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가토리 요시타카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가토리 요시타카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이다. 고치 상업고등학교와 메이지 대학을 거쳐 1979년부터 1989년까지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0년부터 1997년까지 세이부 라이온스에서 선수로 활동했다. 1990년에는 최다 세이브 투수 타이틀을 획득했고, 1987년에는 리그 최다 등판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은퇴 후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대표팀 등에서 투수 코치를 역임했으며, 2017년부터 2018년까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GM을 지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고치현 출신 야구 선수 - 후지카와 규지
    후지카와 규지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한신 타이거스에서 활약하며 최우수 중간 계투와 최다 세이브 투수 타이틀을 획득했고, 메이저 리그에도 진출했으며, 2024년 한신 타이거스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 고치현 출신 야구 선수 - 기노시타 다쿠야
    기노시타 다쿠야는 뛰어난 프레이밍과 강한 어깨를 가진 일본 프로 야구 선수로, 주니치 드래건스의 포수이며 2020년 도루 저지율 1위와 최우수 배터리상 수상 등 공수에서 활약하고 있다.
  • 고치현 출신 - 고토쿠 슈스이
    고토쿠 슈스이는 일본의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언론인, 사상가로서 사회민주당 창당 참여, 러일전쟁 반대 운동 주도, 언론 활동, 무정부주의 전향, 직접행동론 주장 등의 활동을 펼치다 대역사건으로 사형당했으며, 그의 사상은 일본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운동, 문학계, 한국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 고치현 출신 - 아리카와 히로
    아리카와 히로는 2003년 《소금의 마을》로 데뷔한 일본의 소설가로, 자위대를 소재로 한 작품과 《도서관 전쟁》 시리즈 등으로 인기를 얻었으며, 다양한 작품이 영화 등으로 제작되었다.
  • 세이부 라이온스 선수 - 송재박
    송재박은 일본과 한국 프로 야구에서 선수와 코치로 활동하며, 일본에서는 세이부 라이온스와 요코하마 다이요 훼일스에서, 한국에서는 OB 베어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고, 은퇴 후 두산 베어스 코치로 활동하며 우수 코치상을 수상했다.
  • 세이부 라이온스 선수 - 마쓰자카 다이스케
    마쓰자카 다이스케는 '헤이세이의 괴물'이라 불리며 고시엔에서 활약한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NPB와 메이저 리그에서 활동하며 WBC MVP를 두 차례 수상했고 올림픽에도 참가했다.
가토리 요시타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가토리 요시타카
출생일1957년 3월 10일
출생지고치현 가미시
포지션투수
투타우투우타
프로 입단 연도1978년
드래프트 순위드래프트 외
첫 출장1979년 4월 7일
마지막 경기1997년 10월 5일 (은퇴 경기)
선수 경력
소속팀요미우리 자이언츠 (1979년~1989년)
세이부 라이온스 (1990년~1997년)
지도자 경력
소속팀요미우리 자이언츠 (1998년~2000년, 2002년~2003년)
이바라키 골든 골즈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2013년~2015년)
U-15 야구 일본 국가대표팀 (2013년~2014년, 2016년, 2019년~)
수상 내역
수상3× NPB 올스타 (1987년, 1991년, 1993년)
NPB 성적 (1997년 기준)
리그NPB
승패91승 46패
세이브131
평균 자책점2.76
탈삼진846

2. 선수 경력

1978년 일본 야구계의 최대 이슈였던 에가와 사건으로 인해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 불참하면서, 가토리 요시타카는 드래프트 번외로 요미우리에 입단했다.[61] 입단 초기에는 중간 계투로 활약했다.

1979년 합동 자율 훈련에서는 고바야시 시게루의 강속구를 보고 프로에서의 활약을 포기할 뻔했지만,[5] 에가와 스구루와의 트레이드로 고바야시가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하고, 아사노 게이지가 발목 염좌를 당하면서 2월 캠프 4일째에 2군에서 승격, 그대로 시즌 내내 1군에 정착했다. 같은 해 4월 7일 주니치와의 개막전에 등판하여 다카기 모리미치를 중견수 플라이로 처리했고, 6월 9일 주니치전에서 첫 승을 거두는 등 38경기에 등판하여 3승을 기록했다.

