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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바네 시게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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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카바네 시게카타는 1669년에 태어난 하리마국 아코 번의 무사로, 1701년 주군 아사노 나가노리가 키라 요시히사에게 칼부림한 사건 이후 복수를 계획했다. 그는 오이시 요시오와 함께 키라 저택 습격에 참여하여 뒷문에서 싸웠으며, 1703년 에도 막부의 명으로 할복했다. 아카바네 시게카타는 낭인들의 복수극인 츄신구라를 소재로 한 다양한 작품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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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바네 시게카타
인물 정보
이름아카바네 시게카타
본명아카바네 시게타카
자(字)겐조 (源蔵)
다른 이름아카가키 겐조 (赤垣源蔵)
생몰년1665년 - 1703년 2월 4일 (음력 1월 10일)
출생지일본
사망지일본
신상 정보
성씨아카하네 (赤埴) 또는 아카가키 (赤垣)
시게카타 (重賢)
통칭겐조 (源蔵)
직업아코 번사
신분무사
가문아카하네 씨 (赤埴氏)
주군아사노 나가노리
봉록200석
생애
주요 사건아코 사건
역할아코 로시
최종 계급아코 번사
가족 관계
아버지아카하네 시게마사 (赤埴重政)

2. 생애

간분 9년(1669년)에 태어나 하리마국 아코번의 번사로 활동하며 우마마와리(200석) 직책을 맡았다.[3] 겐로쿠 14년(1701년) 주군 아사노 나가노리에도성에서 키라 요시히사에게 칼을 휘두른 사건(아코 사건)으로 아코번이 개역되자, 호리베 타케노부 등과 함께 급진적인 복수를 주장하며 에도에 잠복했다.

겐로쿠 15년(1702년) 7월, 오이시 요시오가 복수를 결정한 후, 12월 14일 밤 키라 저택 습격에 가담하여 후문(뒷문) 공격조로 싸웠다. 습격 전 여동생의 시댁을 방문하여 작별 인사를 나눈 일화가 있으며, 이는 훗날 충신장 이야기 속 '토쿠리의 이별' 장면으로 각색되기도 했다. 습격 당시 저택 안에서 키라 가문의 가로 사이토 미야우치를 놓친 것을 크게 후회했다고 전해진다.

습격 후 오이시 요시오 등 다른 동지들과 함께 호소카와 츠나토시의 저택에 맡겨졌으며, 겐로쿠 16년(1703년) 2월 4일 에도 막부의 명에 따라 동지들과 함께 할복했다. 향년 35세였다.[4] 계명은 刃廣忠劔信士|진코추켄신시일본어이며, 센가쿠지에 묻혔다.[4]

2. 1. 출생과 번사 시절

간분 9년(1669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카하니 잇카즈 또는 시오야마 쥬자에몬으로 여겨진다.[3] 어머니는 타카노 타다자에몬의 딸이다. 하리마국 아코번의 번사로 활동했으며, 우마마와리(200석) 직책을 맡았다.

2. 2. 아코 사건

겐로쿠 14년(1701년) 3월 14일, 주군 아사노 나가노리에도성 마츠노오오로카(松之大廊下)에서 키라 요시히사에게 칼로 상처를 입혔다. 이로 인해 나가노리는 당일 할복 명령을 받았고, 아코번개역되었다.[3] 시게카타는 호리베 타케노부 등과 함께 주군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급진적인 주장을 펼쳤으며, 에도에 잠복하여 개인적으로 키라 요시히사에게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겐로쿠 15년(1702년) 7월, 오이시 요시오교토의 마루야마 회의에서 복수를 실행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오이시가 에도로 내려온 후, 키라 저택 습격은 12월 14일 밤으로 정해졌다.

습격 이틀 전인 12월 12일, 시게카타는 여동생의 시집인 아베 쓰시마노카미 가신 타무라 누이노에몬의 집을 방문했다. 평소와 달리 잘 차려입은 시게카타의 모습에 누이노에몬의 아버지가 쓴소리를 했으나, 시게카타는 "곧 먼 길을 떠나게 되어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고만 말하고, 누이노에몬이 건네는 술잔을 받고 자리를 떠났다. 훗날 아코 낭사들이 키라 저택을 습격했다는 소식을 들은 타무라 부자는 시게카타의 진의를 헤아리지 못했음을 후회했다고 전해진다.

