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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민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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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의 민주화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사후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의 즉위와 함께 시작되었다. 국왕은 프랑코 시대의 틀 안에서 국가 원수 역할을 수행하며, 민주주의로의 전환을 모색했다. 이러한 노력은 서방 세계의 지지를 받았지만, 스페인 내전의 여파로 인한 극우 세력과 극좌 세력 간의 갈등은 민주화의 장해가 되었다. 아돌포 수아레스 내각은 정치 개혁법 제정, 1977년 총선 실시 등을 통해 민주주의 정착을 추진했고, 1978년 헌법 제정으로 민주주의가 공고화되었다. 이후 민주중도연합 정부는 내부 갈등으로 분열되었고, 1982년 총선에서 사회노동당이 승리하여 펠리페 곤살레스가 집권하면서 스페인은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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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민주화
개요
1975년의 스페인 왕국
1975년의 스페인 왕국
공식 명칭스페인 왕국
토착어 명칭}}
국가 모토우나, 그란데 이 리브레
("하나이고, 위대하며, 자유로운")

("더 멀리 나아가다")
국가마르차 레알
("왕의 행진")
정치
정부 형태|단일 의원내각제
입헌 군주제
(1978년 이후)}}
수도마드리드
가장 큰 도시수도
국교로마 가톨릭교 (1978년까지 국교)
공용어스페인어
1978년 이후: 카탈루냐어, 바스크어, 갈리시아어
국왕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 재임 기간1975–1982
총리카를로스 아리아스 나바로 (1975–1976)
총리아돌포 수아레스 (1976–1981)
총리레오폴도 칼보소텔로 (1981–1982)
상원스페인 상원
하원스페인 하원
역사
시대냉전
시작 사건프란시스코 프랑코 사망
시작 년도1975년
시작 날짜11월 20일
정치 개혁법1976년 11월 18일
1977년 총선1977년 6월 15일
1977년 스페인 사면법1977년 10월 15일
1978년 스페인 헌법 채택1978년 12월 29일
1979년 스페인 총선1979년 3월 1일
1981년 스페인 쿠데타 시도1981년 2월 23일
종료 사건1982년 스페인 총선
종료 날짜1982년 10월 28일
종료 년도1982년
통화
통화스페인 페세타
기타
국제 전화 코드+34
이전
이후

2.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정치적 역할

프란시스코 프랑코 사후 스페인의 민주화를 이끈 핵심 인물은 후안 카를로스 1세였다. 그는 민주주의와 입헌군주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정치 개혁을 추진했다.[1]

1975년 11월 22일 코르테스 에스파뇰라스 앞에서 후안 카를로스 1세의 국왕 즉위식


후안 카를로스 1세는 프랑코의 법적 틀 안에서 통치를 시작했지만, 코르테스 에스파뇰라스 연설을 통해 정치 체제 변화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이러한 국왕과 민주화를 원하는 정치 세력 간의 연대는 스페인 민주화 전환의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

하지만 스페인 내전의 후유증으로 인해 극우 프랑코주의자들과 좌익 정치 세력 간의 갈등이 존재했다. 민주화 과정에서 군부의 개입을 막는 것이 중요했으며, 국왕은 군 최고 사령관으로서 군부를 정부에 충성하도록 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1]

2. 1. 후안 카를로스 1세의 복권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사망하면서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스페인 국왕으로 복위하였다. 후안 카를로스 1세는 프랑코 사후 왕위에 오르자 기존 정치 체제 발전을 꾀했는데, 이는 1946년 그의 부친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이 주창했던 바와 연관된다.[1]

프랑코는 스페인 내전 (1936-1939) 이후 1939년 권력을 잡아 1975년 사망할 때까지 독재자로 통치했다. 1969년, 프랑코는 스페인의 마지막 국왕 알폰소 13세의 손자인 후안 카를로스 왕자를 자신의 공식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후 6년간 후안 카를로스 왕자는 공식 석상에서 뒤로 물러나 있었고, 프랑코의 뒤를 이을 준비가 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스페인 국왕으로 권력을 잡은 후, 그는 아버지 후안 데 보르본이 1946년부터 옹호해 온 입헌 군주제의 발전을 촉진했다.[1]