1980년에는 51경기에 등판하여 1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6]

1981년 플로리다주 베로비치에서 캠프에 참가하여 샌디 쿠팩스 등의 강연을 듣고, 근력 훈련과 신체 관리에 대한 의식을 높였다.[7] 전반기에 좋은 성적을 거두어 올스타전에 선출되었지만, 연습 중 오른손 새끼손가락 골절로 후반기에는 1군에서 제외되었다.[7]

1982년부터 1983년까지는 중간 계투, 마무리, 선발 로테이션의 틈새를 메우는 역할을 했다.[7] 1983년 8월 21일 요코하마에서의 다이요전에서는 164구를 던져 2실점으로 막아 프로 유일의 완투승을 거두었다.[7]

1984년 구원 투수로서 입지를 확립,[9] 48경기에 등판하여 개인 최다인 10세이브 포인트를 기록했다.

1986년에는 산체스의 입단으로 스미오카와 함께 강력한 구원 투수진을 형성했다.[10]

1987년 리그 최다인 63경기에 등판하여 7승 4패 18세이브, 평균자책점 1.90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가토리 대명신'이라는 칭송을 받았지만,[11] 잦은 등판은 '오(왕) 패턴'이라는 비판과 함께 '가토리 당하다'라는 신조어를 낳기도 했다.[13]

1988년 산체스의 퇴단과 중간 계투진의 부진으로 부담이 커졌고,[15] 4월 29일 히로시마전에서 4⅓이닝 롱 릴리프를 맡은 것을 계기로 컨디션이 하락했다.[11] 8승 17세이브, 평균자책점 3.20을 기록했다.

1989년 피로 누적과 후지타 감독의 선발 완투 방침으로 등판 간격이 벌어져 컨디션이 떨어졌다.[13] 2승 3세이브에 그쳤고, 시즌 종반에는 내년 구상에서 제외되었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12] 11월 6일 후지타 감독으로부터 트레이드를 희망하면 응하겠다는 말을 들었고,[12] 이후 이적을 결심했다.

1989년 시즌 종료 후 맞트레이드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에 입단했다. 1990년 시즌에는 최다인 24세이브를 기록하며 최다 세이브 투수 타이틀을 획득했다.[19] 시오자키 데쓰야와 함께 중간 계투로 활약하며 팀의 여러 차례 우승에 기여했다.

1990년 4월 14일 헤이와다이 야구장에서 열린 다이에와의 경기에서 첫 등판하여 세이브를 기록했다.[19] 5월 30일 세이부 돔에서 열린 다이에전에서는 당시 NPB 신기록인 10경기 연속 세이브를 달성했다.

1991년 세이브 수는 줄었지만, 롱 릴리프도 소화하며 4년 만에 70이닝을 넘겼고, 평균 자책점 1.78을 기록했다.

1992년 8월에 통산 100세이브를 달성했고, 시오자키와 함께 더블 스토퍼로 활약했다. 자신 유일의 두 자릿수 승리를 모두 구원으로 거두었으며, 이는 당시 NPB 기록이었다.[22][23]

1993년 스기야마 겐토가 입단하여 시오자키, 가토리와 함께 '산프렛체'로 불리는 구원 트리오를 형성했다.[26]

1994년 전반에 긴급 등판이 많아 여름에 컨디션이 떨어졌지만, 후반에 부활하여 팀의 5연패에 기여했다.

1995년 히가시오 오사무 감독의 방침에 따라 마무리 투수 자리를 시오자키에게 양보하고 중간 계투를 맡았다. 선발로도 몇 경기 등판하여 완투승 직전까지 던지기도 했다.

1996년 5월 6일 롯데전에서 구원 승리로 통산 80승 130세이브를 기록, 에나츠 유타카의 당시 일본 기록(210SP)에 근접했고, 5월 16일 니혼햄전에서 통산 81승을 거두며 신기록을 수립했다.

1997년 무릎 악화 등으로 구위가 돌아오지 않아 2군에서 개막을 맞았다.[10] 10월 5일 세이부 돔에서 열린 다이에전이 은퇴 등판이 되었고, 무라마츠 아리토에게 3루타를 허용하고 강판되었다.[27] 세이부에서 요미우리 시절의 기록(45승 29패 58세이브)을 넘어선 46승 17패 73세이브를 기록했다.