키라 저택 습격 당일, 시게카타는 후문(뒷문) 공격조에 속해 싸웠다. 이때 스가야 마사토시와 함께 저택 안으로 쳐들어갔다가 하인 복장을 한 남자를 발견했지만, 별다른 의심 없이 지나쳤다. 나중에 그 남자가 키라 가문의 가로인 사이토 미야우치였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또한 퇴각할 때는 화재를 막기 위해 키라 저택의 불을 끄고 나왔다고도 전해진다. 타케바야시 타카시게가 키라 요시히사를 찾아내 살해하고, 아코 낭사들이 키라의 목을 들고 철수한 후, 시게카타는 오이시 요시오 등 다른 동지들과 함께 호소카와 쓰나토시의 저택에 맡겨졌다. 그러나 호소카와 가문의 기록인 『호리우치 덴에몬 각서』(堀内伝右衛門覚書)에는 시게카타가 습격 당시 특별히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지는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겐로쿠 16년(1703년) 2월 4일, 에도 막부는 아코 낭사들에게 할복을 명했고, 시게카타도 동지들과 함께 생을 마감했다. 향년 35세였다. 계명은 刃廣忠劔信士|진코추켄신시일본어이며[4], 센가쿠지에 묻혔다.

2. 3. 토쿠리의 이별

후년에 회자되는 충신장 이야기 속에서는 '''赤垣源蔵|아카가키 겐조일본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1] 이 이야기에서 그는 토벌 전날 밤, 형인 시오야마 요자에몬의 집을 찾아가 작별 인사를 하려 했으나 형이 부재중이었다. 그래서 형수에게 부탁하여 형의 하오리를 빌려, 이를 형 대신으로 삼아 술잔을 나누며 이별을 고하는 장면이 유명한데, 이를 "徳利の別れ|도쿠리의 이별일본어"이라고 한다.[5]

그러나 실제 역사 기록에 따르면 아카바네 시게카타에게는 형이 없었으며, 술을 잘 마시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는 겐로쿠 15년(1702년) 12월 12일, 여동생의 남편인 타무라 봉에몬의 집을 방문했다. 이때 평소와 달리 잘 차려입은 모습 때문에 봉에몬의 아버지에게 꾸지람을 들었으나, 시게카타는 감사를 표하며 곧 먼 길을 떠나게 되어 인사차 들렀다고만 말했다. 이후 봉에몬과 술잔을 나누고 헤어졌다. 타무라 부자는 나중에 아코 낭사들이 키라 저택을 습격하여 복수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시게카타의 진의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2. 4. 키라 저택 토벌

겐로쿠 14년(1701년) 3월 14일, 주군 아사노 나가노리에도성 마츠노 오오로카에서 키라 요시히사에게 칼부림을 일으킨 사건으로 나가노리는 당일 할복하고 아코번개역되었다. 시게카타는 호리베 타케노부 등과 함께 급진적인 복수론자로 에도에 잠복하며 개인적으로 키라 요시히사에 대한 복수를 계획했다. 겐로쿠 15년(1702년) 7월, 오이시 요시오가 교토 마루야마 회의에서 복수를 결정하자 에도로 내려왔고, 키라 저택 습격은 12월 14일 밤으로 정해졌다.

습격 이틀 전인 12월 12일, 시게카타는 여동생의 시집인 아베 쓰시마노카미 가신 타무라 누이노에몬의 집을 방문했다. 평소와 달리 멋을 낸 모습에 대해 타무라의 아버지에게 쓴소리를 들었으나, 시게카타는 먼 곳으로 떠나기 때문에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고만 말하고 술잔을 나눈 뒤 떠났다. 훗날 타무라 부자는 아코 낭사들의 복수 소식을 듣고 시게카타의 진의를 헤아리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고 전해진다.

후대에 널리 알려진 충신장 이야기에서는 시게카타가 '아카가키 겐조'(赤垣源蔵일본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며[1], 토벌 전날 밤 형 시오야마 요자에몬의 집에 찾아가 부재중인 형 대신 형의 하오리를 빌려 술잔을 나누며 작별을 고하는 '토쿠리의 이별' 장면이 유명하다.[5] 그러나 실제 시게카타에게는 형이 없었고 술도 잘 마시지 못했다고 한다.

