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구마모토번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구마모토번은 센고쿠 시대에 히고국을 통치하기 위해 가토 기요마사가 세운 번으로, 1600년부터 1632년까지 가토 가문이, 이후 1871년 폐번치현까지 호소카와 가문이 통치했다. 가토 기요마사는 구마모토 성을 축조하고 조카마치를 정비하는 등 번의 기반을 다졌으나, 가토 가문 단절 후 호소카와 가문으로 교체되었다. 호소카와 가문은 테누 제도로 인해 백성 봉기가 발생하기도 했으며, 호레키 개혁을 통해 번의 재정을 안정시키려 노력했다. 막말에는 근왕당, 시슈칸당, 실학당으로 번론이 나뉘었고, 보신 전쟁에서 메이지 신정부에 가담했다. 구마모토 번에는 마쓰이, 요네다, 아리요시 씨 등이 주요 가신으로 활약했으며, 폐번 후 호소카와 가문은 후작 작위를 받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오이타시 - 헤쓰기가와 전투
    헤쓰기가와 전투는 1586년 시마즈 가문과 오토모 가문 간의 전투로, 도요토미 연합군이 센고쿠 히데히사의 지휘 아래 시마즈 군에게 패배했으며,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의 계기가 되었다.
  • 오와리 가토씨 - 가토 기요마사
    가토 기요마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에서 공을 세워 다이묘가 되었고 임진왜란에 참전했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지했고 구마모토 번의 내정을 다졌으나, 한국에서는 침략자로 비판받고 일본 내에서도 복잡하게 평가받는 인물이다.
  • 오와리 가토씨 - 가토 다다히로
    가토 다다히로는 에도 시대 구마모토 번의 2대 번주로, 가신단 장악 실패와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개역되어 영지를 잃고 유배 생활을 하다 생을 마감했으며, 그의 개역은 당시 조선 정세에 대한 일본의 경계심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 구마모토시 - 서부방면대
    서부방면대는 일본 육상자위대의 방면대 중 하나로, 구마모토시에 위치한 총감부를 중심으로 서부 지역의 방위 임무를 수행하며, 제4사단, 제8사단, 제15여단 등을 예하 부대로 둔다.
  • 구마모토시 - 제8사단 (육상자위대)
    제8사단은 육상자위대의 사단으로 규슈 남부 3현의 방위, 경비, 재해 파견을 수행하며, 1955년 창설 후 2018년 기동사단으로 개편되어 서부 방면대 직할 부대의 일부가 평시에도 예속되어 운용된다.
구마모토번
위치 정보
기본 정보
공식 명칭구마모토번 (熊本藩)
다른 이름히고번 (肥後藩)
위치구마모토현
번주다이묘
구마모토성의 성벽
구마모토성 천수각
호소카와 가문의 가문 문장
역사
시작1600년
종료1871년
이전가토 기요마사 (1588-1611)
마지막 번주호소카와 모리히사 (1870-1871)
정치
정치 체제다이묘
석고
석고52만 석

2. 역사적 배경

센고쿠 시대 히고국(현재의 구마모토현)은 북부의 기쿠치 씨족, 중부의 아소 씨족, 남부의 사가라 씨족이 통치했다. 이 시기에는 비교적 평화로웠으나, 아소 씨족이 기쿠치 씨족을 공격하며 긴장이 고조되었고, 아소 씨족은 내부 갈등을 겪었다. 분고 국의 오토모 씨족이 개입하여 기쿠치 영토를 평정하고 아소 씨족도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

사가라 씨족은 시마즈 씨족에 복속되어 첨단 무기와 전술을 채택했고, 아소 씨족은 규슈 정복 동안 시마즈 군대에 해체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로 시마즈 씨족은 패배했고, 구마모토 성의 가토 기요마사가 히고 국 북부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운 기요마사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토와 분고 국 쓰루사키 등 2만 석을 추가로 받아 52만 석의 구마모토번을 성립시켰다.[5]