2. 1. 프로 입단 전

고치현 가미시 출신으로 고치 시립 고치 상업고등학교를 거쳐 메이지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 시절 다카하시 미치타케(전 주니치 드래건스)와 함께 메이지 대학의 주력 투수로 활약했다. 도쿄 6대학 리그 통산 58경기에 등판하여 21승 14패, 평균자책점 1.89, 219탈삼진을 기록했다.[1]

고치 상업고등학교에서는 2학년 여름에 등번호 10번의 대기 투수로서 고시엔에 출전했다.[1] 2회전(첫 경기)에서 야마쿠라 카즈히로를 보유한 도호고등학교에 역전승, 3회전은 모리오카 제3고등학교를 연장 14회 사요나라 승리로 꺾고 8강에 진출했다. 준준결승에서는 이 대회에서 우승한 카네미츠 코지, 다츠카와 미츠오 등을 보유한 히로시마 상업고등학교를 만나, 에이스 하마다 요시히코(킨다이)의 다리에 쥐가 나 급히 구원 등판했지만, 다츠카와에게 홈런을 맞아 팀도 2대 7로 패했다.[1][2][3] 당시에는 프로에 갈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히로시마 상업고등학교의 야구 수준의 높이를 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재산이 되었다고 한다.[3]

3학년 여름은 고치현 대회 3회전에서 스기무라 시게루를 4번 타자로 하여 같은 해의 남사국 대회를 제패한 고치고등학교에 0대 2로 패하여, 고시엔 출전은 이루지 못했다.

고등학교 선배가 몇 명 재적하고 있던 점도 있어, 야구부의 셀렉션을 받아 메이지 대학에 진학했다.[1] 동기로는 타카하시 미치타케와 토요타 세이유가 있었다. 1학년 봄부터 타격 투수를 맡아, 도쿄 육대학 야구 리그에서는 1976년 춘계 리그부터 벤치에 들어갔다. 감독 시마오카 요시로 아래에서 매일 500개의 공을 던지는 혹독한 연습을 거듭하며, 타카하시와 함께 투수진을 지탱했다.

1977년 춘계 리그의 와세다 대학과의 3회전에서는 6회부터 타카하시를 구원하여, 미치카타 야스토모(일본강관)와 연장 15회까지 던져 팀은 사요나라 승리를 거두었다. 이 경기 직후 시마오카 감독으로부터 울면서 투구를 칭찬받아, 처음으로 시마오카 일족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을 실감했다고 한다.[4] 같은 해에는 미·일 대학 야구의 일본 대표로 처음 선발되어, 제5전에서 선발로 나섰다.

1학년 선배인 에가와 스구루를 보유한 호세이 대학 등에 막혀 리그 우승은 멀었지만, 1978년 춘계 리그에서는 4회전까지 이어진 호세이와의 승부를 제압하여 마침내 우승했다. 가토리 자신도, 오른손 중지의 물집을 태워버렸다고 할 정도의 열투를 보였다.[4] 같은 해의 대학 일본 선수권은, 결승에서 호리타 카즈히코, 나카오 타카요시의 배터리를 보유한 센슈 대학을 완봉하여 우승했다. 전년에 이어 미·일 대학 야구의 일본 대표로 선출되어, 4경기에 등판했지만 선발로 나선 제5전에서는 패전 투수가 되었다.

졸업 후에는 사회인 야구의 일본강관에 입단할 예정이었으며, 에가와 사건에 의해 요미우리가 보이콧한 1978년 11월 22일의 드래프트 회의에서는 결석한 요미우리 이외의 타 구단으로부터 지명을 받지 못했다.[5] 그러나 드래프트 회의 직후 요미우리 스카우트 사와다 유키오로부터 오래된 지인인 시마오카 감독에게 영입 타진이 있어, 프로 입단을 반대하던 조부로부터 고치에서의 가족 회의를 거쳐 승낙을 얻어, 드래프트 외로 입단이 결정되었다.[5] 또한, 드래프트 회의를 결석한 관계상, 올해에 한해 요미우리의 신입 선수들은 전원이 드래프트 외 입단이 되었다.

주니치에 1위 지명으로 입단한 타카하시와 동등한 계약 조건을 요미우리는 카토리에게 제시했다고 한다.[5]

2. 2.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1979년 ~ 1989년)

1978년 일본 야구계의 최대 이슈였던 에가와 사건으로 인해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 불참하면서, 가토리 요시타카는 드래프트 번외로 요미우리에 입단했다.[61] 입단 초기에는 중간 계투로 활약하며 스미 미쓰오와 함께 팀의 마운드를 지켰다.

