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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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제단은 1919년 3·1 운동의 확산에 대응하여 일제강점기 시대에 조직된 단체이다. 박중양 등 친일 성향의 관료, 유지, 지식인들이 주도하여 결성되었으며, 만세 운동을 자제시키고 불온한 행위를 감시, 신고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전국적으로 지부가 조직되었으며, 주로 만세 시위 참여자들을 설득하고 해산시키는 활동을 펼쳤다. 자제단은 친일 단체로 비판받았으며, 강제 동원 및 민중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3·1 운동이 소강 상태에 접어든 1919년 10월 이후 해산되었으며, 참여자들은 이후에도 친일 행적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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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협회는 1920년 민원식 주도로 설립되어 신일본주의를 내세우며 조선인의 일본 제국 내 참정권과 자치권을 요구했으나, 조선총독부의 지원 의혹, 민원식 암살 사건, 내부 분열, 자금난 등으로 친일 행적 논란 속에 조선 사회의 정치적 상황과 민족 운동 이해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 1919년 일본 - 3·1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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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2월 8일 도쿄에서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이 발표한 2·8 독립 선언은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하여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며 3·1 운동의 기폭제가 된 한국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사건이다. - 일제강점기의 문화 - 형평사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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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제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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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배경 | |
조직 및 활동 | |
평가 및 영향 |
2. 결성 배경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폭력적인 양상을 보이자, 조선총독부는 비폭력적이고 주민자치적인 방식으로 시위를 진압하고자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1919년 4월 6일 중추원 참의 박중양과 교풍회 대구지부 회장 윤필오 등이 중심이 되어 자제단을 조직하였다.[3]
1919년 4월 6일, 중추원 참의 박중양과 교풍회 대구지부 회장 윤필오 등에 의해 자제단이 조직되었다. 3·1 만세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폭력적인 양상을 보이자, 박중양은 대구에서 자제단을 조직하여 시위 참여자를 설득하고 귀가시키려 하였다.
자제단은 대한제국 시절 의병 활동을 억제하기 위해 조직되었던 자위단[5]의 경험을 참고하여 만들어졌다.[6] 자제단은 조선총독부가 직접 개입하지 않는 주민자치적인 성격을 띠었으며, 자제단, 자제회 외에도 자위단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3.1 운동 당시 시위대에 대응하기 위해 도열해 있는 일본 군경의 모습을 담은 이미지는 다음과 같다.
3. 결성 및 조직
'자제단 발기인회'가 조직될 때 박중양은 자제단 본부의 단장이 되었고, 대구 자제단 본부장도 겸임하였다. 지역에 따라서는 자제단 또는 전북 자성회, 전남 자성회, 경성 자성회 등 자성회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였으나 목적은 동일하였다. 이들은 관료, 친일파 정치인, 지식인, 일본과 독일 등지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유학생, 민중 계몽론자, 현실주의자 등 친일 협력자와 그밖에 자유주의자, 탈민족주의자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회원은 순수 조선인이었다. 이들은 “독립운동을 자제하자”며 스스로 자제단이란 단체를 꾸렸다.[4] 이들은 폭력 시위와 유언비어에 반대하였다.
자제단은 대한제국 시절 의병을 토벌 또는 설득하기 위해 조직되었던 자위단[5]의 경험에서 착안되었다.[6] 자제단은 관이 직접 개입하지 않는 주민자치적 성격이 강하였다. 자제단, 자제회라는 이름 외에도 자위단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자제단의 임무는 주로 독립운동 참여자에 대한 체포나 첩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6] 친조선총독부 성향의 관료 외에도 개화, 개혁론을 주장하던 지식인, 민중 계몽론자 등이 주로 참여하여 활동했다. 그러나 머슴이나 소작인들도 가입했다. 지주들이 머슴이나 소작인을 강제로 가입시키고 지주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억제토록 하기도 하였다.[6]
박중양은 유언비어와 선동에 속지 말고, 무력 시위를 자제할 것이며 불온한 행위를 하는 사람을 발견하면 가족, 친척이라 하더라도 곧바로 경찰관헌에 보고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이후, 당시 현직 경북도청 참여관이던 신석린이 주동이 되어 안동, 성주, 군위, 영일, 김천, 문경 등지에 자제단 지부가 조직되었다.
