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극신앙단
1. 개요
적극신앙단은 1932년 신흥우가 주도하여 결성된 기독교 신앙 운동 단체이다. 흥업구락부 내의 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 자본가 세력과 서양 선교사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순수한 신앙 운동을 추구하고자 결성했다. 감리교, 장로교 등 교파를 초월한 조선 개신교회 인사들이 참여했으며, 신앙의 자유와 사회운동 결합을 추구했다. 그러나 보수적인 서북 지역 교회의 반발과 이단 규정, 일제의 탄압 등으로 인해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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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설립된 종교 단체 -
유즈노사할린스크 지목구
유즈노사할린스크 지목구는 러시아 사할린주에 있는 로마 가톨릭교회 지목구이며, 1932년 자치 선교지로 설립되어 2002년 현재 명칭으로 변경되었고, 현재 이르쿠츠크 교구 주교가 교황 대리로 관리한다. -
일제강점기의 개신교 -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는 1901년 마포삼열이 평양에 설립한 한국 최초의 장로회 신학교로, 한국인 목회자 양성을 목표로 초기에는 평양연합신학교로 불리며 한국 개신교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강요로 폐교된 후 해방 이후 여러 신학교가 그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
일제강점기의 개신교 -
조선예수교장로회
조선예수교장로회는 1907년 독노회에서 시작하여 1912년 총회를 결성하며 교세를 확장한 한국 장로교의 중요한 교단이었으나,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고 종교 통제 정책에 따라 해산, 강제 개편되었다. -
장로교 -
대한민국에서의 칼뱅 연구
대한민국에서의 칼뱅 연구는 1884년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칼뱅이 소개된 후 평양신학교를 중심으로 전파되었으며, 1960년대 이후 한국 교회의 관심 증가와 더불어 활발한 연구와 저작 번역이 이루어져 1980년대 이후 전문 연구자 등장과 원저 번역을 통해 깊이를 더하며 한국 신학 발전에 기여하고 원전 연구, 서구 신학 평가, 칼뱅의 해석학 연구 등을 과제로 지속적인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
장로교 -
언약신학
언약신학은 창조, 타락, 구원, 종말에 걸쳐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언약(계약)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는 신학 체계로, 행위 언약, 속죄 언약, 은혜 언약 등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설명하며 개혁파 신학의 핵심 요소로 간주된다.
2. 배경
적극신앙단은 흥업구락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1925년 신흥우가 이승만과 논의하여 결성한 흥업구락부는 1930년대 들어서 내분 사태를 겪게 되었다. 흥업구락부는 기독교, 천도교, 유교, 자유주의자 등 다양한 세력이 참여하여, 흥업구락부 내 일부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들만의 모임을 결성해야 된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에 신흥우는 흥업구락부 내에 섞여 있던 비기독교 자본가 세력을 배제하고, 순수 기독교인 중심의 신앙운동을 추구하고자 적극신앙단을 결성하게 되었다. 또한 조선에 파견된 미국인, 영국인, 프랑스인 기독교선교사들의 조선인들에 대한 공공연한 무시와 멸시 역시 서양인 선교사들에 대항할 조직의 결성 목소리를 높였다.
2.1. 흥업구락부와의 관계
1925년 신흥우가 이승만과 논의하여 결성한 흥업구락부는 1930년대 들어서 내분 사태를 겪게 되었다. 이에 신흥우는 흥업구락부 내에 섞여 있던 비기독교 자본가 세력을 배제하고, 순수 기독교인 중심의 신앙운동을 추구하고자 적극신앙단을 결성하게 되었다.
흥업구락부에 기독교, 천도교, 유교, 자유주의자 등 다양한 세력이 참여하게 되자 흥업구락부 내 일부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들만의 모임을 결성해야 된다는 주장을 하였다. 신흥우는 흥업구락부 활동에 관여하면서도 기독교인들만의 독자적인 모임 조직을 구상하였다. 또한 조선에 파견된 미국인, 영국인, 프랑스인 기독교선교사들의 조선인들에 대한 공공연한 무시와 멸시 역시 서양인 선교사들에 대항할 조직 결성 목소리를 높였다.
흥업구락부와 마찬가지로 경성부와 경기도 출신인 기호 지역 세력이 중심이 되어 서북세와는 대립했다. 이는 적극신앙단의 또 다른 측면인, 서북 지역 출신의 개신교 주류와 이들의 배후에 있던 외국인 선교사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과 연결되었다. 이는 적극신앙단 출범 직후, 감리교, 장로교, 성결교 등 교파를 초월한 조선개신교회 인사들의 포괄적인 참여로 나타났다.
2.2. 서북-기호 지역 갈등
흥업구락부와 마찬가지로 경성부와 경기도 출신인 기호 지역 세력이 중심이 되어 서북 지역 세력과는 대립했다. 이는 적극신앙단의 또 다른 측면인, 서북 지역 출신의 개신교 주류와 이들의 배후에 있던 외국인 선교사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과 연결되었다. 이는 적극신앙단 출범 직후, 감리교, 장로교, 성결교 등 교파를 초월한 조선 개신교회 인사들의 포괄적인 참여로 나타났다.