1979년 합동 자율 훈련에서는 고바야시 시게루의 강속구를 보고 프로에서의 활약을 포기할 뻔했지만,[5] 에가와 스구루와의 트레이드로 고바야시가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하고, 아사노 게이지가 발목 염좌를 당하면서 2월 캠프 4일째에 2군에서 승격, 그대로 시즌 내내 1군에 정착했다.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에가와에게 요령 등을 전달하는 담당으로 임명되어 '에가와계'라고 불리기도 했다.[6] 같은 해 4월 7일 주니치와의 개막전에 등판하여 다카기 모리미치를 중견수 플라이로 처리했고, 6월 9일 주니치전에서 첫 승을 거두는 등 38경기에 등판하여 3승을 기록했다. 가을에는 "지옥의 이토 캠프"에 참가하여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6]

1980년에는 51경기에 등판하여 1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지만, 오프 시즌에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의 사임과 오 사다하루의 은퇴로 큰 충격을 받았다.[6]

1981년에는 플로리다주 베로비치에서 캠프에 참가하여 샌디 쿠팩스 등의 강연을 듣고, 근력 훈련과 신체 관리에 대한 의식을 높였다.[7] 전반기에 좋은 성적을 거두어 올스타전에 선출되었지만, 연습 중 오른손 새끼손가락 골절로 후반기에는 1군에서 제외되었다.[7]

1982년부터 1983년까지는 중간 계투, 마무리, 선발 로테이션의 틈새를 메우는 역할을 했다.[7] 1982년 센다이에서의 히로시마전에서 프로 첫 선발로 나서 10⅓이닝 무실점을 기록했지만, 6일 후 고라쿠엔에서의 한신전에서는 1회에 KO되었다.[8] 1983년 8월 21일 요코하마에서의 다이요전에서는 164구를 던져 2실점으로 막아 프로 유일의 완투승을 거두었다.[7] 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서는 4경기에 등판하여 4⅓이닝 무자책점을 기록했다.

후지타 모토시 감독 시절에는 언더스로 전향을 명령받기도 했지만, 투구 폼이 맞지 않아 단념했다.[10]

1984년에는 구원 투수로서의 입지를 확립,[9] 48경기에 등판하여 개인 최다인 10세이브 포인트를 기록했다.

1986년에는 산체스의 입단으로 스미오카와 함께 강력한 구원 투수진을 형성했다.[10]

1987년에는 리그 최다인 63경기에 등판하여 7승 4패 18세이브, 평균자책점 1.90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가토리 대명신'이라는 칭송을 받았지만,[11] 잦은 등판은 '오(왕) 패턴'이라는 비판과 함께 '가토리 당하다'라는 신조어를 낳기도 했다.[13] 시즌 MVP는 야마쿠라 가즈히로가 수상했지만, 가토리는 야나세 MVP상을 수상했다.[9] 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서는 3경기에 등판하여 총 6이닝 1자책점을 기록했다.

1988년에는 산체스의 퇴단과 중간 계투진의 부진으로 부담이 커졌고,[15] 4월 29일 히로시마전에서 4⅓이닝 롱 릴리프를 맡은 것을 계기로 컨디션이 하락했다.[11] 8승 17세이브, 평균자책점 3.20을 기록했다. 오 사다하루 감독의 마지막 경기인 10월 4일 다이요전에서 마지막 1이닝을 맡아 위닝볼을 받았다.[12] 오프 시즌에는 팜스프링스 가을 캠프에서 체인지업 습득에 힘썼다.[13]

1989년에는 피로 누적과 후지타 감독의 선발 완투 방침으로 등판 간격이 벌어져 컨디션이 떨어졌다.[13] 구위 저하와[16] 투구 중심이 높아지는 경향이 나타나[13] 2승 3세이브에 그쳤고, 시즌 종반에는 내년 구상에서 제외되었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12] 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서는 2차전에서 ⅔이닝을 던졌다. 11월 6일 후지타 감독으로부터 트레이드를 희망하면 응하겠다는 말을 들었고,[12] 이후 팜스프링스 캠프에서도 잔류 요청을 받지 못해 이적을 결심했다.

2. 3. 세이부 라이온스 시절 (1990년 ~ 1997년)

1989년 시즌 종료 후 맞트레이드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에 입단했다. 1990년 시즌에는 최다인 24세이브를 기록하며 최다 세이브 투수 타이틀을 획득했다.[19] 시오자키 데쓰야와 함께 중간 계투로 활약하며 팀의 여러 차례 우승에 기여했다. 특히 1991년에는 마운드에서 우승이 결정되는 순간 헹가래 투수가 되기도 했다.