1919년 4월부터 12월까지 전국적으로 조직이 확대되었으며 만세 운동의 여파가 사라진 1919년 10월부터 서서히 자체해산에 들어갔다.박중양 신석린 권중익 서경순 김승훈 김자현 서병조 장상철 양자익 김병제 배상직 이영석 임병대 한세동 이호연 김기필 최찬우 서철규 이의풍 주재덕 서상규 윤수용 마현국 백응훈 김홍조 김병련 박민영 김재열 손한룡 한경원 서병원 하영조 정해진 문영규 이병학 김경추 김성하 이장우 정해붕 이종국 김진옥 신원오 이경재 김영배 정호기 정희모 한익동 정익조 엄주상 이효철 백재견 허근 최덕겸 김치홍 최처은 유성삼 정봉래 최세진 김영두 최만달 이용덕 이길우 정희봉 이일우 이영면 윤필오 정재학
3. 1. 대구 자제단
1919년 4월 6일 박중양 등 대구 지역 관료, 지역 유지, 지식인 백여 명이 대구부청 앞에서 대구 자제단을 조직하였다. 박중양은 대구 자제단 조직 성명서에서 자제단 결성 취지에 대해 "경거망동으로 인하여 국민의 품위를 손상케 하는 일이 없도록 상호 자제케 함"을 목적으로 하며, "소요(3.1 만세 운동)를 진압하고 불령한 무리를 배제"하는 것임을 천명하였다.[1]
같은 날 결성된 대구 자제단의 규약 제3조에는 만세 시위에 부화뇌동하지 않도록 부민(府民)을 굳게 타이르고, '만일 불온한 행위를 감행하는 자를 발견하였을 때에는 당장 경무 관헌에 보고하여야 한다'고 규정했다.[1] 박중양은 같은 날 경성부로 올라가 자제단 경성지부를 조직하였다.[1]
3.1 만세 운동이 확산되면서 전국적으로 자제단 조직이 확산되었다. 이 중 대구부 등에서는 부, 군 지부 외에 읍면 지부 조직, 그 아래 동, 리별 조직까지 결성될 만큼 활발하게 활동하였다.[1]
3. 2. 전국 조직 확산
1919년 4월 6일 발기인 80여 명으로 대구와 경성에서 처음 만들어진 자제단은 같은 해 7월까지 충청북도(충북)·전라북도(전북)·울산·수원 등 전국으로 확대, 지부가 조직되었다.[4] 대구 자제단의 규약에는 '본 단원은 부민 집집마다 경거망동하지 않도록 굳게 타이르고, 만약 불온한 행위를 하는 자를 발견했을 때는 당장 경무관헌에 보고해야 한다'고 정해 시위 이탈을 조장하고, 항일 운동과 유언비어, 감정적 시위의 확대를 막으려 했다.
자제단은 4월 6일 대구부와 경성부를 시작으로, 경기도 양주군과 광주군에 지부가 개설되었다. 4월 15일에는 청주, 4월 16일에는 안동군 등 경상북도 9개 군, 4월 18일에는 평안북도 정주군과 의주군, 4월 21일 경상북도 청도군, 4월 25일에는 황해남도 재령군, 4월 28일 울산군 등에도 조직되었다. 5월 14일 연백군, 5월 21일 전주군, 완주군, 진주군, 군산부 등 15개 군에 개설되었다.
1919년 5월에는 경상남도에도 부산, 밀양, 창원, 사천, 통영 등지에 자제단이 구성되었으며, 6월에는 충주, 천안, 아산, 제천, 연기군, 청주 등지에 지부가 결성되었다. 6월 2일 자제단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지회, 6월 27일 옥천군 옥천면에서 정석용에 의해 옥천 자제단이 조직되었다. 이러한 자제단은 민간인에 의한 자치 조직으로 움직였다.