가토 기요마사는 일본 3대 명성 중 하나인 구마모토 성을 건설하고, 조카마치와 도로망, 농업 관개 시스템을 정비했다. 오늘날에도 구마모토 주민들은 그의 토목 사업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조선 군사 원정 동안 만든 동원 및 세금 제도는 농촌 피폐와 가신 간 권력 투쟁을 야기했다는 비판도 있다.[5]

1632년 가토 씨족은 스루가 다이곤 사건에 연루되어 영지를 잃고 쇼나이에 유배되었다. 1870년 호소카와 모리히사는 실학당에 합류하여 구마모토 성 해체를 요청했으나 반대로 중단되었다. 1871년 구마모토 현이 설립되었고, 1884년 호소카와 씨족은 후작이 되었다. 198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구마모토 현 지사가 되었다.

2. 1. 센고쿠 시대 이전

센고쿠 시대 이전, 히고국(현재의 구마모토현)은 기쿠치 씨, 아소 씨, 사가라 씨 등 여러 호족들이 분할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각자의 거점을 기반으로 세력을 유지하며 비교적 평온한 시기를 보냈습니다.

각 씨족들은 히고국의 북부, 중부, 남부에 각각 거점을 두고 비교적 평온한 전국 시대 전기를 보냈습니다.

이후 기쿠치 씨족은 아소 씨족에게 흡수되는 형태가 되었지만, 아소 씨족도 내부의 후계자 다툼과 내분을 반복했습니다. 결국 분고국의 오토모 씨에 의해 옛 기쿠치 영지가 평정되었고, 아소 씨족도 그 영향력 아래에 들어갔습니다.

남쪽에서는 가고시마의 시마즈 씨의 방패 역할을 했던 사가라 씨족이 있었지만, 조총 전래 후, 근대 병기를 갖춘 시마즈 군에게 속수무책으로 항복했습니다. 아소 씨족 또한 시마즈 군에게 잇따라 성을 함락당해 멸망했습니다(시마즈 씨의 규슈 평정).

2. 2. 센고쿠 시대: 권력 투쟁과 외부 세력의 개입

센고쿠 시대 동안, 기쿠치 씨족은 아소 씨족에게 흡수되는 등 권력 구도에 변화가 생겼다. 아소 씨족은 내부 후계자 다툼과 내분을 겪었고, 결국 분고 국의 오토모 씨족이 개입하여 히고 국 북부를 평정하고 영향력을 확대했다. 남부의 사가라 씨족은 시마즈 씨족에게 복속되었고, 아소 씨족 역시 시마즈 씨족에게 멸망당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규슈 정벌로 시마즈 씨족은 히고 국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2. 3. 도요토미 정권 시대: 사사 나리마사의 실정과 히고 국인 잇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사사 나리마사에게 히고 국 통치를 명했으나, 개혁을 서두르던 사사 나리마사는 히고 국인 잇키를 초래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토 기요마사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잇키 진압을 명했고, 잇키는 종식되었다. 사사 나리마사는 책임을 지고 자결했다. 히고 국을 평정한 가토 기요마사고니시 유키나가는 히고 국의 영지를 받았으며, 가토 기요마사는 주로 북부, 고니시 유키나가는 중남부를 영지로 했다.

2. 4. 가토 가문 통치 시대 (1600년 ~ 1632년)

가토 기요마사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워 고니시 유키나가의 옛 영지와 분고국의 쓰루사키 등 2만 석을 추가로 받아 52만 석의 구마모토번을 성립시켰다.[5]

기요마사는 일본 3대 명성 중 하나인 구마모토 성을 축조하고, "구마모토(隈本)"를 "구마모토(熊本)"로 고쳤다. 또한 조카마치와 도로망을 정비하고, 신전 개발과 관개 용수 정비를 통해 치수를 도모하여 통치를 안정시켰다. 토목 건설에 힘을 쏟아 영내 기반 정비의 초석을 다진 "기요마사 공(清正公) 씨"는 오늘날 구마모토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최근 연구에서는 조선 출병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동원·징세 체제와 중신들에게 큰 권한을 부여하는 구조가 백성에게 부담을 주고,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도 이 체제가 유지되어 농촌 피폐와 중신 간 권력 다툼의 원인이 되었다는 점 등 기요마사 통치의 문제점도 지적되고 있다.[5]

가토 가문 2대 번주 다다히로간에이 9년(1632년) 스루가 다이나곤 사건에 연루되어 데와국쇼나이로 유배되었고, 가토 가문은 단절되었다.

