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라노 마사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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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이라노 마사카도는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에 활동한 인물로, 간무 천황의 후손인 간무 평씨의 일족이다. 그는 헤이안 시대에 교토에서 섭정 후지와라노 다다히라를 섬겼으나, 게비이시가 되지 못하고 도고쿠로 내려가 일족과의 갈등을 겪었다. 이후 히타치, 시모쓰케, 고즈케, 무사시, 우에노 등 5개 구니의 국부를 장악하고 신황을 자칭하며 독자적인 관직을 임명했다. 이에 조정은 후지와라노 다다후미를 정동대장군으로 임명하여 토벌군을 파견했고, 마사카도는 940년 전투에서 패배하여 사망했다. 그는 간토 지역에서 반신으로 추앙받았으며, 다양한 전설과 신사, 관련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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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라노 마사카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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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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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 다이라노 코지로 마사카도 (平小次郎将門) 소마노 코지로 (相馬小次郎) 도요타 고지로(豐田小次郎) 소바 고지로(相馬小次郎) 다키구치 고지로(滝口小次郎) 신황(新皇) |
출생 | 900년대 초 (추정) |
사망일 | 940년 3월 25일 (덴교 3년 음력 2월 14일) |
사망 장소 | 시모사국 (현재 이바라키현 반도 시) |
묘소 | 도쿄도 지요다구 오테마치, 마사카도즈카 (머리) 이바라키현 반도 시, 엔메이인 (몸통) |
씨족 | 간무 헤이시 보소 헤이시 |
아버지 | 다이라노 요시마사 |
어머니 | 아가타 이누카이노 하루에의 딸 |
자녀 | 다이라노 요시카도 다이라노 마사쿠니 하루히메 (뇨슌니) 뇨조니 (지조니) 사츠키히메 (다키야샤히메) |
주요 활동 | 중앙 정부에 대한 반란 |
관직 | |
사군 | 후지와라노 다다히라 |
기타 정보 | |
일본 3대 원령 | 스기와라노 미치자네, 다이라노 마사카도, 스토쿠인 |
배우자 | |
정실 | 다이라노 마키의 딸, 御前 다이라노 요시카네의 딸 |
측실 | 후지와라노 무라오의 딸? 기쿄히메 |
2. 생애
다이라노 마사카도는 다이라노 요시마사(平良将)의 아들로, 간무 천황의 후손이다. 간무 천황의 자손들은 왕족에서 평민 신분으로 강등되어 다이라 성을 하사받았다.[3] 요시마사는 간무 천황의 증손자인 다카모치 왕의 아들 중 한 명이었다. 889년(간표 원년) 가즈사국(현재 지바현 중부)의 부윤으로 임명되었으며, 그의 아들들은 무쓰국의 방위 주둔지(친주부) 사령관인 친주부 쇼군 등 동부 지역의 여러 지방 관직을 역임하며 북부의 에미시 부족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9][10][11][12][13]
마사카도의 출생과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손피분묘쿠에는 요시모치의 여덟 아들 중 셋째로 기록되어 있지만, 소마 씨의 계보인 『소마 계도』에는 일곱 아들 중 둘째로 기록되어 있다.[3] 소마 씨 계보에는 어린 시절 '''소마노 고지로'''(相馬小次郎, '고지로'는 '둘째 아들'을 뜻함)라는 별명을 가졌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시모사국(현재 이바라키현 남서부와 지바현 북서부 일부)의 소마군 지역에서 자랐다는 것을 시사한다.[14] 마사카도의 어머니는 소마군의 지역 유력자였던 아가타(no) 이누카이노 하루에(県犬養春枝)의 딸로 추정된다.[7][15]
마사카도의 출생 연도는 불분명하다. 930년대 중반 그의 활동에 대한 기록과 그의 자녀들이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을 만큼 어렸다는 점을 미루어 보아, 900년경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있다.[14]
10대 후반에 마사카도는 헤이안쿄 (교토)로 가서 섭정 후지와라노 다다히라의 집에 봉직했다. 그는 게비이시(경비위사)에 들어가고자 했지만, 궁중 관직이나 중요한 직책을 얻지 못했다.[14][9]
2. 1. 출생과 초기 생애
다이라노 마사카도는 903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32] 아버지는 진수부장군을 지낸 다이라노 요시마사(다이라노 요시마사)이며, 간무 천황의 5대손이다. 요시마사는 시모우사국(下総国) 사쿠라(현재의 지바현 사쿠라시)를 영지로 삼았다고 전해지지만, 이를 뒷받침할 사료(史料)는 없다.[3] 마사카도는 시모우사국(下総国) 소마군(相馬郡)에서 성장하여 '소마노 고지로'라고 불렸다고도 하지만, 실제 세력 범위는 도요다군(豊田郡)ㆍ사루시마군(猿島郡)이었다고 여겨진다.