수원군에서는 자제단의 활동이 활발하게 되면서 7월 2일에는 수원군의 송산면, 서신면, 우정면 등 각 면 지회가 추가로 개설되었다. 이어 평택군에도 자제단 지부가 조직되었다. 한편 이완용, 송병준 등 일부 친일파 정치인도 참여 의사를 밝혔지만 박중양은 이들의 참여가 오히려 불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며, 3.1 운동 진압에 도움이 안된다며 거절하였다.
4. 주요 활동
1919년 4월 6일 박중양 등 대구 지역 관료, 지역 유지, 지식인 백여 명이 대구부청 앞에서 자제단을 조직하였다. 3.1 만세 운동이 확산되면서 전국적으로 조직이 확대되었는데, 수원군, 연기군, 경주군, 대구부 등에서는 읍면 지부 아래 동, 리별 조직까지 결성될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자제단은 3ㆍ1운동 참가자들을 설득하고, 해산시키거나 귀가시키는 활동을 주로 하였다. 만세 시위 참여자를 검거하고 관련 정보를 수집하여 일본 경찰에 제공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이들은 시위대에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설득하거나, 마이크와 녹음 방송 등을 통해 홍보 활동을 하여 시위대와의 물리적 충돌은 거의 없었다. 일부 지주들도 자제단에 참여하여 반일 시위를 막거나 해산을 권고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자제단은 단원들에게 밀고 의무를 부과하였다. 자제단원들은 전국을 돌며 3·1 만세 운동을 자제할 것을 촉구하고, 일본 경찰을 대신해 만세 시위를 진압하거나 시위 참여자를 설득하여 귀가시켰다. 설득에 불응하거나 귀가, 해산을 거부하는 경우 지부장과 본부에 연락하고, 경찰서나 부청, 군청 등에 신고하도록 하였다.
자제단은 1919년 12월까지 3.1 운동 참가자들에게 무력 시위를 자제하고 귀가할 것을 설득하거나, 만세 운동을 해산시키는 활동을 지속했다. 이에 불응하는 사람들은 지부와 본부에 보고되어 총독부 경찰에 신고되었다.[8]
4. 1. 대민 설득 활동
1919년 4월 6일 박중양은 자제단 결성 취지에 대해 '경거망동으로 인하여 국민의 품위를 손상케 하는 일이 없도록 상호 자제케 함'을 목적으로 한다면서, '소요(3.1 만세 운동)를 진압하고 불령한 무리를 배제'하는 것임을 천명하였다. 자제단은 '경거망동 자제', '국민 품위' 등의 명분을 내세워 시위 참여 자제를 촉구했다.[8] 박중양은 유언비어와 선동에 속지 말고, 무력 시위를 자제할 것이며 불온한 행위를 하는 사람을 발견하면 가족, 친척이라 하더라도 곧바로 경찰 관헌에 보고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대구 자제단의 규약을 보면, '본 단원은 부민 집집마다에 대해 경거망동에 가담하지 말도록 굳게 타이르고, 만약 불온한 행위를 감히 하는 자를 발견했을 때는 당장 경무관헌에 보고해야 한다'고 정해 시위 이탈을 조장하고, 항일 운동과 유언비어, 감정적 시위의 확대를 막으려 했다. 자제단은 거의 예외 없이 단원에게 밀고의 의무를 부과하였다.
자제단은 3ㆍ1운동 참가자를 만류, 해산, 설득하고 귀가시키는 활동을 하였다. 그 밖에 만세 시위 참여자에 대한 검거, 첩보 및 대민 설득을 통해 민중을 만세운동에서 격리시키려는 것이 목적이었다.[8] 이들은 시위대에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설득, 혹은 마이크와 녹음 방송 등을 통한 홍보 활동을 하여 시위대와 물리적인 충돌은 극히 드물었다.
자제단원들은 전국 각지에서 해당 지역을 돌며 3·1 만세 운동을 자제할 것을 촉구하거나 일본 경찰 대신 만세 소요를 진압, 시위 참여자를 설득, 귀가시켰다. 설득을 거부하거나 귀가, 해산을 불응하는 지역, 주민, 단체에 대해서는 지부장과 본부에 연락하고, 각 예하 경찰서나 부청, 군청 등에 신고하게 했다.