2. 5. 호소카와 가문 통치 시대 (1632년 ~ 1871년)

1632년, 호소카와 다다토시가 부젠 국 고쿠라 번에서 54만 석으로 입봉하여 구마모토 번을 통치하게 되었다. 이후 폐번치현까지 호소카와 가문이 번주 지위를 유지했다.[6] 호소카와 가문은 가토 기요마사의 통치를 존중하여, 기요마사의 위패를 행렬 선두에 내걸고 입국했으며, 가토 가문의 가신과 히고 국인을 많이 등용했다.

호소카와 가문은 테누라는 독자적인 지방 행정 제도를 시행했다. 연공은 대략 5공 5민이었으며, 소 조야(惣庄屋)라고 불리는 해당 테누의 장이 "개장(改帳)"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 제도는 농민들에게 가혹한 부담을 주었고, 에도 시대 동안 80여 건의 백성 봉기가 발생했다.[6] 이는 전국적으로도 매우 많은 수치이다.[7]

대표적인 백성 봉기는 다음과 같다.

연도사건명내용결과
1674년 (엔포 2년)테누 부츠하라 촌 반란테누 제도에 대한 불만53명 체포 (그 중 13명 사형)[8]
1677년 (엔포 5년)시모센다 촌 반란강압적인 연공 징수에 저항17명 도망
1685년 (조쿄 2년)고카쇼 소동호소카와 쓰나토시와 고카쇼 대지주 간 분쟁막부가 고카쇼를 천령으로 편입[9]
1703년 (겐로쿠 16년)히로세 코칸 반란촌장 배척과 분촌 요구, 호소카와 치세 폐지 및 천령 편입 요구28명 체포 (그 중 1명 옥사)
1707년 (호에이 2년)아소 반란연공 납부 후 추가 징수에 항의30명 타령으로 도망



호소카와 쓰나토시 대에는 아코 사건의 아코 의사 17명을 맡아 할복을 주관했다. 츠나토시는 "아코 의사는 호소카와 가문의 수호신이다"라고 하며 묘와 공양탑을 세웠다.

구마모토 번의 재정은 에도 초부터 위태로웠다. 1712년에는 37만 냥이 넘는 빚이 있었고, 상인들로부터 공소가 일어나기도 했다.[10] 4대 번주 호소카와 노리키는 오사카의 거상에게 빚을 거절당하기도 했다.[11]

5대 번주 호소카와 무네타카1747년 에도 성 안에서 칼에 베여 사망했다. 호소카와 가문은 이를 문양 실수의 오살로 처리하고, 이후 호소카와 가문의 문양은 "호소카와 구요"로 불리게 되었다.

무네타카 사후, 동생 호소카와 시게카타가 번주가 되었다. 시게카타는 호레키 개혁을 단행하여 번정 개혁을 추진, 1755년 번교 시슈칸을 설립하고 행정과 사법을 분리, 형법을 개정하는 등 중흥의 조상으로 평가받는다.

1783년 아사마 산의 덴메이 대분화 발생 시, 구마모토 번은 막부의 명령으로 약 100000JPY의 지원금을 부담했다.[16][17][18][19]

막말에는 번론이 근왕당, 시슈칸당, 실학당의 3파로 나뉘었다. 실학당의 중심은 요코이 쇼난이었으나, 쇼난은 실각하고 후쿠이 번으로 옮겨갔다. 1864년 이케다야 사건으로 근왕당의 중심 인물 미야베 데이조가 사망하면서 시슈칸당이 주류가 되었지만, 번론은 통일되지 못했다.

