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오자키 데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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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오자키 데쓰야는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활약한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다. 고등학교 시절 사이드 슬로 투수로 전향하여 싱커를 주무기로 활약했고, 1988년 서울 올림픽 일본 대표로 선발되어 은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1990년 세이부에 입단하여 주로 셋업맨으로 활약하며 최우수 신인상 후보로 거론되었고, 이후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팀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2004년 은퇴 후에는 세이부의 코치 및 프런트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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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자키 데쓰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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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시오자키 데쓰야 |
원어 이름 | 潮崎 哲也 (일본어) |
로마자 표기 | Tetsuya Shiozaki |
출생일 | 1968년 11월 26일 |
출생지 | 도쿠시마현 나루토시 |
신장 | 177cm |
체중 | 75kg |
포지션 | 투수 / 코치 |
투구/타석 | 우투/우타 |
선수 경력 | |
고등학교 | 도쿠시마현립 나루토 고등학교 |
실업팀 | 마쓰시타 전기 |
프로 입단 연도 | 1989년 (드래프트 1위) |
소속팀 | 세이부 라이온스 (1990-2004) |
첫 출장 | 1990년 4월 14일 |
마지막 출장 | 2004년 9월 21일 (은퇴 경기) |
코치 경력 | |
코치팀 | 세이부 라이온스 (2007-2011)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2013-2018) |
NPB 성적 | |
승-패 | 82승 55패 |
세이브 | 55 |
평균 자책점 | 3.16 |
탈삼진 | 967 |
수상 | |
올스타 | NPB 올스타 (1995) |
올림픽 | |
메달 | 1988 서울 올림픽 야구 은메달 |
2. 프로 입단 전
시오자키는 나루토 고등학교 시절 속구와 커브를 던졌지만 결정구가 없어 중간 계투와 외야수를 겸했다. 3학년 봄, 싱커를 던지는 투수를 보고 감독의 권유로 싱커를 연습하여 결정구로 만들었다.[4][17] 그해 여름 도쿠시마 현 대회 결승까지 진출했지만, 이케다 고등학교에 패해 고시엔 진출은 좌절되었다.
마쓰시타 전기 입사 후, 가지쇼 다쿠미 감독에게 소질을 인정받아 1년 차부터 선발로 기용되어 제58회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출전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19세의 나이로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노모 히데오, 이시이 다케히로와 함께 선발 로테이션을 담당하며 은메달 획득에 공헌했다.
2. 1. 나루토 고등학교 시절
나루토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속구와 커브를 가지고 투구했지만 결정구가 없어 중간 계투 겸 외야수로 뛰는 시기가 계속되었다.[2] 이 때문에 포크볼과 팜을 익히려 했으나 잘 풀리지 않았다.[3] 3학년 봄에 다카마쓰니시 고등학교와의 연습 경기에서 같은 사이드 스로 투수가 싱커를 던지는 것을 보고 감독의 권유로 싱커 구사에 도전했다.[4][17] 커브와 반대로 그립과 손목의 각도를 조절했는데, 첫 투구부터 놀라운 각도로 떨어지는 싱커를 던지게 되었고, 편하게 삼진을 잡는 결정구가 되었다.[5][54] 그 해 여름 도쿠시마 현 대회에서 팀이 결승까지 진출하는 원동력이 되었다.[5] 하지만 결승에서는 이케다 고등학교에 패배해 고시엔 진출은 좌절되었다.2. 2. 마쓰시타 전기 시절 (1988 서울 올림픽)
마쓰시타 전기에 입사해 회사 소유의 사회인 야구 팀인 마쓰시타 전기 야구부에 입부했다. 직장 월급은 110000JPY으로 고액은 아니었으나 좋아하는 야구를 할 수 있어 기뻤다고 한다. 감독인 가지쇼 다쿠미에게 소질을 높게 평가받아 1년 차부터 선발을 맡아 1987년의 제58회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출전했다. 1988년의 도시 대항 대회에서는 1회전에서 히타치 제작소를 물리치고 승리 투수가 되었으나 2회전에서 대회 구지쇼를 수상한 NTT 도카이의 우에하라 가쓰오에게 밀려 패전 투수가 되었다.같은 해 서울 올림픽에서 19세의 나이로 최연소 일본 대표로 뽑혀 올림픽 직전의 IBAF 월드컵에서 호투했다. 특히 대 네덜란드 전에서 6과 3분의 1이닝을 던져 12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는 등 싱커가 위력을 발휘했다. 올림픽에서는 노모 히데오, 이시이 다케히로와 함께 선발 로테이션을 담당해 예선 리그 3차전의 네덜란드 전에서 5이닝을 2피안타 8탈삼진의 기록으로 승리 투수가 되었다. 또한 이 대회에서 예선 리그 1차전 이외의 4경기에 전부 등판해 8과 3분의 1이닝을 던지며 1실점으로 '그림자 MVP'로 불릴 만큼의 활약을 펼치며 은메달 획득에 공헌했다. 결승에서는 미국을 상대로 6회부터 2이닝을 완벽하게 막았지만 감독인 스즈키 요시노부가 헤매며 계속 등판시켰던 8회 티노 마르티네스에게 바깥쪽 낮은 직구를 던진 것이 피홈런으로 이어졌다.