일부 지주들도 자제단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 지주들은 자신이 거느린 머슴이나 소작인들을 자제단 조직원으로 가입시킨 뒤 이들을 통해 만세시위 장소를 적발하거나 만류하게 했다. 자제단은 이들 지주들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반일 시위를 막거나 해산을 권고하게 하였다.
4. 2. 시위 진압 및 정보 제공
1919년 4월 6일 결성된 대구자제단의 규약 제3조에는 만세에 부화뇌동하지 않도록 부민(府民)을 굳게 타이르고, '만일 불온한 행위를 감행하는 자를 발견하였을 때에는 당장 경무 관헌에 보고하여야 한다.'고 규정했다.[7] 자제단은 3ㆍ1운동 참가자를 만류, 해산, 설득하고 귀가시키는 활동을 했다. 그 밖에도 만세 시위 참여자를 검거하고 첩보를 수집하며, 대민 설득을 통해 민중을 만세운동에서 격리시키려는 목적을 가졌다.[8]자제단은 단원에게 밀고의 의무를 부과하였다. 자제단원들은 전국 각지에서 해당 지역을 돌며 3·1 만세 운동을 자제할 것을 촉구하거나 일본 경찰 대신 만세 소요를 진압하고, 시위 참여자를 설득하여 귀가시켰다. 설득을 거부하거나 귀가, 해산을 거부하는 지역 주민, 단체에 대해서는 지부장과 본부에 연락하고, 각 예하 경찰서나 부청, 군청 등에 신고하게 했다.
자제단은 1919년 12월까지 각지에서 3.1 운동 참가자들에게 무력 시위를 자제하고 집으로 돌아갈 것을 설득, 호소하거나 만세 운동을 해산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에 불응하는 자는 지부와 본부에 보고하여 총독부 경찰에 신고하였다.
4. 3. 밀고 의무 부과
1919년 4월 6일 대구 자제단 규약 제3조에는 부민(府民)에게 만세 시위에 부화뇌동하지 말도록 타이르고, '불온한 행위를 하는 자를 발견하면 가족, 친척이라도 곧바로 경무 관헌에 보고해야 한다'고 되어 있었다.[7] 박중양은 유언비어와 선동에 속지 말고, 무력 시위를 자제할 것을 호소하였다.자제단은 단원에게 밀고 의무를 부과하였다. 자제단원들은 전국 각지에서 3·1 만세 운동을 자제할 것을 촉구하거나 일본 경찰 대신 만세 시위를 진압하고, 시위 참여자를 설득하여 귀가시켰다. 설득을 거부하거나 귀가, 해산을 거부하는 자는 지부장과 본부에 연락하고, 각 경찰서나 부청, 군청 등에 신고하게 했다.[8]
5. 참여 인물
3·1 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폭력의 조짐이 보이자 1919년 4월 6일 대구에서 중추원 참의 박중양과 교풍회 대구지부 회장 윤필오 등에 의해 자제단이 조직되었다.
박중양은 자제단 본부의 단장이자 대구 자제단 본부장을 겸임하였다. 지역에 따라서는 자제단 또는 전북 자성회, 전남 자성회, 경성 자성회 등 자성회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였으나 목적은 동일하였다.
박중양 서한에 동봉한 대구 자제단의 취의서·규약·발기인 명부에 따르면 발기인은 총 67명이었다.[3] 대구 지역 발기인 전체 67인은 다음과 같다.