보신 전쟁에서 구마모토 번은 메이지 신정부에 가담했다. 1870년, 마지막 번주 호소카와 모리히사는 지번사가 되어 화족에 올랐고, 실학당을 중심으로 번정을 이끌었다. 모리히사는 구마모토 성 해체를 요청했으나, 반대 여론으로 동결되었다.

1871년 폐번치현으로 구마모토 현이 설치되었고, 1884년 호소카와 가는 후작에 봉해졌다. 1983년에는 호소카와 가의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구마모토 현 지사에 취임했으며, 정계 은퇴 후 도예가로 활동하고 있다.

3. 역대 번주

#이름재임 기간관위조정 관직고쿠다카
가토 씨(도자마 다이묘) 1588 - 1632
1가토 기요마사1600 - 1611히고노카미 (肥後守)종5위하 (従五位下)520,000 코쿠
2가토 다다히로1611 - 1632히고노카미 (肥後守)종5위하 (従五位下)520,000 코쿠
-- 호소카와 씨(도자마 다이묘) 1632 - 1871
1호소카와 다다토시1632 - 1641사쇼쇼 (社叢書)종4위하 (従五位下)540,000 코쿠
2호소카와 미쓰나오1641 - 1649히고노카미 (肥後守)종4위하 (従五位下)540,000 코쿠
3호소카와 쓰나토시1649 - 1712엣추노카미 (越中守)종4위하 (従五位下)540,000 코쿠
4호소카와 노부노리1712 - 1732엣추노카미 (越中守)종5위하 (従五位下)540,000 코쿠
5호소카와 무네타카1732 - 1747엣추노카미 (越中守)종5위하 (従五位下)540,000 코쿠
6호소카와 시게카타1747 - 1785엣추노카미(越中守)종5위하 (従五位下)540,000 코쿠
7호소카와 하루토시1785 - 1787엣추노카미 (越中守)종4위하 (従五位下)540,000 코쿠
8호소카와 나리시게1787 - 1810엣추노카미 (越中守)종4위하 (従五位下)540,000 코쿠
9호소카와 나리타쓰1810 - 1826엣추노카미 (越中守)종4위하 (従五位下)540,000 코쿠
10호소카와 나리모리1826 - 1860엣추노카미 (越中守)종4위하 (従五位下)540,000 코쿠
11호소카와 요시쿠니1860 - 1870엣추노카미 (越中守)종4위하 (従五位下)540,000 코쿠
12호소카와 모리히사1870 - 1871없음종4위하 (従五位下)540,000 코쿠



가토 기요마사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옛 영지를 획득하고, 분고국 내 쓰루사키 등 2만 석을 추가로 받아 52만 석으로 구마모토번을 성립시켰다.[5] 그는 구마모토 성을 축조하고, 조카마치와 도로망, 농경지 개간과 관개 시설을 정비했다. "기요마사 공(清正公)"은 오늘날 구마모토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5] 그러나 조선 출병을 위한 동원 및 징세 체제는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고,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도 유지되어 농촌 피폐와 권력 다툼의 원인이 되었다는 비판도 있다.[5]

1632년, 가토 가문스루가 다이나곤 사건에 연루되어 영지를 몰수당하고 쇼나이로 유배되었고, 호소카와 다다토시고쿠라번에서 들어와 히고 국 전체와 분고국 중 쓰루사키 2만 석을 포함, 총 54만 석을 다스렸다.[6] 이후 폐번치현까지 호소카와 가문이 번주로 이어졌다.

3. 1. 가토 가문 (도자마 다이묘, 52만 석)

도자마 다이묘였던 가토 가문은 1600년부터 1632년까지 구마모토번을 다스렸다.