3. 프로 야구 선수 시절
1990년 세이부 라이온즈에 드래프트 1위로 입단한 시오자키 데쓰야는 모리 시게카즈 이후 11년 만에 개막 1군에 진입했다.[22] 헤이와다이 구장에서 열린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첫 등판하여 호투했고, 오릭스 블루웨이브전에서 프로 첫 승을 기록했다. 1962년 오자키 유키오 이후 8타자 연속 탈삼진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22] 가토리 요시타카와 함께 더블 스토퍼를 맡아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일본 시리즈에서도 활약하여 헹가래 투수가 되었다.[22] 퍼시픽 리그 회장 특별상을 수상했다.[22]
1991년에는 시즌 방어율이 4.48로 다소 부진했고, 일본 시리즈 4차전에서 3실점하며 아쉬움을 남겼다.[22] 1992년에는 두 자릿수 세이브를 기록하며 다시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일본 시리즈 5차전과 6차전에서 연달아 홈런을 맞고 패전 투수가 되었다.[22]
우완 사이드 스로우 투수로서 150km/h에 가까운 강속구[22]와 100km/h 전후의 구속으로 50cm 가까이 떨어지는 싱커[22], 130km/h대의 슬라이더를 던지며 구원 및 선발로 활약했다.[22] 프로 입단 후 선발 전향 후에는 120km/h대의 고속 싱커도 습득했다.[38] 그의 가장 큰 장점은 '마구[1]' 또는 '전가의 보도[54]'라고 불리는 싱커였다.
3. 1. 세이부 라이온즈 (1990-2004)
1990년 세이부 라이온즈에 드래프트 1위로 입단한 시오자키 데쓰야는 모리 시게카즈 이후 11년 만에 개막 1군에 진입했다.[22] 헤이와다이 구장에서 열린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첫 등판하여 호투했고, 오릭스 블루웨이브전에서 프로 첫 승을 기록했다. 7월 5일 오릭스 전에서는 1962년 오자키 유키오 이후 8타자 연속 탈삼진 신기록을 세웠다.[22] 가토리 요시타카와 함께 더블 스토퍼를 맡아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일본 시리즈에서도 활약하여 헹가래 투수가 되었다.[22] 퍼시픽 리그 회장 특별상을 수상했다.[22]1991년에는 시즌 방어율이 4.48로 다소 부진했고, 일본 시리즈 4차전에서 3실점하며 아쉬움을 남겼다.[22] 1992년에는 두 자릿수 세이브를 기록하며 다시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일본 시리즈 5차전과 6차전에서 연달아 홈런을 맞고 패전 투수가 되었다.[22]
3. 1. 1. 황금기 (1990-1996)
1990년 세이부 라이온즈에 드래프트 1위로 입단하여 모리 시게카즈 이후 11년 만에 개막 1군 엔트리에 포함되었다.[22] 4월 14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첫 등판하여 2와 3분의 1이닝 동안 2피안타 4탈삼진 무실점으로 호투했다.[22] 오릭스 블루웨이브와의 경기에서는 야마고시 요시히로에게 홈런을 맞았지만 2와 3분의 1이닝을 막아내며 프로 첫 승을 거두었다.[22] 7월 5일 오릭스 전에서는 가도타 히로미쓰를 포함한 블루 선더 타선을 상대로 신인으로서는 1962년 오자키 유키오 이후 8타자 연속 탈삼진을 기록했다.