후안 카를로스 1세는 프랑코의 법적 틀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국가 원수로서 통치를 시작했다. 그는 프랑코 시대의 정치 체제인 민족 운동의 원칙에 충성을 맹세했고, 프랑코주의 코르테스 에스파뇰라스 앞에서 왕관을 받았다. 또한, 자신의 첫 번째 정부 수반 임명을 위해 국가 유기법을 존중했다. 그는 코르테스 앞에서 한 연설에서 스페인 정치 체제의 변화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후안 카를로스와 현상 유지를 반대하는 정치 세력 간의 이러한 사실상의 동맹은 스페인의 민주주의로의 전환 성공의 핵심 요소였다.[1]

이러한 전환은 스페인 안팎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으며 계획되었다. 서방 정부는 미국을 중심으로 스페인의 입헌 군주제를 선호했고, 많은 스페인 및 국제 자유주의 자본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스페인은 여전히 내전의 그림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프랑코주의자는 극우에서 스페인군 내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았으며, 좌익 정치의 사람들은 프랑코에게 자리를 빚진 국왕을 불신했다. 국왕의 정당성은 이 임명에 달려 있었고, 그의 아버지 돈 후안은 1977년 5월 14일까지 자신의 주장을 포기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 자유주의 여론은 왕위의 정당성은 민주적이고 입헌적이며 의회 군주제를 수립함으로써만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1]

전환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군대가 기존 정부 내의 프랑코주의 세력을 위해 정치 과정에 개입하는 것을 자제해야 했다. 레이몬드 카가 설명했듯이, 군 최고 사령관으로서 국왕의 지원은 우익을 억제하고 군대를 정부에 충성하게 하는 데 매우 중요했다. 이를 통해 정부는 기존 헌법을 유지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분열적인 장군들을 은퇴시킬 수 있었다.[1]

날짜사건
1975년 11월 20일프랑코 사망[2]
1975년 11월 22일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 및 국가 원수 즉위, 9,000명의 정치범 사면. 아리아스 나바로는 총리직 유지.[2]


2. 2. 민주화 진행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즉위 후 프란시스코 프랑코 시대의 법적 틀을 유지하면서도 민주화를 위한 개혁을 추진했다.[1] 이는 그의 부친인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이 1946년부터 옹호해 온 입헌 군주제의 이상과 연결된다.[1]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코르테스 에스파뇰라스 앞에서 한 연설에서 정치 체제 변화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1] 이러한 국왕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정치 세력 간의 연대는 스페인의 민주화 전환을 성공으로 이끈 핵심 요인으로 평가받는다.

스페인의 민주화는 국제 사회, 특히 냉전 시기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의 지지를 받았다.[1] 서방 정부와 국제 자유주의 자본가들은 스페인의 입헌 군주제를 선호했다.[1] 그러나, 스페인 내전의 상처가 여전히 남아있던 스페인 내에서는 극우 프랑코주의자들과 좌익 정치 세력 간의 갈등이 존재했다.[1]

민주화 과정에서 군부의 개입을 막는 것이 중요했으며, 국왕은 군 최고 사령관으로서 군부를 정부에 충성하도록 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1]

스페인 민주화 주요 사건
날짜사건
1975년 11월 20일프란시스코 프랑코 사망
1975년 11월 22일후안 카를로스 1세 즉위
1976년 7월 1일아돌포 수아레스 총리 임명
1976년 11월 18일정치 개혁법 통과
1976년 12월 18일정치 개혁법 국민투표 비준
1977년 4월 9일공산당 합법화
1977년 5월 14일바르셀로나 백작 돈 후안 왕위 계승권 포기
1977년 6월 15일총선 실시
1977년 10월 15일사면법 제정
1977년 10월 25일몬클로아 협정 체결
1978년 12월 6일새 헌법 국민투표 비준
1981년 2월 23일쿠데타 미수 사건 발생
1982년 5월 30일스페인 나토 가입
1982년 10월 28일총선에서 사회노동당 승리


2. 3. 민주화의 장해

스페인 내전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고, 이는 민주화의 큰 걸림돌이었다. 극우 세력인 프랑코주의자들은 스페인군의 지원을 받으며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반대로 극좌 세력은 후안 카를로스 1세를 신뢰하지 않았다.