참여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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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양, 신석린, 권중익, 서경순, 김승훈, 김자현, 서병조, 장상철, 양자익, 김병제, 배상직, 이영석, 임병대, 한세동, 이호연, 김기필, 최찬우, 서철규, 이의풍, 주재덕, 서상규, 윤수용, 마현국, 백응훈, 김홍조, 김병련, 박민영, 김재열, 손한룡, 한경원, 서병원, 하영조, 정해진, 문영규, 이병학, 김경추, 김성하, 이장우, 정해붕, 이종국, 김진옥, 신원오, 이경재, 김영배, 정호기, 정희모, 한익동, 정익조, 엄주상, 이효철, 백재견, 허근, 최덕겸, 김치홍, 최처은, 유성삼, 정봉래, 최세진, 김영두, 최만달, 이용덕, 이길우, 정희봉, 이일우, 이영면, 윤필오, 정재학 |
자제단은 친조선총독부 성향의 관료, 친일파 정치인, 개화 및 개혁론을 주장하던 지식인, 일본과 독일 등지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유학생, 민중 계몽론자, 현실주의자, 자유주의자, 탈민족주의자 등 다양한 성향의 조선인들로 구성되었다.[4] 이들은 “독립운동을 자제하자”며 스스로 자제단이란 단체를 꾸렸고,[4] 폭력 시위와 유언비어에 반대하였다.
자제단은 대한제국 시절 의병을 토벌 또는 설득하기 위해 조직되었던 자위단[5]의 경험에서 착안되었으며,[6] 관이 직접 개입하지 않는 주민자치적 성격이 강하였다. 자제단, 자제회라는 이름 외에도 자위단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주요 임무는 독립운동 참여자를 체포하거나 관련 첩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6] 지주들은 머슴이나 소작인을 강제로 자제단에 가입시켜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억제하기도 했다.[6]
5. 1. 주요 인물
- 박중양: 자제단 단장 겸 대구지부장을 맡았다. 유언비어와 선동에 속지 말고, 무력 시위를 자제하며, 불온한 행위를 하는 사람을 발견하면 가족, 친척이라도 즉시 경찰에 보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7] 칠곡, 선산의 자제단 조직을 직접 주관하였다.
- 신석린: 경북도청 참여관으로, 안동, 성주, 군위, 영일, 김천, 문경 등지에 자제단 지부 조직을 주도했다.[7]
- 윤필오: 관변단체 대구교풍회 회장으로, 대구에서 자제단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경주 자제단을 조직했다. 경주에서 면장들을 모아 놓고 자제단 결성을 주도하는 등 세 확산에 앞장섰다.[4]
- 한익동: 자제단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다.[7]
- 기타 주도 인물: 김병태, 민영은, 박기순, 서병조, 윤석필, 이승칠, 이종국, 장상철, 정재학, 정해붕[4]
5. 2. 구성원 성향
3·1 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며 폭력적인 양상을 보이자, 1919년 4월 6일 박중양은 대구에서 자제단을 조직하였다. 자제단은 친조선총독부 성향의 관료, 친일파 정치인, 개화 및 개혁론을 주장하던 지식인, 일본과 독일 등지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유학생, 민중 계몽론자, 현실주의자, 자유주의자, 탈민족주의자 등 다양한 성향의 조선인들로 구성되었다.[4]자제단의 주된 임무는 독립운동 참여자를 체포하거나 관련 첩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6] 지주들은 머슴이나 소작인을 강제로 자제단에 가입시켜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억제하기도 했다.[6]
5. 3. 지주 계층의 역할
지주들은 머슴이나 소작인들을 자제단에 강제로 가입시켜, 이들을 통해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감시하고 억제하도록 하였다.[6] 이는 지주 계층이 자제단을 통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3·1 만세 운동으로 대표되는 민족 운동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였다.6. 비판 및 논란
자제단은 3·1 운동을 조직적으로 와해시키려 한 대표적인 친일 단체로 평가받으며,[10][11] 민족문제연구소 등은 "가장 반민족적인 친일단체"로 규정하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자제단 조직 과정에서 강제 동원이 이루어지거나, 성과 올리기에 급급하여 오히려 민중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6. 1. 친일 행적
1919년 4월 6일 중추원 참의 박중양 등에 의해 조직된 자제단은 3·1 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폭력 시위와 유언비어에 반대하며, 독립운동 참여자에 대한 체포나 첩보를 수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6]자제단은 대한제국 시절 의병을 토벌 또는 설득하기 위해 조직되었던 자위단의 경험에서 착안되었으며,[5] 관이 직접 개입하지 않는 주민자치적 성격이 강하였다.[6] 자제단, 자제회라는 이름 외에도 자위단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박중양은 자제단 본부를 구성하고 단장이 되었고, 대구 자제단 본부장도 겸임하였다. 지역에 따라서는 자제단 또는 전북 자성회, 전남 자성회, 경성 자성회 등 자성회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였으나 목적은 동일하였다. 이들은 관료, 친일파 정치인, 지식인, 일본과 독일 등지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유학생, 민중 계몽론자, 현실주의자 등 친일 협력자와 그밖에 자유주의자, 탈민족주의자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회원은 순수 조선인이었다. 이들은 “독립운동을 자제하자”며 스스로 자제단이란 단체를 꾸렸다.[4]
1919년 4월부터 12월까지 전국적으로 조직이 확대되었으며 만세 운동의 여파가 사라진 1919년 10월부터 서서히 자체해산에 들어갔다.