15, 6세 무렵 헤이안쿄(平安京)로 상경하여 후지와라 북가(北家)의 후지와라노 다다히라(藤原忠平)를 주군으로 섬겼다. 게비이시(檢非違使)의 관직을 희망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도고쿠(東国)로 돌아갔다.[14][9]
마사카도가 도고쿠로 돌아간 직후, 숙부인 다이라노 구니카(平国香) 등에게 습격당했으나, 또 다른 숙부 다이라노 요시후미(平良文)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이후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난'으로 이어지는 여러 분쟁이 발생했지만, 그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다.
- 아버지 요시마사가 남긴 영지를 백부인 구니카나 다이라노 요시카네(良兼)가 임의로 나누어 가진 것이 원인이 되었다는 설.
- 히타치국(常陸国)의 전임 다이죠(大掾) 미나모토노 마모루(源護)의 딸(혹은 요시카네의 딸)을 둘러싸고 싸움이 시작되었다는 설.[66]
- 미나모토노 마모루와 다이라노 마키(平眞樹)의 영지 싸움에 마사카도가 개입하면서 싸움이 시작되었다는 설.
- 마모루 및 그의 친척, 그리고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싸움이었을 것이라는 설.
조헤이 5년(935년) 2월, 마사카도는 미나모토노 마모루의 아들들에게 습격당했지만 격퇴하고, 마모루의 본거지를 불태웠다. 이 과정에서 백부 구니카가 사망했다. 같은 해 10월, 다이라노 요시마사(良正)가 군사를 일으켜 마사카도와 대치했으나 패배했다. 요시마사는 요시카네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936년 6월 요시카네는 다이라노 사다모리(貞盛)와 함께 마사카도를 공격했지만, 오히려 기습을 받아 패하고 시모쓰케국(下野国) 관아로 도망쳤다. 마사카도는 시모쓰케 국아를 포위했지만, 일부러 포위를 풀고 요시카네를 도망치게 한 뒤, 국아와 교섭하여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2. 2. 일족과의 항쟁 (931년 ~ 939년)
조헤이 5년(935년) 2월, 마사카도는 미나모토노 마모루의 아들 타스쿠(扶) 등에게 히타치의 마카베군(眞璧郡) 노모토(野本, 지금의 지쿠세이시)에서 습격당했지만 격퇴했고, 타스쿠 등은 전사했다. 마사카도는 오쿠시(大串)ㆍ토리데(取手, 시모쓰마시)에서 마모루의 본거지인 마카베 군까지 진군해 인근 마을들까지 불살랐다. 이때 백부 구니카가 근거지로 삼고 있던 히타치의 이시다(石田)도 공격당했고, 구니카는 화재로 사망했다.[19][24]같은 해 10월, 장인 마모루의 호소를 받은 요시마사(良正)가 군세를 모아 기누(鬼怒) 강변의 니하리사토(新治鄕) 가와타니(川曲, 야치요정)에 진을 치고 마사카도와 대치했지만, 마사카도에 의해 격파되었다. 