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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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양극장은 1935년 배구자와 홍순언 부부가 설립한 연극 전용 극장으로, 일제강점기 한국 연극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최신식 시설과 전속 배우 고용 시스템을 갖추고, 청춘좌와 호화선 등 인기 극단을 통해 연극을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1939년 지배인 최독견의 부도로 몰락했고, 이후 영화관으로 운영되다 1976년 폐관되었다. 1990년 극장이 해체되었으나, 2003년 '동양극장지' 석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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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극장 | |
---|---|
기본 정보 | |
사명 | 동양극장 |
원어명 | lang: ko text: 동양극장 (동양극쟝) |
영문 사명 | Dongyang Theatre |
약칭 | 동양, 동극 |
국적 | 대한민국 |
본사 위치 | 서울특별시 중구 충정로1가 62번지 |
설립일 | 1935년 11월 1일 |
업종 | 서비스업 |
사업 내용 | 영화의 흥행 |
상세 정보 | |
폐관일 | 1976년 2월 |
주요 인물 | 홍순언 배구자 금전태윤 |
기타 | 1950년 전후 영화관으로 업태 변경 |
2. 역사
1935년 11월 1일, 홍순언·배구자 부부가 일본 통치하의 조선 경성부 죽첨정 1정목 62번지(현재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충정로1가 62번지)에 동양극장을 설립하고 개관했다.[1] 배구자는 무용가였고, 홍순언은 평양부(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출신의 실업가였다.[1] 지배인으로는 전속 작가이기도 한 최독견(본명: 최상덕)이 취임했다. 동 극장 개관과 함께, "청춘좌한국어"를 설립했다.[1]
1936년에 발행된 자료에 따르면, 동양극장은 경성극장(후의 서울극장)과 함께 분도 주지로가 경영했다고 기록되어 있다.[8] 같은 해 10월 25일에는 동 극장 지배인 최독견이 각본을 집필한 『미몽』을 분도 주지로가 경영하는 경성촬영소에서 제작하여, 동 극장 및 단성사에서 개봉했다.[9] 이 영화의 필름은 2006년에 중국에서 발견되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영화 필름으로 대한민국 문화재청에 등록되었다.[9]
동양극장은 소속 배우에게 고정 월급제를 채택하여 배우들이 생활 걱정 없이 연극에 전념할 수 있게 한 획기적인 극장 운영을 했다.[1] 동 극장을 거점으로 "청춘좌", "호화선한국어", "동극좌한국어", "희극좌한국어" 등의 극단이 활동했으며, 지방 순회 공연도 했다. 1938년 창립한 "호화선한국어"은 "청춘좌"와 함께 양대 극단으로 알려졌다.[2]
1937년 1월 19일, 연극을 중심으로 경영하던 홍순언은 아내의 일본 공연에 동행했다가 도쿄에서 사망했다.[1] 홍순언 사후에는 지배인이었던 최독견이 대표로 취임하여 동 극장을 경영했다.
"청춘좌"의 대표작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한국어』였으며, 1939년 동 극장은 고려영화협회와 제휴하여 이를 영화화하고, 경성부민관에서 공개하여 10,000명을 동원했다.[10] 이 작품에 주연한 배우는 "청춘좌"의 스타 여배우 차홍녀한국어였다.[10] 1940년 12월 24일에는 차홍녀가 순회 공연 중 무대에서 쓰러져 급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11] 소속 배우들은 최독견의 경영에 반발하여 대거 동 극장을 탈퇴했으며, 이 전후 시기에 영화관으로 업태를 변경했다.[3]
1941년 3월 자료에 따르면, 동 극장 내에 "청춘좌", "호화선한국어" 양 극단의 사무실이 있었고, 단원 수는 모두 23명, 대표자는 모두 김태윤이었다.[2] 1942년 자료에는 동 극장의 경영자는 김전태윤(김태윤)이며, 지배인도 겸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3] 같은 해 9월 20일에는 동 극장의 "혁신 개관 3주년 기념 공연"으로 "청춘좌"가 『춘향전』을 상연했다.[12][13] 당시 "청춘좌" 외에 "극단 성군한국어"도 동 극장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13] 1943년 자료에는 동 극장이 상설 영화관으로 게재되어 있지 않다.[4]
1945년 광복 이후,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전까지 미군정이 이 지역을 통치했다. 종전 직후 동 극장의 관주는 김전태준이었다. 대한민국이 성립된 해인 1948년 12월 26일부터 동 극장에서 조건의 희곡을 김춘광이 연출한 '임이 오시는 길'을 상연했다.