자제단은 친일 성향의 조선인들이 직접 결성하여 움직인 단체였다. 자제단과 박중양 등 자제단 간부들은 3.1 만세 운동을 진압하고 폭력사태로 확산을 막은 공로로 조선총독부로부터 훈3등 서보장을 각각 수여받았다.[10]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총독부에 협조한 셈이 되어 민중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11]
6. 2. 강제 동원 및 부작용
박은식에 따르면, 평양의 일본 관리들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백성들을 위협하여 자위단 혹은 자제단이라는 조직을 만들게 했다.[9] 일본 형사들은 매질로 강제 입단시킨 후, 단규를 어기면 처벌했다는 기록도 있다.[6] 이처럼 일부 지역 자제단은 성과를 올리는 데 급급하여 오히려 민중의 반감을 샀다.6. 3. 역사적 평가
자제단은 3·1 운동을 조직적으로 와해시키려 한 대표적인 친일 단체로 평가받는다.[10][11] 민족문제연구소 등은 자제단을 "가장 반민족적인 친일단체"로 규정하고 있다.7. 해산 및 이후
1919년 3·1 운동의 여파가 사라진 1919년 10월부터 서서히 자체 해산에 들어갔다. 자제단 참여 인사들은 이후에도 친일 행적을 지속했으며, 박중양 등 일부는 조선총독부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7. 1. 참여 인사들의 이후 행적
자제단은 친일 성향의 조선인들이 직접 결성하여 움직인 단체였다. 자제단과 박중양 등 자제단 간부들은 3.1 만세 운동을 진압하고 폭력 사태로 확산을 막은 공로로 조선총독부로부터 훈3등 서보장을 각각 수여받았다.[10] 박중양은 이같은 공으로 1945년 일본 천황이 선임하는 일본 귀족원 칙선의원에 올랐다.[10]이는 결과적으로 조선총독부에 협조한 셈이 되어 민중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11]
8. 기타
지역에 따라 '자성회'(自省會)라고도 불렀으나, 자제단과 목적은 비슷하였다.[4] 한편 만세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자제단을 조직한 박중양은 각처로부터 협박, 살해 통보를 받기도 했다.[4]
참조
[1]
뉴스
친일중의 친일 ‘3·1운동 자제단’은 누구?
http://www.hani.co.k[...]
The Hangeorye
2010-03-01
[2]
웹사이트
Refrain club
http://www.cultureco[...]
[3]
서적
구한말 의 민족 운동
국학자료원
2000
[4]
뉴스
친일중의 친일 ‘3·1운동 자제단’은 누구?
http://www.hani.co.k[...]
한겨레신문
2010-03-01
[5]
문서
[6]
서적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소명출판
2008
[7]
뉴스
'신문도시' 대구, 일제강점기에도 4,5개 매체 발행
http://www.imaeil.co[...]
대구매일신문
2011-07-11
[8]
웹사이트
자제단
https://terms.naver.[...]
[9]
서적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소명출판
2008
[10]
서적
영남을 알면 한국사가 보인다
푸른역사
2005
[11]
서적
한국사 이야기 20:우리 힘으로 나라를 찾겠다
한길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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