요시마사는 요시카네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요시카네는 조헤이 6년(936년) 6월에 대군을 출병, 미즈모리에서 요시마사ㆍ사다모리 등과 합류했다. 가즈사를 출발하여 시모스케의 구요타(마사카도의 본거지)로 남하하여 마사카도를 쳤지만[67], 마사카도의 기습을 받아 패하고 시모스케(도치기현)의 관아로 도망쳐 보호를 요청했다. 마사카도는 시모스케의 관아를 포위했지만, 일부러 슬쩍 포위를 풀고 요시카네를 도망치게 한 뒤, 직접 관아와 교섭하여 자신이 거병한 것에 대한 정당성을 인정하게 한 다음 회군했다.[22][25][26]
얼마 지나지 않아 미나모토노 마모루의 고발장에 따라 조정은 마사카도와 마키 두 사람을 소환하라는 명을 내렸고, 마사카도 등은 헤이안쿄의 게비이시쵸(檢非違使廳)에서 신문받았지만, 조헤이 7년(937년) 4월 7일의 스자쿠 천황의 원복을 기념하는 대사면령에 따라 모든 죄를 사면받고 귀향한다.[25][26]
돌아온 뒤에도 마사카도는 요시카네를 필두로 하는 대부분의 일족과 대립했는데, 8월 6일에 요시카네는 시모우사와 히타치의 경계에 해당하는 오가이ㆍ코가이 지역까지 진군했고, 마사카도의 아버지 요시마사나 다카모치왕 등 조상의 초상을 내걸고 마사카도가 관리하고 있던 국영목장 이쿠하노 미하야(常羽御厩)를 쳤다. 이 싸움에서 마사카도는 패하여 도망치고, 요시카네는 마사카도의 본거지 도요타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한 뒤, 마사카도의 처자(요시카네의 딸과 외손자)를 데리고 돌아갔다. 하지만 남동생들의 도움으로 9월 10일에 탈출해 마사카도에게로 돌아왔다. 처자가 돌아온 것에 힘을 얻은 마사카도는 조정과 후지와라노 다다히라에게 요시카네의 악행과 자신의 정당성을 호소했다. 그리고 조정은 동년 11월 5일에 태정관부(太政官符)를 보냈다.
덴교 2년(939년) 2월, 무사시국에 새로 부임한 곤노카미(權守) 오키요 왕(興世王)과 스케 미나모토노 쓰네모토(源經基), 그리고 아다치 군지(足立郡司) 무사시노 다케시바(武藏武芝) 사이에 벌어진 갈등에 마사카도가 중개에 나서서, 오키요 왕과 다케시바를 대면시켜 서로 화해하게 했는데, 다케시바의 군사가 갑자기 쓰네모토의 진영을 포위하면서(이유는 불명) 놀란 쓰네모토는 교토로 도망쳐서 다이라노 마사카도와 오키요 왕, 무사시노 다케시바가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조정에 고발했다.[39] 마사카도의 주군이기도 했던 태정대신(太政大臣) 다다히라가 일의 사실 여부를 조사하기로 하고, 사자를 도고쿠에 내려 보냈다. 놀란 마사카도는 상서를 받아들이고 동년 5월 2일자로 히타치ㆍ시모우사ㆍ시모스케ㆍ무사시ㆍ고즈케 다섯 구니의 관아에서 나서서 작성한 "모반은 사실무근"이라는 연판장을 첨부해 보냈다. 이로써 조정은 마사카도에 대한 혐의를 풀었고, 반대로 쓰네모토는 무고죄로 처벌되었다. 한편 마사카도의 간토에서의 명망을 알게 된 조정은 마사카도를 임관시켜 써먹을 방법을 논의하게 되었다.