1950년 전후 시기에 다시 영화관으로 업태를 변경했다.[1] 동 극장에서는 한국 영화를 중심으로 상영했으며, 1969년 11월 8일에는 '흑산도 아가씨'(감독 권혁진, 주연 윤정희)를 개봉했다.[14] 1976년 2월에 폐관했다.[1] 현대그룹이 동 극장을 매수했으나, 1990년에 해체하여 연극인들의 항의를 받았다.[15]
1991년 3월 25일 문화일보가 동양극장 부지의 건축 허가를 얻어 재개발을 시작, 1994년 9월 20일 새 빌딩에 입주했다.[5] 2003년에는 동양극장 터에 '동양극장지' 석비가 세워졌다.[1][16] 2001년 6월 9일부터 9월 9일까지는 KBS2에서 1930년대의 동 극장을 무대로 한 드라마 '동양극장'을 제작·방영했다.[6][7]
2. 1. 배경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자본가들은 전국의 대도시에 극장을 세웠다.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일본인 소유 극장들은 신파극 공연 대신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한국인 연극인들은 공연할 극장을 빌리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일본인 흥행업자에게 착취와 박대를 당했다. 한국인 소유 극장들도 영화 상영 위주로 운영되었다.[17]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중은 연극을 통해 시대를 인식하기 시작했고, 연극 감상 수준도 높아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극장이 영화 상영 위주였고, 일본인 경영 극장들은 '수지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국 극단에 협조하지 않아 한국 극단이 발전하기 어려웠다.[18]
2. 2. 창설과 활동
1935년 11월, 배구자와 홍순언 부부가 연극 전용 극장인 동양극장을 설립하였다.[1] 배구자는 일본에서 춤과 노래를 익힌 예술인이었고, 남편 홍순언은 평양 출신의 재력가였다. 이들은 20여만 원을 투자하여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에 최신식 극장을 세웠다.동양극장은 연극인 최독견이 지배인을, 박진이 부책임자를 맡아 실무를 담당했다. 산하에 문예부를 두고 전속 작가들과 계약하여 많은 유명 작가를 배출했다. 최독견, 이서구, 송영, 임선규, 김건, 박영호, 김태진, 이운방은 모두 동양극장 전속 작가였다. 일본 유학파로 극예술연구회 창립회원인 연출가 홍해성을 비롯해 박진, 안종화, 한노단, 이서향 등이 연출가로 활동했다. 안영일, 나웅은 객원 연출가로 참여했다.[1]
동양극장은 개관과 함께 청춘좌를 설립했다.[1] 청춘좌의 대표작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였다.[10] 1938년 창립한 호화선은 청춘좌와 함께 양대 극단으로 알려졌다.[2] 청춘좌, 호화선 외에도 동극좌, 희극좌 등의 극단이 동양극장을 거점으로 활동했으며, 지방 순회 공연도 했다.[2]
동양극장은 소속 배우에게 고정 월급제를 채택하여 배우들이 생활 걱정 없이 연극에 전념할 수 있도록 했다.[1] 1940년 12월 24일에는, 청춘좌의 스타 여배우 차홍녀(1919년 - 1940년)가 순회 공연 중 무대에서 쓰러져 급사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11]

2. 3. 해체
1939년 동양극장은 지배인 최독견에게 경영권이 넘어갔으나, 최독견이 부도를 내면서 몰락하게 되었다.[1] 청춘좌의 황철, 차홍녀 등 인기 배우들이 이탈하여 예전과 같은 명성을 찾기 어려웠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영화관으로 사용되다가 1976년 폐관되었다.[1] 이후 현대그룹이 인수하여 교육장으로 사용하다가 1990년 완전히 철거되었다.[1] 현재는 문화일보 사옥이 들어서 있으며, 충정로 동양극장 자리에는 표지석이 남아 있다.[1]2. 4. 연혁 (일본어 위키 항목 참고)
- 1935년 11월 1일: 홍순언, 배구자 부부가 경성부 죽첨정 1정목 62번지(현 서울특별시 중구 충정로1가 62번지)에 연극 공연장으로 개관.[1] 최독견이 지배인으로 취임하고, 극단 '청춘좌'를 설립했다.
- 1937년 1월 19일: 홍순언이 일본 도쿄에서 사망.[1] 이후 지배인이었던 최독견이 대표로 취임했다.
