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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타 아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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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루타 아쓰야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포수로서 활약했다. 리쓰메이칸 대학을 졸업하고 1990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 입단하여 2007년 은퇴할 때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1990년 신인왕, 1991년 타격왕, 1992년 사이클링 히트, 1993년 MVP, 1995년 일본 시리즈 우승, 1997년 MVP, 1997년 일본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2004년에는 선수 노조를 이끌어 일본 프로 야구 파업을 주도했다. 2006년부터 2007년까지는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했으며, 2007년 은퇴 후 야구 해설가로 활동했다. 2015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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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타 아쓰야
기본 정보
선수 경력
소속팀토요타 자동차
야쿠르트 스왈로스/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1990-2007)
감독 경력
소속팀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2006-2007)
수상 경력
센트럴 리그 MVP2회 (1993년, 1997년)
일본 시리즈 MVP2회 (1997년, 2001년)
마쓰타로 쇼리키상1997년
명예의 전당 헌액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2015년)
국가대표 경력
올림픽1988년 은메달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1999년 은메달
인터컨티넨탈컵1989년 은메달
기타 정보
등번호27번 (영구 결번)
현역 은퇴 후 진행된 OB전 이벤트 (2019년 7월 11일 [[메이지진구 야구장]])
현역 은퇴 후 진행된 OB전 이벤트 (2019년 7월 11일 메이지진구 야구장)
주요 기록
타율0.294
홈런217개
안타2,097개
타점1,009점

2. 선수 경력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후, 1990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 드래프트 2순위로 입단하여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프로 입단 첫 해부터 주전 포수로 활약하며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고, 1991년에는 센트럴 리그 타격왕을 차지하며 최고의 선수로 성장했다. 1993년에는 팀을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며 리그 MVP를 수상했다.

1995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스즈키 이치로가 이끄는 오릭스 블루웨이브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으며, 1997년에도 팀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며 일본 시리즈 MVP와 쇼리키 마쓰타로상을 수상했다.

1998년에는 통산 1000경기 출장을 달성하고 일본 프로 야구 선수회 회장으로 취임했다. 1999년에는 시드니 올림픽 야구 아시아 지역 예선 일본 대표팀 최고령 선수로 발탁되기도 했다.

2003년 6월 28일에는 연속 4타석 홈런을 기록하며 일본 기록과 타이를 이루었고, 2005년 4월 24일에는 2000안타를 달성하며 일본 선수 중 32번째, 포수로는 노무라 가쓰야에 이어 두 번째, 대학/기업 팀 출신 선수로는 최초의 기록을 세웠다. 2004년에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회 회장으로서 프로야구 구단 재편 문제에 맞서 프로야구 파업을 주도하며 선수들의 권익 보호에 앞장섰다.

2006년에는 노무라 가쓰야 감독의 뒤를 이어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선수 겸 감독으로 취임했다. 2007년에는 선수와 감독으로서 모두 은퇴를 선언했고, 그의 등번호 27번은 야쿠르트 구단 최초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후루타는 선수 시절 뛰어난 타격과 수비 능력을 겸비한 포수로 활약하며, 통산 2097안타, 217홈런, 1009타점, 타율 2할 9푼 4리를 기록했다. 특히, 시즌 도루 저지율 .644와 통산 도루 저지율 .462는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이다.

2. 1. 프로 입단 전

효고현 가와니시시 출신으로 초등학교 3학년 때 가와니시 시의 소년 야구팀에 입단했는데, 당시 몸집이 컸기 때문에 포수를 맡았다. 중학교 시절부터 주목을 받아 고교 진학을 앞둔 시점에 사립 학교로부터 권유가 있었지만, 집에서 가까운 공립 학교인 효고 현립 가와니시메이호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교 3년간은 거의 무명에 가까웠다.

그 후 간사이 대학 상학부와 리쓰메이칸 대학 경영학부의 일반 시험에 응시하여 1984년 리쓰메이칸 대학에 입학, 야구부에 입단했다. 간사이 학생 리그에서 통산 77경기에 출전하여 234타수 72안타, 타율 3할 8리, 8홈런, 44타점을 기록했고 베스트 나인에 4차례나 선정되었다. 3학년 때에는 팀을 춘계와 추계 대회의 연속 우승으로 이끌었고, 4학년 때인 1987년에는 대학 야구 일본 대표팀 멤버로 발탁되어 프로 야구 각 구단으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11월에 있은 드래프트 회의 당일에 회견용 단상이 설치되었을 정도였지만 지명이 확약된 구단을 포함한 어느 구단으로부터도 지명되지 않았다. 당시 닛폰햄 파이터스 구단 상무였던 오사와 게이지에 의하면 “후루타는 밤소경이다”라는 진위 불명의 정보가 흘러 닛폰햄은 지명을 취소했다고 한다.[69]

1988년 3월, 리쓰메이칸 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토요타 자동차에 입사, 회사 내에 있는 경식 야구부에 입단하여 포수를 맡았다. 1년차부터 팀의 중심 타자로서 활약했고, 1988년 서울 올림픽 야구(당시에는 시범 종목이었음) 일본 국가대표팀 선수로 발탁되어 노모 히데오, 시오자키 데쓰야 등과 배터리를 짜면서 활약했지만, 결승전 상대였던 미국에게 패해 은메달 획득에 기여하였다.

이듬해 1989년, 후루타의 플레이에 반한 야쿠르트 스카우트 부장 가타오카 히로오가 토요타 자동차를 방문하여 영입 의사를 본인에게 전달했을 때 후루타는 “정말입니까? 거짓말 아니겠지요?”라고 몇 번이나 되물었다고 한다.

