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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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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심훈은 대한제국 시기인 1901년에 태어나 1936년에 사망한 한국의 소설가, 시인, 영화 각본가이다. 3·1 운동 참여로 투옥되고 학교에서 퇴학당한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귀국 후에는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소설 《상록수》를 발표했고,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작품은 민족의 현실을 반영하며, 항일 정신과 농촌 계몽 운동을 다루었다. 사후에는 문학상 제정, 기념관 건립, 기념 메달 발행 등 다양한 기념 사업이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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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해풍 심훈
이름심훈
본명심대섭
다른 이름심삼준, 심삼보
아호해풍
한자 이름沈熏
한자 본명沈大燮
로마자 표기Sim Hun
로마자 본명Sim Daeseop
출생일1901년 10월 23일
출생지대한제국 경기도 과천군 하북면 흑석리
사망일1936년 9월 16일
사망지일제강점기 경성부
국적대한제국
본관청송
종교유교 → 개신교 (감리회)
활동 기간1924년 ~ 1936년
가족 관계
아버지심상정
어머니해평 윤씨
배우자안정옥(재혼), 이해영(전처, 이혼)
자녀심재건(장남), 심재광(차남), 심재호(삼남)
형제심우섭(첫째형), 심명섭(둘째형), 심원섭(여동생)
친척윤현영(외조부), 윤극영(외사촌), 심재영(장조카), 심천보(손자)
학력
대학중화민국 장쑤 성 상하이 세인트 존스 대학교 철학과 중퇴
중화민국 국민정부 본토 시대 저장 성 항저우 저장 대학교 극문학과 중퇴
직업 및 활동
직업독립운동가
소설가
시인
언론인
배우
영화 감독
시나리오 각본가
번역 문학 작가
경력조선중앙일보 학예부 부장
언어한국어, 영어, 중어, 일어
장르소설, 시문학, 영화 각본
수상 및 훈장
수상200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2. 생애

1901년 10월 23일(음력 9월 12일) 대한제국 경기도 과천군 하북면 흑석리(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의 양반 지주 집안에서 아버지 심상정(沈相珽)과 어머니 해평 윤씨 사이의 3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11][3] 그의 집안은 여러 대에 걸쳐 고위 관직을 지내고 왕실에 봉사한 명문가였으나, 두 형(심우섭, 심명섭)은 친일파로 활동하는 등 '친일적 시류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다.[12]

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2] 4학년이던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여 3월 5일 남대문 학생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8개월(다른 자료에서는 6개월) 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으며, 학교에서도 퇴학당했다.[12][2] 이는 친일적인 집안 분위기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12] 투옥 중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국의 자유를 위해 싸우겠다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3]

출옥 후 1920년 겨울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하이, 난징 등을 거쳐 항저우의 저장 대학 극문과(劇文科)에 입학하여 공부했으나 중퇴했다.[3] 망명 시기 이동녕, 이시영, 김구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교류하였다.

1923년 귀국하여 안석주, 최승일, 이경손 등과 함께 연극 연구 단체인 "극문회"를 조직하며 문예 활동을 시작했다. 1924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기자로 활동하며 번역 소설 "미인의 한"을 연재하여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영화계에도 관심을 보여 첫 영화 원작 소설 「가면무도회」를 동아일보에 연재하기도 했다. 한편, 1917년 왕족 이해승의 누이 이해영과 정략결혼했으나 1924년 이혼했다.[4]

1926년 언론인 항일 단체인 철필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동아일보에서 퇴사했다. 이후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의 닛카츠촬영소에서 영화 연출을 공부하고 귀국하여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직접 각본, 감독하여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1928년 조선일보에 입사했으며, 같은 해 12월 14일 음악 및 연극 활동을 하던 안정옥(安定玉, 1913-2004)과 재혼하여 슬하에 3남(재건, 재광, 재호)을 두었다.[4]