- 1939년: 고려영화협회와 제휴하여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영화화하고, 경성부민관에서 공개하여 10,000명을 동원했다.[10]
- 1940년 전후: 상설 영화관으로 업태를 변경했으나,[3] 소속 배우들이 최독견의 경영에 반발하여 대거 극장을 탈퇴했다.[3]
- 1940년 12월 24일: 배우 차홍녀가 순회 공연 중 무대에서 사망했다.[11]
- 1941년 3월: 동 극장 내에 '청춘좌', '호화선' 양 극단의 사무실이 있었고, 단원은 총 23명, 대표는 김태윤이었다.[2]
- 1942년: 김전태윤(김태윤)이 경영자 겸 지배인이었다.[3]
- 1942년 9월 20일: '혁신 개관 3주년 기념 공연'으로 '청춘좌'가 『춘향전』을 상연했고,[12][13] '극단 성군'도 동 극장에 사무실을 두었다.[13]
- 1943년: 상설 영화관으로 게재되지 않았다.[4] (연극 공연장으로 복귀한 것으로 추정)
- 1950년 전후: 다시 영화관으로 업태를 변경했다.[1]
- 1976년 2월: 폐관.[1]
3. 특징
동양극장은 일제강점기 경성부 죽첨정 1정목 62번지(현재의 대한민국서울특별시중구 충정로1가 62번지 문화일보 빌딩 위치)에 있었다.[1][5] 철근 콘크리트조 4층 건물로 648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1] 경영자는 홍순언(1935년 - 1937년[1]), 최독견(1937년 - 1940년 전후), 김전태윤(1940년 전후 - ) 순으로 바뀌었다.[3]
3. 1. 시설
동양극장은 회전 무대로 꾸며져 있으며 한국 최초로 음향효과를 위한 허리전트(horizont, 허공에 설치하는 장막)를 갖춰놓기도 했다. 1인용 접이식 의자를 배치하였으며 무대 밑에서는 스팀 효과를 낼 수 있었다. 연극 시작 시에는 징을 쳐서 알렸다. 이 당시로서는 최신식 극장이었기에, 시골에서 구경하기 위해 올라온 사람 중에서는 현관에 들어서자 반짝거리는 바닥 타일을 보고서 신발을 벗어들고 입장했다는 해프닝도 남아 있다.[18]
- 소재지: 일제강점기 경성부 죽첨정 1정목 62번지
- * 현재의 대한민국서울특별시중구 충정로1가 62번지 문화일보 빌딩 위치[1][5]
- 구조: 철근 콘크리트조 4층 건물
- 관객 정원: 648명 (1935년[1])
3. 2. 전속 극단
동양극장은 산하에 문예부를 두고 전속 작가들과 계약하여 많은 작가를 배출했으며, 전속 극단으로 청춘좌를 결성했다. 서월영, 박제행, 심영, 황철, 차홍녀, 김선영, 한은진 등이 청춘좌 소속이었다.[18]심영은 뛰어난 연기력과 사회주의적 신념을 가진 배우로, 민족의 아픔을 표현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연극을 통해 민중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자 노력했으며, 억압받는 조선 민중의 현실을 고발하는 작품에 참여했다.
이후 사극 전담의 동극좌, 희극 전담의 희극좌가 통합하여 호화선을 조직하고 주로 지방 순회공연을 다녔다. 서일성, 양백명, 유계선, 박영신, 문정복, 이정순 등이 호화선 배우였다.[18] 청춘좌와 호화선 외에도 동극좌, 희극좌도 동양극장을 거점으로 활동했다.[2]
3. 3. 상연 작품
동양극장은 당대 최고의 흥행 배우들을 보유하며 한국 전역에 연극을 대중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주로 식민지 현실이라는 시대적 상황에 맞춰 눈물을 자아내는 슬픈 내용의 멜로드라마가 많은 사랑을 받았다. 대표적인 상연 작품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제목 | 장르 | 내용 | 비고 |
---|---|---|---|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 신파극 | 가난 때문에 기생이 된 여주인공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 | 임선규 작, 1936년 초연, 동양극장 대표작 |
검사와 여선생 | 신파극 | 여선생과 검사의 사랑과 갈등 | |
어머니의 힘 | 신파극 | ||
단종애사 | 사극 | 조선 제6대 임금 단종의 비극적인 삶 | 이서구 작 |
일본에서 전문적인 연극 수업을 받은 연출가들은 1910년대부터 한국에 유입된 전통적인 신파극과는 달리 고급화된 연기를 선보였다.[18]
4. 갤러리 (일본어 위키 항목 참고)
참조
[1]
웹사이트
동양극장 터
http://www.cultureco[...]
2013-12-09
[2]
웹사이트
『연극특집호』발간에 제하여 - 조선연극협회의 약진을 기대하노라
http://sparchive.dgu[...]
2013-12-09
[3]
간행물
年鑑
1942
[4]
간행물
年鑑
1943
[5]
웹사이트
회사연혁
http://www.munhwa.co[...]
2013-12-09
[6]
웹사이트
동양극장
http://www.kbs.co.kr[...]
2013-12-09
[7]
웹사이트
東洋劇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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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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笠原
193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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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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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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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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劇藝術에殉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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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웹사이트
革新開館3週年紀念公演 傳説春香傳
https://commons.wiki[...]
2013-12-10
[13]
웹사이트
劇団星群 山風
https://commons.wiki[...]
2013-12-10
[14]
웹사이트
흑산도 아가씨
http://www.kmdb.or.k[...]
2013-12-10
[15]
간행물
박
1991
[16]
웹사이트
東洋劇場址
2013-12-09
[17]
서적
표석을 따라 경성을 거닐다
유씨북스
2016-11-30
[18]
서적
표석을 따라 경성을 거닐다
유씨북스
2016-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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