2. 2. 프로 입단 후

1987년 드래프트 회의 당일, 닛폰햄은 후루타가 밤소경(야맹증)이라는 정보 때문에 지명을 취소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진위는 불명확하다. 후루타는 이때의 경험으로 프로에서 성공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13][14] 도요타 자동차에 입사한 후, 사회인 야구 선수로 활동하며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여 은메달을 획득했다.

1988년 4월, 도요타자동차에 입사한 후루타는 인사부에 배속되어 야구부 연습이 없는 시간에는 직원들의 문제 해결이나 사내 레크리에이션 기획 및 운영 등에 종사했다. 신입 사원 연수에서는 딜러에서 영업 업무도 했다. 후루타는 사회인 야구 시대를 거치면서 평범한 금전 감각을 갖게 되었고, 당시 경험이 프로 입문 후에도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도요타자동차 경식야구부에서는 1년차부터 주전 포수를 맡아 도시대항에서 NTT 도카이의 보강 선수로서 팀의 준우승에 기여했다.

서울올림픽 야구 일본 대표 선발 과정에서 후루타는 대표팀 감독과 코치의 야구관을 조사하여 “기운이 있고, 국제 대회의 환경이 나빠도 굴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정보를 얻고 실행에 옮겼다. 선발회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대표팀에 발탁되었고, 노모 히데오, 시오자키 데쓰야 등과 배터리를 이루어 은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2년차에는 팀을 9년 만의 도시대항 출전으로 이끌었고, 가을 일본 선수권에서는 2회전에서 탈락했다.

1990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 드래프트 2순위로 입단하여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2. 2. 1. 1990년대

1988년 서울 올림픽 야구(당시에는 시범 종목이었음) 일본 국가대표팀 선수로 발탁되어 노모 히데오, 시오자키 데쓰야 등과 배터리를 짜면서 활약했지만 결승전 상대였던 미국에게 패해 은메달 획득에 기여하였다.[13][14]

이듬해 1989년, 후루타의 플레이에 반한 야쿠르트 스카우트 부장 가타오카 히로오가 토요타 자동차를 방문하여 영입 의사를 본인에게 전달했을 때 후루타는 “정말입니까? 거짓말 아니겠지요?”라고 몇 번이나 되물었다고 한다. 야쿠르트는 같은 해 드래프트 회의에서 후루타를 2순위로 지명했지만 감독으로 취임한 지 얼마 안된 노무라 가쓰야는 “안경을 착용하고 있지만 진짜로 괜찮은가” 라고 불안감을 숨길 수 없었다고 한다. 노무라 감독은 드래프트 회의장에서 드래프트 회의가 열리기 직전에 “후루타(의 지명)는 그만두고 포수는 내가 기른다”라고 발언했던 것에 대해 가타오카는 “후루타와의 약속을 어기게 되므로 그것은 할 수 없다”라고 “사실은 후루타를 1위로 지명하고 싶었다”라고 후에 밝히기도 있다.[15][16]

입단 초 노무라 감독은 후루타를 “어깨는 일류이지만 타격은 2류, 리드는 3류” 라고 평가했지만[17] 최대의 무기인 강한 어깨를 살리기 위해 포수로서의 기술을 맨투맨으로 계속 가르쳤다. 당시 야쿠르트의 주전 포수였던 하타 신지는 과제로 삼았던 약한 어깨를 극복할 수 없게 되자 시즌 도중 후루타가 그 자리를 차지하며 106경기에 출전했다. 타격 성적은 기대에 못 미쳤지만 수비 부문에서 도루 저지율 1위를 기록하는 등 맹활약을 보여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1991년, 도쿄 돔에서 열린 올스타전에 출전하여 MVP(제1차전)를 차지했고, 시즌 종반에는 주니치 드래건스의 간판 타자인 오치아이 히로미쓰와 타격왕(수위타자)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한 끝에 140개의 안타, 11개의 홈런, 3할 4푼의 시즌 최고 타율을 기록하여 센트럴 리그 타격왕에 등극했다. 당시 타격왕을 차지한 포수는 노무라 가쓰야(당시 난카이 호크스 선수) 이래 두 번째로 센트럴 리그 사상 최초였다.

이듬해 1992년에는 올스타전에 출전하여 제2차전(지바 마린 스타디움)에 올스타전 사상 최초인 사이클링 안타를 기록한 공로로 MVP를 차지했고, 같은 해 시즌 3할 1푼 6리의 타율과 개인 기록 최다인 30홈런, 86타점으로 타격 순위 3위를 기록함과 동시에 팀을 1978년 이후 14년 만의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일본 시리즈에서 퍼시픽 리그 우승 팀인 세이부 라이온스에 패배했지만 다음 해인 1993년에는 리그 우승과 15년 만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시즌 종료 후 시즌 최고인 90득점과 161개의 최다 안타를 기록하여 리그 최우수 선수에 선정되었다.

1994년에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 경기 도중 마에다 도모노리의 파울 팁을 받아 오른손 집게 손가락 골절상을 입어 시즌 초반부터 팀 전력에서 장기 이탈, 76경기 출전에 타율 2할 3푼 8리, 3홈런, 19타점으로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고 팀 전체가 성적 부진으로 침체에 빠지면서 B클래스(4위)로 떨어졌다. 이듬해인 1995년 시즌 전 경기(130경기)에 출전하면서 팀은 2년 만에 리그 우승을 제패했고, 일본 시리즈에서 이치로의 소속팀인 오릭스 블루웨이브를 꺾으면서 2년 만에 우승을 차지하는 데 일조했다.

1996년에는 팀이 4위로 끝나면서 자신도 기대에 미치지 못할 정도의 활약을 보여주며 시즌을 마쳤다. 1997년 팀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에서 세이부를 누르고 우승 멤버로 활약, 일본 시리즈 MVP를 석권했다. 포수로서는 처음으로 시즌 MVP와 일본 시리즈 MVP를 동시에 수상했고 일본 야구계의 최고상인 쇼리키 마쓰타로상을 수상했다.