1930년대 들어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조선일보에 연재하던 소설 《동방의 애인》, 《불사조》 등이 검열로 중단되고, 시집 출간이 거부되는 등 창작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다. 1931년 조선일보를 퇴사하고 잠시 경성방송국에 근무하다 그만둔 뒤, 경제적 어려움과 일제의 감시를 피해 1932년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현 당진시 송악읍 부곡리)로 이주했다. 1933년 잠시 조선중앙일보에서 근무했으나 곧 당진으로 돌아와 창작에 전념했다. 1934년 직접 설계한 집 "필경사"를 짓고 이곳에서 대표작 《상록수》를 집필했다.

1935년상록수》가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 소설 공모에 당선되었다. 그는 상금 일부로 농촌 계몽 운동을 위한 야학 "상록학원"을 설립했다. 《상록수》의 영화화를 직접 추진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이후 소설 단행본 출간을 위해 개작하던 중 1936년 여름 장티푸스에 걸려 투병하다 같은 해 9월 16일 오전 8시, 경성부에서 3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 유해는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신봉리(현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에 안장되었다.

2. 1. 언론 및 문학 활동

1923년 중국에서 돌아온 심훈은 안석주, 최승일, 이경손 등과 함께 연극 및 문학 단체인 "극문회"에 참여하며 본격적인 문화 활동을 시작했다. 이듬해 1924년에는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입사하여 언론 활동에 뛰어들었다. 동아일보에 번역소설 "미인의 한"을 연재하며 이름을 알렸고, 1926년에는 소설 《탈회》와 첫 영화 원작 소설인 「가면무도회」를 연재했다. 같은 해 발표한 소설 《탈춤》은 영화로 만들어진 최초의 한국 소설이 되었다.[4] 그러나 언론 운동 단체 철필 구락부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는 철필 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동아일보에서 해직되는 아픔을 겪었다.[12] 1926년 순종이 서거하자, 시대일보에 '통곡 속에서'라는 제목의 시를 발표하여 민족의 슬픔을 대변하고 6·10 만세운동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데 기여했다.[12][13]

1927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의 닛카츠촬영소에서 무라타 미노루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영화 연출을 공부했다. 귀국 후 식민지 현실을 고발하는 영화 《먼동이 틀 때》의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각색, 감독하여 단성사에서 상영했으며, 「야명곡」을 원작으로 각색, 연출하여 영화를 개봉하기도 했다.

1928년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언론 및 문학 활동을 이어갔으나, 1930년대 들어 일제의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조선일보에 연재하던 소설 《동방의 애인》(1930)과 《불사조》는 일제의 검열과 압력으로 중단되는 수난을 겪었다.[12] 1930년에는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을 기리고 조국 독립의 염원을 담은 시 《그날이 오면》을 썼다. 이 시는 원래 시집으로 발간될 예정이었으나 일제의 검열로 인해 출판이 거절당했고, 해방 후인 1949년에야 빛을 볼 수 있었다.[3][12] 1933년 발표하려던 시집 역시 절반 이상이 검열로 삭제되는 등 창작 활동에 큰 제약을 받았다.

경제적 어려움과 일제의 감시를 피해 1932년 충청남도 당진군으로 이주한 심훈은 그곳에서 창작 활동에 몰두했다. 1933년 잠시 조선중앙일보에 입사했으나 곧 당진으로 돌아왔고, 1934년에는 이 신문에 첫 부인 이해영의 삶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소설 《직녀성》을 연재했다.[4] 1935년, 동아일보브나로드 운동의 일환으로 창간 15주년을 맞아 농촌 계몽을 주제로 한 장편 소설을 공모하자, 당진에서의 경험과 장조카 심재영의 야학 및 공동경작회 활동을 바탕으로 소설 《상록수》를 집필하여 당선되었다.[12][14] 《상록수》는 농촌 계몽 운동의 이상과 현실을 생생하게 그려낸 작품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심훈은 당선 상금의 일부로 농촌 학생 교육을 위한 상록학원을 설립하여 교육 운동에도 힘썼다. 그는 《상록수》를 직접 영화화하려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단행본 출간을 위해 《상록수》를 개작하던 중 1936년 장티푸스에 걸려 3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수가 우승하자 감격하여 쓴 시 "조선의 아들"이었다.