따라서 민주화가 정착되려면 극좌 세력이 국왕이나 정부 수장에 대한 극단적인 생각을 버리고, 군부가 극우 세력을 감싸며 정치에 개입하는 행위를 멈춰야만 했다.

3. 아돌포 수아레스 내각 (1976년 7월 - 1977년 6월)

후안 카를로스 1세아돌포 수아레스를 총리로 임명하여 정치 개혁을 추진했다. 수아레스는 다음 두 가지 주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 정치 개혁법 제정: 스페인 국민투표를 통해 의회에서 승인되면 개정이 이뤄지고, 헌법과 법령의 공표로써 자유주의 스페인을 구현.
  • 1977년 6월 민주주의 선거 실시: 의회가 새로운 민주주의 헌법을 제대로 집행했는가에 대한 신임.


수아레스는 야당을 설득하고, 군부의 간섭을 막고, 바스크 자치 지방의 분란을 통제해야 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년 안에 대부분의 계획을 성공했다.

1976년 12월부터 1977년 1월 사이, 스페인은 잦은 반정부 공격으로 인해 극심한 치안 불안을 겪었다.[14] 마오쩌둥주의를 표방한 GRAPO는 공공건물에 폭탄 테러를 감행하고, 국가위원회 의장 호세 마리아 데 오리올과 군사정의상임위원장 헤네랄 비야에스쿠사를 납치하는 등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한편, 신파시즘 성향의 반공산주의 사도 연합은 1977년 아토차 학살을 일으켜 노동 변호사 5명을 포함한 6명의 공산당원을 살해했다.[2]

ETA 역시 프랑코 사후 잠시 주춤했던 테러 활동을 재개했다. 특히 1978년부터 1980년까지 ETA의 테러는 절정에 달해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2]

이러한 극심한 폭력 사태 속에서도 1977년 6월 총선은 예정대로 치러졌다.

다음은 1975년 11월부터 1977년 6월까지 스페인 민주화 과정에서 발생한 주요 사건들이다.

날짜사건
1975년 11월 20일프랑코 사망
1975년 11월 22일후안 카를로스 1세 즉위, 정치범 9,000명 사면. 아리아스 나바로 총리직 유지.
1976년 1월~3월민주화 시위 (파업 17,455건, 시위 1672건, 연좌 농성 283건 - 내무부 기록).
1976년 5월 29일집회법 개정, 공공 시위 허용.
1976년 6월 14일정치 단체법 개정, 정당 결성 허용.
1976년 7월 1일수아레스 총리 임명, 새 정부 구성, 근대 민주주의 창출 의사 발표.
1976년 7월 19일형법 개정, 집회, 결사, 사상 표현 및 직업의 자유 비범죄화.
1976년 7월 30일일부 정치범 사면 ("유혈 범죄" 제외)
1976년 11월 18일정치 개혁법 통과, 민주주의 재건.
1976년 12월 18일정치 개혁법 국민투표 비준.
1977년 3월 4일노동 관계법, 파업권 합법화.
1977년 3월 18일선거법 통과.
1977년 4월 1일노동조합법, 조직 결성권 합법화.
1977년 4월 9일공산당 합법화.
1977년 4월 22일유럽 의회, 스페인의 민주주의 전환 인정.
1977년 5월 14일바르셀로나 백작 왕위 계승권 포기.
1977년 6월 15일1936년 이후 최초의 자유 선거 실시, 새 헌법 제정 권한 위임.


3. 1. 아돌포 수아레스의 정치 개혁


  • -|]]|thumb|1980년의 아돌포 수아레스]]

토르쿠아토 페르난데스-미란다 국가 평의회 의장은 아돌포 수아레스를 카를로스 아리아스 나바로를 대신하여 새 정부 수반으로 임명하기 위해 후안 카를로스 국왕이 선택할 세 명의 후보자 명단에 올렸다. 국왕은 수아레스가 프랑코가 임명한 정치인으로 구성된 코르테스(Cortes, 스페인 의회)를 설득하여 프랑코 체제를 해체하도록 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그를 선택했다.[13]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형식적으로 프랑코주의 법적 시스템 내에서 행동하여 정치 과정에 대한 군사적 개입의 가능성을 피할 수 있었다. 수아레스는 1976년 7월 3일 후안 카를로스에 의해 스페인 제138대 총리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그의 프랑코주의적 과거 때문에 좌파와 일부 중도파의 반대에 부딪혔다.