1998년에는 통산 1000경기 출장 기록을 달성했지만 약간의 타격 부진으로 팀은 시즌 4위로 끝났다. 같은 해 마지막으로 은사였던 노무라가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오프에는 FA를 행사해 야쿠르트와 5년 계약을 맺어 일본 프로 야구 선수회 회장으로 취임했다.

와카마쓰 쓰토무가 감독으로 취임한 1999년 시즌에는 통산 5번째인 3할 대 타율을 달성했고, 같은 해 시드니 올림픽 야구 아시아 지역 예선 대회인 제20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일본 대표팀 최고령 선수로 발탁되는 등 15세 연하의 마쓰자카 다이스케와 배터리를 짰다.

2. 2. 2. 2000년대

1989년 드래프트 회의를 앞두고, 후루타는 자이언츠야쿠르트를 희망한다고 보도되었다. 야쿠르트는 1987년 드래프트에서도 후루타를 지명 후보에 넣었지만, 2위 이상이 아니면 프로에 입단하지 않겠다는 정보를 받고 철수했다. 당시 야쿠르트 1위 지명자 나가시마 카즈시게에 따르면, 릿쿄 대학 선배이자 아버지 나가시마 시게오와 친했던 스카우트 부장 가타오카 히로오에게 “후루타 씨를 왜 영입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자, “안경이다. 눈”이라고 답해 의문을 가졌다고 한다.[10]

당시 야쿠르트 야수진은 세키네 준조 감독 아래 이케야마 타카히로, 히로사와 카츠미 등 젊은 선수들이 급성장하여 주전 자리를 꿰차며 전력이 강화되었지만, 포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베테랑 야에가시 유키오 이후 주전 포수 자리를 두고 하타 신지와 나카니시 친시가 경쟁했으나, 하타는 타격은 좋지만 수비가 약하고 포일이 많았고, 나카니시는 수비는 좋지만 타격이 약했다. 두 선수 모두 도루 저지율이 낮아, 강한 어깨와 좋은 수비를 갖춘 즉시 전력감 포수 영입이 시급했다.

포수 출신 가타오카 스카우트 부장은 올림픽 경험으로 성장한 후루타의 플레이에 주목, 담당 스카우트 라본 신지에게 협상을 맡겼다. 여름 편성 회의에서 소마 카즈오 구단 사장, 타구치 슈 구단 대표, 세키네 감독 등 구단 수뇌부에 후루타를 강력히 추천하여 2위 지명이 내정되었다. 후루타는 도요타에 방문한 가타오카로부터 드래프트 지명 의사를 전달받았지만, 과거 프로 구단의 배신 경험으로 인해 “정말입니까? 거짓말이 아니겠죠?”라며 여러 번 확인했다.[11]

10월, 와카마츠 벤이 아닌 야쿠르트 본사 사장 쿠와하라 준의 추천으로 노무라 가쓰야가 신임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노무라는 “대학 출신에 명포수는 없다”고 주장하며, 취임 직후 인터뷰에서 고졸 4년 차 강견 이다 테츠야를 직접 육성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노무라는 후루타 지명을 반대했지만, 가타오카는 “후루타와의 약속을 어길 수 없다”며 반박했고, 구단도 지명 방침을 유지했다. 가타오카는 지명 직전에도 노무라가 “후루타는 그만두자. 포수는 내가 육성한다”고 고집했다고 주장했지만, 야쿠르트는 예정대로 후루타를 2위로 지명했다.[11]

노무라는 저서에서, 취임 직후 드래프트에서 가타오카에게 좋은 포수 후보를 묻자, 가타오카가 “안경을 쓰고 있지만…” “타격은 눈감아 주시겠습니까?”라고 답해, 안경은 문제없다며 후루타 영입을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후루타와의 대담에서도 “편성 부장(※스카우트 부장의 오류)에게 ‘좋은 캐처 없어?’라고 했더니, ‘한 명 있습니다. 그런데, 안경을 쓰고 있죠.’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후에 내가 크게 반대하고 있다고 말해졌습니다. 나는 말한 적이 없으니까요.”라며 웃으며, “지금은 콘택트렌즈도 있고, 렌즈도 경량화되어 문제가 없는데,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어. … ‘배팅은 눈을 감아 주시겠습니까?’라고 말입니다. 뭐, 캐처는 수비가 되고, 머리가 좋고, 어깨가 강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해서, 그래서 (후루타 영입에) 가자고 했습니다. 혹시나 영입될 줄은 생각 못했지만, 이것도 하나의 인연이죠”라고 주장, 가타오카와 대립했다.[11]

노무라와 가타오카 사이에는 쿠로스 양이치로 드래프트 지명 전략 차이, 나가시마 시게오에 대한 노무라의 도발, 아들 카즈시게 대우에 대한 불만 등 악감정이 있었다. 당시 야쿠르트 스카우트 토리하라 코지는 “노무라는 드래프트 전 회의까지 후루타와의 지명 약속을 몰랐고, 회의에서 ‘이미 결정된 선수가 있다’고 주장하는 스카우트 측과 공방이 있었다. 후루타 지명에 대해 노무라는 ‘안경을 쓰고 있네’라고 중얼거렸을 뿐, 안경이 안 된다는 이야기는 없었다”고 가타오카와 다른 견해를 밝혔다.[11]

2. 3. 선수 겸 감독 시절

효고현 가와니시시 출신으로, 초등학교 3학년 때 가와니시 시의 소년 야구팀에 입단하여 포수를 맡았다. 간사이 대학리쓰메이칸 대학 시험을 거쳐 1984년 리쓰메이칸 대학에 입학하여 야구부에 들어갔다. 간사이 학생 리그에서 통산 77경기에 출전, 234타수 72안타, 타율 3할 8리, 8홈런, 44타점을 기록했고 베스트 나인에 4차례 선정되었다. 3학년 때 팀을 춘계와 추계 대회 연속 우승으로 이끌었고, 4학년인 1987년에는 대학 야구 일본 대표팀 멤버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드래프트 회의에서 지명되지 못했다.