심훈은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소설, 시, 희곡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긴 다작 작가였다. 그의 작품들은 일제 강점기 조선의 암울한 현실과 독립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상록수》와 《그날이 오면》은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자신의 원고를 꼼꼼히 보관하여, 약 4,000페이지에 달하는 원고 대부분이 오늘날까지 남아 전해지고 있다.[4] 사후 그의 작품들은 《심훈 전집》 등의 형태로 여러 차례 출간되었다.

2. 2. 사회주의 문학 활동

1922년 고향인 조선에 돌아온 후, 나중에 카프로 통합되는 염군사에서 활동했고, 1925년에 카프에 가입하였다.[15]

2. 3. 《상록수》와 농촌 계몽 운동

1930년대 들어 일제강점기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심훈은 창작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다. 조선일보에 연재하던 소설 「동방의 애인」과 「불사조」가 조선총독부의 검열로 중단되었고, 1933년 발간하려던 시집 역시 절반 이상이 삭제되는 수난을 겪었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던 심훈은 경성을 떠나 충청남도 당진군으로 이주하여 창작 활동에 몰두했다.[12]

1932년, 심훈은 당진에 직접 설계하고 건축한 집 '필경사'를 마련했다. 그는 이곳에서 《상록수》를 비롯한 주요 작품 대부분을 집필했다. 현재 필경사는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보존 및 관리되고 있으며, 옆에는 심훈 기념관이 있다.

1935년, 동아일보브나로드 운동(농촌 계몽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면서 창간 15주년을 기념하여 농촌과 어촌을 배경으로 한 장편 소설을 공모했다. 심훈은 당진에서의 경험과 장조카 심재영(沈載英)의 야학 운동 및 공동경작회 활동을 소재로 삼아 장편 소설 《상록수》를 집필하여 공모전에 응모했고, 당선되었다.[12][14] 《상록수》는 농촌 계몽 운동의 이상과 현실을 생생하게 그려낸 작품으로 평가된다.

심훈은 당선 상금의 일부를 사용하여 농촌 학생들의 교육을 위한 상록학원을 설립했다. 상록학원은 이후 상록국민학교의 모태가 되어 농촌 교육 발전에 기여했다.[12] 심훈은 《상록수》를 직접 영화로 만들고자 각색과 배역 선정까지 마쳤으나, 일제의 방해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염원은 훗날 신상옥 감독이 최은희, 허장강 등을 캐스팅하여 [https://www.kmdb.or.kr/db/kor/detail/movie/K/00674/own/videoData 영화]로 제작하면서 실현되었다.

《상록수》 단행본 출간을 위해 집필에 몰두하던 심훈은 1936년 장티푸스에 걸려 투병하다 같은 해 9월 16일 사망했다.[12]

2. 4. 죽음과 사후

1935년 《상록수》가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현상 공모에 당선되자, 심훈은 상금 일부로 농촌 학생 교육을 위한 상록학원을 설립했다.[12][14] 그는 《상록수》를 직접 영화화하려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무산되었다.[12] 이후 단행본 출간을 위해 집필에 몰두하던 중 장티푸스에 걸려 1936년 9월 16일 오전 8시, 3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 유해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당시 용인군 목동면 신봉리)에 안장되었다.

심훈의 사후에도 그의 문학적, 사회적 영향력은 이어졌다. 일제 강점기 검열로 출판되지 못했던 시집 《그날이 오면》은 광복 후인 1949년에 출간되었다. 이후 1952년에는 《심훈집》 7권이, 1996년에는 《심훈 전집》 3권이 출간되었다. 반면,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소설 《동방의 애인》과 《불사조》는 일제의 검열로 중단되어 미완성 작품으로 남았다.