수아레스 총리는 취임 후 두 가지 사항을 기반으로 한 명확한 정치 프로그램을 신속하게 제시했다.

  • 코르테스와 국민투표에서 승인되면 스페인에 자유주의 민주주의를 수립하기 위한 제헌 과정을 시작할 정치 개혁 법안 개발.
  • 1977년 6월에 민주적 선거를 실시하여 새로운 민주적 헌법을 제정할 코르테스를 선출


이 프로그램은 명확하고 분명했지만, 그 실현은 수아레스의 정치적 능력을 시험했다. 그는 야당이 자신의 계획에 참여하도록 설득해야 했고, 군대가 이 과정이 중단되지 않도록 허용해야 했으며, 동시에 바스크 자치 지방의 상황을 통제해야 했다.[2]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수아레스의 프로젝트는 1976년 7월부터 1977년 6월까지 지체 없이 수행되었다. 그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 짧은 기간 동안 여러 전선에서 활동해야 했다.

정치 개혁법(Ley para la Reforma Políticaes) 초안은 코르테스 의장인 토르쿠아토 페르난데스-미란다가 작성하여 1976년 7월 수아레스 정부에 넘겼다. 이 프로젝트는 1976년 9월 수아레스 정부에 의해 승인되었다.[1] 스페인 의회 민주주의의 문을 열기 위해 이 법은 프랑코 정권이 민주주의에 대해 설정한 장애물을 제거하여 새로운 정치 시스템을 만들 수 없었다. 즉, 프랑코주의 코르테스 자체를 통해 프랑코주의 체제를 청산해야 했다. 페르난데스-미란다 의장의 지휘 아래 코르테스는 11월 한 달 동안 이 법안에 대해 논의했고, 결국 찬성 425표, 반대 59표, 기권 13표로 승인했다.

수아레스 정부는 1976년 스페인 정치 개혁 국민투표를 통해 개혁에 대한 정당성을 더 확보하고자 했다. 1976년 12월 15일, 77.72%의 투표율로 유권자의 94%가 개혁을 지지했다. 이 순간부터 민주 헌법을 제정할 기구인 제헌 의회 의원들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 과정(수아레스 프로그램의 두 번째 부분)을 시작할 수 있었다.

계획의 이 부분을 완수한 수아레스는 또 다른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즉, 전환 초기에 참여하지 않았던 야당 그룹을 포함시켜야 하는가? 수아레스는 또한 세 번째 문제, 즉 반 프랑코주의 야당과의 타협에 직면해야 했다.

3. 2. 정치 개혁을 위한 입법

토르쿠아토 페르난데스-미란다가 작성하여 1976년 7월 아돌포 수아레스 내각에 제출한 정치 개혁법(Ley para la Reforma Políticaes) 초안은 1976년 9월 의회에서 승인되었다.[1] 이 법안은 프랑코 정권이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하고, 프랑코주의 코르테스 자체를 통해 프랑코주의 체제를 청산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페르난데스-미란다 의장의 지휘 아래, 코르테스는 11월에 이 법안을 논의했고, 찬성 425표, 반대 59표, 기권 13표로 통과시켰다.

수아레스 정부는 1976년 스페인 정치 개혁 국민투표를 통해 개혁에 대한 더 많은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1976년 12월 15일, 77.72%의 투표율을 기록한 가운데, 유권자의 94%가 개혁을 지지했다. 이를 통해 민주 헌법을 제정할 제헌 의회 의원들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 과정(수아레스 프로그램의 두 번째 부분)이 시작될 수 있었다.[13]

3. 3. 야당과 수아레스 내각의 관계

1976년 7월, 아돌포 수아레스는 부분적인 정치 사면을 통해 400명을 석방했고, 1977년 3월과 5월에 걸쳐 이를 확대했다.[1] 또한, 1976년 12월에는 프랑코 정권의 비밀경찰 조직인 ''Tribunal de Orden Público''(TOP)를 해산했다.[1] 1977년 3월, 파업과 집회의 자유가 법령으로 보장되었고, 노동조합의 교섭권이 인정되었다.[1]