이름초상관위재임 기간향년비고
1가토 기요마사
종4위히고노카미게이초 5년 ~ 게이초 16년
(1600년 ~ 1611년)
49
2가토 다다히로
종4위지주게이초 16년 ~ 간에이 9년
(1611년 ~ 1632년)
52



가토 기요마사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워 고니시 유키나가의 옛 영지를 획득하고, 분고국 내 쓰루사키 등 2만 석을 추가로 받아 총 52만 석을 다스리며 구마모토번을 성립시켰다.[5] 그는 일본 3대 명성 중 하나인 구마모토 성을 축조하고, "구마모토(隈本)"를 "구마모토(熊本)"로 고쳤다. 또한 조카마치와 도로망을 정비하고, 농경지 개간과 관개 시설 정비를 통해 통치를 안정시켰다. 이러한 노력으로 "기요마사 공(清正公)"은 오늘날 구마모토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5]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는 조선 출병을 위한 동원 및 징세 체제, 중신들에게 큰 권한을 부여한 구조가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고,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도 유지되어 농촌 피폐와 권력 다툼의 원인이 되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5]

2대 번주 가토 다다히로1632년 스루가 다이나곤 사건에 연루되어 영지를 몰수당하고 데와국쇼나이로 유배되었고, 가토 가문은 단절되었다.

3. 2. 호소카와 가문 (도자마 다이묘, 54만 석)

細川氏일본어1632년부터 1871년까지 구마모토번을 다스린 도자마 다이묘 가문으로, 54만 석의 영지를 다스렸다.



1632년, 부젠국 고쿠라번에서 호소카와 다다토시가 들어와 히고 국 전체와 분고국 중 쓰루사키 2만 석을 포함, 총 54만 석을 다스렸다.[6] 이후 폐번치현까지 호소카와 가문이 번주로 이어졌다. 구마모토는 지방 호족들의 반란이 잦아 다스리기 어려운 곳으로 알려졌는데, 호소카와 다다토시는 인기가 많았던 가토 기요마사의 통치를 존중하여 기요마사의 위패를 행렬 선두에 세우고 입국했으며, 가토 가문의 가신과 히고 국인을 많이 등용했다고 한다.

호소카와 가문은 테누라는 독자적인 지방 행정 제도를 시행했다. 연공은 대략 5공 5민이었으며, 소 조야(惣庄屋)라고 불리는 해당 테누의 장이 "개장(改帳)"을 기록했다. 이 제도 때문에 농민에 대한 압박은 심했고, 에도 시대 동안 80여 건(가토 가문 2건, 호소카와 가문 82건)의 백성 반란이 발생했다.[7] 이는 전국적으로 보아도 많은 편에 속한다.

3대 호소카와 쓰나토시 때, 오이시 요시오아코 사건의 의사 17명을 시로카네 저택에 맡아두고 할복을 주관했다. 츠나토시는 "아코 의사는 호소카와 가문의 수호신이다"라고 하며, 유발을 나누어 받고 할복 장소에 묘와 공양탑을 세웠다.

번 재정은 에도 초부터 어려웠으며, 호소카와 쓰나토시처럼 역사를 많이 거느리는 무단파 번주가 나와 불필요한 낭비를 거듭했다. 1712년에는 37만 냥이 넘는 빚이 있었으며, 상인으로부터 소송이 일어났다. 번은 에도와 오사카의 대 상인으로부터 막대한 빚을 여러 번 떼어먹었고, 대 상인들에게는 가난한 호소카와라고 미움을 받았다고 한다.[10] 4대 호소카와 노부노리는 오사카의 고노이케 가문에 빚을 거절당했다.[11]

5대 호소카와 무네타카1747년 에도성 안에서 하타모토 이타쿠라 가쓰요리에게 칼에 베여 사망했다. 호소카와 가문에서는 사람의 실수(문양이 비슷한 이타쿠라 가쓰키요와의 오인)에 의한 것으로 하고, 이후 호소카와 가문의 문장인 구요 문은 "호소카와 구요" "떨어진 구요"라고 불리게 되었다.

