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다 히사시
1. 개요
야마다 히사시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지도자이다. 아키타현 노시로시 출신으로, 고등학교 시절 투수로 전향하여 사회인 야구팀 후지 제철 가마이시에서 언더 스로우 투구폼을 익혔다.
1969년 한큐 브레이브스에 입단하여 1970년대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다승왕 3회, MVP 3연패 등 뛰어난 성적을 기록했다. 1975년부터 1986년까지 12년 연속 개막전 선발 투수로 등판하는 기록을 세웠다. 1988년 은퇴 후에는 야구 해설가, 코치, 감독으로 활동하며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대표팀 투수 코치를 역임했다. 2006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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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일 | 1948년 7월 29일 |
|---|---|
| 출생지 | 아키타현 노시로시 |
| 사망일 | (알 수 없음) |
| 신장 | 176cm |
| 체중 | 77kg |
| 포지션 | 투수 / 감독 |
| 투구/타석 | 우투우타 |
| 프로 입단 | 1968년 (드래프트 1위) |
| 첫 출장 | 1969년 8월 22일 |
| 마지막 경기 | 1988년 10월 23일 (은퇴 경기) |
| 아마추어 | 후지 제철 가마이시 아키타현립 노시로 고등학교 |
|---|---|
| 프로 | 한큐 브레이브스 (1969년 ~ 1988년) |
| 코치 | 오릭스 블루웨이브 (1994년 ~ 1996년) 주니치 드래건스 (1999년 ~ 2001년) |
|---|---|
| 감독 | 주니치 드래건스 (2002년 ~ 2003년) |
| 퍼시픽 리그 MVP | 3회 (1976년, 1977년, 1978년) |
|---|---|
| 일본 시리즈 MVP | 1977년 |
| 20승 투수 | 4회 |
| 승패 | 284승 166패 |
|---|---|
| 평균 자책점 | 3.18 |
| 완봉승 | 31 |
| 투구 이닝 | 3,865 |
| 탈삼진 | 2,058 |
| 헌액 | 2006년 (경기자 표창) |
|---|
| 일본어 표기 | 야마다 히사시 (山田 久志) |
|---|---|
| 로마자 표기 | Yamada Hisash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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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타현 출신 야구 선수 -
오치아이 히로미쓰
오치아이 히로미쓰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로서 롯데, 주니치, 요미우리, 닛폰햄에서 활약하며 3번의 타격 3관왕, 양대 리그 홈런왕과 타점왕 석권 등 굵직한 족적을 남겼고, 은퇴 후 주니치 드래건스 감독으로서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으며, 2011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아키타현 출신 야구 선수 -
나카지마 사토시
나카지마 사토시는 1987년부터 2015년까지 일본 프로 야구 선수로 활동했으며, 2019년부터 2024년까지 오릭스 버펄로스의 감독을 역임하며 2022년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
한큐 브레이브스 선수 -
후쿠하라 미네오
후쿠하라 미네오는 닛폰 통운 우라와 사회인 야구 선수에서 한큐 브레이브스 프로 야구 선수로 활동하며 1984년 퍼시픽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고, 은퇴 후에는 일본과 한국 프로야구 구단에서 20년 이상 코치, 야구 해설가 및 평론가로 활동했다. -
한큐 브레이브스 선수 -
모리 고타로
모리 고타로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한큐군, 도큐 플라이어스, 니시닛폰 파이레츠 등에서 투수로 활약하며 1941년 다승왕과 최고 승률을 석권하고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으며, 은퇴 후에는 사회인 야구팀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했다. -
1948년 출생 -
시아오시 투포우 5세
시아오시 투포우 5세는 통가의 제23대 국왕으로, 외무장관을 역임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다 2006년 즉위 후 민주주의 개혁을 추진하고 권력을 이양하는 등 통가의 정치 개혁에 힘썼으나 결혼하지 않아 왕위 계승권이 있는 자녀는 없었다. -
1948년 출생 -
김희옥
김희옥은 검사 출신 법조인으로서 법무부 차관과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역임하고 동국대학교 총장,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 새누리당 혁신비상대책위원장, KBL 프로농구연맹 총재, 한국프로스포츠협회 회장 등을 지낸 대한민국의 교육자, 스포츠인, 정치인이다.