1988년 리쓰메이칸 대학 졸업 후 토요타 자동차에 입사, 경식 야구부에 입단하여 포수를 맡았다. 1년차부터 중심 타자로 활약했고, 1988년 서울 올림픽 야구 일본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은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1989년, 야쿠르트 스왈로스 스카우트 부장 가타오카 히로오가 후루타를 2순위로 지명했다. 감독으로 취임한 노무라 가쓰야는 후루타의 안경 착용에 불안감을 표했지만, 가타오카는 후루타와의 약속을 지켰다. 노무라 감독은 후루타에게 포수 기술을 가르쳤고, 후루타는 주전 포수로 106경기에 출전, 도루 저지율 1위를 기록하며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1991년, 도쿄 돔에서 열린 올스타전에 출전하여 MVP를 차지했고, 오치아이 히로미쓰와의 경쟁 끝에 센트럴 리그 타격왕(.340)에 등극했다. 이는 센트럴 리그 포수 사상 최초의 쾌거였다. 1992년에는 올스타전에서 사상 최초 사이클링 안타를 기록하며 MVP를 차지했고,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1993년에는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동시에 달성, 리그 최우수 선수에 선정되었다.

1994년에는 마에다 도모노리의 파울 팁에 오른손 집게 손가락 골절상을 입어 장기 이탈했다. 1995년 시즌 전 경기에 출전, 일본 시리즈에서 이치로의 소속팀 오릭스 블루웨이브를 꺾고 우승했다. 1997년 팀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며 일본 시리즈 MVP를 석권, 쇼리키 마쓰타로상을 수상했다.

1998년 통산 1000경기 출장을 달성, FA를 행사해 야쿠르트와 5년 계약을 맺고 일본 프로 야구 선수회 회장으로 취임했다. 와카마쓰 쓰토무 감독 시절인 1999년, 통산 5번째 3할 타율을 달성했고, 시드니 올림픽 야구 아시아 지역 예선 일본 대표팀 최고령 선수로 발탁되었다.

2007년 4월 19일, 개인 통산 2000경기를 출전했다. 오른쪽 어깨 통증 악화로 9월 17일 팀의 리그 6위 확정 시점에서 사의를 표명, 9월 19일 현역 은퇴와 감독직 사임을 발표했다. 10월 7일 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의 마지막 경기, 10월 9일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의 은퇴 경기를 끝으로 18년간의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통산 2008경기 출장, 2097안타, 217홈런, 1009타점, 타율 2할 9푼 4리를 기록했다.

2007년 10월 11일, 후루타의 등번호 27번은 야쿠르트 구단 최초 ‘명예 번호’로 지정되었다.

3. 은퇴 이후

2007년 11월 21일자로 임의 은퇴가 공시되어 야쿠르트를 탈퇴했으며, 이후 야구 해설자로서 TV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현재 후지 TV의 스포츠 캐스터와 야구 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다.[5] 선수 시절에는 야쿠르트 스왈로스→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만 뛰며 명포수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역대 14위 타이 기록인 8회의 연간 타율 3할을 달성했으며, 시즌 도루 저지율 .644와 통산 도루 저지율 .462는 일본 기록이다. 포수로서의 통산 타율 일본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서울 올림픽 야구 은메달리스트이기도 하다.

2004년 프로야구 구단 재편 문제 당시에는 일본 프로야구 선수회 회장으로서 구단 측과의 협상을 이끌었고, 역사상 최초의 프로야구 파업을 주도했다.

마이내비 뉴스에서 2014년에 실시한 '미스터 스왈로스' 설문조사(투표자 수: 마이내비 뉴스 회원 733명)에서 득표율 47.5%를 기록하며 2위 이하를 크게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5]

4. 프로야구 파업 주도 (2004년)

2004년 일본 프로 야구 선수 노조(당시 노조위원장은 후루타였다)는 9월 18일부터 19일까지 이틀간 파업을 주도했다. 이는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의 파업이었다.[3] 파업의 발단은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와 오릭스 버펄로스의 합병 문제였다. 재정난에 시달리던 긴테쓰 구단을 없애고, 1958년부터 이어져 온 양대 리그 체제를 통합하려는 구단주들의 움직임에 선수 노조가 반발한 것이다. 특히 센트럴 리그요미우리 자이언츠 구단주 와타나베 츠네오가 후루타를 "단순한 선수"라고 폄하하며 선수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해 갈등이 심화되었다.[3]

당초 파업은 9월 11일부터 매주 주말마다 열릴 예정이었으나, 노사 간 추가 협상 합의로 연기되었다. 그러나 협상이 결렬되자 선수들은 결국 다음 주 파업에 돌입했다.

파업은 곧 양측의 타협으로 이어졌다. 긴테쓰는 오릭스와 합병하여 오릭스 버펄로스가 되었지만,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가 새로 창단되면서 기존의 6개 팀 리그 구조는 유지되었다. 이 사건은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으며(대부분 후루타와 선수 노조에 우호적이었다), 일본 야구 역사상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노사 양측은 2004년 9월 23일 최종 합의에 도달하며 분쟁을 마무리 지었다.