수아레스는 야당과의 협력을 통해 정치 개혁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1976년 8월, 스페인 사회노동당(PSOE)의 펠리페 곤살레스 총서기와 만나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는 수아레스 내각이 정치적 결단을 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

가장 큰 문제는 스페인 공산당(PCE)의 합법화였다. 당시 공산당은 다른 야당 세력보다 더 많은 활동가와 조직을 갖추고 있었고, 군부는 공산당 합법화에 강력히 반대했다.[1] 그러나 수아레스는 1977년 1월 아토차 학살 이후, 2월에 공산당 지도자 산티아고 카리요와 협상을 시작했고, 카리요의 협력 의사에 따라 1977년 4월 PCE를 합법화했다.[1] 이는 스페인 민주화 과정에서 가장 위험한 결정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3. 4. 군부와의 관계

수아레스는 군부 내 민주주의 옹호 세력과 협력하여 군부의 정치 개입을 막고자 했다. 디에스 알레그리아 장군, 마누엘 구티에레스 메야도 장군 등 군부 내 개혁 세력을 중용하고, 페르난도 데 산티아고와 같이 프랑코주의 성향의 인사들을 배제했다.[1] 수아레스는 군대가 정치 평준화의 한 모습으로 남아있기를 바랐다.[1]

1980년의 아돌포 수아레스

3. 5. 테러리즘의 부활

1976년 12월부터 1977년 1월 사이, 스페인은 잦은 반정부 공격으로 인해 극심한 치안 불안을 겪었다.[14] 마오쩌둥주의를 표방한 GRAPO는 공공건물에 폭탄 테러를 감행하고, 국가위원회 의장 호세 마리아 데 오리올과 군사정의상임위원장 헤네랄 비야에스쿠사를 납치하는 등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한편, 신파시즘 성향의 반공산주의 사도 연합은 1977년 아토차 학살을 일으켜 노동 변호사 5명을 포함한 6명의 공산당원을 살해했다.[2]

ETA 역시 프랑코 사후 잠시 주춤했던 테러 활동을 재개했다. 특히 1978년부터 1980년까지 ETA의 테러는 절정에 달해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2]

이러한 극심한 폭력 사태 속에서도 아돌포 수아레스 총리는 야당 인사들과의 회동을 통해 테러리즘에 대한 비난 결의를 이끌어내고 내각 지지를 요청하는 등 정치적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군부 내 강경파들은 이러한 혼란을 틈타 국가가 위기에 처했다고 주장하며 쿠데타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테러와 정치적 불안 속에서도 1977년 6월 총선은 예정대로 치러졌다.

4. 1978년 스페인 헌법 제정과 민주주의 공고화

스페인 의회는 1977년 여름 헌법 초고를 작성하기 시작했다.[3] 1978년 몬클로아 협약이 통과되면서 정당과 정치인, 노동조합은 민주화 진행 과정 하에서 경제 정책을 조정하고자 하는 데 합의한다. 1978년 스페인 헌법은 1978년 12월 6일 국민투표에서 승인되어 공표된다.

1977년 6월 15일에 실시된 총선 결과는 다음과 같다.

정당득표율의석
민주중앙연합(UCD)34.61%165석
스페인 사회노동자당(PSOE)29.27%119석
스페인 공산당(PCE)9.38%19석
국민동맹(AP)8.33%16석[3]
바스크 민족주의당(EAJ)8석
카탈루냐 민주 협약(PDC)11석



민족주의 정당들도 이 선거에서 정치적 역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77년 중반, 제헌 의회(선출된 스페인 의회)는 헌법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1978년에는 몬클로아 협약이 통과되었다. 이는 전환기 동안 경제를 운영하는 방안을 계획하기 위한 정치인, 정당, 노동조합 간의 합의였다. 1978년 스페인 헌법은 1978년 12월 6일 국민투표에서 승인되었다.