2. 프로 입단 전
아키타현 노시로시 출신의 야마다 히사시는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진학 대신 사회인 야구팀인 후지 제철 가마이시에 입사했다. 대학 스카우트 제의도 있었지만, 프로 진출의 지름길을 택했다. 포수 오사와 츠토무와 함께 입단 테스트를 받았으나 오사와만 합격했고, 야구부 감독의 도움으로 후지 제철에 입사하게 되었다. 투구폼을 사이드 스로우에서 언더 스로우로 바꿨다. 본인은 "오버스로 자세에서 상반신을 기울였을 뿐, 순수한 언더 스로우는 아니다"라고 언급했다.
1967년 제38회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출전, 1회전에서 우승 후보 일본 생명을 완봉하며 주목받았다. 그러나 2회전에서 전전 도쿄에 패했다. 이후 3년 연속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출전했다.
1967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니시테쓰 라이온스로부터 11위로 지명을 받았으나, 어머니의 반대로 입단하지 못했다. 1968년 드래프트에서 1위로 한큐 브레이브스에 지명되었다. 2위는 가토 슈지, 7위는 후쿠모토 유타카였다. 야마다는 연습 중 허리 부상(척추분리증)으로 입단을 망설였으나, 1969년 도시 대항 야구 대회 이후 한큐와 정식 계약을 맺었다. 한큐 매니저 마루오 센넨지는 야마다를 "고장을 숨기고 계약금을 올리는 녀석들이 많은데, 특이한 녀석"이라며 계약금을 더 줬다.
2.1. 유소년 시절
아키타현 노시로시에서 목재 회사에 근무하는 아버지 밑에서 5남매(형 3명, 누나 1명)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겨울에는 스키나 스케이트를 타며 하체 근육을 단련했다. 초등학교 6학년 겨울에 아버지에게서 글러브를 선물받았지만, 이듬해 봄에 아버지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형들이 가족을 부양했다. 노시로 시립 노시로 제2 중학교 야구부에서 내야수로 활동했으며, 3학년 때 형을 따라 아키타 현립 노시로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2.2. 고교 시절
아키타현 노시로시 출신의 야마다 히사시는 노시로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경기에 출전했다. 2학년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서오우 대회 3회전에서 3루수였던 자신의 실책으로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 며칠 후 책임을 느끼고 퇴부를 신청하려 했으나, 감독의 권유로 투수로 전향했다.
투수 전향 초기에는 제구가 불안정했으나, 사이드 스로우 선배를 참고하여 투구 폼을 교정했다. 1루수에서 포수로 전향한 오사와 츠토무와 배터리를 이뤘다. 1966년 아키타 현 대회 준결승에서 아키타 현립 아키타 고등학교에 패하며 고시엔 진출에는 실패했다.
2.3. 사회인 야구 시절
아키타현 노시로시 출신인 야마다 히사시는 고등학교 졸업 후, 사회인 야구팀인 후지 제철 가마이시에 입사하여 선수로 활동하면서 투구폼을 사이드암에서 언더핸드로 변경했다.
1967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니시테쓰 라이온스로부터 11위 지명을 받았으나 어머니의 반대로 입단을 거부했다. 이듬해인 1968년 드래프트에서 한큐 브레이브스로부터 1순위 지명을 받고 입단했다.
3. 선수 시절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투수로 활약하며 8번의 리그 우승과 3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NPB에서 총 22개의 타이틀(9개)과 주요 표창(13개)을 획득했다.
12년 연속 개막전 선발 투수를 맡았으며, 언더핸드 투수로서는 일본 프로 야구 최다인 통산 284승을 기록했다. 야구계 관계자들로부터 사상 최고의 잠수함 투수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으며, 한큐 브레이브스의 황금 시대를 이끈 주역 중 한 명이다.