2. 3.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난 (939년 ~ 940년)
이 무렵, 무사시노곤노카미(武蔵権守) 오키요 왕은 당시 새로 무사시노카미로 부임해 온 구다라노 사다쓰라와의 불화로 임지를 떠나 마사카도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또한 히타치노 국의 호족으로서 부동창을 부순 혐의로 추포령이 내려져 있던 수배자 후지와라노 하루아키가 비호를 요구해오자 마사카도는 받아주었다. 히타치 관아에서는 마사카도에게 하루아키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지만 마사카도는 "하루아키는 이미 도망쳤다"며 거절하고, 오히려 덴교 2년(939년) 11월 21일에는 병사를 모아 하루아키에게 떨어진 추포령을 철회할 것을 히타치 관아에 요구했다. 히타치에서는 이것을 거부하는 동시에 마사카도에 대한 선전포고를 했고, 어쩔 수 없이 싸우게 된 마사카도는 1천여 군세로 히타치 관아의 3천 군사를 단번에 격파했다. 히타치노스케 후지와라노 고레모토는 싱겁게 항복해버렸다. 히타치의 관아를 접수한 마사카도는 히타치의 수령이 가지고 있던 인일(印鎰)을 몰수했다.[68]이 사건은 조정이 마사카도를 '반역자'로 인식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마사카도는 측근 오키요 왕의 획책을 받아 12월 11일에 시모스케로 향했고, 이를 사전에 알고 시모스케노카미 후지와라노 히로마사 등은 마사카도에게 예를 갖추며 관청 곳간의 열쇠와 수령의 상징인 인끈을 넘겼지만, 마사카도는 그들을 시모스케에서 내쫓아버렸다. 나흘 뒤인 15일에는 고즈케에 출병했는데, 요격에 나온 스케[69] 후지와라노 히사노리[70]를 붙잡고 그의 목숨을 구해주는 대신 그로부터 수령의 인일을 양도받고, 또 다시 고즈케에서 내쫓았다. 19일에는 지휘관이 없는 고즈케의 관아를 함락시키고 간토 전역을 그의 손안에 넣었다.
이 과정에서 하치만 대보살의 계시를 받았다는 무녀의 신탁에 의해 그는 간토에서 '''신황'''(新皇)을 자칭하기에 이르렀고, 독자적으로 관직을 임명하고 이와이(岩井, 지금의 일본 이바라키 현 반도시)에 정청(政廳) 즉 새로운 왕성을 지었다. 왕성을 시모우사의 정남쪽(사루시마 군 이시이라는 설도 있다)에 정하고 히로바시(檥橋)를 교토의 야마사키, 소마 군의 오오이(大井)의 진을 오쓰(大津)에 비유하고, 교토의 관위를 모방해 좌ㆍ우 대신과 납언ㆍ참의 등 문무백관을 임명하고 내인(內印)과 외인(外印)을 주조해, 간토 땅에 교토를 본뜬 국가를 수립하려 했다는 것이다. 신황 즉위에 대해서는 친동생 다이라노 마사히라나 시동 이와노 가즈쓰네(伊和員經) 등이 반대했지만 마사카도는 듣지 않았다고 한다.
신황이 된 마사카도가 임명한 여러 구니의 수령은 아래와 같다.
직책 | 이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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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스케노카미(下野守) | 다이라노 마사요리 | 마사카도의 아우 |
고즈케노카미(上野守) | 다지노 쓰네아키라 | 전임 진두(陣頭)이자 이쿠하노 미하야 벳토(常羽御廐別當)직 |
히타치노스케(常陸介) | 후지와라노 하루모치 | 전임 히타치노죠(常陸掾)직 |
가즈사노스케(上総介) | 오키요 왕 | 전임 무사시노곤노카미 |
아와노카미(安房守) | 훈야노 요시타테 | 전임 상병(上兵) |
사가미노카미(相模守) | 다이라노 마사후미 | 마사카도의 아우 |
이즈노카미(伊豆守) | 다이라노 마사타케 | 마사카도의 아우 |
시모우사노카미(下總守) | 다이라노 마사타메 | 마사카도의 아우 |
다이라노 마사카도는 간토 제일의 무장으로 불릴 만큼 무예가 뛰어났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을 대변하려 했으며, 비극적인 죽음으로 인해 숱한 전설을 남겼다. 당시 도고쿠 사람들은 무거운 조세와 부역에 시달렸기에 마사카도를 자신들의 대변자로 인식했다.[27] 중세 시대에는 마사카도의 무덤 주변에서 천재지변이 자주 발생하자, 이를 그의 저주로 여겨 호조 도키무네의 유행승 진교가 신으로 모셨고, 1309년 간다 신사(神田明神社)에 합사되었다.