1990년 마우이 섬에서 개인 훈련을 하며 이시게 히로미치 등과 교류하며 팀에 적응했다.[19] 스프링캠프에서는 아키야마 고지, 기요하라 가즈히로를 상대로 좋은 투구를 보여주었다.[20] 모리 마사아키 감독은 가토리를 마무리 투수로 기용할 것을 밝혔지만, 가토리는 전년도 부진으로 불안감을 느끼기도 했다.[26]

같은 해 4월 14일 헤이와다이 야구장에서 열린 다이에와의 경기에서 첫 등판하여 세이브를 기록하며 팀의 일원임을 실감했다.[19] 이후 5월 30일 세이부 돔에서 열린 다이에전에서는 당시 NPB 신기록인 10경기 연속 세이브를 달성했다. 셋업맨 시오자키 데쓰야의 활약으로 최우수 구원 투수 타이틀을 수상했다.[19] 1990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2차전에 등판하여 9회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19]

1991년에는 세이브 수는 줄었지만, 롱 릴리프도 소화하며 4년 만에 70이닝을 넘겼고, 평균 자책점 1.78을 기록했다. 1991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2경기에 등판하여 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1992년에는 8월에 통산 100세이브를 달성했고, 시오자키와 함께 더블 스토퍼로 활약했다. 자신 유일의 두 자릿수 승리를 모두 구원으로 거두었으며, 이는 당시 NPB 기록이었다.[22][23] 1992년 일본 시리즈 1차전에서는 오카바야시 요이치와 맞대결을 펼쳤으나 패전 투수가 되었다. 4차전에서는 승리 투수가 되었지만, 6차전에서는 리드를 지키지 못했다. 계약 갱신에서는 연봉이 처음으로 1억 엔(추정)에 도달했다.[24]

1993년에는 스기야마 겐토가 입단하여 시오자키, 가토리와 함께 '산프렛체'로 불리는 구원 트리오를 형성했다.[26] 1993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4차전부터 6차전까지 산프렛체가 모두 등판했고, 5차전에서 가토리가 승리 투수가 되었다.

1994년에는 전반에 긴급 등판이 많아 여름에 컨디션이 떨어졌지만, 후반에 부활하여 팀의 5연패에 기여했다. 1994년 일본 시리즈 5차전에서는 헨리 코토에게 홈런을 허용하는 등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1995년에는 히가시오 오사무 감독의 방침에 따라 마무리 투수 자리를 시오자키에게 양보하고 중간 계투를 맡았다. 선발로도 몇 경기 등판하여 완투승 직전까지 던지기도 했다.

1996년 5월 6일 롯데전에서 구원 승리로 통산 80승 130세이브를 기록, 에나츠 유타카의 당시 일본 기록(210SP)에 근접했고, 5월 16일 니혼햄전에서 통산 81승을 거두며 신기록을 수립했다.

1997년에는 무릎 악화 등으로 구위가 돌아오지 않아 2군에서 개막을 맞았다.[10] 10월 5일 세이부 돔에서 열린 다이에전이 은퇴 등판이 되었고, 무라마츠 아리토에게 3루타를 허용하고 강판되었다.[27] 세이부에서 요미우리 시절의 기록(45승 29패 58세이브)을 넘어선 46승 17패 73세이브를 기록했다.

3. 지도자 경력

은퇴 후 가토리 요시타카는 지도자로서 다양한 경력을 쌓았다. 1998년부터 2000년, 그리고 2002년부터 2003년까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투수 코치를 맡아 오카지마 히데키의 투구 폼을 교정하는 등 투수 육성에 힘썼다. 2001년에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산하 마이너 리그 팀에서 코치 연수를 받았고, 같은 해 2월에는 삼성 라이온즈의 임시 투수 코치를 맡기도 했다.[16] 당시 임창용을 지도할 예정이었으나 계약 문제로 무산되었다.

2006년에는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국가대표팀 투수 코치로 발탁되어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스포츠 호치 야구 평론가, RF라디오닛폰 야구 해설가 및 평론가로 활동하며 야구계에 지속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프로 야구 마스터스 리그의 삿포로 앰비셔스 소속 선수로도 활동했다.

그 외에도 이바라키 골든 골즈 헤드 코치(2005년), 스포츠 호치 야구 평론가, RF 라디오 일본과 BS-TBS의 MLB 중계 해설자(2011년), 사무라이 재팬 15U 대표팀 감독 및 야구 일본 대표 테크니컬 디렉터(2014년), 2015 WBSC 프리미어 12 일본 대표팀 투수 코치(3위, 2015년), 자이언츠 GM 특별 보좌 및 GM 겸 편성 본부장(2017년~2018년), TV 아사히 게스트 야구 해설자(2022년) 등을 역임했다.

