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모 히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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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모 히데오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투구 폼인 '토네이도 투구법'으로 유명하다. 일본 오사카부 출신으로, 고등학교 졸업 후 사회인 야구 선수로 활동하다가 1990년 긴테쓰 버펄로스에 입단하여 일본 프로 야구(NPB)에서 4년 연속 다승왕, 탈삼진왕을 석권하며 MVP, 신인왕, 사와무라 에이지상 등을 수상했다. 1995년 메이저 리그(MLB)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 계약하여 아시아인 최초로 내셔널 리그 신인왕을 수상하고, 두 번의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며 통산 1918개의 탈삼진을 기록했다. 2008년 은퇴 후에는 야구 해설가 및 지도자로 활동하며, 2014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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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모 히데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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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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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 투수 |
타석 | 우타 |
투구 | 우투 |
출생일 | 1968년 8월 31일 () |
출생지 | 오사카 일본 |
NPB 경력 | |
데뷔 리그 | NPB |
데뷔 일자 | 1990년 4월 10일 |
데뷔 팀 | 긴테쓰 버펄로스 |
최종 리그 | NPB |
최종 팀 | 긴테쓰 버펄로스 |
최종 년도 | 1994년 |
MLB 경력 | |
데뷔 리그 | MLB |
데뷔 일자 | 1995년 5월 2일 |
데뷔 팀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최종 리그 | MLB |
최종 일자 | 2008년 4월 18일 |
최종 팀 | 캔자스시티 로열스 |
NPB 성적 | |
승-패 | 78–46 |
평균 자책점 | 3.15 |
탈삼진 | 1,204 |
MLB 성적 | |
승-패 | 123–109 |
평균 자책점 | 4.24 |
탈삼진 | 1,918 |
소속 팀 | |
수상 내역 | |
NPB | 5× NPB 올스타 (1990-1994) 퍼시픽 리그 MVP (1990) 사와무라 에이지 상 (1990) 트리플 크라운 (1990) 퍼시픽 리그 신인왕 (1990) 베스트 나인 (1990) |
MLB | 올스타 (1995) 내셔널 리그 신인왕 (1995) 2× 탈삼진 리더 (1995, 2001) 2번의 노히트 노런 (1996, 2001) |
명예의 전당 | |
등재 정보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
종류 | 일본 |
헌액 년도 | 2014년 |
올림픽 메달 | |
메달 정보 | Sport: 남자 야구 Country: Competition: 올림픽 야구 Silver: 1988 서울 | 팀 Competition: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Gold: 1989 서울 | 팀 Competition: 인터컨티넨탈컵 Silver: 1989 San Juan | 팀 |
기타 정보 | |
고등학교 | 오사카부립 세이조 공업 고등학교 |
사회인 야구 | 신닛폰 제철 사카이 |
드래프트 | 1989년 드래프트 1위 |
첫 출장 (NPB) | 1990년 4월 10일 |
첫 출장 (MLB) | 1995년 5월 2일 |
마지막 출장 (NPB) | 1994년 8월 24일 |
마지막 출장 (MLB) | 2008년 4월 18일 |
대표팀 | 일본 |
올림픽 참가 | 1988년 서울 올림픽 야구 |
선출 년도 | 2014년 |
득표율 | 82.4% (324표 중 243표) |
선출 방법 | 경기자 표창 |
2. 프로 입단 전
오사카부 오사카시 미나토구에서 태어난 노모 히데오는 어부이자 우체부인 아버지와 슈퍼마켓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노모는 수줍음이 많았지만 야구에 대한 열정은 컸다. 아버지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 캐치볼을 하면서 코르크 마개 회전식 투구 동작을 개발했는데, 이는 투구 속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5]
1989년 NPB 드래프트에서 한신 타이거스, 롯데 오리온즈, 야쿠르트 스왈로스,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닛폰햄 파이터즈, 오릭스 브레이브스, 긴테쓰 버팔로스 등 8개 구단이 1차 지명으로 경합했고, 추첨 결과 긴테쓰가 교섭권을 획득했다.[5] 계약금은 당시 최고액인 1.2억엔이었으며, 계약 조건에는 투구 폼을 변경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당시 긴테쓰 감독은 오기 아키라였다.