앞서 덴초 3년(826년) 9월에 가즈사ㆍ히타치ㆍ고즈케의 3개 구니는 모두 친왕이 카미(守, 정4위하에 해당하는, 천황의 칙으로서 임명되는 관직)로 다스리는 친왕임국이 되어 있었지만, 마사카도 당시 카미는 관직만 받고 교토에 머무르며 실제로는 부임하지 않았고, 그 아래의 스케가 대리로서 장관직을 맡아 수행했다. 마사카도가 진정으로 간토에 새로운 왕국을 세우려 했다면 조정의 관습을 답습할 필요 없이 히타치나 가즈사에도 카미를 임명해야 하지만 어째서인지 카미가 아닌 스케를 임명하고 있다. 여기서의 히타치나 가즈사의 스케라는 것은 '관습상의 장관'이라는 의미인지 아니면 마사카도 신황 자신의 직할지라는 의미인지 알 수 없다. 《쇼몬기》에는 조정에 반역할 마음이 없었다고 하지만, 그랬다면 어째서 같은 히타치나 가즈사에는 스케를 두면서 다른 한편으로 고즈케에만 스케가 아닌 카미를 임명했는지도 알 수 없다. 통일된 규정은 찾아보기 어렵다.
마사카도가 반역을 꾀하였다는 정보는 곧바로 교토에 전달되었는데, 그 와중에 또 서쪽의 세토나이카이에서 후지와라노 스미토모(藤原純友)가 난을 일으켰다는 보고까지 겹치자 조정은 경악했다(서쪽의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와 동쪽의 다이라노 마사카도가 서로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꽤 오랜 뒤까지 남아 있었다). 여러 지샤에는 천황의 칙명으로 역적 조복(調伏)의 기도가 명해졌고, 이듬해 덴교 3년(940년) 1월 9일에는 미나모토노 쓰네모토가 이전에 밀고했던 것이 현실이 되었다는 것을 참작해 그에게 종5위하를 내렸다. 열흘 뒤인 1월 19일에는 참의 후지와라노 다다후미가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에 임명되었는데, 다다후미는 저택에 돌아가는 일 없이 곧바로 토벌군의 장관으로서 출정했다고 전한다.
동년 1월 중순, 간토에서 마사카도는 5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히타치로 출진해, 다이라노 사다모리나 후지와라노 고레모토의 아들 다메노리(爲憲)의 행방을 수색했다. 열흘 간에 걸친 수색에서 사다모리 등의 행방은 알 수 없었지만, 대신 사다모리의 아내와 미나모토노 마모루의 아내를 붙잡았다. 마사카도는 군사들에게 능욕당한 그녀들을 가엾게 여기고 옷가지를 주어 돌려보냈다. 마사카도는 시모우사의 본거지로 돌아가 군사를 각자의 본향으로 귀환시켰다. 사실 주요 교통로를 봉쇄하고 지키지 않으면 안 될 시기에 사다모리 등의 수색을 위해 쓸데없이 시간과 병력을 허비한 것은 마사카도에 있어 굉장한 실책이었다.
