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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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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세당은 1629년에 태어나 1703년에 사망한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1660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예조좌랑, 병조좌랑, 홍문관교리 등을 역임했다. 소론으로 노론의 송시열과 대립하며 정치적 갈등을 겪었고, 1702년 이경석의 비문을 쓴 일로 탄핵을 받아 옥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는 《사변록》, 《색경》 등의 저서를 통해 주자학적 학풍을 비판하고 실용적인 학문 태도를 보였으며, 실학 사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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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당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박세당
한자 이름朴世堂
박세당 초상
출생일1629년 음력 8월 10일
출생지조선 한성부
사망지조선 한성부에서 귀양길을 떠나가던 중 노환으로 병사
사망일1703년 음력 8월 21일 (향년 75세)
국적조선
직책조선의 홍문관 수찬
임기1667년 3월 2일~1668년 2월 29일
임금조선 현종
계긍(季肯)
서계(西溪)
시호문정(文貞)
학력1660년 (현종 1년) 증광 문과에 장원급제
분야성리학
정당서인 출신 소론 세력
배우자의령 남씨
자녀슬하 3남 2녀 (그 중 아들 박태유(朴泰維), 박태보(朴泰輔), 박태한(朴泰翰))
아버지박정
어머니양주 윤씨
친인척박세채(8촌 아우), 남구만(처남), 남이성(처숙부)

2. 생애

1629년(인조 7년) 음력 8월 10일 전라남도 남원부 관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의정부좌참찬 박동선이며 아버지는 이조참판 박정이다. 어머니는 관찰사 윤안국(尹安國)의 딸인 양주 윤씨(楊州尹氏)이다. 당대의 명문가였으나 4살 때 부친이 병사한 이후로 가세가 기울어 10세가 되어서야 글을 배울 수 있었다.

소년 시절 고모부인 교관 남사무에게 글을 배운 뒤[1] 처남 남구만, 처숙부 남인성(南仁星) 등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였다. 병자호란 발생 후 피난 중 재산을 잃고, 조모·모친·두 형과 함께 강원도 원주·충청북도 청풍·경상북도 안동을 전전하며 피난생활을 하였다.

1660년(현종 1년) 32세에 증광 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이후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홍문관교리, 홍문관교리 겸 경연시독관 등의 삼사의 요직을 역임한 뒤 함경북도병마평사로 나가기도 했다. 1664년 황해도 암행어사로 나갔으며, 1694년 갑술옥사에 승지가 되고 공조판서를 거쳐 1700년(숙종 26년) 음력 8월엔 이조판서직이 내려졌다.

소론 출신으로 노론계의 송시열과 대립하였고, 이로 인해 노론에게 여러 번 비난을 받자 정치에 뜻을 버리고 경기도 양주 석천동으로 물러나 농사를 지으면서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몰두했다.

1702년(숙종 28년) 이경석의 비문을 지은 것이 계기가 되어 정치적인 박해를 받았다. 비문 속에는 송시열의 인품이 이경석의 인품보다 못하다는 내용이 있어, 노론에게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삭탈관직 당하고 옥과로 유배되었다. 1703년(숙종 29년) 《사변록》을 저술하여 주자학적인 학풍을 비판하고 독자적인 견해를 발표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사문난적으로 몰렸다고도 한다.[2]

관직에서 물러난 뒤 노자도덕경, 장자의 연구를 통해 주자학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또한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훼손된 공맹(孔孟)의 본뜻을 밝힌다는 입장에서 사변록을 저술하였다.

박세당의 제자인 이탄, 이인엽 등의 소청으로 석천동으로 돌아왔으나 귀환한 지 3개월 만에 죽었다.[1]

2. 1. 생애 초기

1629년(인조 7년) 음력 8월 10일 전라남도 남원부 관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의정부좌참찬 박동선이며 아버지는 이조참판 박정이다. 어머니는 관찰사 윤안국(尹安國)의 딸인 양주 윤씨(楊州尹氏)이다.