그의 모교인 경기고등학교는 2005년 7월 심훈에게 명예 졸업장을 추서했다.[2] 2013년 7월 16일에는 장손 심천보 씨가 심훈 관련 유품 등 가문 유물 414점을 충청남도 당진시에 기증했으며, 당진시는 이를 바탕으로 2014년 3월 심훈기념관을 개관했다.[16]

심훈을 기리는 활동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 심훈상록문화제: 1977년 충청남도 당진에서 시작된 복합문화예술 행사로, (사)심훈상록문화제 집행위원회가 주관하고 당진시가 후원하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공식 웹사이트 (보존됨)
  • 심훈문학상: 1997년 (사)심훈선생기념사업회와 계간 아시아가 공동으로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다. 2015년에는 기성 작가를 대상으로 하는 심훈문학대상이 추가로 제정되었다.
  • 기념 메달: 2011년 한국조폐공사는 '한국의 인물 100인 시리즈' 메달 중 하나로 심훈 기념 메달을 발행했다.


심훈은 항일 운동과 상록수 운동을 통한 사회 참여, 뛰어난 문학적 업적, 그리고 식민지 현실 극복과 자유로운 미래를 향한 열망을 보여준 삶으로 인해 한국 근대 문학의 중요한 작가로 평가받는다.[3]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널리 읽히고 있다. 셋째 아들 심재호 씨는 미국에 거주하며 다수의 원고를 소장하고 있으며, 2010년 당진에서 열린 전시에 이를 대여하기도 했다.[5]

3. 작품 세계

심훈은 소설, 시, 희곡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작품 활동을 한 작가였다. 그는 자신의 원고를 꼼꼼하게 보관했으며, 상당수의 원고가 오늘날까지 전해진다.[4]

1924년 중국에서 돌아와 동아일보 기자가 된 심훈은 1926년 소설 《탈회》를 연재했으나, 철필 구락부 사건으로 해직되었다. 같은 해 순종 서거 후에는 시대일보에 시 '통곡 속에서'를 발표하며 6·10 만세운동과 같은 민족적 저항의 분위기를 예감했다.[12][13] 그의 1926년 소설 《탈춤》은 영화화된 최초의 한국 소설로 알려졌으나[4], 1925년 김춘광의 《효녀 심청전》이 최초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26]

1927년 일본 유학 후에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다룬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직접 집필, 각색, 감독하여 단성사에서 상영했다.[12] 이후 조선일보에 소설 '동방', '불사조' 등을 연재했으나 일제의 검열로 중단되기도 했다. 1930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을 기념하여 쓴 시집 《그날이 오면》은 조국 독립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으며, 3·1 운동 기념일에 발표되었으나[3] 일제의 검열로 생전에는 출판되지 못하고 1949년에야 출간되었다.[12]

1935년 동아일보브나로드 운동 및 창간 15주년 기념 소설 공모에 참여하기 위해 충청남도 당진에 머물며 장편 소설 《상록수》를 집필하여 당선되었다. 이 작품은 조카 심재영의 야학 운동 등 당시 농촌 계몽 운동을 소재로 삼았다.[12][14][4][5] 심훈은 당선 상금으로 상록학원을 설립해 농촌 교육에 기여했으며, 《상록수》를 영화화하려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었다.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것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을 기린 시 "조선의 아들"이다. 일제강점기 하에 일본 대표로 뛰어야 했던 손기정 선수의 승리를 축하하는 마음을 담아 특별호 사본에 직접 적었다.