마사카도가 그토록 찾고 있던 사다모리는 머지 않아, 시모스케의 압령사(押領使) 후지와라노 히데사토와 함께 4천의 군사를 모으고 있다는 보고와 함께 그의 귀에 들어간다. 마사카도는 여러 구니에서 모아들였던 병사 거의 대부분을 귀향시켰던 탓에 바로 옆에 남은 군사는 1천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시간을 끌면 불리해진다고 판단한 마사카도는 2월 1일을 기해 출격했다. 마사카도의 부장 후지와라노 하루모치의 무장 다지노 쓰네아키라 등이 사다모리와 히데사토의 연합군을 발견하고 마사카도에 한 장 보고도 없이 공격을 개시했는데, 원래 노련한 전략가인데다 숫적으로도 마사카도보다 많은 히데사토의 군세 앞에 하루모치군은 눈 깜짝할 사이에 패하여 도망쳤다. 이를 추격해온 연합군과 시모우사의 가와구치에서 마사카도군은 전투를 벌였다. 마사카도가 직접 진두에 서서 분전한 싸움에서 초반에는 사다모리나 히데사토 등도 밀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숫적으로 우세였던 그들에게 마사카도군이 밀리며 결국 퇴각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심한 패전으로 쫓기게 된 마사카도는 지형지물에 익숙한 본거지로 적을 끌어들여 승부를 내고자 고지마 군(幸島郡)의 히로에(廣江)에 숨었다. 하지만 사다모리나 히데사토 등은 그를 뒤쫓는 대신 조정에서 보낸 자신들 '관군'이 이기고 있음을 민중에게 호소했고, 더욱이 후지와라노 다메노리의 군세까지 가세하면서 2월 13일 마사카도의 본거지 이시이로 쳐들어가 모든 것을 다 태우는 초토화 작전을 벌였다. 살 곳을 잃고 길거리에 나앉은 신세가 된 백성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태워버린 추토군보다도 마사카도의 '악정'을 원망했다고 한다. 그때 마사카도는 몸에 투구와 갑옷을 고정시켜 붙인 채로 사다모리 등의 움직임을 탐색하면서 여러 곳을 전전했고, 반격을 위해 군사를 모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불과 4백 군세만으로 고지마 군 북쪽 산을 등지고 진을 친 채 아군의 원군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나 마사카도의 아군보다 먼저 그 소재를 파악한 적들은 마사카도를 포위해왔고, 마사카도는 소수 병력만으로 최후의 일전을 준비했다.
2월 14일 미신(未申)의 각(오후 3시)에 연합군과 마사카도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마사카도군은 거칠게 불어오는 북풍을 등지고 화살을 쏘며 연합군을 몰아붙였다. 사다모리의 중진이 기습을 시도했지만 실패하면서, 사다모리와 히데사토ㆍ다메노리의 군사들은 격파되어 군병 2,900명이 도망가고, 정예병 300여 명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마사카도가 우쭐한 사이, 갑작스럽게 바람의 방향이 북풍에서 남풍으로 바뀌어버린다. 마사카도 쪽으로 부는 바람을 업고 기세를 얻은 연합군은 다시 마사카도군에 대한 반격을 개시했다. 마사카도는 직접 말을 몰고 진두에 서서 분전했지만, 빠르게 달리던 말의 발걸음이 흐트러지면서 마사카도도 중심을 잃고 흔들렸고, 어디선가 날아온 한 발의 화살이 마사카도의 이마를 명중시켰다.[71] 그렇게 마사카도는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했다.