5. 민주중도연합(UCD) 정부 (1977-1982)

아돌포 수아레스가 이끌던 민주중도연합(UCD)은 1977년 6월과 1979년 3월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과반 의석 확보에는 실패하여 다른 정당들과 연립 정부를 구성해야 했다.[3]

1979년 정부 출범 후 내각과 정당 내부 구성을 완료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1980년에는 민주화를 위한 대부분의 정책이 해결되면서 더 이상의 의제 발굴이 어려워졌다. 많은 당원들은 보수적이었고, 추가적인 변화를 원하지 않았다. 특히 이혼 합법화 문제는 당내 심각한 분열을 일으켰고, 결국 중도연합은 해체되었다.

당내 결속력이 약화되고 갈등이 심화되면서 수아레스의 권위 또한 상실되었다. 1981년 이러한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면서 수아레스는 총리직에서 사임하고, 레오폴도 칼보 소텔로가 새로운 총리이자 중도연합의 대표로 취임했다. 이 과정에서 사회민주주의 세력은 연립 정부에서 탈퇴했다.

5. 1. 1977년 및 1979년 총선

아돌포 수아레스가 이끌던 민주중도연합(UCD)은 1977년 6월과 1979년 3월 총선에서 승리했지만, 과반 의석 확보에는 실패하여 다른 정당들과 연립 정부를 구성해야 했다.[3]

1977년 6월 15일에 실시된 총선 결과는 다음과 같다.

정당득표율의석
민주중앙연합(UCD)34.61%165석
스페인 사회노동자당(PSOE)29.27%119석
스페인 공산당(PCE)9.38%19석
국민동맹(AP)8.33%16석



바스크 민족주의당(EAJ)이 8석, 카탈루냐 민주 협약(PDC)이 11석을 얻으면서, 민족주의 정당들도 정치적 역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78년 스페인 헌법은 1978년 12월 6일 국민투표에서 승인되었다.

1979년 정부 출범 후 내각과 정당 내 구성을 완료하기 위해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1980년 민주화를 위한 대부분의 정책이 해결되면서, 더 많은 의제를 발굴해낼 여력이 부족해졌다. 많은 당원들은 상당히 보수적이었고 더 이상의 변화를 원치 않았다. 일례로 이혼을 명문화하는 데 당내 분열이 심했으며 결국 중도연합은 해체된다.

당내 결집력이 줄어들고 충돌이 일어나자 수아레스의 권위 또한 상실되었다. 1981년 긴장이 폭발하면서 수아레스는 내각에서 사임하고, 새로운 내각의 수장이자 중도연합 세력의 대표로서 레오폴도 칼보 소텔로가 취임한다. 이에 따라 사회민주주의 세력은 연립에서 탈퇴한다.

5. 2. UCD의 분열과 수아레스의 사임

1979년 총선 이후, 아돌포 수아레스 총리가 이끄는 민주중도연합(UCD) 내에서는 여러 파벌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1980년, 민주화를 위한 주요 정책들이 대부분 완료되자, 당내 이견으로 인해 UCD는 분열되기 시작했다. 많은 당원들은 보수적이었고, 더 이상의 변화를 원하지 않았다. 특히 이혼 합법화 법안은 당내 큰 반목을 야기했다.

당내 결속력 약화와 여러 파벌 간의 갈등으로 인해 수아레스의 지도력은 약화되었다. 결국 1981년, 수아레스는 총리직을 사임했고, 레오폴도 칼보 소텔로가 새로운 총리로 취임했다. 프란시스코 페르난데스 오르도녜스가 이끄는 사회 민주주의자들은 연정에서 이탈하여 나중에 (PSOE)에 합류했고, 기독 민주주의자들은 인민민주당을 결성하기 위해 탈당했다.

5. 3. 2.23 쿠데타 미수 사건

1981년 2월 23일, 안토니오 테헤로 중령이 이끄는 하원 "국민 경비대(Guardia Civil)" 그룹이 의회를 점거하는 쿠데타를 시도했다.[11] 쿠데타 지도자들은 국왕의 이름으로 행동한다고 주장했지만, 다음날 이른 아침,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전국 연설을 통해 "국가의 영속성과 통일의 상징인 왕관은 무력을 사용하여 민주주의 과정을 방해하려는 누구의 행동이나 행위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쿠데타에 대한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11] 이 쿠데타는 그날 늦게 진압되었으나, 군부 내에 반란 요소가 존재함을 보여주었다.[11]