최고 승률 4회(NPB 최다 타이), 최우수 선수 3회(투수 최다 타이), 베스트 나인 5회(퍼시픽 리그 투수 최다 타이)를 수상했다.
3.1. 초기 (1969년 ~ 1975년)
요네다 데쓰야, 가지모토 다카오, 이시이 시게오, 아다치 미쓰히로 등 쟁쟁한 투수들이 포진한 투수 왕국 한큐 브레이브스에 1969년 입단했다. 유연한 폼에서 나오는 시속 150km에 육박하는 속구를 앞세워 프로 2년 차인 1970년에 첫 완봉승을 거두는 등 10승(8선발승)을 기록하며 가능성을 보였다.
등번호를 25번에서 17번으로 바꾼 이듬해 1971년에는 22승(17선발승, 아다치 미쓰히로(18선발승)에 이어 팀내 선발승 2위)을 올리며 팀의 에이스로 성장했다. 그러나 같은 해 일본 시리즈 3차전에서 오 사다하루에게 끝내기 3점 홈런을 맞고 패전 투수가 됐다.
이듬해 1972년에는 시즌 최다인 20승(4구원승 포함)을 거두며 다승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후 무릎 부상으로 구속이 떨어지면서 1973년부터 1975년까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냈다. 1975년, 팀 동료 아다치 미쓰히로를 본보기로 삼아 새로운 구질인 싱커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3.2. 전성기 (1976년 ~ 1984년)
요네다 데쓰야, 가지모토 다카오 등 ヨネカジ일본어라고 불리던 투수진이 침체되면서, 야마다 히사시는 1973년부터 1975년까지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두었다. 하지만 팀 동료인 아다치 미쓰히로를 본보기로 삼아 새로운 구질과 싱커를 연구하며 부활을 노렸다. 처음에는 직구 중심의 투구에 한계를 느껴 아다치에게 싱커 던지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지만, 아다치는 "직구가 통할 때는 싱커를 던지지 말라"며 거절했다. 그럼에도 야마다는 아다치가 던지는 싱커를 몰래 보며 매일같이 연구했고, 결국 아다치도 힌트를 주게 되었다.
1976년, 싱커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야마다는 26승(7구원승 포함)을 기록하며 다승왕 타이틀을 차지, 팀의 에이스 투수로 부활했다. (최다 선발승은 야마우치 신이치(20선발승)에게 돌아감) 통산 두 번째 다승왕 타이틀(모두 최다 선발승과는 거리가 있음)과 함께,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로 3년 연속 MVP를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3년 연속 MVP는 이치로도 달성) 1979년에는 21승(19선발승)으로 통산 세 번째 다승왕(첫 최다 선발승) 타이틀을 획득했다.
1982년 4월 29일, 롯데 오리온스 전에서 언더핸드 투수로는 미나가와 무쓰오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개인 통산 200승(당시 160선발승)을 달성했다. (200선발승은 1985년 5월 11일 난카이 호크스 전에서 기록) 이 경기에서 롯데의 간판 타자 오치아이 히로미쓰에게 3개의 홈런을 허용했는데, 모두 싱커를 노린 것이었다. 에나쓰 유타카는 이를 보고 "이것이야말로 프로의 대결"이라며 감탄했다. 1984년, 팀은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야마다는 정규 시즌 도중 무릎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며 14승(13선발승) 4패를 기록했다.
3.3. 후기 (1985년 ~ 1988년)
1975년부터 1986년까지 일본 프로 야구 신기록인 12년 연속 개막전 선발 투수로 활약했다. 1987년에는 세이부 라이온스의 기요하라 가즈히로를 상대로 개인 통산 2000탈삼진을 달성했지만, 시즌 성적은 7승에 그치며 17년간 이어온 연속 두 자릿수 승리(당시 10선발승 이상) 기록이 중단되었다.