그 목은 헤이안쿄에 옮겨져 효수되었다. 이는 일본 역사에서 옥문(獄門)이 확인되는 가장 오래되고 확실한 사례이다. 그리고 이 난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세토 내해(瀬戸内海)에서 후지와라노 스미토모(藤原純友)가 일으킨 난과 함께 조헤이텐케이의 난(承平天慶の乱)이라 불리게 되었다.[72]
3. 평가와 전설
전국 시대 오타 도칸(太田道灌), 호조 우지쓰나(北條氏綱) 등 여러 무장들이 간다 명신에 무운을 빌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세키가하라 전투 전 이곳에서 승리 기도를 올렸다. 에도 막부 수립 후 간다 신사는 에도의 수호신으로 중시되었다.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 시대, 칙사 가라스마루 미쓰히로(烏丸光廣)가 마사카도의 업적을 듣고 조정에 호소하여 역적 칭호가 제거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마사카도는 조정에 대적한 역적으로 평가되어 1874년 간다 신사 제신에서 밀려났으나, 메이지 후기 복권 운동이 일어났다. 태평양 전쟁 패전 후에는 난폭한 조정 지배에 맞선 영웅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1976년 NHK 대하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무지개와」 방영 후, 1984년 마사카도는 간다 신사 제신으로 복귀했다.
이처럼 마사카도는 고대 '역적', 중세 '숭배 대상', 메이지 시대 '역적', 패전 후 '영웅' 등 시대에 따라 평가가 격렬하게 변했다. 최근에는 학술적 연구가 기대된다.
3. 1. 전설
간토 제일의 무장으로 불릴 만큼 무예가 뛰어났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아 내쫓긴 사람들의 처지를 대변해주려 애썼으며, 장렬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기에 마사카도는 오랫동안 숱한 일화와 전설을 남기며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남았다. 조정으로부터 무거운 조세와 부역 등의 부담을 강요당해야 했던 도고쿠 사람들은 마사카도를 자신들의 처지를 대변해주는 인물로 인식했다. 중세에 마사카도즈카(將門塚) 주변에서 천재지변이 빈번하게 속출하자, 이를 마사카도의 저주라며 두려워했던 당시 민심을 가라앉히고자 싯켄 호조 도키무네의 유행승이었던 진교가 신으로 모셨고, 엔쿄(延慶) 2년(1309년) 간다 명신사(神田明神社)에 합사되었다.[73]
전국 시대 오타 도칸(太田道灌)이나 호조 우지쓰나(北條氏綱) 등의 무장들도 간다 명신에 무운을 빌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앞서 이곳에서 전승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에도 막부가 들어선 뒤 다이라노 마사카도를 모신 간다 신사는 에도의 수호신으로 중시되었다. 마사카도의 역적으로서의 인식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 시대에 칙사로 에도에 온 다이나곤(大納言) 가라스마루 미쓰히로(烏丸光廣)가 막부로부터 마사카도의 업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런 영웅에게 역적의 이름은 당치도 않다"며 조정에 호소해 제거되었다. 간다 신사는 막부에 의해 지금의 땅에 옮겨졌는데, 이곳은 에도성 동북쪽 귀문(鬼門)에 해당한다. 이는 도쿠가와 집안이 조정에 반역했던 다이라노 마사카도를 쇼군이 사는 성의 귀문에 자리잡게 하여 막부의 통치에 조정을 배제하겠다는 결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간다 신사의 '간다'는 목이 잘려 죽은 마사카도의 나머지 몸, 즉 '카라다(體)'에서 변한 것이라는 설도 있고, 반도시 시내 동총 주변 지명은 '카도야마(神田山)'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마사카도에 대한 평가는 다시 뒤바뀌어 조정에 대적한 역적임이 문제시되면서 메이지 7년(1874년) 교부성 지시로 간다 신사의 제신 자리에서 밀려나 마사카도 신사로 천좌되었다. 메이지 후기에는 마사카도 복권 운동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패전 뒤에는 조정의 난폭한 지배에 의연히 일어나 신황으로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영웅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1976년 NHK 대하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무지개와」가 방영되면서 마사카도를 간다 신사의 제신으로 복귀하자는 움직임이 높아졌고, 1984년 마사카도는 2백 년 만에 다시 간다 신사로 돌아왔다. 이처럼 마사카도의 평가는 고대 '역적'에서 중세 '숭배'와 '경외'의 대상, 메이지 시대 다시 역적, 패전 후 영웅화 등으로 격렬하게 흔들렸다. 최근에는 보다 학술적인 면에서 연구가 기대된다.