센다이번주 다테 무네무라의 조언으로, 이미 죽었던 무네타카는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으로 하고 호소카와 저택으로 몰래 옮겨져 다음날 사망한 것으로 되었다. 동생인 호소카와 시게카타가 급히 번주 자리에 올랐다. 아사노 가문과 절연 상태에 있는 은인인 다테 가문을 배려해[13], 아코 의사의 유품은 파괴되었다.[14]

호소카와 시게카타는 호리 가쓰나를 대봉행으로 발탁하여 검약과 지출 삭감을 추진하고, 1755년에는 번교 시슈칸을 열고 행정과 사법을 분리하여 형법을 개정(율령법 참조)하는 등 호레키의 개혁을 실시하여 중흥의 조상이 되었다.

막말에는 번론이 근왕당, 시슈칸당, 실학당의 3파로 나뉘었다. 실학당의 중심은 요코이 쇼난이었다. 쇼난은 번정 개혁에 힘썼지만 실각, 1858년후쿠이번주 마쓰다이라 요시나가의 권유로 정치 고문으로서 후쿠이번으로 옮겼다.

보신 전쟁에서는 삿초 주도의 메이지 신정부에 가담하여, 에도 무혈 개성 후에는 우에노간에이지 일대에 농성한 쇼기대 토벌에 참전했다.

4. 지번

구마모토 번의 지번은 다음과 같다.


  • 우토 번
  • 히고신덴 번 (이후 다카세 번)

5. 주요 가신

센고쿠 시대 동안, 기쿠치 씨족, 아소 씨족, 사가라 씨족은 각각 히고 국 북부, 중부, 남부 지역에 기반을 둔 강력한 다이묘였다. 시마즈 씨족의 통치 하에 있던 사가라 씨족은 남부 지역의 방어 역할을 포기하고 첨단 무기와 전술을 채택했다. 아소 씨족은 규슈 정복 동안 시마즈 군대에 의해 해체되었다. 규슈 정복 직전, 시마즈 씨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패배했다. 히데요시는 오이타와 오토모의 간청에 응하여 규슈를 제압할 군대를 소집했고, 여기에는 시마즈 씨족이 버린 히고 지역도 포함되었다.

구마모토 번의 주요 가신은 다음과 같다.


  • 조케 삼가
  • * 마쓰이 씨 (역대 야쓰시로성 대리이며, 실질적인 야쓰시로 지번주)
  • * 요네다 씨 (호소카와 별성인 나가오카 성도 허용)
  • * 아리요시 씨

  • 일문 가신
  • * 호소카와 타다타카의 내선가
  • * 호소카와 오키타카의 형부가


지번으로는, 후에 우토번과 히고 신전번(후에 다카세번)이 생겼다. 야쓰시로성은 일국일성령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막말에는 번론이 근왕당, 시슈칸당, 실학당의 3파로 나뉘었다. 실학당의 중심은 요코이 쇼난이었다. 쇼난은 번정 개혁에 종사했지만 실각, 안세이 5년(1858년)에 후쿠이번주 마쓰다이라 요시나가의 권유로 정치 고문으로서 후쿠이번으로 옮겼다.

안세이 7년(1860년), 사쿠라다몬 밖의 변에서는 오세키 카즈시로 등 4명은, 구마모토 번 저택의 8대 나리아키에게 취지서를 제출하고 자수했다.

겐지 원년(1864년)의 이케다야 사건에서, 근왕당의 중심 인물 미야베 테이조가 사망했다. 이로 인해 시슈칸당이 주류가 되었지만, 번론은 불통일 상태였다.

보신 전쟁에서는, 삿초 주도의 메이지 신정부에 가담하여, 에도 무혈 개성 후에는, 우에노의 칸에이 사 일대에 농성한 쇼기대의 토벌에 참전했다.