오사카 시립 이케지마 초등학교와 시립 미나토 중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생 시절 "이케지마 파이어즈"에서 야구를 시작했다. 오사카 부립 세이조 공업고등학교(현 오사카 부립 세이조 고등학교) 2학년 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오사카 대회에서 퍼펙트 게임을 달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구력 문제로 일본 프로 야구 드래프트에서 지명받지 못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1988년 사카이시에 있는 신일본제철 지사를 대표하는 실업 리그 팀인 신일본제철 사카이에 입단했다. 이 기간 동안 노모는 포크볼 그립을 완벽하게 하기 위해 손가락 사이에 테니스 공을 테이프로 붙여놓고 잠을 자기도 했다.[5] 실업 리그에서 투구하며 포크볼과 제구력을 갈고 닦은 노모는 1988년 하계 올림픽에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출전하여 은메달을 획득했다.
1989년 NPB 드래프트에서 8개 구단의 1순위 지명을 받았고, 추첨 결과 긴테쓰 버팔로스가 교섭권을 획득했다.
3. 일본 프로 야구 (NPB) 경력
1990년일본어 4월 10일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프로 첫 등판을 했고, 4월 29일 오릭스전에서는 당시 일본 타이 기록인 1경기 17탈삼진을 기록하며 완투승으로 프로 첫 승을 거두었다. 데뷔 첫 해부터 다승왕, 최우수 평균 자책점, 최다 탈삼진, 최고 승률을 차지하며 투수 4관왕을 달성했고, 베스트 나인, 신인왕, 사와무라 에이지상, MVP까지 석권했다. 특히 퍼시픽 리그 투수로는 최초로 사와무라 에이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1991년일본어에는 자신의 기록을 경신하는 6경기 연속 두 자릿수 탈삼진을 기록했고, 올스타전 1차전에서는 선발 투수로 등판하여 6탈삼진(1990년대 올스타전 최다 기록)을 기록했다. 2차전에서는 부상당한 아키야마 고지를 대신해 대타로 출장하기도 했다.
1992년일본어에도 18승을 거두며 2년 연속 다승왕과 탈삼진왕 타이틀을 획득했다.
1993년일본어에는 노다 고지와 치열한 다승왕 경쟁을 펼쳤다. 시즌 막판 머리 부상에도 불구하고 10월에만 3번의 선발 등판을 통해 16승을 거두며 노다와 함께 공동 다승왕이 되었다. 이로써 1990년일본어부터 1993년일본어까지 4년 연속 다승왕과 탈삼진왕을 동시에 석권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1994년일본어에는 개막전에서 8회까지 무안타 경기를 펼쳤으나 9회에 안타를 허용하며 노히트 노런 달성에 실패했다. 7월 1일 세이부전에서는 일본 프로 야구 신기록인 1경기 16사사구를 기록했지만 완투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8월에 오른쪽 어깨 부상으로 시즌을 마감하며 8승에 그쳤다.
1994년 시즌 이후 구단과의 계약 분쟁 과정에서 돈 노무라 에이전트가 일본 선수 계약서의 허점을 발견, 노모는 자유 계약 선수 자격을 얻어 메이저 리그 진출을 모색하게 되었다.