2.3. 외국인 선교사에 대한 반발
1925년 신흥우가 이승만과 논의하여 결성한 흥업구락부는 1930년대 들어 내분 사태를 겪었다. 이에 신흥우는 흥업구락부 내 비기독교 자본가 세력을 배제하고, 순수 기독교인 중심의 신앙운동을 추구하고자 적극신앙단을 결성하였다.
흥업구락부에 기독교, 천도교, 유교, 자유주의자 등 다양한 세력이 참여하자, 흥업구락부 내 일부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만의 모임 결성을 주장하였다. 신흥우는 흥업구락부 활동에 관여하면서도 기독교인만의 독자적인 모임 조직을 구상하였다. 또한 조선에 파견된 미국인, 영국인, 프랑스인 기독교선교사들의 조선인에 대한 공공연한 무시와 멸시는 서양인 선교사에 대항할 조직 결성 목소리를 높였다.
3. 참가자
1932년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총무 신흥우가 적극신앙단을 주도하여 조직하였다. 감리교와 장로교의 여러 인물들이 참여했으며, 이들은 신앙의 자유와 자유로운 성서 해석 등을 주장하였다.
3.1. 주요 참가자
1932년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총무 신흥우가 적극신앙단을 주도하여 조직하였다. 감리교와 장로교의 여러 인물들이 참여했다.
참가자 중에는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와 관련된 인물이 다수 포함되었다.
4. 신앙선언
적극신앙단이 표방한 신앙선언 5개조는 다음과 같다.
# 나는 자연과 역사와 예수와 경험 속에 계시되는 하나님을 믿는다.
# 나는 하나님과 일치되는 것과, 악과 싸워 이기는 것이 인간생활의 제1원리라고 믿는다.
# 나는 성별에 관계없이 인간의 권리·의무·행위에 있어서 완전한 평등이 있어야 하며 다른 사람에게 방해되지 않는 한에서 완전한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 나는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위하여 개인적 취득동인을 고상한 기여동인으로 대치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 나는 사회가 모든 사람에게 경제적, 문화적, 정신적 생활에 있어서 '승등적(昇登的) 균형과 안전'을 보장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5. 해체
적극신앙단은 개신교계의 갈등과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이단 규정, 윤치호, 양주삼 등 신흥우 계열 인물들의 비판에 직면했다. 중일 전쟁을 앞두고 일본 제국이 결사 조직을 경계하며 통제를 강화하면서 해체되었다. 윤치호는 적극신앙단이 《기독신보》를 이용해 교활한 계략을 꾸몄으며, 이 단체가 비밀결사이자 파쇼 단체라고 비난했다.
5.1. 이단 규정
적극신앙단의 신앙운동은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의 조직과 함께 진행되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 문서를 보면, 적극신앙단이 아돌프 히틀러의 파시즘과 기독교 정책에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적극신앙단은 개신교계의 고질적인 서북-기호 대립 속에서 보수주의 파벌의 주류였던 서북계의 반발로 많은 지지를 얻지 못했고, 교회의 분열과 갈등을 일으켰다. 특히 조선예수교장로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어 어려움을 겪었다.
5.2. 내부 비판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와 함께 활동했던 적극신앙단은 히틀러의 파시즘과 기독교 정책에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이 조선총독부 경무국 문서를 통해 제기되었다. 그러나 적극신앙단은 개신교 내 서북-기호 간의 갈등 속에서 보수주의 주류였던 서북계의 반발로 큰 지지를 얻지 못하고, 교회 분열과 갈등을 야기했다. 특히 조선예수교장로회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되어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신흥우 계열이었던 윤치호와 양주삼이 적극신앙단을 비판하면서, 중일 전쟁을 앞두고 결사 조직을 경계하던 일본 제국의 통제 강화로 인해 해체되었다. 윤치호는 적극신앙단이 《기독신보》를 이용해 교활한 계략을 꾸몄으며, 이 단체가 비밀결사이자 파쇼 단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5.3. 일제의 탄압
적극신앙단의 신앙운동은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의 조직을 동반하여 진행되었다. 당시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문서를 근거로, 적극신앙단이 히틀러의 파시즘과 기독교 정책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분석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적극신앙단은 개신교계의 고질적인 서북-기호 대립 구도 속에서 보수주의 파벌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서북계의 반발로 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교회의 분열과 갈등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조선예수교장로회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되면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신흥우 계열의 인물이었던 윤치호와 양주삼이 적극신앙단을 비판하는 쪽으로 돌아서고, 중일 전쟁을 앞둔 일본 제국이 모든 종류의 결사 조직에 대하여 극심한 경계심을 보이며 통제 체제를 강화면서 해체되었다. 윤치호는 적극신앙단 단원들이 《기독신보》를 가지고 교활한 계략을 부렸다며, 이 단체가 비밀결사의 파쇼 단체라고 격렬히 비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