5. 1. 가토 가문 시대

센고쿠 시대 말, 시마즈 씨족에게 패한 구마모토 성의 성주 가토 기요마사는 히고 국 북부 지역 25만 석을 다스렸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토와 분고 국 쓰루사키 등지에서 2만 석을 추가로 얻어 총 52만 석을 다스리며 구마모토 번을 성립시켰습니다.[5]

가토 기요마사는 일본 3대 명성 중 하나인 구마모토 성을 축조하고, 성읍과 도로망을 정비했습니다. 또한, 새로운 농경지와 관개 시설을 통해 농업 생산량을 늘렸습니다. 오늘날 구마모토 주민들은 그의 토목 사업이 지역 번영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가토 기요마사임진왜란 (분로쿠·게이초의 역) 당시 동원 및 세금 제도를 만들어 농민들에게 부담을 주었고,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도 이 제도가 유지되어 농촌 피폐와 가신 간 권력 다툼의 원인이 되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습니다.[5]

1632년, 가토 가문 2대 다다히로스루가 다이나곤 사건에 연루되어 영지를 몰수당하고 데와 국 쇼나이로 유배되면서 가문이 단절되었습니다.

5. 2. 호소카와 가문 시대

1632년, 가토 씨족은 지도자가 스루가 다이나곤 사건에 연루되어 영지를 잃으면서 몰락했다.[5] 그는 쇼나이에 유배되었고, 가문은 단절되었다.

호소카와 씨족은 1884년에 후작이 되었다. 1983년에는 훗날 79대 총리가 된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도예를 위해 은퇴하기 전 구마모토현 지사가 되었다.

호소카와 가문 시대의 주요 가신들은 다음과 같다.

가신
마쓰이 씨
호리 씨
미야모토 씨
아리요시 씨
오쓰카 씨
미우라 씨


  • 마쓰이 씨는 호소카와 시대에 번의 재정 관리와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담당했다.
  • 모리모토 씨는 구마모토성 축성 시에 중역을 맡았다고 전해진다.
  • 요코이 씨는 가토 시대와 호소카와 시대 모두 가신단 내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했다.

6. 번의 재정과 경제

구마모토번의 재정은 에도 시대 초기부터 위태로웠다. 쓰나토시와 같이 역사를 많이 거느리는 무단파 번주가 나와 불필요한 낭비를 거듭했다. 쇼토쿠 2년(1712년)에는 37만 냥이 넘는 빚이 있었고, 상인들로부터 외면받기도 했다.[10] 4대 노리키는 오사카의 호상 고노이케 가문에 빚을 거절당했다.[11]

5대 무네타카에도성 안에서 하타모토 이타쿠라 가쓰요리에게 칼에 베여 사망했다. 호소카와 가문에서는 사람의 실수(문양의 실수)에 의한 것으로 하고, 이후 호소카와 가문의 가문인 구요 문은 "호소카와 구요", "떨어진 구요"라고 불리게 되었다. 다만, 참극이 "유한"(호소카와 가문의 별저에서 비가 올 때마다 배수가, 인접하는 가쓰요리의 저택으로 흘러들어온 것을 원한으로 여김)에 의한 것이며, 처음부터 무네타카가 표적이었다는 설도 있다.[12]

센다이번주 다테 무네무라의 기지를 살린 조언으로, 이미 죽었던 무네타카는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으로 하고 호소카와 저택으로 몰래 옮겨지고, 다음날 사망한 것으로 되었다. 동생인 시게카타가 급히 번주의 자리에 올랐다. 아사노 가문과 절연 상태에 있는 은인인 다테 가문을 배려해[13], 아코 의사의 유구는 파괴되었다.[14] 마찬가지로 전해져 내려온 칼이나 의류 등의 의사 유품도 처분되었다.[15]

시게카타는 호리 가쓰나를 대봉행으로 발탁하여 검약과 지출 삭감을 추진, 호레키 5년(1755년)에는 번교 시슈칸을 열고, 행정과 사법을 분리하여 형법을 개정(율령법 참조)했다. 또한 번의 기구를 정비하는 등 호레키의 개혁을 행하여, 중흥의 조상이 되었다.