3. 1. 일본 프로 야구 (NPB) 수상 및 타이틀
연도 | 수상 |
---|---|
1990년 ~ 1993년 | 다승왕 (4회) |
1990년 | 최고 승률 (1회) |
1990년 | 최우수 평균 자책점 (1회) |
1990년 ~ 1993년 | 최다 탈삼진 (4회) |
1990년 | 신인왕 |
1990년 | MVP (1회) |
1990년 | 베스트 나인 (1회) |
1990년 | 사와무라 에이지상 (1회) |
1990년 6월, 1992년 8월 | 월간 MVP (2회) |
1990년 | 일본 프로 스포츠 대상 |
1990년 | 호치 프로 스포츠 대상 |
1990년 | 넘버 MVP상 |
[5] 노모는 1990년 버팔로스에서 데뷔하여 18승 8패, 235 이닝 동안 287개의 삼진을 기록하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의 독특한 투구 폼은 "토네이도"라는 별명을 얻게 했으며, 그 해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4. 메이저 리그 (MLB) 경력
1995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 입단하여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에 진출했다. 선수 파업으로 인해 마이너 리그 야구에서 한 달을 보낸 후, 5월 2일에 마사노리 무라카미 이후 30년 만에 처음으로 경기에 출전한 일본 출신 메이저리거가 되었다.[6] 그는 또한 무라카미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단 두 시즌만 뛰고 선수 생활의 나머지 기간을 일본 프로 야구에서 보냈기 때문에 미국 메이저 리그로 영구적으로 이주한 최초의 일본 출신 선수이기도 했다.
일본에서 타자들을 당황하게 했던 토네이도 투구는 메이저 리그 타자들에게도 같은 효과를 냈고, 1995년에 리그에서 탈삼진 1위(볼넷 2위)를 기록했고, ERA 2.54로 2위를 기록했다.[6] 그 해의 올스타전에 선발 등판하여 상대한 6명의 타자 중 3명을 삼진으로 잡았으며, 최고 시속 93마일(약 150km)을 기록했다. 노모는 그 해 내셔널 리그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미래의 명예의 전당 헌액자 치퍼 존스를 제쳤다.
1996년 9월 17일, 콜로라도주 덴버의 쿠어스 필드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7][8] 쿠어스 필드는 높은 고도, 반건조 기후, 파울 지역 부족으로 악명 높은 타자 친화적인 구장이었으며, 노모의 노히터는 쿠어스 필드에서 유일하게 기록된 노히터로 남아 있다.
1998년 시즌 초 2승 7패를 기록한 후 뉴욕 메츠로 트레이드되었으나, 경기력은 향상되지 않았고, 그 시즌에 방출되었다. 1999년 밀워키 브루어스와 계약하여 12승 8패, 평균자책점 4.54를 기록했고, 통산 1,000 탈삼진을 기록하며 메이저 리그 역사상 세 번째로 빠른 기록을 세웠다. 2000년에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 계약하여 8승 12패, 평균자책점 4.74를 기록하고 다시 방출되었다.
2001년 보스턴 레드삭스와 계약, 4월 4일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상대로 데뷔전에서 두 번째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9] 3개의 볼넷을 내주고 11개의 삼진을 잡아낸 이 노히트 노런은 캠든 야드의 10년 역사상 최초의 기록이었다. 노모는 사이 영, 짐 버닝, 놀란 라이언에 이어 양대 리그에서 모두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역대 4번째 선수로 기록되었다. 또한, 메이저 리그 데뷔 이후 처음으로 리그 탈삼진 1위를 기록했다.
2002년 다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 복귀하여 2년 연속 16승을 거두는 등 꾸준한 활약을 이어갔다. 그러나 2003년 9월에 들어서면서 부상과 피로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2004년에는 부진하여 4승 11패, 8.25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2005년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와 계약, 6월 15일 NPB/MLB 통산 200승을 달성했지만, 7월 26일에 해고되었다. 이후 뉴욕 양키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었지만 메이저 리그에 승격되지 못하고 그 해 시즌을 마쳤다.
2008년 캔자스시티 로열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고, 4월에 메이저 리그로 승격되었으나, 부진한 성적으로 인해 곧 방출되었다. 2008년 7월 17일, 노모는 공식적으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은퇴했다. 노모는 메이저 리그에서 123승, 일본에서 78승을 거두었다.