심훈의 작품들은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 현실 속에서 민족의 아픔과 저항 정신,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담아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3. 1. 작품 목록

심훈은 여러 편의 소설, 시, 희곡 등을 남긴 다작 작가였다. 그는 자신의 원고를 꼼꼼하게 보관했으며, 약 페이지에 달하는 원고 대부분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4]

=== 소설 ===

작품명연도비고
동방의 애인1930조선일보 연재 시작[4], 미완
불사조1930조선일보 연재, 일제의 게재 중지 조치로 중단, 미완[12]
영원의 미소19331987년 KBS 1TV에서 드라마화됨
직녀성1934조선중앙일보 연재. 첫 아내 이혜영에게 헌정한 것으로 추정됨[4]
상록수1935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 소설 공모 당선작. 충청남도 당진에 머물며 브나로드 운동과 조카 심재영의 야학 운동 및 공동경작회 활동을 소재로 함.[12][14][4][5]
황공의 최후1936


  • 기남의 모험
  • 새벗
  • 오월의 비상
  • 뻐꾹새가 운다


=== 시 ===

작품명연도비고
통곡 속에서1926순종 서거 후 시대일보 게재. 6·10 만세운동을 예견함.[12][13]
그날이 오면1930광주 학생 항일 운동을 기념하여 쓴 시. 3·1 운동 기념일에 발표되었으며, 한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3] 1932년 시집으로 발간하려 했으나 일제의 검열로 출판되지 못하고 사후인 1949년에 출판됨.[12]
조선의 아들1936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딴 소식을 듣고 쓴 시. 당시 일제강점기 하에 있던 손기정은 일본 국기를 달고 뛰어야 했다. 심훈은 이 시를 손기정의 우승 소식을 알리는 특별호 사본에 적었다.



=== 시나리오 / 영화 ===

작품명연도비고
탈춤1926영화 소설. 영화로 각색된 최초의 한국 소설로 알려졌으나[4], 1925년 김춘광의 《효녀 심청전》이 최초라는 주장도 제기됨.[26]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영화 시나리오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먼동이 틀 때1927심훈이 직접 집필, 각색, 감독하여 단성사에서 상영한 영화.[12]



=== 번역 ===

작품명원작자연도비고
대지펄 S. 벅1936



=== 전집 ===

심훈의 작품을 모은 7권짜리 《심훈 전집》이 1952년에 출간되었고, 3권짜리 《심훈 전집》이 1996년에 재출간되었다.

4. 가족 관계 및 인간 관계

심훈은 1901년 10월 23일(음력 9월 12일), 지금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에서 태어났다.[11] 그의 집안은 대대로 고위 관직을 지낸 양반 가문이었으나, 당대에는 '친일적 시류에 순응하는 전통적인 양반 가문 출신의 중산지주 계급'으로 분류된다.[12][3] 아버지 심상정은 면장을 지냈고, 어머니 해평 윤씨는 주사 윤현영의 딸이다. 심훈은 3남 1녀 중 막내였다.[3] 그의 두 형 심우섭(언론인)과 심명섭(목사)은 친일파로 활동하여[12], 3·1운동에 참여하며 다른 길을 걷게 된 심훈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심훈의 첫 번째 부인은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은 이해승의 누이 이해영(李海映)이었으나, 이 결혼은 1924년 이혼으로 끝났다.[12][4] 이후 1930년, 음악극 단체에서 만난 안정옥(安貞玉)과 재혼하여 슬하에 장남 심재건, 차남 심재광, 삼남 심재호 등 3남을 두었다.[4]