5. 상세 정보

후루타 아쓰야는 가와니시 메이호 고등학교와 릿쓰메이칸 대학을 졸업하고 1988년 도요타 자동차에 입단하여 사회인 야구 선수로 활동했다. 같은 해 1988년 서울 올림픽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 은메달을 획득했다.[13]

1990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으며, 첫 시즌부터 주전 포수로 활약했다. 1991년에는 오치아이 히로미쓰를 제치고 타격왕을 차지했고, 1992년에는 올스타전에서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1995년과 1997년에는 팀을 일본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며 각각 MVP를 수상했다.

2003년에는 4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며 일본 프로야구 타이 기록을 세웠고, 2005년에는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 이는 일본 프로야구 역대 32번째이자, 포수로서는 노무라 가쓰야에 이어 두 번째 기록이었다.

2004년에는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팀 해체에 반대하며 선수협의회 회장으로서 선수 파업을 주도했다. 2006년부터는 노무라 가쓰야 감독의 뒤를 이어 야쿠르트의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했으나, 2007년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야구 해설가 및 탤런트로 활동하며 다양한 방송에 출연했다. 2015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55][56][57] 2019년부터는 시즈오카현 야이즈시의 사회인 야구팀 야이즈 마린즈의 어드바이저를 맡고 있다.[60] 2021년부터는 야쿠르트 춘계 캠프 임시 코치로 활동하며 후배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62][63]

후루타는 선수 시절 뛰어난 수비 능력과 타격 실력을 겸비한 포수로 평가받았다. 특히, 상대 타자를 분석하고 도루를 저지하는 능력이 뛰어났으며, 통산 도루 저지율 .462는 일본 프로야구 기록이다. 또한, 타격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거두어 타격왕 1회, 통산 타율 .294를 기록했다.
수상 및 타이틀 경력

연도수상 내용
1990년 ~ 1993년골든 글러브상 (4회 연속 수상)
1991년최고 타자
베스트 나인
월간 MVP (5월)
올스타 게임 MVP (1차전)
최우수 배터리상 (투수: 니시무라 류지)
호치 프로 스포츠 대상
1992년베스트 나인
올스타 게임 MVP (2차전)
최우수 배터리상 (투수: 오카바야시 요이치)
1993년최다 안타
최우수선수
베스트 나인
월간 MVP (8월)
JA 전농 Go・Go상 (강견상: 9월)
최우수 JCB・MEP상
1993년최우수 배터리상 특별상
일본 프로 스포츠 대상 수훈상
1995년골든 글러브상
베스트 나인
최우수 배터리상 (투수: 테리 브로스)
1997년최우수선수
베스트 나인
골든 글러브상
월간 MVP (5월, 9월)
최우수 배터리상 (투수: 타바타 카즈야)
일본 시리즈 MVP
쇼리키 마쓰타로상
1997년호치 프로 스포츠 대상
일본 프로 스포츠 대상 수훈상
마이니치 스포츠 인상 팬상
1999년베스트 나인
골든 글러브상
2000년베스트 나인
골든 글러브상
최우수 배터리상 (투수: 이가라시 료타)
JA 전농 Go・Go상 (최다 2·3루타상: 8월)
2001년베스트 나인
골든 글러브상
최우수 배터리상 (투수: 후지이 슈고)
일본 시리즈 MVP
호치 프로 스포츠 대상
2001년일본 프로 스포츠 대상 수훈상
2003년세·리그 연맹 특별 표창 (회장 특별상)
2004년베스트 나인 ※포수 부문 9회 수상은 센트럴 리그 최다 타이 (아베 신노스케와 동일)
골든 글러브상 ※포수 부문 10회 수상은 역대 2위, 센트럴 리그 최다. 4년 연속은 센트럴 리그 포수 최장 타이 (오야 아키히코와 동일)
마이니치 스포츠 인상 문화상
2004년골든 애로우상 (스포츠상)
2005년효고현 스포츠 우수 선수 특별상[122]
2007년세·리그 연맹 특별 표창 (특별 공로상)
2015년야구 명예의 전당 선수 표창
미쓰이 골든 글러브 레전즈 (포수 부문)


기타


  • 취미는 장기, 골프, 독서, 영화 감상, 투자 등이며, 음악에서는 U2의 열렬한 팬이다. 서예 유단자이기도 하다.
  • 일본 프로 야구 선수회 회장을 역임하며 선수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노력했다.
  • 2006년에는 남성지 GQ JAPAN의 독자 투표에 의해 "GQ JAPAN Men of the Year 2006" 스포츠 부문에 선정되었다.
  • 은퇴 후에는 마라톤, 트라이애슬론 등 다양한 스포츠에 도전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5. 1. 출신 학교


  • 효고 현립 가와니시메이호 고등학교
  • 리쓰메이칸 대학

5. 2. 선수 경력

효고현 가와니시시 출신으로 초등학교 3학년 때 가와니시 시의 소년 야구팀에 입단했는데, 당시 몸집이 컸기 때문에 포수를 맡았다. 중학교 시절부터 주목을 받아 고교 진학을 앞두고 사립 학교로부터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지만, 집 근처 공립 학교인 효고현립 가와니시메이호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교 3년간은 거의 무명에 가까웠다.