4. 1. 메이저 리그 (MLB) 수상 및 타이틀
상 | 연도 | 비고 |
---|---|---|
탈삼진왕 | 1995년, 2001년 [56] | 1995년은 아시아인 및 일본인 최초 |
신인왕 | 1995년 [56] | |
이달의 MVP (투수 부문) | 1995년 6월, 1996년 9월 [56] | |
Topps All-Star Rookie Team영어 (우완 투수 부문) | 1995년 | |
Baseball Digest영어 (선발 투수 부문) | 1995년 [96] |
1995년, 노모는 내셔널 리그 신인왕을 수상했고, 리그 최다 탈삼진을 2회 기록했다. 특히 1995년에는 아시아인 최초이자 일본인 최초로 최다 탈삼진 타이틀을 획득했다.[56] 1995년 6월과 1996년 9월에는 뛰어난 성적으로 이달의 투수상을 수상했고, 1995년에는 Topps 루키 올스타 팀과 Baseball Digest 루키 올스타 팀에도 선정되었다.
5. 은퇴 후
11월 12일부터 3일간 오릭스 버팔로스의 가을 캠프에 임시 코치로 초빙되었다.[71]
2월 1일, 오릭스의 기술 고문으로 취임했지만,[71] 그해 오프에 월 1회의 경기 관전이라는 임무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이시 다이지로 감독의 퇴임에 따라 계약 해제되었다. 3월 10일, 입회를 보류하고 있던 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에 정식으로 입회했다.
・에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봄철 캠프에서 임시 코치를 담당했다.[72] 11월에는, 다저스가 2008년까지 캠프지로 사용했던 "다저 타운"이라고 불렸던 플로리다주베로 비치의 스포츠 시설 공동 소유주로 취임했다.
한편, 매년 7월에 개최되는 미일 친선 소년 야구 대회에서는, 대회의 일본 대표 감독(총감독)을 맡고 있다. 감독으로서 임한 같은 해의 대회에서는 하세가와 시게토시가 감독을 맡는 오렌지 카운티 선발과 대결했다. 에는 총감독으로서, 하세가와가 총감독・오츠카 아키노리가 투수 코치를 맡는 미국 선발과 대결했다.
부터는 야구 해설자로도 활동했다. 처음 해설을 맡은 11월 6일의 일본 시리즈 6차전・주니치 드래곤스 대 지바 롯데 마린스(나고야 돔)의 텔레비전 중계(도카이 TV・후지 TV 계열)에서는, 서울 올림픽에서 배터리를 이룬 후루타 아츠야와 함께 출연했다. 이 경기는, 일본 시리즈 사상 첫 연장 15회・사상 최장 경기 시간(5시간 43분)으로 이어진 끝에, 2-2 무승부로 종료되었다. 중계 종료 시에는 후루타와 함께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서로에게 말을 걸었다.[73] 부터는, 1년에 1경기 페이스로, 『슈퍼 베이스볼 호랑이 정신』(아사히 방송 텔레비전)의 세・퍼 교류전 중계에 게스트 해설자로 출연하고 있다.
11월 26일, 일본인 선수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입후보자가 되었지만,[74] 1월 8일의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입회 발표에서는 6표로 낙선했다. 득표율은 1.1%로, 5%를 밑돌았기 때문에 다음 해 후보에서 제외되었다.[75] 한편,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서는 11월 29일에 경기자 표창 후보에 이름을 올린 것이 발표되었고,[76] 1월 17일에 아키야마 고지, 사사키 카즈히로와 함께 경기자 표창자로 헌액된 것이 야구 명예의 전당 박물관에서 발표되었다.[77][78] 표창 후보자 진입 1년 만에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것은 빅토르 스타루힌, 오 사다하루에 이어 사상 3번째가 되었다.