[22] 9타자 째에 시바하라 미노루에게 안타를 맞아 일본 타이 기록은 놓쳤지만, 다음날 스포츠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다.[22]같은 해 가토리 요시타카와 함께 더블 스토퍼를 맡아 주로 셋업맨으로 활약하며 가토리의 최우수 구원 투수 획득에 기여했다.[22] 리그 우승을 확정지은 9월 23일 닛폰햄 파이터스와의 경기에서는 마지막 투수로 등판하여 헹가래 투수가 되었다.[22] 일본 시리즈 2차전에서는 4와 3분의 2이닝 2자책점으로 승리 투수가 되었고, 4차전에서는 3이닝 무실점으로 시리즈 첫 세이브를 기록하며 헹가래 투수가 되었다.[22] 정규 시즌과 일본 시리즈에서 모두 헹가래 투수가 된 것은 신인으로서는 1975년 야마구치 다카시 이후 역대 두 번째였다.[22] 최우수 신인상은 노모 히데오에게 돌아갔지만, 102와 3분의 2이닝 동안 123탈삼진, 방어율 1.84를 기록하며 퍼시픽 리그 회장 특별상을 수상했다.[22]
1991년에는 피로를 풀고 체력 향상에 집중했지만, 캠프에서 만족스러운 투구를 하지 못했고 시즌 방어율은 4.48로 악화되었다.[22] 일본 시리즈에서는 2차전에서 1이닝 무실점을 기록했지만, 4차전에서 3실점하며 결승점을 내주었다.[22] 계약 갱신에서는 연봉이 1,300만 엔 증가한 4100만엔(추정)을 받았다.[22]
1992년에는 처음으로 두 자릿수 세이브를 올렸고, 일본 시리즈에서는 4차전까지 3경기에 등판해 2세이브를 기록했다.[22] 그러나 5차전에서 이케야마 다카히로에게 결승 홈런을 맞고 패전 투수가 되었고, 6차전에서도 하타 신지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고 패전 투수가 되었다.[22] 오프에는 연봉 6500만엔(추정)에 계약을 갱신했다.[22]
우완 사이드 스로우 투수로서 150km/h에 가까운 강속구[22]와 100km/h 전후의 구속으로 50cm 가까이 떨어지는 싱커[22], 130km/h대의 슬라이더를 던지며 구원 및 선발로 활약했다.[22] 프로 입단 후 선발 전향 후에는 120km/h대의 고속 싱커도 습득했다.[38] 사이드 스로우 폼은 가토리 요시타카와 사이토 마사키를 참고했고,[42] 옆에서 던지기 때문에 싱커가 떠오르는 듯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48]
구원 투수일 때는 타구를 앞으로 날아가지 않게 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카운트를 잡는 공도 승부구도 싱커로 헛스윙을 유도하여 볼넷이 될 위험과 항상 마주하는 투구 스타일이었다.[3] 반면 선발일 때는 주자를 모으지 않는 것을 우선시하여 투구 구성에서 싱커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작아졌다.[3] 구원 투수의 마음가짐에 대해서는 가토리에게 배운 것이 도움이 되었으며, 맞더라도 좌절하지 않는 자세와 투구에 대한 단순한 사고방식을 배웠다.[42]
맞아도 후회하며 끌지 않았고,[51] 막으면 자신의 힘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긍정적인 성격이었으며,[49] 프로 입단 1년차부터 1994년까지 감독을 맡았던 모리 마사아키로부터 정신력의 강함은 팀에서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50] 오른손 언더핸드 투수는 "좌타자에게 상성이 좋지 않다"는 정설이 있었지만,[28] 시오자키는 그다지 괴로워하지 않았다.[28] 홈런 타자도 그다지 괴로워하지 않은 반면, 헛스윙을 유도하지 못했던 아라이 히로마사는 상대했던 프로 선수 중에서 인상 깊었다고 한다.[51]