3. 1. 요미우리 자이언츠 코치 (1998년 ~ 2000년, 2002년 ~ 2003년)

은퇴 후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의 지휘 아래 요미우리 자이언츠 투수 코치로 부임했다.[13] 오카지마 히데키의 투구 폼을 세밀하게 지도하고 조정하여 제구력을 향상시켰다.[13] 2001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산하 마이너 리그 팀에서 코치 연수를 받았다.

2001년 시즌 종료 후 하라 다쓰노리 감독의 요청으로 수석 코치로 발탁되었다. 하라 감독은 우에하라 고지를 구원 투수의 에이스로 배치 전환하려 했으나, 가토리는 이에 반대했다.[13] 2003년에는 요미우리 코치직을 2년 만에 사임했다.

3. 2.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코치 (2001년)

2001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산하 마이너 리그 팀에서 코치 연수를 받았다.[60]

3. 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국가대표팀 코치 (2006년)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대표팀 투수 코치로 발탁되어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53]

3. 4. 기타 지도자 경력

은퇴 후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의 지휘하에 요미우리의 투수 코치로 부임하여 오카지마 히데키의 투구 폼을 세밀하게 지도하고 조정하면서 오카지마의 제구력을 끌어올렸다.[57][58][59] 2001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산하 마이너 리그 팀에서 코치 연수를 받았다. 이에 앞서 2월에는 애리조나주의 캠프에서 KBO 리그팀인 삼성 라이온즈의 임시 투수 코치를 맡았다. 사이드 스로 투수였던 임창용을 지도할 예정이었지만 계약 문제로 임창용이 귀국하면서 다른 투수에 대한 지도를 실시했다.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대표팀의 투수 코치로 발탁되어 팀의 우승에 기여했고, 현재는 스포츠 호치 야구 평론가, RF라디오닛폰에서 야구 해설가와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역에서 은퇴한 선수들로 구성된 프로 야구 마스터스 리그 팀인 삿포로 앰비셔스의 소속 선수로도 활동했다.

4. 은퇴 후 활동

은퇴 후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의 지휘 아래 요미우리의 투수 코치로 부임하여 오카지마 히데키의 투구 폼을 세밀하게 지도하고 조정하여 제구력을 향상시켰다.[60] 2001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산하 마이너 리그 팀에서 코치 연수를 받았다. 또한 같은 해 2월에는 애리조나주의 캠프에서 KBO 리그 팀인 삼성 라이온즈의 임시 투수 코치를 맡았다. 당초 사이드 스로 투수였던 임창용을 지도할 예정이었지만 계약 문제로 임창용이 귀국하면서 다른 투수를 지도했다.

2001년 시즌 종료 후 요미우리의 감독으로 취임한 하라 다쓰노리 감독의 요청으로 수석 코치로 발탁되었다. 정규 시즌 동안 하라 자이언츠(原ジャイアンツ|하라 자이언츠일본어) 시대에 절대적인 구원 투수를 확립하기 위해 우에하라 고지를 구원 투수의 에이스로 배치 전환하려던 하라 감독의 계획안에 반대하기도 했다. 2003년에는 요미우리 코치직을 2년 만에 사임했다.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대표팀의 투수 코치로 발탁되어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현재는 스포츠 호치 야구 평론가, RF라디오닛폰에서 야구 해설가와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역에서 은퇴한 선수들로 구성된 프로 야구 마스터스 리그 팀인 삿포로 앰비셔스(札幌アンビシャス|삿포로 앰비셔스일본어)의 소속 선수로 활동했다.

5. 한국과의 인연

2001년 2월 애리조나주에서 진행된 KBO 리그삼성 라이온즈의 스프링 캠프에 임시 투수 코치로 초빙되었다.[1] 임창용을 지도할 예정이었으나, 계약 문제로 임창용 선수가 귀국하게 되어 다른 투수들을 지도했다.[1]

6. 플레이 스타일

사이드암 투수였던 가토리 요시타카는 140km/h대의 빠른 직구와 슬라이더, 싱커, 체인지업 등 다양한 변화구를 구사했다.[13] 특히 무릎 아래로 떨어지는 슬라이더는 좌타자를 상대로 효과적이었다.[46]