간사이 대학 상학부와 리쓰메이칸 대학 경영학부의 일반 시험에 응시하여 1984년 리쓰메이칸 대학에 입학, 야구부에 입단했다. 간사이 학생 리그에서 통산 77경기에 출전하여 234타수 72안타, 타율 3할 8리, 8홈런, 44타점을 기록했고 베스트 나인에 4차례나 선정되었다. 3학년 때에는 팀을 춘계와 추계 대회의 연속 우승으로 이끌었고, 4학년 때인 1987년에는 대학야구 일본 대표팀의 멤버로 발탁되는 등 프로 야구 각 구단으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11월 드래프트 회의 당일에 회견용 단상이 설치되었을 정도였지만 지명이 확약된 구단을 포함한 어느 구단으로부터도 지명되지 않았다.[13][14] 당시 닛폰햄 파이터스 구단 상무였던 오사와 게이지에 따르면, 후루타는 야맹증이라는 진위 불명의 정보 때문에[15] 닛폰햄은 지명을 취소했다고 한다.[16]

1988년 3월, 리쓰메이칸 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토요타 자동차에 입사, 회사 내 도요타자동차 경식야구부에 입단하여 포수를 맡았다. 1년차부터 팀의 중심 타자로서 각종 대회에서 활약했고 1988년 서울 올림픽 야구(당시에는 시범 종목) 일본 국가대표팀 선수로 발탁되어 노모 히데오, 시오자키 데쓰야 등과 배터리를 짜면서 활약했지만, 결승전에서 미국에게 패해 은메달 획득에 기여하였다.

1989년, 후루타의 플레이에 반한 야쿠르트 스카우트 부장 가타오카 히로오가 토요타 자동차를 방문하여 영입 의사를 전달했을 때 후루타는 “정말입니까? 거짓말 아니겠지요?”라고 몇 번이나 되물었다고 한다. 야쿠르트는 같은 해 드래프트 회의에서 후루타를 2순위로 지명했지만, 감독으로 취임한 지 얼마 안된 노무라 가쓰야는 “안경을 착용하고 있지만 진짜로 괜찮은가” 라고 불안감을 숨길 수 없었다고 한다. 노무라 감독은 드래프트 회의장에서 “후루타(의 지명)는 그만두고 포수는 내가 기른다”라고 발언했고, 가타오카는“후루타와의 약속을 어기게 되므로 그것은 할 수 없다”라고 반박하며 “사실은 후루타를 1위로 지명하고 싶었다”라고 후에 밝히기도 했다.

; 사회인 시대

; 프로팀 경력

; 국가 대표 경력

야쿠르트 스왈로스는 1990년 드래프트 2라운드에서 후루타를 지명했다. 그는 첫 시즌부터 팀의 주전 포수가 되었다. 1991년 올스타전에서 그는 한 이닝에 도루 시도자 3명을 잡아 올스타 MVP를 수상했다. 그는 선수 생활 내내 매년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같은 해, 그는 오치아이 히로미쓰를 제치고 타격왕(.340)에 올랐다. 또한 1992년 올스타전에서는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하며 다시 한번 올스타 MVP를 수상했다. 1995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타격왕 스즈키 이치로를 제압하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1997년에는 팀의 우승을 이끌며 시즌 MVP를 수상했다.

2003년 6월 28일, 후루타는 연속 4타석 홈런을 기록하며 일본 기록과 타이를 이루었다. 그는 2005년 4월 24일 2000안타를 달성했는데, 이는 일본 선수 중 32번째, 포수로는 노무라 가쓰야에 이어 두 번째이며, 대학/기업 팀 출신 선수로는 최초의 기록이다. 2004년에는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팀 해체에 반대하여 일본 야구 역사상 최초의 선수 파업을 이끌었다. 2006년에는 스승인 노무라 가쓰야에 이어 29년 만에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선수 겸 감독이 되었다. 그의 팀은 2006년 70승 73패 3무를 기록하며 3위에 올랐지만, 후루타 자신의 성적은 최악이었다. 그는 시즌 후 일본 야구 역사상 최대 규모의 연봉 삭감을 당했지만(선수 계약과 감독 계약은 별도이며, 선수 계약은 기간이 더 짧다), 2007년 시즌에도 선수 겸 감독직을 유지했다. 그는 2007년 말 선수와 감독으로서 모두 은퇴했다.

나이와 여러 부상으로 타격과 수비 능력이 나이가 들면서 저하되었지만, 후루타는 전성기 시절 일본 최고의 포수였으며, 상대 타자를 끊임없이 분석하고 많은 도루 시도자를 잡아냈다. 그의 도루 저지율은 1993년과 2000년에 0.600을 넘었는데, 이는 놀라운 수치이다. 그는 또한 타격에서도 큰 공헌을 하여 타격왕을 차지했고, 타율 0.300 이상을 기록한 시즌이 8번이나 되었는데(일본 포수 중 최다), 1995년 테리 브로스와 1997년 이시이 가즈히사의 노히트 노런 경기를 모두 포수로서 받았다.

후루타는 전설적인 포수 노무라 가쓰야의 지도 아래 많은 기술을 연마했다. 노무라는 1990년대 스왈로스가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팀 중 하나였을 때 그의 감독이었으며, 그 10년 동안 세 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선수 겸 감독을 역임했다는 점이다. 노무라는 당시 난카이 호크스에서, 후루타는 야쿠르트에서 선수 겸 감독을 맡았다. 두 사람은 2006년 인터리그 토너먼트에서 감독으로 맞붙었고, 후루타가 스승인 노무라를 제치고 야쿠르트와 2년차 토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6경기 중 5경기를 승리했다.

선수로서 야쿠르트 스왈로스→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만 선수 생활을 하며 명포수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역대 14위 타이 기록인 8회의 연간 타율 3할 달성자이며, 시즌 도루 저지율 .644와 통산 도루 저지율 .462는 일본 기록이다. 포수로서의 통산 타율 일본 기록 보유자이기도 하다. 서울 올림픽 야구 은메달리스트이다.

2007년 11월 21일자로 자의적 은퇴가 공표되어 야쿠르트를 퇴단했다.