그의 가장 큰 장점은 '마구[1]' 또는 '전가의 보도[54]'라고 불리는 싱커였다. 느린 싱커는 커브와 반대 방향으로 쥐고 손목을 비틀어 가운뎃손가락과 약손가락으로 빼는 벌컨 체인지와 같은 독특한 투구법[38]으로, 궤도는 슬라이더처럼 스르륵 가라앉는 정통적인 것이 아니라, 한 번 떠올랐다가 가라앉는 커브에 가까운 궤도였다.[3] 오른쪽으로 가라앉기 때문에 본인은 싱커라고 불렀지만, 일반적인 싱커와는 다른 구종이라고 지적받기도 했다.[3]
마쓰누마 마사유키는 "팜볼처럼 흔들리면서 떠올라 포크볼과 같은 속도로 떨어지는 공"이라고 표현했고,[52] 모리 시게카즈는 "스피드는 없지만, 한 번 떠올랐다가 떨어진다. 옆에서 보면 커브 같았다. 사이드암에서 나오는 독특하고, 본 적 없는 공이었다"[56]라고 평했다. 야마다 히사시는 "시오자키나 다카쓰의 싱커는 체인지업이다"라고 TV 프로그램에서 말한 적이 있으며, 같은 프로그램의 취재에서 이를 들은 시오자키도 "팀의 스코어러도 체인지업이라고 기록했다"고 말하며 부인하지 않았다.[53]
국제 경기 등에서는 두 번째 순회부터 싱커에 타이밍을 맞추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릴리프로서 짧은 이닝의 기용으로 위력이 더욱 발휘되는 면도 있었다고 한다.[3] 참고로, 고속 싱커는 직구에 가까운 그립으로, 릴리스 순간에 손목을 덮듯이 던졌다.[38] 시오자키는 자신의 싱커의 기원이 미즈시마 신지의 야구 만화 "도카벤"에 등장하는 사토나카 사토루가 잘하는 '사토루볼'이라고 한다.[54]
세이부 시대의 기요하라 가즈히로는 시오자키의 싱커를 "공이 홈 베이스 바로 앞에서 시야에서 사라진다. 사라지는 공은 칠 수 없다"고 평하며, "같은 팀이라 다행이다"라고 말했다.[54] 몬다 히로미쓰는 시오자키의 싱커를 어려워했고, 시오자키가 공을 던지는 순간 타석의 가장 앞으로 이동해서 치려고 했지만, 칠 수 없었다.[54] 노무라 가쓰야는 야쿠르트 감독 시절 1992년 유마 스프링 캠프에서[55] 당시 프로 입단 2년차로 결정구를 갖지 못하고 있던 다카쓰 신고에게 "너는 스피드가 없으니 완급 조절을 해라"라고 지시했는데, "시오자키는 왜 억제할 수 있는가? 직구와 싱커뿐인데"라고 물었다.[55] 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서 세이부와 대결했을 때에도 "저런 싱커를 익혀라"라고 조언을 했고, 다카쓰도 이를 받아들여 독학으로 습득에 힘썼으며, 1년 만에 마스터[55]했다.[54]
그 외에도 세이부 시절 동료·관계자나 상대 팀 선수들로부터 "한 번 떠올랐다가 눈에서 사라졌다. 그래서 완전히 상체가 들려버렸다. 파울로 간신히 버티는 게 전부였다"(후쿠라 준이치[56]), "한 번 푹 하고 떠올라 스트라이크 존으로 떨어진다. 그때까지 본 적 없는 궤도였다. 바로 마구였지"(와타나베 히사노부[56]), "빠졌다고 생각하면 공이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온다. 예상 밖의 변화를 한다. 타석에서 뒤로 물러선 건 저 공 정도였다"(오가와 히로후미[56]), "좌완 투수처럼 휘어진다. 세이부 시절에 시오자키 씨의 공을 (포수로서) 받았었는데, 저런 휘어짐은 특수하다"(와다 가즈히로[56])라고 평을 받았다.
