. 대홍수 동안 도시는 모스크바에 점령되었지만, 곧 야누시 라지비우에 의해 탈환되었다. 모스크바와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도시는 심각한 피해를 입어, 1667년에는 1648년의 401가구 중 111가구만 남았다.[8]1648년 보흐단 흐멜니츠키 휘하의 코사크 군이 투라우를 점령했다. 이후 리투아니아 대공국 군과의 쟁탈전, 모스크바 대공국과의 전쟁을 통해 도시는 여러 번 파괴되었다.[8]
2. 3. 러시아 제국 시대 (18세기 - 20세기 초)
1793년 제2차 폴란드 분할 이후, 투라우는 러시아 제국의 민스크 현에 편입되었다. 19세기 동안 투라우는 지방의 소박한 마을 풍경을 유지했다. 1882년에 출판된 아담 키르코르(ru)의 저서[9]에는 "지금은 그저 프리피야트 강 오른쪽 지역의 작고 가난한 마을이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가장 오래되고 주목할 만한 도시이며, 이를 확인하기 위해 방문해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현재의 투라우는, 과거의 빛나던 시대의 기억 외에는, 특별히 비평할 의미가 없다"고 덧붙였다.당시 투라우에는 목조 보도가 있었고, 중앙 공원에서는 오케스트라 연주가 이루어졌다. 수로가 설치되어 프리피야트 강과 키예프까지 배로 이동할 수 있었다. 16세기부터 유대인 사회가 형성되었으며, 1897년에는 2252명(총 인구 4290명 중 52.3%)의 유대인이 있었다.[10]

(오르다 나폴레옹(ru)・1856년)
2. 4. 소비에트 연방 및 현대 벨라루스 시대 (20세기 - 현재)
1940년, 폴레시예 주(ru)[11]의 한 구역이었다. 1941년 여름 나치 독일군에 점령되었지만, 같은 해 10월에는 이미 투라우 주민들에 의한 반파시스트 조직이 활동을 시작했다. 20세기에 들어 벨라루스 유대인 다수가 미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중 홀로코스트로 인해 투라우를 포함한 벨라루스 유대인들이 살해되었다. 1944년 7월 5일에 해방되었다. 1962년, 투라우는 시에서 도시형 집락으로 개편되어 지트카비치 지구의 일부가 되었다.2004년 8월 10일에 투라우는 다시 시로 승격되었다. 같은 해에 고대 슬라브인의 문헌과 출판물의 날이 제정되었다. 현재 투라우에는 채소 통조림과 주스를 만드는 공장과 유제품 콤비나트 기업이 있다. 2006년 투라우에서 일하는 사람은 3,100명이었다. 2008년에는 새로운 호텔이 건설되었고, 관광객을 위한 사회 기반 시설 정비가 이루어졌다. 시에는 프리피야츠키 국립 공원이 있으며, 부근 초원에서는 봄철 홍수로 인해 섬처럼 보이는 독특한 자연 경관을 볼 수 있다.
2. 5. 유대인 공동체
16세기부터 투라우에 슈테틀(유대인 공동체)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유대인 인구는 정점에 달했고, 이후 더 큰 도시나 다른 나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투로프는 포그롬(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폭력)의 피해를 입었지만, 제1차 세계 대전과 러시아 혁명을 거치면서 유대인 인구는 살아남았다. 볼셰비키 집권 후에도 유대인들은 전통을 이어갔고, 투로프의 비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어느 정도 관용이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종교 활동을 억압하려는 노력이 강화되었다.[2]1921년 투로프에는 일반 학교와 이디시어 학교 두 곳이 개교했으며, 두 학교 모두 유대인 학생들이 다녔다. 투로프에는 세 개의 회당이 있었는데, 하나는 미스나그딤, 두 개는 하시딤이었다. 이 세 회당은 모두 1930년대 초에 폐쇄되었다.[2]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투로프의 유대인 인구는 몰살당했다. 일부 유대인은 독일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자원 입대했다. 1941년 7월, 투로프를 처음 통과한 독일군은 유대인들에게 해를 가하지 않았지만, 이후 도착한 부대가 홀로코스트를 시작했다. 전쟁 후 극소수의 유대인 가족만이 돌아왔으며, 2003년 기준으로 투로프에는 단 세 명의 유대인만이 거주하고 있었다.[2] 1897년에는 2252명(총 인구 4290명 중 52.3%)의 유대인이 있었다.[10]
3. 지리
프리피야트강에서 남동쪽으로 25km, 철도로는 고멜 시에서 258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4. 문화
2004년 8월 10일 투라우는 시로 승격되었고, 같은 해 고대 슬라브인의 문헌과 출판물의 날이 제정되었다.[7] 현재 채소 통조림과 주스를 만드는 공장과 유제품 콤비나트 기업이 있으며, 2006년 기준 3,100명이 일하고 있다.[7] 2008년에는 호텔이 건설되었고, 관광객을 위한 사회 기반 시설 정비가 이루어졌다.[7] 시에는 Припятский (национальный парк)|프리피야츠키 국립 공원|프리피야츠키 국립 공원ru이 있으며, 부근 초원은 봄철 홍수로 섬처럼 보이는 독특한 자연 경관을 자랑한다.[7]
4. 1. 유적 및 기념물
- 석조 십자가: 20세기 말에 오래된 묘지의 한 구역에서 출토되었다. 표면은 마모되었지만 가장자리는 날카로웠기 때문에 땅 속에서 "성장"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7]
- 1170년대 교회의 토대 부분: 깊이 29.3m, 너비 17.9m. 키예프 루스 시대 서부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1961년에 발굴되었으며, 1230년의 지진으로 파괴된 것으로 밝혀졌다.