1월 18일, 미국의 프로 야구 스카우트 재단은, 노모와 박찬호에게 "선구자상"을 수여하며, 메이저 리그의 국제화에 기여한 공적을 칭찬했다.[79]
2월부터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어드바이저로 취임[80]했다. 11월에 미국의 스포츠 뉴스사가 발표한 "메이저 리그에서 가장 중요한 40인"에 37위로 선정되어, 일본인 선수 중 유일하게 선정되었다.[81]
3월 21일의 WBC 준결승에서는, 다저 스타디움에서 개최된 미국 대 일본의 경기 전 시구에서 토미 라소다와 함께 등장하여, 투구를 선보였다.[82]
, 일본의 사회인 야구 팀들이 잇따라 폐부되는 현실에 대해, 야구를 지망하는 젊은이들에게 조금이라도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는 이유로, 노모 히데오가 소속했던 신일본제철 사카이 팀이 있던 오사카부 사카이시에 사회인 야구 클럽팀인 "NOMO 베이스볼 클럽"을 설립하고 구단주로 취임했다. 에는 사회인 야구의 전국 통괄 조직인 일본 야구 연맹에 가맹했다. 에는 창단 2년 만에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첫 출전했으며, 전일본 클럽 선수권에서는 클럽팀 일본 챔피언에 등극했다.
소년 야구 (보이즈 리그)의 주니어 올 재팬의 총감독도 맡고 있다.
6. 투구 스타일
노모 히데오는 오버핸드 딜리버리로 최고 95mph의 패스트볼과 주 무기인 포크볼을 던졌다.[18] 그의 시그니처 와인드업은 "토네이도"로 알려져 있는데, 먼저 팔을 머리 위로 천천히 들어 올린 다음, 앞쪽 다리를 들어 올리고 허리를 비틀어 등판이 홈 플레이트를 향하게 하는 동작이다. 그런 다음 모든 투구에 동일한 팔 스피드를 사용하여 폭발적인 딜리버리로 홈 플레이트를 향해 돌진했다.[19]
"'''토네이도 투구법'''"은 포크 등으로 삼진을 양산하여, NPB에서 MLB로 가는 문을 연 사실상의 '''선구자'''로 평가받게 했다. 그의 별명은 "'''닥터 K'''"와 "'''The Tornado'''(토네이도)"이다. 투구 시에는 크게 휘두르는 와인드업 포지션으로 시작하여 공을 릴리스하기까지 일단 등을 타자에게 향하는 독특한 오버스로 투구 폼을 사용했다. 이 폼에서 평균 86mph-90mph, 최고 95mph[83]의 뻗는 포심과 77mph-82mph의 포크볼을 던졌다.[84] 속구는 기본적으로 포심이었지만, 좌타자에게는 때때로 컷 패스트볼을 섞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커브, 슬라이더, 투심 패스트볼 등도 구사했다.
2004년 어깨 부상 이후, 다저스 담당 의사는 토네이도 투구 폼의 비틀림이 어깨에 부담을 준다고 진단했다. 이 때문에 부상 후 경기에서는 토네이도 투구 폼을 봉인해야 했다. 2005년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에서 일미 통산 200승을 달성했을 때는 토네이도 투구 폼으로 던졌지만, 시즌 도중 팀에서 방출되었다.
2008년 캔자스시티 로열스에서 메이저 리그에 복귀했지만, 토네이도 투구 폼(와인드업 포지션)을 봉인하여 본래의 퍼포먼스를 발휘하지 못했고, 속구에도 예전의 날카로움이 없었다. 선발 투수로서 일미 양 구계에서 활약했지만, 투구 성적 부진으로 중간 계투로 배치 전환되었고, 결국 시즌 도중 은퇴했다.
노모는 삼진 탈삼진율이 매우 높아 프로 입문 후 9년 연속 탈삼진이 투구 이닝을 넘었다. NPB/MLB 통산 탈삼진율은 '''9.28'''이며, MLB로 한정하면 8.734로 역대 33위이다[85](통산 1000이닝 이상 투구).