이듬해인 1988년에는 제구력 난조와 컨디션 저하로 4승 10패라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며 결국 통산 300승 문턱에 다가서지 못한 채 통산 284승(240선발승) 166패, 2058탈삼진, 평균자책점 3.18을 기록하여 20년간의 선수 생활을 은퇴했다. 현역 마지막 경기인 10월 23일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에서 열린 한큐 브레이브스의 정규 시즌 마지막 경기(롯데 오리온스 전)에 선발 투수로 등판, 완투승(통산 284승째)을 기록하여 동료 선수들과 코칭 스태프들로부터 헹가래를 받았다.
4. 은퇴 후
1989년부터 NHK 야구 해설위원, 닛칸 스포츠 야구 해설 위원 및 평론가로 활동했다. 1994년에는 오릭스 블루웨이브 투수 코치로 부임하여 1996년까지 활동했다. 1999년에는 주니치 드래건스 투수 코치로 부임하여 2001년까지 활동했는데, 이와세 히토키의 투구 폼을 교정하여 리그를 대표하는 구원 투수로 성장시키는 등 지도력을 발휘했다.
2002년에는 주니치 드래건스 감독으로 부임했으나, 2003년 성적 부진으로 시즌 중에 경질되었다. 2004년부터 주부닛폰 방송(CBC) 야구 해설위원, 닛칸 스포츠 야구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일본 대표팀 투수 코치로 부임하여 팀의 2회 연속 우승에 기여했다.
5. 논란 및 비판
주어진 원본 소스는 야마다 히사시의 선수 시절 기록만을 담고 있으며, '논란 및 비판' 섹션의 주제인 감독 시절 선수들과의 불화에 대한 내용은 포함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주어진 소스만으로는 해당 섹션을 작성할 수 없다.
6. 수상 및 기록
야마다 히사시는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투수로 활약하며 8번의 리그 우승과 3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NPB에서 총 22개의 타이틀과 주요 표창을 획득했다.
현역 시절에는 12년 연속 개막전 선발 투수를 맡았으며, 언더핸드 투수로서는 일본 프로 야구 최다인 통산 284승을 기록하여 야구계 관계자들로부터 사상 최고의 잠수함 투수라는 칭찬을 받았다. 한큐 브레이브스의 황금 시대를 이끈 주역 중 한 명이다.
최고 승률 4회, 최우수 선수 3회, 베스트 나인 5회 등 여러 기록을 세웠다.
6.1. 타이틀
* 다승: 3회 (1972년, 1976년, 1979년)
* 최우수 평균자책점: 2회 (1971년, 1977년)
* 최고 승률: 4회 (1971년, 1976년, 1978년, 1979년) ※ 구도 기미야스와 최다 타이 기록
6.2. 수상
* 최우수 선수: 3회(1976년 ~ 1978년) ※ 투수 최다 타이기록(다른 선수는 스기우라 타다시, 야마모토 요시노부), 3년 연속은 이치로, 야마모토 요시노부와 함께 최장 타이기록
* 베스트 나인: 5회(1971년, 1972년, 1976년, 1977년, 1979년) ※ 역대 투수 2위 타이기록(다른 선수는 이나오 카즈히사, 사이토 마사키, 스기우라 타다시), 퍼시픽 리그 투수 최다 타이기록(다른 선수는 이나오 카즈히사)
*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5회(1977년 ~ 1979년, 1981년, 1982년)
* 월간 MVP: 3회(1979년 7월, 1981년 8월, 1984년 5월)
*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 MVP: 1회(1977년)
* 일본 시리즈 MVP: 1회(1977년)
* 일본 시리즈 감투상: 1회(1971년)
* 일본 시리즈 최우수 투수상: 1회(1975년)
* 야구 명예의 전당 경기자 표창(2006년)
* 호치 프로 스포츠 대상: 2회(1976년, 1977년)
* 효고현 스포츠 우수 선수 특별상: 1회(1988년) ※ 17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 및 3년 연속 MVP를 기념하여