'''심훈의 가족 관계'''
관계성명생몰년 및 기타 정보
고조부심능유증 이조참판
증조부심의붕(沈宜朋)동지돈녕부사
조부심정택(沈鼎澤)주사
조모광주 안씨도사 안기원의 딸
아버지심상정(沈相涏)면장
어머니해평 윤씨주사 윤현영의 딸
첫째 형심우섭(沈友燮)친일파[12], 언론인
형수 (심우섭 처)대구 서씨 서남순
진주 강씨 강도원
서상춘의 딸
강선흡의 딸
장조카심재영(沈載英)상록수》 집필 계기 관련 인물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논란이 있음[17][18][19]
둘째 형심명섭(沈明燮)친일파[12], 목사
형수 (심명섭 처)안동 권씨
안동 김씨 김복한
참서 권보상의 딸
여동생심원섭(沈元燮)기계인 유원식에게 출가
본인심훈
전처전주 이씨 이해영(李海映)(1917년 결혼, 1924년 이혼) 일제 후작 이해승의 누이
후처죽산 안씨 안정옥(安貞玉)(1930년 결혼)
장남심재건(沈載健)(1932년생) 안정옥 소생[4]
차남심재광(沈載光)(1934년생) 안정옥 소생[4]
삼남심재호(沈載昊)(1936년 ~ 2021년) 안정옥 소생[4][20], 미국 거주



심훈은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 폭넓은 인간관계를 맺었다. 아동문학가 방정환, 소설가 현진건 등과는 문우(文友)로서 교류했으며, 영화감독 윤봉춘, 나운규 등과는 예우(藝友) 관계를 형성했다.

경성고등보통학교 시절에는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이범석,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박헌영,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박열 등과 함께 공부했다. 특히 동요 《반달》의 작곡가 윤극영과는 내외종간(어머니 쪽 사촌)이면서 학교 동창이기도 했다.[21][22]

1919년 3·1운동 참여 후 중국으로 망명했을 때는 베이징에서 신채호, 이회영과 같은 저명한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며 민족의식과 독립 의지를 더욱 확고히 다졌다.[12] 또한 항저우 등지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요 인물인 이동녕, 이시영 등과도 교류하였다. 1923년 귀국한 뒤에는 안석주, 최승일 등과 함께 극예술 연구 단체인 "극문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5. 심훈에 대한 평가와 유산

1936년 서거 이후에도 심훈은 항일 운동과 상록수 운동을 통한 헌신, 뛰어난 예술적 재능과 왕성한 작품 활동, 그리고 식민지 현실 속에서 자유로운 미래를 향한 비전을 제시한 삶으로 인해 한국 근대 문학의 중요한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 대한민국 학생들의 필독서로 널리 읽히고 있다.

그의 문학적, 사회적 업적과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사후인 200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25] 그의 정신과 문학 세계를 기리기 위한 다양한 기념 사업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5. 1. 심훈 기념 사업