덴메이 3년(1783년)에 아사마 산의 덴메이 대분화가 발생했다. 이때, 막부의 명령을 받은 구마모토번은 약 10만 냥(약 100억 원)의 지원금을 부담했다.[16][17][18][19]

7. 메이지 유신 이후

1870년, 마지막 번주였던 모리히사는 지번사가 되었고, 화족에 포함되었다. 모리히사는 실학당을 번정의 중심으로 삼았다. 그는 구마모토 성의 해체를 신정부에 요청하여 허가를 받았으나, 해체를 아쉬워하는 목소리 때문에 해체 방침은 중단되었다.

1871년 폐번치현에 의해 구마모토 번은 구마모토 현이 되었다. 1884년 호소카와 가문은 후작 작위를 받았다.

1983년에는 호소카와 가문 제18대 당주 호소카와 모리히로(이후 내각총리대신 역임)가 구마모토 현지사에 취임했다. 그는 정계 은퇴 후 도예가로 활동하고 있다.

8. 번저

호소카와 씨가 입부한 이후의 에도 번저(상저)는 에도성 근처의 다이묘코지에 있었으며, 에도 시대 동안 변동이 없었다(단, 에도성의 확장으로 인해 면적이 감소는 있었다).[25] 이사라고다이(현재의 미나토구 다카나와 및 시로카네)에 중저[26]가 있었다. "호소카와가 문서"에서는 당초에는 하저였으나, 에도 후기에는 중저가 된 것으로 보인다. 하저는 니혼바시에 있었으나, 미타의 사이카이 사(지후쿠 사) 부근으로 옮겨졌다(현재의 미타 3초메. 앞에 "겐나 기리시탄 순교의 땅" 비석이 있다).

참조

[1] 서적 The Meiji Restoration: Japan as a Global Nation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0-05-07
[2] 서적 Kyushu: Gateway to Japan: A Concise History https://books.google[...] Global Oriental 2008-12-18
[3] 서적 Essays on the Modern Japanese Church: Christianity in Meiji Japan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2020-08-06
[4] 서적 The East Asian War, 1592-1598: International Relations, Violence and Memory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4-12-05
[5] 서적 シリーズ・織豊大名の研究 第二巻 加藤清正 戒光祥出版 2014
[6] 서적 肥後藩の百姓一揆 熊本大学
[7] 서적 百姓一揆の年次的研究
[8] 간행물 肥後藩の政治 熊本藩史料集成
[9] 문서
[10] 문서
[11] 서적 細川家の700年 新潮社 2008
[12] 서적 醇堂叢稿
[12] 서적 旗本御家人
[13] 서적 伊達治家記録
[14] 문서
[15] 서적 堀内伝右衛門覚書
[16] 웹사이트 熊本地震と浅間大噴火 〜 熊本藩民10万両(100億円超)の支援金 https://readyfor.jp/[...]
[17] 웹사이트 群馬県・浅間山大噴火から240年 https://web.archive.[...] 蒲島郁夫 2022-08-17
[18] PDF 広報つまごい 令和4年9月号 https://www.vill.tsu[...]
[19] 논문 浅間押し240周年追悼記念誌 天明3年浅間山噴火災害復興における熊本藩の貢献
[20] PDF 天明浅間山噴火 報告書 復興への努力と災害の記憶 https://www.bousai.g[...]
[21] PDF 天明浅間山噴火と利根川水系 https://www.stc.or.j[...]
[22] PDF 浅間山北麓ジオパーク通信 あさまびと vol.21 2022夏号 http://mtasama.com/w[...]
[23] 문서
[24] 서적 幕末証言 史談会速記録を読む 2017
[25] 문서
[26] 간행물 肥後文献叢書
[27] 웹사이트 熊本藩主細川家墓所 https://bunka.nii.ac[...]
[28] 뉴스 熊本藩主細川家の墓に赤い液体 熊本市の国史跡「四つ御廟」 市は被害届を提出へ 熊本日日新聞 2023-02-09
[29] 웹사이트 旧高旧領取調帳データベース https://www.rekihaku[...]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