현역 시절, 불펜에서 3구만 던져도 어깨가 풀릴 만큼 강한 어깨를 가졌으며,[47] 1980년에는 감독에게 직접 마운드 투입 지시를 받기도 했다.[48] 연투로 피로가 쌓이면 구속을 줄이고 제구에 집중했고, 변화구 움직임이 둔해지는 것을 역이용해 타자의 허를 찌르는 노련한 투구를 했다.[49]

캠프에서는 하루 150구 가까이 던졌지만,[21] 시즌 중에는 경기 없는 날 투구를 쉬며 컨디션을 관리했다.[21] 어깨와 팔꿈치는 소모품이라는 신념으로, 투구 시 전력을 다하고 뻐근하면 멈췄다.[21] 등판 간격이 벌어지면 조정 등판을 자청했으나, 집중력이 떨어지는 단점도 있었다.[49] 연간 40경기 등판이 이상적이었다.[13] 구원 투수들이 등판 시점을 인지하고 팀 기용 방식과 일치할 때 집중력이 높아진다는 점을 체득, 코치 시절 불펜 투수들을 면밀히 살폈다.[26]

로테이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총 16번 선발 등판했다.[49] 요미우리 시절에는 결과에 대한 압박감을 느꼈지만, 세이부에서는 5회까지 던지는 것을 목표로 긴 이닝을 소화해 중간 계투진 부담을 덜었고, 이는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49]

상대 타자 중 야마모토 코지를 가장 인상 깊은 타자로 꼽았다. 야마모토는 선구안과 심리전에 능해, 헛스윙을 유도하며 가토리의 구종 선택을 어렵게 했다.[57] 센트럴 리그에서는 키누가사 사치오 (연속 경기 출장 기록 때문에 몸쪽 공략 어려움), 카케후 마사유키, 나가시마 키요유키를 상대하기 까다로워했다.[58] 타츠카와 미츠오처럼 공이 좋으면 쉽게 억제 가능한 유형에는 강했고, 켄 모카나 펠릭스 미얀에게는 좋은 공을 던져도 안타를 맞는 경우가 잦았다.[58]

퍼시픽 리그지명 타자 제도로 쉴 틈이 없었고, 과감한 타격이 많아 실투는 장타로 연결되기 쉬웠다.[59] 랄프 브라이언트의 빠른 스윙은 위협적이었고, 바깥쪽 낮은 공이 강한 투수 라인 드라이브가 될 정도였다.[59] 야마모토 카즈노리는 자신만의 타격 리듬으로 예측이 어려웠고, 후지모토 히로시는 중요한 순간 강했다.[59] 1994년 이치로를 7타석 무안타로 막았는데, 바깥쪽 슬라이더로 스트라이크를 잡고 몸쪽 높은 직구로 타자를 일으킨 후 다시 바깥쪽으로 공을 던지는 전략이 주효했다.[59]

7. 상세 정보

통산 성적[19]
연도소속 팀경기세이브승률투구 이닝피안타피홈런볼넷사구탈삼진실점자책점평균 자책점WHIP
1979요미우리 자이언츠38002.60059.04552522924223.361.19
198051003.57186.05973086318171.781.03
1981220001.00037.22531122212102.370.96
198221520.60057.257101203630294.501.20
198338521.71494.0101142526441383.641.34
198448136.57188.069112545827242.451.07
198560054.44484.174113047533333.521.23
198659034.571101.08281836829262.320.99
1987637418.63694.26681647023201.900.87
1988458417.66764.263101264025233.201.16
198921213.66734.12941012512123.151.14
1990세이부 라이온즈373124.75045.04131122615153.001.16
199134718.87570.260322103715141.781.16
19923810116.90976.25642074121212.470.99
1993425416.55668.05721744721172.251.09
199440735.70076.26641815329293.401.10
199543632.66785.27481934324232.421.09
199647732.70075.06932864822202.401.29
19978110.5007.1111501889.822.18
통산: 19년7559146131.6641306.11104119354698464294012.761.12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7. 1. 출신 학교

7. 2. 수상 및 타이틀 경력

수상 경력
최우수 구원 투수 1회 (1990년)[19]
월간 MVP 1회 (1984년 7월)
파이어맨상 1회 (1990년)


7. 3. 개인 기록

항목내용
올스타전 출장3회(1987년, 1991년, 1993년)[5]
월간 MVP1회(1984년 7월)[57]
파이어맨상1회(1990년)[57]
야나세·자이언츠 MVP상1회(1987년)[9]