* 아키타현 현민 영예상(1989년)
6.3. 주요 기록
山田 久志일본어의 주요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정규 시즌
* 12년 연속 개막전 선발 투수 (1975년 ~ 1986년) ※일본 프로 야구 기록
* 시즌 42피홈런 (1985년) ※퍼시픽 리그 타이기록
; 일본 시리즈
* 통산 9패 (시리즈 기록)
* 통산 122피안타 (시리즈 기록)
* 통산 23피홈런 (시리즈 기록)
* 시리즈 3패 (1984년, 시리즈 타이기록)
* 시리즈 6피홈런 (1978년, 시리즈 기록)
* 시리즈 12자책점 (1976년, 1978년, 시리즈 타이기록)
* 1경기 169투구수 (1978년 1차전, 9이닝 초과를 제외하고 최다)
* 1경기 14피안타 (1978년 5차전, 시리즈 기록)
; 올스타전
* 출장: 13회 (1971년 ~ 1972년, 1974년 ~ 1979년, 1981년 ~ 1982년, 1985년 ~ 1987년)
* 1980년과 1984년은 출장 사퇴
* 통산 7승 (올스타전 기록)
; 첫 기록
* 첫 등판: 1969년 8월 22일, 난카이 호크스 19차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8회 초 4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 2이닝 무실점
* 첫 탈삼진: 상동, 8회 초 와타나베 타이수케로부터
* 첫 선발: 1969년 10월 20일, 긴테쓰 버팔로스 26차전 (니치세이 구장), 2⅔이닝 4실점으로 패전 투수
* 첫 승리·첫 선발 승리: 1970년 5월 14일, 니시테츠 라이온즈 6차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7⅔이닝 무실점
* 첫 완투 승리·첫 완봉 승리: 1970년 5월 19일, 도에이 플라이어스 5차전 (고라쿠엔 구장)
* 첫 세이브: 1974년 4월 9일, 대 닛폰햄 파이터스 전기 5차전 (고라쿠엔 구장), 7회 말 3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 3이닝 무실점
* 첫 홈런: 1972년 6월 28일, 대 도에이 플라이어스 12차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우다 도쇼쿠로부터 (통산 유일)
; 이정표 기록
* 100승: 1976년 6월 8일, 대 퍼시픽 클럽 라이온즈 전기 9차전 (헤와다이 구장), 8이닝 1실점 완투 승리 (우천 콜드) ※역대 67번째
* 1000탈삼진: 1977년 6월 19일, 롯데 오리온즈 전기 12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5회 말 아라이 마사노리로부터 ※역대 53번째
* 150승: 1978년 9월 23일, 대 긴테쓰 버팔로스 후기 13차전 (후지이데라 구장), 9이닝 2실점 완투 승리 ※역대 31번째
* 1500탈삼진: 1981년 8월 26일, 대 세이부 라이온즈 후기 7차전 (세이부 라이온즈 구장), 1회 말 야마자키 히로유키로부터 ※역대 28번째
* 200승: 1982년 4월 29일, 대 롯데 오리온즈 전기 6차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9이닝 6실점(자책점 4) 완투 승리 ※역대 17번째
* 500경기 등판: 1982년 8월 14일, 대 세이부 라이온즈 후기 8차전 (세이부 라이온즈 구장), 9이닝 1실점 완투 승리 ※역대 48번째
* 250승: 1985년 7월 10일, 대 롯데 오리온즈 14차전 (가와사키 구장), 9이닝 2실점 완투 승리 ※역대 9번째
* 600경기 등판: 1986년 6월 10일, 대 세이부 라이온즈 8차전 (헤와다이 구장), 9이닝 3실점(자책점 2) 완투 패전 투수 ※역대 25번째
* 2000탈삼진: 1987년 8월 24일, 대 세이부 라이온즈 18차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4회 초 기요하라 가즈히로로부터 ※역대 12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