1949년에는 시집 《그 날이 오면》이, 1952년에는 《심훈집》 7권이, 그리고 1996년에는 《심훈 전집》 3권이 출간되었다. 그러나 조선일보에 연재하던 소설 《동방의 애인》과 《불사조》는 일본 제국의 검열로 인해 중단되어 미완성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심훈의 문학적, 사회적 업적을 기리기 위한 다양한 기념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 교육 및 학술: 2005년 7월, 심훈의 모교인 경기고등학교는 그의 업적을 기려 명예 졸업장을 추서했다.[2]
  • 기념관 및 유물 보존: 1932년 심훈이 직접 설계하고 건축한 충청남도 당진시의 자택 '필경사'(필경사|필경사한국어)는 그가 주요 작품 대부분을 집필한 장소이다. 현재 필경사는 충청남도의 역사 유적으로 지정되어 보존 및 관리되고 있다. 2013년 7월 16일, 심훈가의 장손 심천보 씨가 심훈 관련 유품 등 가문 유물 414점을 당진시에 기증한 것을 계기로[16], 2014년 3월 필경사 옆에 심훈기념관이 준공되었다. 정부는 향후 기념관 확장을 계획하고 있다. 미국 버지니아주에 거주하는 그의 셋째 아들 심재호 씨는 다수의 원고를 소장하고 있으며, 2010년 당진에서 열린 전시에 이를 대여하기도 했다.[5]
  • 문화 행사: 1977년 충청남도 당진군에서 시작된 [https://web.archive.org/web/20190724161724/http://www.djsangnok.org/ 심훈상록문화제]는 심훈을 기리는 복합문화예술 행사로, '(사)심훈상록문화제 집행위원회'가 충청남도 당진시의 후원을 받아 현재까지 그 정신을 이어오고 있다.
  • 문학상 제정: 1997년에는 심훈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심훈문학상이 제정되었다. 이 상은 당진의 '(사)심훈선생기념사업회'와 '계간 아시아'가 공동 주관하며 매년 수상자를 선정하고 있다. 2015년에는 기성 작가를 대상으로 문학 업적과 발전 공로를 치하하는 심훈문학대상이 추가로 제정되었다.
  • 기타 기념 사업: 2011년 한국조폐공사는 '한국 역사 인물 메달 시리즈'의 일환으로 심훈 기념 메달을 발행하여, 그를 한국의 주요 역사 인물 100명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1936년 서거 이후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심훈은 항일 운동과 상록수 운동을 통한 헌신적인 봉사, 뛰어난 예술적 재능, 왕성한 작품 활동, 그리고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자유로운 미래를 향한 비전을 제시한 삶으로 인해 오늘날 한국 근대 문학의 중요한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다. 그의 작품들은 현재 대한민국 학생들의 필독서로 널리 읽히고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The Real Person of the Novel, Sangnoksu Choi Yongsin https://web.archive.[...] 2015-06-07
[2] 웹사이트 ‘상록수’ 작가 심훈 경기고 명예졸업장 https://web.archive.[...] 2005-07-04
[3] 웹사이트 9월의독립운동가: 심훈 http://www.ksilbo.co[...] 2001-08-31
[4] 웹사이트 문화투쟁사 http://e-gonghun.mpv[...]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5] 웹사이트 심훈 선생 유품 200여 점『상록수』 쓴 생가로 돌아온다 http://article.joins[...] 2010-04-12
[6] 웹사이트 영원의 미소 / 심훈 http://encykorea.aks[...]
[7] Kotobank 沈薫
[8] 웹사이트 (38)청송 심씨(靑松沈氏)-212,717명 http://www.seoulecon[...] 2014-08-26
[9] 텍스트
[10] 텍스트
[11] text
[12] 서적 표석을 따라 경성을 거닐다 유씨북스 2016-11-30
[13] 웹사이트 네이버캐스트 - 독립운동가 심훈(沈熏) 항일 예술의 불꽃 https://terms.naver.[...]
[14] 웹사이트 네이버캐스트 - 독립운동가 심훈(沈熏) 항일 예술의 불꽃 https://terms.naver.[...]
[15] 서적 상록수 문학과 지성사
[16] 뉴스 심훈 기념관 문열었다 http://go.seoul.co.k[...] 서울신문 2014-09-17
[17] 웹사이트 네이버캐스트 - 독립운동가 심훈(沈熏) 항일 예술의 불꽃 https://terms.naver.[...]
[18] 서적 상록수 문학과 지성사
[19] 웹인용 <상록수> 주인공 박동혁 모델, 심재영 아니다? http://m.djtimes.co.[...] 2018-12-20
[20] 웹인용 충남연구원, 심재호가 쓴 '심훈을 찾아서' 발간 https://newsis.com/v[...] 뉴시스 2020-05-19
[21] 서적 국어국문학자료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22] 웹사이트 독립운동가 심훈(沈熏) 항일 예술의 불꽃 https://terms.naver.[...]
[23] Youtube 윤봉길 의사 종손 배우 윤주빈 '심훈 선생이 옥중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https://www.youtube.[...]
[24] 뉴스 윤봉길 의사 종손 배우 윤주빈, 3.1절 기념식서 심훈 선생 편지 낭독 https://news.naver.c[...]
[25] 웹사이트 독립운동가 심훈(沈熏) 항일 예술의 불꽃 https://terms.naver.[...]
[26] 뉴스 한국영화 100년사에서 제일 오래된 시나리오는? https://news.v.daum.[...] 2019-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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