마사카도 전설을 연구한 일본 향토사학자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현재까지 전승되는 마사카도 전설을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 명계전설(지옥에 떨어진 마사카도의 전설)
# 조복전설
# 제사전설(마사카도를 제사지내게 된 진쟈의 유래에 관련된 전설)
# 마사카도의 왕성(마사카도가 지은 수도에 대한 전설)
# 마사카도의 목
# 무쇠로 된 몸(마사카도의 튼튼한 몸 가운데 약점을 찾은 전설)
# 일곱 명의 마사카도(마사카도의 가게무샤 전설)
# 동서호응 전설(다이라노 마사카도와 후지와라노 스미토모가 동서에서 작당하고 군세를 일으켰다는 전설)
# 마사카도 일족의 전설
# 마사카도의 추토자(追討者)
지바현 나리타시(成田市) 나리타산 신쇼지(新勝寺)는 스자쿠 천황 밀명으로 뱃길로 간토에 온 간초(寬朝) 승정이 마사카도에 맞서 싸우는 군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기도를 실시했다는 곳에 지어진 사원이다. 때문에 마사카도나 그 가신 자손을 자처하는 이들은 천 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나리타산 신쇼사를 참배하지 않는다. 마사카도가 자랐다는 내력이 전해지는 사쿠라시 마사카도에 아주 오래전부터 살아온 사람들 중에도 참예하지 않는 집이 많으며, 정청이 있는 반도시에도 참배를 좋게 생각하지 않는 풍조가 일부 남아 있다고 한다. 쓰쿠도 신사나 간다 진쟈의 씨자(氏子)라도 나리타산 신쇼사를 참배하면 그들이 태어난 땅의 수호신인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가호를 받을 수 없다는 전설 때문에 참예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1976년 NHK 대하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무지개와」 출연자들도 나리타산 신쇼사 세쓰분 콩 뿌리기에 참가하는 것을 사퇴했다(예년 대하드라마 출연자는 나리타산 신쇼사 콩 뿌리기에 참가했었다).
지바현 이치카와시 오노지구에도 마사카도 공 전설이 많이 남아있는데, 이곳은 마사카도와 인연이 깊은 땅으로 전한다(현재 이치카와 시립제5중학교 부지는 마사카도의 옛 성터라 전한다). 예로부터 이곳 현지 주민들은 대부분 마사카도를 섬겼던 가신 후손이라 하는 설이 있는데, 이들은 오늘날까지 나리타 산 신쇼사에 가지 않으며 참배를 하면 마사카도의 저주를 받는다는, 그리고 다이라노 마사카도를 배반하고 그의 약점을 후지와라노 히데사토에게 누설했다는 키쿄히메(桔梗姬) 전설을 생각해 지금도 도라지를 심지 않고 도라지가 들어간 무늬로 집안을 장식하지 않는다는 전언을 지금까지도 들을 수 있다.[73]
'교토간다명신(京都神田明神)'이 모셔진 교토시 시모교구(下京區) 신카만자 정(新釜座町)에는 민가에 파묻혀 잘 보이지 않는 조그만 사당이 있다. 안내문에는 "덴교 연간에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목이 효수되었던 자리"라고 이곳을 소개한다. 《태평기]》(太平記)》에는 교토에 옮겨져 효수된 마사카도의 목이 석 달 동안 썩지 않고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눈을 부릅뜨고서, 밤만 되면 "떨어져 나간 내 몸들은 어디에 있느냐. 이리 오너라. 목을 붙여서 한 번 더 싸우자꾸나."라고 울부짖었고 공포에 사로잡혀 떨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때 도노로쿠 사콘(藤六左近)이라는 시인이 이것을 보고 "몇 번을 다시 붙여 싸운들
3. 2. 관련 사찰 및 신사
3. 3. 관련 작품
다이라노 마사카도는 여러 작품에서 다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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