2015년 1월 23일, 야구 명예의 전당에서 255표를 획득하여 선수 부문에 선출되었다.[55][56][57] 노무라 가쓰야는 "제가 야쿠르트에서 9년간 감독을 역임하는 동안 4번 우승했지만, 제 주장인 '우승팀에는 명포수가 있다'를 구현할 수 있었다. 후루타의 성장과 함께 야쿠르트는 강해졌다. 명예의 전당 입성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당시 선수 중 최초의 명예의 전당 입성은 당연하다"라고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58]

2019년 4월부터 시즈오카현야이즈시 내 여러 기업의 복합 기업형 사회인 야구클럽팀인 야이즈 마린즈의 어드바이저에 취임했다.[60]

2021년에는 야쿠르트의 춘계 캠프 2쿨부터 임시 코치를 맡았다.[62][63] 야쿠르트 지도는 14년 만이다.[64]

같은 해 3월 20일, 일본 여자 소프트볼 리그 기구 이사에 취임하는 것이 발표되었다.[67]

2023년 2월, 3년 연속 야쿠르트의 춘계 캠프 임시 코치를 맡은 후, 2월 15일부터 같은 달 말까지 MLB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임시 코치를 맡는 것이 발표되었다.[68]

5. 3. 지도자 경력

2006년부터 2007년까지 2년간 야쿠르트 스왈로스 선수 겸임 감독을 맡았다. 선수 겸임 감독은 1977년 노무라 가쓰야(난카이) 이래 29년 만이었다.[52]

감독 첫 해인 2006년, 언론과 해설가들은 후루타가 그동안의 착실한 플레이 스타일을 바탕으로 "신중한 야구를 할 것이다"라고 예상했지만, 1번 아오키 노리치카, 2번 아담 리그스, 3번 이와무라 아키노리, 4번 알렉스 라미레스, 5번 그렉 라로카라는 공격적인 라인업을 구축했다. 같은 해 총 홈런 161개는 리그 최다였고, 총 득점 669점도 주니치 드래건즈와 함께 리그 최다 타이였다. 반면 투수진은 선수층이 부족했고, 특히 불펜진은 이시이 히로토시이가라시 료타의 부상과 부진으로 고정할 수 없었다. 감독으로서 70승 73패 3무, 승률 .490으로 리그 3위 성적을 거두었지만, 선수로서는 36경기 출전에 그쳤고, 시즌 성적도 최저치를 기록했다.

2007년, 팀은 리그 최하위(6위)로 추락했다. 후루타는 팀의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다며 현역 은퇴와 감독직 사임을 동시에 발표했다.[52] 9월 17일에 팀은 리그 종합 순위인 6위(B클래스)로 확정되면서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 가능성이 없어진 시점에서 사의를 표명했다. 9월 19일에 있은 기자 회견에서 “팀의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다”라고 밝혔다.

  •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감독(2006년 ~ 2007년) ※선수 겸임.


년도구단순위경기승리패전무승부승률경기차홈런타율평균자책점나이
2006야쿠르트3위14670733.49018161.2693.9141세
20076위14460840.41720.5139.2694.0742세
합계: 2년2901301573.448A클래스 1회, B클래스 1회


5. 4. 국가대표 경력

1988년 서울 올림픽 야구(당시에는 시범 종목) 일본 국가대표팀 선수로 발탁되어 노모 히데오, 시오자키 데쓰야 등과 배터리를 짜면서 활약했지만, 결승전에서 미국에게 패해 은메달을 획득했다.[13] 1987년에는 일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 일본 대표로 선출되었다.[10]

5. 5. 수상 및 타이틀 경력

연도수상 내용
1990년 ~ 1993년골든 글러브상 (4회 연속 수상)
1991년최고 타자
베스트 나인
월간 MVP (5월)
올스타 게임 MVP (1차전)
최우수 배터리상 (투수: 니시무라 류지)
호치 프로 스포츠 대상
1992년베스트 나인
올스타 게임 MVP (2차전)
최우수 배터리상 (투수: 오카바야시 요이치)
1993년최다 안타
최우수선수
베스트 나인
월간 MVP (8월)
JA 전농 Go・Go상 (강견상: 9월)
최우수 JCB・MEP상
1993년최우수 배터리상 특별상
일본 프로 스포츠 대상 수훈상
1995년골든 글러브상
베스트 나인
최우수 배터리상 (투수: 테리 브로스)
1997년최우수선수
베스트 나인
골든 글러브상
월간 MVP (5월, 9월)
최우수 배터리상 (투수: 타바타 카즈야)
일본 시리즈 MVP
쇼리키 마쓰타로상
1997년호치 프로 스포츠 대상
일본 프로 스포츠 대상 수훈상
마이니치 스포츠 인상 팬상
1999년베스트 나인
골든 글러브상
2000년베스트 나인
골든 글러브상
최우수 배터리상 (투수: 이가라시 료타)
JA 전농 Go・Go상 (최다 2·3루타상: 8월)
2001년베스트 나인
골든 글러브상
최우수 배터리상 (투수: 후지이 슈고)
일본 시리즈 MVP
호치 프로 스포츠 대상
2001년일본 프로 스포츠 대상 수훈상
2003년세·리그 연맹 특별 표창 (회장 특별상)
2004년베스트 나인 ※포수 부문 9회 수상은 센트럴 리그 최다 타이 (아베 신노스케와 동일)
골든 글러브상 ※포수 부문 10회 수상은 역대 2위, 센트럴 리그 최다. 4년 연속은 센트럴 리그 포수 최장 타이 (오야 아키히코와 동일)
마이니치 스포츠 인상 문화상
2004년골든 애로우상 (스포츠상)
2005년효고현 스포츠 우수 선수 특별상[122]
2007년세·리그 연맹 특별 표창 (특별 공로상)
2015년야구 명예의 전당 선수 표창
미쓰이 골든 글러브 레전즈 (포수 부문)