7. 사회 현상 및 대중 문화
1990년대에 노모 히데오는 일본과 미국에서 'NOMO 마니아'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20][21][22] 그의 독특한 투구폼인 "'''토네이도 투구법'''"과 뛰어난 활약은 여러 대중 매체에서 다뤄졌으며, 관련 상품도 출시되었다. 1995년에는 디아만테스가 노모의 응원가 「노모 히데오의 테마・HIDE〜O」를 싱글 CD로 발매했고, "Nomo(노모)가 던지면 괜찮아"라는 가사가 유행하기도 했다.[25][26] 1996년에는 나이키에서 그의 시그니처 운동화인 에어 맥스 노모를 출시했다.[6]
1990년에는 신인 시절 하이라이트 장면과 소년 시절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오리지널 비디오 「삼진 탈취왕 노모 히데오의 모든 것」이 발매되었고, 애니메이션 파트에서 노모의 목소리는 마츠모토 야스노리가 연기했다. 1997년에는 세가 새턴 광고에 세가 산시로와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1998년에는 3개사의 고등학교 영어 교과서에 노모가 등장했고, 그 중 한 회사는 토네이도 투구를 분해 사진과 함께 소개했다.
힙합 래퍼들(푸샤 T, 웨일 등)의 가사에도 노모가 언급되었으며,[21] 프로 레슬러 히라사와 미츠히데는 노모를 오마주하여 링 네임 "히데오 사이토"를 사용했다.[22] 포켓몬스터 에피소드 "이상해씨와 숨겨진 마을"의 일본어 더빙판에서는 로켓단의 제임스가 노모를 언급하기도 했다. 1997년에 공개된 짐 캐리 주연의 영화 『라이어 라이어』에서도 주인공의 아이가 노모의 이름을 언급하는 장면이 나온다.
노모 히데오는 다음과 같은 광고에도 출연했다.
8. 기타
-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일본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은메달 획득에 기여했다.[1]
- 1990년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다승왕, 최우수 평균자책점, 탈삼진왕, 최고 승률을 차지하며 투수 4관왕을 석권했다.[1]
- 1995년에는 리그 최다 3완봉을 기록하여 첫 최다 탈삼진 타이틀을 획득하며 팀의 7년 만의 지구 우승에 기여했다.[1]
- 첫 등판·첫 선발 : 1990년 4월 10일, 대 세이부 라이온스 1차전(후지이데라 구장), 6이닝 4실점에서 패전 투수[1]
- 첫 탈삼진 : 상동, 1회초에 기요하라 가즈히로로부터[1]
- 첫 승리·첫 완투 승리 : 1990년 4월 29일, 대 오릭스 브레이브스 5차전(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9이닝 2실점[1]
- 첫 완봉 승리 : 1990년 6월 24일, 대 닛폰햄 파이터스 13차전(도쿄 돔)[1]
- 통산 1000탈삼진 : 1993년 8월 27일, 대 오릭스 블루웨이브 16차전(그린 스타디움 고베), 5회말에 다카하시 사토시로부터 (역대 90번째, 사상 최고 속도 : 871회)[1]
- 통산 1000투구 이닝 : 1994년 5월 31일, 대 세이부 라이온스 9차전(후지이데라 구장) (역대 253번째)[1]
- 1경기 17탈삼진 달성 당시 프로 야구 타이 기록(1990년 4월 29일)[1]
- 1경기 개인 최다 볼넷 16개 프로 야구 신기록(1994년)[1]
- 시즌 탈삼진률 10.99 프로 야구 신기록(1990년, 달성 당시)[1]
- 6경기 연속 두 자릿수 탈삼진 프로 야구 신기록(1991년 4월 7일 ~ 5월 9일)[1]
- 프로 야구 사상 최단 경기 통산 1000 탈삼진 달성[1]
- 올스타전 출장 : 5회(1990년 ~ 1994년)[1]
8. 1. 연도별 투수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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