그는 현역 시절 팀의 스터디에서 투수 코치로부터 싱커 그립을 공개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같은 팀 내에서도 라이벌. 밥벌이는 가르쳐줄 수 없다"라며 거절했지만,[54] 은퇴 후 인터뷰에서 "싱커를 전수하고 싶다는 생각은?"이라는 질문에 "일자상전도 아니고, 내 대에서 이 변화구를 끝내고 싶지는 않으니, 전수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다"고 답했다.[54] 실제로 던지는 법을 배우러 온 투수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아낌없이 공의 그립을 가르쳤지만, 그와 같은 싱커를 던지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고,[17] 그 이유로 시오자키처럼 약지의 유연성을 가진 투수가 없고, 공을 릴리스할 때 잘 빼낼 수 없어 회전력을 멈춰버리는 점이 꼽혔다.[17] 2005년 주니치에서 세이부로 이적해 온 쇼즈 에이지는 "여러 가지로 따라 해봤지만, 시오자키 씨의 싱커를 던질 수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17]
3. 1. 2. 선발 전환과 부상 (1997-2004)
시오자키는 프로 입단 후 구원 투수로 활약하다가 선발 투수로 전향했다. 1999년에는 120km/h대의 고속 싱커를 습득하여 투구의 폭을 넓혔다.[38] 구원 투수 시절에는 싱커를 주무기로 삼아 헛스윙을 유도하는 공격적인 투구를 펼쳤지만,[3] 선발 투수로 전향한 후에는 주자를 내보내지 않기 위해 싱커의 비중을 줄이고 맞춰 잡는 투구를 했다.[3]150km/h에 육박하는 강속구와[22] 100km/h 전후의 속도로 50cm 가까이 떨어지는 싱커,[22] 130km/h대의 슬라이더를 던졌다. 사이드암 투구 폼은 가토리 요시타카와 사이토 마사키를 참고했으며,[42] 옆으로 던지는 폼에서 싱커가 떠오르는 듯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48]
구원 투수의 마음가짐은 가토리에게서 배웠는데, 맞아도 좌절하지 않는 자세와 투구에 대한 단순한 사고방식을 익혔다.[42] 긍정적인 성격으로, 맞아도 후회하지 않고 막으면 자신의 힘이라고 생각했다.[49] 모리 마사아키 감독은 시오자키의 정신력이 팀에서 최고라고 평가했다.[50]
4. 은퇴 후
은퇴 후에는 세이부 편성부 조사 담당에 취임했다. 2005년에는 세이부 주니어 감독을 맡기도 했다.
2007년 굿윌(세이부 2군) 투수 코치로 취임했다. 2008년 1군 불펜 투수 코치로 승격, 5월 24일 대 요미우리 전 시구식에서는 요미우리 타격 코치인 시노즈카 가즈노리와 대결해 좌중간 안타를 맞았다. 2010년 1군 투수 코치를 지냈는데, 2009년 퍼시픽 리그 최악으로 기록될 14회 끝내기 패배를 당하는 등 중계 투수진의 약점이 눈에 띄었다. 2010년 팀 방어율은 전신인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스 이래 33년 만에 최하위로 떨어졌다.
이후 2011년과 2012년 세이부 편성부 전문 담당으로 복귀했다가 2013년부터 2군 감독으로 3시즌 만에 현장에 복귀했다.
5. 플레이 스타일
시오자키 데쓰야는 오른쪽 사이드암 투수로, 150km에 육박하는 속구와 100km 전후의 느린 속도에서 50cm 가까이 가라앉는 싱커, 그리고 130km대의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삼아 구원과 선발로 활약했다. 프로에서 선발로 전향한 후 1999년에는 120km대의 고속 싱커도 익혔다. 사이드암 투구폼은 가토리 요시타카와 사이토 마사키의 조언을 받아들여 만들었으며, 옆으로 던지는 싱커가 떠오르는 이미지를 만들어냈다.[3]
구원 투수일 때는 타구를 앞에 날리지 않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여 싱커를 던져 사구를 기록할 위험이 있는 투구 스타일이었다.[3] 반면 선발 투수일 때는 주자를 내보내지 않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여 싱커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3] 구원 투수의 마음가짐은 가토리에게 배운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하며, 맞아도 주눅 들지 않는 자세와 투구에 대한 간단한 생각을 배웠다고 한다.[3]
다음은 시오자키 데쓰야의 일본 프로 야구 통산 성적이다.