6. 개인 기록

; 첫 기록


  • 첫 출전: 1990년 4월 11일, 대 주니치 드래곤스 2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6회초 하타 신지를 대신하여 포수로 출전
  • 첫 선발 출전: 1990년 4월 28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3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8번·포수로 출전
  • 첫 안타·첫 타점: 1990년 4월 30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5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2회말 키타 유오로부터 좌중간으로 2점 적시 2루타
  • 첫 홈런: 1990년 6월 6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8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6회초 키타베푸 마나부로부터 3점 홈런

; 기념비적인 기록

  • 100홈런: 1997년 5월 7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4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7회말 이리이 유사쿠로부터 좌월 솔로 ※역대 190번째
  • 1000안타: 1997년 10월 3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24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3회초 쿠로다 히로키로부터 중전 적시타 ※역대 186번째
  • 1000경기 출전: 1998년 6월 2일, 대 주니치 드래곤즈 9차전 (나고야 돔), 4번·포수로 선발 출전 ※역대 343번째
  • 150홈런: 2001년 7월 10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3차전 (도쿄 돔), 6회초 다렐 메이로부터 좌월 역전 2점 홈런 ※역대 118번째
  • 1500안타: 2001년 7월 11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4차전 (도쿄 돔), 1회초 우에하라 고지로부터 우월 솔로 ※역대 82번째
  • 1500경기 출전: 2002년 5월 4일, 대 주니치 드래곤즈 6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5번·포수로 선발 출전 ※역대 135번째
  • 300 2루타: 2003년 4월 4일, 대 한신 타이거스 1차전 (오사카 돔), 9회초 제프 윌리엄스로부터 우중간 2루타 ※역대 40번째
  • 200홈런: 2004년 6월 29일,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14차전 (미야기 구장), 9회초 도이 료타로로부터 좌월 장외 솔로 ※역대 80번째
  • 3000루타: 2004년 9월 25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27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6회초 오야마다 야스히로로부터 좌중간 솔로 ※역대 38번째
  • 350 2루타: 2005년 4월 19일,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3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3회말 요시카와 데루아키로부터 좌익선 2루타 ※역대 24번째
  • 2000안타: 2005년 4월 24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5차전 (보짱 스타디움), 6회말 오타케 간으로부터 3루 강습 2루타 ※역대 32번째 (포수로서는 노무라 가쓰야에 이어 역대 2번째, 대학 졸업·사회인 야구 출신 선수로서는 최초)
  • 1000타점: 2005년 10월 5일, 대 주니치 드래곤즈 21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8회말 마나카 미쓰루의 대타로 출전, 다카하시 아키후미로부터 좌전 적시타 ※역대 27번째 (대학 졸업·사회인 야구 출신 선수로서는 최초)
  • 1000득점: 2006년 6월 4일, 대 오릭스 버펄로스 6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7회말 중전 안타로 출루 후 아담 리그스의 좌월 3점 홈런으로 기록 ※역대 33번째
  • 2000경기 출전: 2007년 4월 19일,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3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8번·포수로 선발 출전 ※역대 37번째 (포수 등록 선수 역대 5번째, 대학 졸업·사회인 출신 선수 최초. 덧붙여, 후루타는 이 경기에서 퇴장 처분을 받았다.)

; 기타 기록

  • 시즌 도루 저지율 .644: 1993년 ※일본 기록
  • 4타석 연속 홈런: 2003년 6월 28일 ※역대 17번째 18번째, 역대 2위 타이[123]
  • 1경기 4홈런: 상동 ※역대 최다 타이
  • 포수 게임 19살인: 2005년 4월 6일 ※일본 타이 기록[124]
  • 올스타 게임 출전: 17회 (1990년 ~ 2006년) ※현역 마지막 해인 2007년에는 코치로 출전

7. 가족 관계

부인은 후지 TV의 전 아나운서이며, 현재는 프리 아나운서와 탤런트로 활동하고 있는 나카이 미호이다. 이는 프로야구 선수-아나운서 커플의 시초이다.[113] 종형은 탤런트인 오오키 본진이다. 또한 혈연은 아니지만, 야쿠르트 시대 동료였던 시로이시 노리유키와는 인척 관계(서로의 사촌끼리 부부)에 있다. 시로이시의 전처였던 오오하시 미호에게 시로이시와의 교제를 권유했다.

참조

[1] 웹사이트 Three Hall of Famers for 2015 Elected: FURUTA, Atsuya http://english.baseb[...] 2015-04-06
[2] 웹사이트 Why Japanese fans love baseball strikes http://www.slate.com[...]
[3] 웹사이트 Archived copy http://www.japanball[...] 2007-04-19
[4] 웹사이트 古田 敦也 http://j-sm.jp/atsuy[...] 2023-05-07
[5] 웹사이트 ミスタースワローズといえば誰ですか? - 半数近くの票を集めた1位は…… https://news.mynavi.[...] マイナビ 2014-04-24
[6] 서적 古田敦也
[7] 서적 阪急ブレーブス 光を超えた影法師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8] Youtube 初登場!屋鋪要&松永浩美&西岡剛 球界の絶滅危惧種 スイッチヒッターの技術に迫る【バッターズバイブル】 https://www.youtube.[...]
[9] 웹사이트 古田敦也氏「いじめで野球やめた」 どつく、殴る、蹴る、一気飲みで吐く… 中学1年で転校した過去明かす https://times.abema.[...] 2023-09-09
[10] 웹사이트 第32回 東京ヤクルトスワローズ 古田敦也 https://www.dreamgat[...] 2021-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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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웹사이트 “良いストレート”って何?斉藤&五十嵐&古田の答えは…【ピッチャーズバイブル】 https://www.youtube.[...] 2021-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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