키라 저택 습격에서는 후문(뒷문) 공격대에 속해 싸웠다. 이때 스가야 마사토시와 함께 저택 안으로 쳐들어가 하인 복장을 한 남자를 만났으나 놓아주었는데, 나중에 그가 키라 가문의 가로인 사이토 쿠나이(미야우치)라는 것을 알고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타케바야시 타카시게가 키라 요시히사를 찾아내 살해하고 그 목을 확보한 후, 아코 낭사 일동은 철수했다. 충신장 등에서는 시게카타가 철수할 때 화재 예방을 위해 저택의 불을 껐다고 묘사되기도 한다.[6] 하지만 사료에 따르면, 아카바네 등 후문조는 하인들을 위협하여 촛불을 빼앗아 사용했으며, 사용한 촛불은 그대로 두거나 추격을 막기 위해 일부러 쓰러뜨리고 철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7]

키라 저택 습격 후, 시게카타는 오이시 요시오 등 다른 동지들과 함께 호소카와 츠나토시의 저택에 맡겨졌다. 호소카와 가문의 기록인 『호리우치 덴에몬 각서』에는 시게카타가 습격 당시 특별히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지는 않았다고 적혀 있다. 겐로쿠 16년(1703년) 2월 4일, 에도 막부의 명에 따라 동지들과 함께 할복하였다. 향년 35세였다. 계명은 진광충검신사[4]이며, 센가쿠지에 묻혔다.

2. 5. 최후

키라 저택 습격 이후, 타케바야시 타카시게가 키라 요시히사의 목을 벤 뒤, 시게카타는 오오이시 요시오 등 동지들과 함께 구마모토번 번주 호소카와 츠나토시의 저택에 맡겨졌다.[3][4] 호소카와 가문의 기록인 『호리우치 덴에몬 각서』에는, 시게카타가 습격 당시 특별히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지는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4]

겐로쿠 16년(1703년) 2월 4일, 에도 막부의 명에 따라 다른 동지들과 함께 할복하였다.[4] 향년 35세였다.[4] 계명은 刃廣忠劔信士|진광충검신사일본어이다.[4] 유해는 주군 아사노 나가노리와 동지들이 묻힌 에도 센가쿠지에 안장되었다.[4]

3. 관련 작품

아카바네 시게카타는 충신장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로, 일본의 여러 대중문화 작품에서 다루어졌다. 특히 나니와부시,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그의 이야기가 재현되었다.

3. 1. [[나니와부시]]


  • 장편 가요 겐로쿠 꽃의 형제 아카가키 겐조 (元禄花の兄弟 赤垣源蔵) - 미나미 하루오
  • 장편 가요 이야기 아카가키 겐조 (2005년) - 야마구치 루미

3. 2. 영상

전후를 막론하고, 아래 작품 외에도 많은 작품에 등장하고 있다.

  • 충신장 꽃의 권·눈의 권 (1962년, 배우: 이와모토 코지)
  • 아아 충신장 (1969년, 배우: 나쓰야기 이사오)
  • 대충신장 (1971년, 배우: 프랭키 사카이)
  • 겐로쿠 태평기 (1975년, 배우: 나가사와 다이)
  • 아시는 분! 여자 쥐 소승 (1977년, 배우: 하야시 요이치)
  • 아코 성 단절 (1978년, 배우: 시모야마 타카야)
  • 아코 낭사 (1979년, 배우: 후지사와 테츠오)
  • 고개의 군상 (1982년, 배우: 와카사 아츠시)
  • 충신장 (1985년, 배우: 아오이 테루히코)
  • 충신장 바람의 권·구름의 권 (1991년, 배우: 와타나베 켄)
  • 사십칠인의 자객 (1994년, 배우: 호키모토 타츠야)
  • 충신장 (1996년, 배우: 가쓰노 히로시)
  • 겐로쿠 료란 (1999년, 배우: 나카무라 나카스케)
  • 아코 낭사 (1999년, 배우: 초대 이치카와 우콘)
  • 충신장〜결단의 때 (2003년, 배우: 후나코시 에이이치로)
  • 충신장 (2004년, 배우: 나가시마 도시유키)
  • 충신장 요센인의 음모 (2007년, 배우: 키타가와 류이치)
  • 충신장〜그 남자, 오이시 구라노스케 (2010년, 배우: 가쓰무라 마사노부)

참조

[1] 웹사이트 赤埴源蔵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15-01-10
[2]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辞典 第5版 株式会社三省堂 2009
[3] 문서 龍野藩士
[4] 웹사이트 兵庫県赤穂市公式サイト・赤穂浪士(赤穂事件)の一部始終「赤穂義士 赤埴源蔵重賢」
[5] 기타 講談「赤垣源蔵、徳利の別れ」(神田松鯉など)
[6] 기타 講談「赤垣のかぼちゃ娘」(旭堂みなみ)
[7] 문서 「野本忠左衛門見聞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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