- 만성자 교회((en)): 1810년에 건설된 교회. 명물인 2m의 석조 십자가는 전승에 따르면 하류의 키예프에서 상류의 투라우로 물길을 거슬러 배로 운반되었다고 한다.
- 키릴 투라우스키 동상: 높이 7m의 기념비. 1994년 건설.
4. 2. 도시 상징
투라우 시기는 2001년 9월 27일 시의회에서 승인되었으며, 2002년 1월 23일 벨라루스 문장 등록부에 포함되었다.투라우 시기는 가로 세로 비율이 1:2인 직사각형 형태이며, 파란색(너비의 6/9), 흰색(너비의 1/9), 빨간색(너비의 2/9)의 세 개의 가로 줄무늬로 구성되어 있다.[1]
5. 저명한 출신 인물
- 키릴 투라우스키[12] (1130년 - 1182년): 투라우 출신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이다. 11세기에 키릴 투라우스키는 벨라루스에서 가장 오래된 서적인 『투로프복음서(be)』를 썼다.
- 콘스탄틴 오스트로그스키 (1526년 - 1608년): 16세기에 투라우를 다스렸다. 1502년 타타르인에 의해 도시가 파괴된 후 투라우는 콘스탄틴 오스트로그스키 가문의 소유가 되어 재건되었으며, 약 1세기 동안 관리했다.
- 알렉산드르 쉬프만(ru) (1907년 - 1993년): 투라우 출신의 문학 평론가이다.
- 아리에 레이브 쉬프만(1891–1937): 랍비
- 스카르진스키 귀족 가문.[3]
참조
[1]
웹사이트
Численность населения на 1 января 2024 г. и среднегодовая численность населения за 2023 год по Республике Беларусь в разрезе областей, районов, городов, поселков городского типа
https://www.belstat.[...]
2024-05-06
[2]
웹사이트
Smilovitsky, Leonid, A Byelorussian Border Shtetl in the 1920s and 1930s: The Case of Turov
http://www.jewishgen[...]
[3]
웹사이트
Предводитель дворянства Скаржинский Александр Матвеевич и отдельные представители его рода
http://www.mglin-kra[...]
[4]
웹사이트
Aurochs Come Back to Belarus: Unique Rewilding Initiative to Help Biodiversity Restoration
https://minpriroda.g[...]
2020-03-05
[5]
웹사이트
Численность населения на 1 января 2016 г. и среднегодовая численность населения за 2015 год по Республике Беларусь в разрезе областей, районов, городов и поселков городского типа
http://www.belstat.g[...]
[6]
서적
歴史の狭間のベラルーシ
[7]
서적
ロシア原初年代記
[8]
문서
これらの戦争は、ポーランド史において広義の[[大洪水時代]]と呼ばれる一連の戦争を指す。
[9]
문서
Живописной России
[10]
웹사이트
Семья Райхман из Турова. Д-р Леонид Смиловицкий
https://web.archive.[...]
[11]
문서
1938年から1954年まで存在した地域区分。現在のホメリ州の西半分にあたる。
[12]
서적
ベラルーシを知るための50章
明石書店
2017
[13]
서적
歴史の狭間のベラルーシ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