연도 | 소속팀 | 경기 | 승리 | 패전 | 세이브 | 평균자책점 |
---|---|---|---|---|---|---|
1990 | rowspan="15" 세이부 | 43 | 7 | 4 | 8 | 1.84 |
1991 | 45 | 10 | 3 | 5 | 4.48 | |
1992 | 47 | 6 | 2 | 10 | 2.94 | |
1993 | 53 | 6 | 3 | 8 | 1.18 | |
1994 | 50 | 4 | 2 | 1 | 2.39 | |
1995 | 45 | 5 | 6 | 12 | 1.92 | |
1996 | 43 | 8 | 6 | 11 | 2.84 | |
1997 | 27 | 12 | 7 | 0 | 2.90 | |
1998 | 27 | 7 | 5 | 0 | 4.05 | |
1999 | 20 | 5 | 3 | 0 | 4.60 | |
2000 | 24 | 3 | 6 | 0 | 2.85 | |
2001 | 21 | 1 | 0 | 0 | 4.46 | |
2002 | 28 | 6 | 5 | 0 | 3.89 | |
2003 | 37 | 1 | 3 | 0 | 4.86 | |
2004 | 13 | 1 | 0 | 0 | 6.57 | |
통산: 15년 | 523 | 82 | 55 | 55 | 3.16 |
5. 1. 싱커
시오자키 데쓰야의 가장 큰 장점은 '마구[1]' 또는 '전가의 보도[54]'라고 불리는 싱커이다.느린 싱커는 커브와 반대 방향으로 쥐고 손목을 비틀어 가운뎃손가락과 약손가락으로 빼는 벌컨 체인지와 같은 독특한 투구법[38]으로, 궤도는 슬라이더처럼 스르륵 가라앉는 정통적인 것이 아니라, 한 번 떠올랐다가 가라앉는 커브에 가까운 궤도였다[3]。오른쪽으로 가라앉기 때문에 본인은 싱커라고 불렀지만, 일반적인 싱커와는 다른 구종이라고 지적받기도 했다[3]。
마쓰누마 마사유키는 "팜볼처럼 흔들리면서 떠올라 포크볼과 같은 속도로 떨어지는 공"이라고 표현했고[52], 모리 시게카즈는 "스피드는 없지만, 한 번 떠올랐다가 떨어진다. 옆에서 보면 커브 같았다. 사이드암에서 나오는 독특하고, 본 적 없는 공이었다"[56]라고 평했다. 야마다 히사시는 TV 프로그램에서 "시오자키나 다카쓰의 싱커는 체인지업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으며, 같은 프로그램의 취재에서 이를 들은 시오자키도 "팀의 스코어러도 체인지업이라고 기록했다"고 말하며 부인하지 않았다[53]。
국제 경기 등에서는 두 번째 순회부터 싱커에 타이밍을 맞추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릴리프로서 짧은 이닝에 기용될 때 위력이 더욱 발휘되는 면도 있었다고 한다[3]。고속 싱커는 직구에 가까운 그립으로, 릴리스 순간에 손목을 덮듯이 던졌다[38]。시오자키는 자신의 싱커의 기원이 미즈시마 신지의 야구 만화 "도카벤"에 등장하는 사토나카 사토루가 잘하는 '사토루볼'이라고 한다[54]。
세이부 시대의 기요하라 가즈히로는 시오자키의 싱커를 "공이 홈 베이스 바로 앞에서 시야에서 사라진다. 사라지는 공은 칠 수 없다"고 평하며, "같은 팀이라 다행이다"라고 말했다[54]。몬다 히로미쓰는 시오자키의 싱커를 어려워했고, 시오자키가 공을 던지는 순간 타석의 가장 앞으로 이동해서 치려고 했지만, 칠 수 없었다[54]。노무라 가쓰야는 1992년 유마에서 열린 스프링 캠프에서[55], 당시 프로 입단 2년차로 결정구를 갖지 못하고 있던 다카쓰 신고에게 "너는 스피드가 없으니 완급 조절을 해라"라고 지시했는데, "시오자키는 왜 억제할 수 있는가? 직구와 싱커뿐인데"라고 물었다[55]。 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서 세이부와 대결했을 때에도 "저런 싱커를 익혀라"라고 조언을 했고, 다카쓰도 이를 받아들여 독학으로 습득에 힘썼으며, 1년 만에 마스터[55]했다[54]。
그 외에도 세이부 시절의 동료, 관계자나 상대 팀 선수들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 "한 번 떠올랐다가 눈에서 사라졌다. 그래서 완전히 상체가 들려버렸다. 파울로 간신히 버티는 게 전부였다"(후쿠라 준이치[56])
- "한 번 푹 하고 떠올라 스트라이크 존으로 떨어진다. 그때까지 본 적 없는 궤도였다. 바로 마구였지"(와타나베 히사노부[56])
- "빠졌다고 생각하면 공이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온다. 예상 밖의 변화를 한다. 타석에서 뒤로 물러선 건 저 공 정도였다"(오가와 히로후미[56])
- "좌완 투수처럼 휘어진다. 세이부 시절에 시오자키 씨의 공을 (포수로서) 받았었는데, 저런 휘어짐은 특수하다"(와다 가즈히로[56])