6. 사회노동당(PSOE) 정부 (1982-)

1982년 총선에서 펠리페 곤살레스가 이끄는 사회노동당(PSOE)이 압승을 거두면서 스페인 민주화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1] 칼보 소텔로는 의회를 해산하고 1982년 10월 선거를 열었는데, 1979년 선거에서 중도연합세력이 다수를 차지했던 것과 달리 1982년에는 참패했다. 1982년 총선에서 사회노동당은 절대 다수의 의석을 확보했는데, 이는 몇 년 전부터 대안 정부의 이미지를 홍보한 전략의 승리였다.[1]

1982년 사회노동당은 중도 세력으로 결집을 선언하고 민주중도세력에서 떨어져 나온 사회민주주의 인사를 영입했다.[1] 이후 1982년, 1986년 총선에서 연속으로 대승을 거두었고, 1989년에는 절반의 의석을 확보하면서 다른 의회 정당들과 협력하여 여러 입법 절차를 집행하고 관리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1] 이를 바탕으로 사회노동당은 '변화(''el cambio'')'라는 정치 목표를 달성하고, 여러 지역과 지방의 변화와 관리도 진행했다. 사회노동당은 확보된 다수의 정치력을 바탕으로 국정 안정과 평화를 이끌었다.[1]

6. 1. 펠리페 곤살레스의 집권과 안정화

1979년 5월 사회노동당(PSOE) 제28차 총회에서 사무총장 펠리페 곤살레스는 당내 혁명 세력과의 동맹 대신 사임했다. 그해 9월 특별 총회가 소집되어 당을 더욱 온건한 노선으로 재정비하고,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하면서 곤살레스가 다시 지휘를 맡게 되었다.[1]

1982년 사회노동당은 온건 노선을 확고히 했으며, 민주중도연합(UCD)에서 탈퇴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영입했다.[1]

1982년 선거에서 사회노동당은 과반수를 확보했는데, 이는 오랫동안 대안 정부의 이미지를 구축해온 결과였다.[1] 1986년 선거에서도 과반수를 확보하고, 1989년에는 절반의 의석을 확보함으로써 다른 의회 정치 세력과의 협약 없이 법을 제정하고 통치할 수 있었다.[1] 사회노동당은 "''엘 캄비오''" ("변화")라는 정치 프로그램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법을 만들었고, 많은 지방 정부와 지역 행정부를 이끌었다. 이러한 안정적인 정치적 다수는 격동의 과도기를 거친 후 국가에 오랜 기간의 평화와 안정을 제공할 수 있게 했다.[1]

참조

[1] 웹사이트 Historia de un Cambio http://www.adurcal.c[...] Ayuntamiento de Dúrcal
[2] 웹사이트 Acciones Terroristas: Víctimas Policiales de ETA https://web.archive.[...] La Guardia Civil 2005-09-23
[3] 웹사이트 Appendix A: Table 2. Selected Election Results for the Congress of Deputies, 1977–86 http://lcweb2.loc.go[...] Library of Congress
[4] 간행물 Right of Assembly Act https://www.boe.es/b[...] 1976-05-29
[5] 간행물 Political Associations Act https://www.boe.es/b[...] 1976-06-14
[6] 간행물 Penal Code Amendment Act https://www.boe.es/b[...] 1976-07-19
[7] 간행물 Amnesty Decree https://www.boe.es/b[...] 1976-07-30
[8] 간행물 Political Reform Act https://www.boe.es/b[...] 1977-01-04
[9] 간행물 Labour Relations Act https://www.boe.es/b[...] 1977-03-04
[10] 간행물 Electoral System Act https://www.boe.es/b[...] 1977-03-18
[11] 간행물 Trade Union Act https://www.boe.es/b[...] 1977-04-01
[12] 간행물 Amnesty Act https://boe.es/busca[...] 1977-10-15
[13] 웹사이트 Historia de un Cambio http://www.adurcal.c[...] Ayuntamiento de Dúrcal 2007-09-28
[14] 웹사이트 Acciones Terroristas: Víctimas Policiales de ETA http://www.guardiaci[...] La Guardia Civil 2005-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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