7. 4. 등번호

참조

[1]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01-02-05
[2] 뉴스 巨人・鹿取GMも甲子園視察 思い出は「達川さんにくそボールを…」 https://www.sponichi[...]
[3] 뉴스 NextPlay 夏の高校野球 2006-08-08
[4]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01-02-05
[5]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01-02-12
[6]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01-02-12
[7]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01-02-19
[8] 간행물 野球小僧 2010-02
[9]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01-02-19
[10]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00-12-25
[11]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1988-06-06
[12]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1989-12-25
[13]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1989-12-25
[14]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別冊 2008-11-15
[15]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1988-06-06
[16]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01-03-12
[17] 뉴스 1989-11-04
[18] Youtube 第二話 巨人から西武トレードの真相。藤田元司監督とは何があった!?【鹿取義隆】 https://www.youtube.[...]
[19]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01-03-12
[20] 간행물 別冊宝島1652号 宝島社
[21]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1990-03-26
[22] 문서 最年長は2014年に中日の山井大介が36歳で更新
[23] 뉴스 中日・山井「昌さん刺激」遅咲き10勝 36歳で初2桁勝利は最年長 https://www.sponichi[...] スポーツニッポン 2014-09-07
[24] 간행물 Number 1993-01-20
[25] 간행물 別冊宝島1652号 宝島社
[26] 간행물 野球小僧 2010-02
[27]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1997-12-15
[28]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01-01-29
[29]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01-01-29
[30] 서적 プロ野球「第二の人生」 輝きは一瞬、栄光の時間は瞬く間に過ぎ去っていった 講談社 2015
[31] 간행물 Number 2002-10-10
[32]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01-01-14
[33] 서적 プロ野球全記録 (2003年版) 実業之日本社
[34] 간행물 週刊プロ野球セ・パ誕生60年 第40号 2003年(平成15年)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10
[35]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09-01-19
[36] 웹사이트 侍ジャパンインタビューVol.5鹿取義隆15U代表監督インタビュー http://www.japan-bas[...]
[37] 웹사이트 侍ジャパンに「テクニカルディレクター」を新設、鹿取義隆氏が就任 http://www.japan-bas[...]
[38] 웹사이트 トップチーム、WBSC世界野球プレミア12へ向けて、コーチ陣を発表! http://www.japan-bas[...] (2015年7月16日) 2015-08-04
[39] 웹사이트 鹿取義隆氏がGM特別補佐に就任 https://www.giants.j[...] 2017-04-03
[40] 뉴스 鹿取氏が巨人新GMに就任「真摯に受け止めて」堤氏は退任 https://www.sponichi[...] 2017-06-13
[41] 뉴스 巨人堤GMが低迷引責で退任、後任に鹿取義隆氏 https://www.nikkansp[...] 2017-06-13
[42] 뉴스 【巨人】鹿取GM、来日したゲレーロに本塁打量産期待 本人は東京Dに好印象 https://www.nikkansp[...] 2017-01-28
[43] 뉴스 野上巨人と合意「飛び込め」鹿取GM口説きにグラッ https://www.nikkansp[...] 2017-12-02
[44] 뉴스 巨人、鹿取GMを解任へ 編成部門トップも引責 昨オフ補強も振るわず https://www.sponichi[...] 스포츠니폰 2018-10-04
[45] 웹사이트 GMの退任について https://www.giants.j[...] 2018-10-11
[46]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1990年3月26日号、P.113
[47] 간행물 "大いなる挑戦 「記録」に挑んだ男たち" Number 1991-01-20
[48]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2000年12月25日号、P.28
[49] 간행물 野球小僧、2010年2月号、P.130
[50]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2001年9月3日号、P.34
[51]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2001年9月3日号、P.35
[52]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2001年3月5日号、P.44
[53] 뉴스 1995年6月9日毎日新聞朝刊20面 毎日新聞 1995-06-09
[54] 웹사이트 その時、マッサージ台に…鹿取義隆“完投”勝利 http://www.sponichi.[...] 스포츠니폰 2012-06-08
[55] 뉴스 1995年7月17日読売新聞朝刊17面 読売新聞 1995-07-17
[56] 뉴스 1995年8月26日読売新聞朝刊17面 読売新聞 1995-08-26
[57]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2001年2月26日号、P.48
[58]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2001年2月26日号、P.49
[59]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2001年3月19日号、P.49
[60] 간행물 第1戦 あまりにも劇的なヤクルトの1勝 Sports Graphic Number 1992-11-20
[61] 간행물 《주간 베이스볼》, 2001년 2월 12일자, p.4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