시오자키는 현역 시절 팀의 스터디에서 투수 코치로부터 싱커의 그립을 공개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같은 팀 내에서도 라이벌. 밥벌이는 가르쳐줄 수 없다"라며 거절한 적이 있었지만[54], 은퇴 후 인터뷰에서 "싱커를 전수하고 싶다는 생각은?"이라는 질문에 "일자상전도 아니고, 내 대에서 이 변화구를 끝내고 싶지는 않으니, 전수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다"고 답했다[54]。실제로 던지는 법을 배우러 온 투수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아낌없이 공의 그립을 가르쳤지만, 그와 같은 싱커를 던지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고[17], 그 이유로 시오자키처럼 약지의 유연성을 가진 투수가 없고, 공을 릴리스할 때 잘 빼낼 수 없어 회전력을 멈춰버리는 점이 꼽혔다[17]。2005년에 주니치에서 세이부로 이적해 온 쇼즈 에이지는 "여러 가지로 따라 해봤지만, 시오자키 씨의 싱커를 던질 수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17]。
6. 에피소드
신장 176cm, 체중 68kg(입단 첫 해)의 날씬한 몸에 쟈니스 계의 달콤한 외모[57]로 신인 시절에는 1주일에 40통의 팬레터를 받기도 했으며 스포츠 타올 등의 선물도 대량으로 받았다.[58] 악력이 약 30kg 밖에 되지 않으며 1년차의 캠프에서 바벨을 들지 못했다는 일화도 있다.[22]
가족으로는 두 명의 아들이 있으며, 현역 은퇴 당시에 소년 야구를 하고 있던 장남은 힘의 쇠약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13] 맞아도 분해하지 않았고 막으면 자신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대담하고 좋은 성격이었다. 또한 모리 마사아키에게도 정신력은 팀 내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 홈런 타자를 그다지 힘들어하지 않았지만 헛스윙을 하지 않았던 아라이 히로마사는 대전했던 프로 선수 가운데 가장 인상에 남는다고 평가했다.
7. 상세 정보
시오자키 데쓰야는 프로 야구 선수로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며, 은퇴 후에도 코치와 스카우트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다음은 그의 주요 기록과 경력에 대한 상세 정보이다.
프로 선수 시절 주요 기록 | |
---|---|
통산 성적 (15년) | 523경기 등판, 97승 55패 55세이브, 1249.1이닝, 1122피안타, 106피홈런, 348볼넷, 967탈삼진, 평균자책점 3.16 |
첫 등판 | 1990년 4월 14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전 (헤이와다이 야구장) |
첫 승리 | 1990년 4월 24일, 오릭스 브레이브스 전 (니시노미야 구장) |
첫 선발 승리·첫 완투 승리 | 1991년 9월 3일, 오릭스 블루웨이브 전 (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
첫 완봉 승리 | 1997년 5월 18일, 지바 롯데 마린스 전 (세이부 라이온스 구장)[36] |
1000 투구 이닝 | 2000년 4월 30일, 지바 롯데 마린스 전 (세이부 돔) |
500경기 등판 | 2003년 8월 10일, 지바 롯데 마린스 전 (지바 마린 스타디움) |
8연속 탈삼진 | 1990년 7월 5일, 오릭스 브레이브스 전 (니시노미야 구장) |
올스타 출장 | 1회 (1995년) |
은퇴 후 경력 | |
---|---|
세이부 편성부 조사 담당 | |
2005년 | 세이부 주니어 감독 |
2007년 | 굿윌(세이부 2군) 투수 코치 |
2008년 | 세이부 1군 불펜 투수 코치 |
2010년 | 세이부 1군 투수 코치 |
2011년-2012년 | 세이부 편성부 전문 담당 |
2013년- | 세이부 2군 감독 (3시즌) |
- 투구 스타일:
- 주 무기는 싱커였으며, 슬라이더, 커브, 슈트를 함께 던졌다.
- 싱커는 타자 앞에서 급격하게 떨어지는 구종으로, 많은 탈삼진을 잡아내는 데 기여했다.
- 그 외 정보:
- 서울 올림픽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참가하여 은메달을 획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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