당대의 명문가였으나 박세당이 4살 때 부친이 병사한 이후로 가세가 기울어 10세가 되어서야 글을 배울 수 있었다. 17세 때 의령 남씨 남일성(南一星)의 딸이자 남구만의 누이와 결혼하여 태유(泰維)와 태보(泰輔), 태한(泰翰) 세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소년 시절 고모부인 교관 남사무에게 글을 배운 뒤[1] 처남 남구만, 처숙부 남인성(南仁星) 등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는 데 힘썼다.

같은 서인이자 온건파 소론이었던 박세채 역시 그의 일족이었다. 4살 때 아버지가 병사하였고 7살 때에는 큰 형인 박세규(朴世圭)마저 요절하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였다. 병자호란이 발생하면서 피난 중 재산을 잃고, 조모·모친·두 형과 함께 강원도 원주·충청북도 청풍·경상북도 안동을 전전하며 피난생활을 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형편이 어려워 청주·천안 등지로 옮겨다니며 곤궁한 생활을 영위하였다.

2. 2. 관료 생활

1660년(현종 1년) 32세의 나이로 증광 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이후 예조좌랑, 병조좌랑,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홍문관교리, 홍문관교리 겸 경연시독관 등의 삼사의 요직을 역임한 뒤 함경북도병마평사로 나가기도 했다.

1664년 황해도 암행어사로 나갔다. 1667년 이조좌랑이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장형을 받았다. 그 해 동지사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94년 갑술옥사에 승지가 되고 공조판서를 거쳐 1700년(숙종 26년) 음력 8월엔 이조판서직이 내려졌다.

박세당은 소론 출신으로 노론계의 송시열과 대립 관계였다. 이러한 연유로 노론에게 여러 번 비난을 받자 정치에 뜻을 버리고 경기도 양주 석천동으로 물러나 농사를 지으면서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몰두했다.

2. 3. 탄핵과 유배

1702년(숙종 28년) 이경석의 비문을 지은 것이 계기가 되어 정치적인 박해를 받게 되었다. 비문 속에는 송시열의 인품이 이경석의 인품보다 못하다는 내용이 있어, 노론에게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삭탈관직 당하고 옥과로 유배되었다. 일설에는 1703년(숙종 29년) 《사변록》을 저술하여 주자학적인 학풍을 비판하고 독자적인 견해를 발표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사문난적으로 몰렸다고 한다.[2]

홍계적(1680-1722)이 유생 108명과 함께 비난의 포문을 열었다. 이들은 박세당의 글이 성인을 업신여겼으며 정인(正人)을 욕했다고 단정한 뒤, 이경석 비문과 사변록을 거두어 불태움과 동시에 엄중한 벌을 내려달라고 청했다. 이에 대해 국왕은 즉시 삭탈관직과 함께 문 밖에 내치는 조치를 취했고, 유신(儒臣)들에게 조목조목 따져 잘못을 지적한 글을 올리게 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그는 사서(四書)는 물론 노자도덕경, 장자의 연구를 통해 주자학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또한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훼손된 공맹(孔孟)의 본뜻을 밝힌다는 입장에서 사변록을 저술하였다. 이러한 학문 태도로 인해 그는 주자학에 경도된 당시의 지배세력으로부터 여러 차례 비난을 받았다.

2. 4. 석방과 사망

노론 김창흡 등이 가장 먼저 팔을 걷고 서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박세당의 제자인 수찬 이탄(李坦)과 이인엽(李仁燁) 등이 구명소를 올려 반박했다. 이탄은 후일 서계의 연보를 작성한 사람이며 이인엽은 상소로 서계가 유배에서 풀려날 수 있도록 하였다.[1] 박세당의 제자인 이탄, 이인엽 등의 소청으로 석천동으로 돌아왔으나 귀환한 지 3개월 만에 죽었다.[1]

3. 사상과 신념

박세당은 관직에서 물러난 뒤 노자도덕경, 장자 등을 연구하며 주자학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그는 후대 학자들이 공맹(孔孟)의 본뜻을 훼손했다고 보고, 《사변록》을 저술하여 이를 바로잡고자 하였다. 이러한 학문 태도는 당시 주자학에 경도된 지배세력으로부터 여러 차례 비난을 받게 했다.[4]

그의 학문은 귀납적 방법론과 실용적 경향성을 특징으로 한다. 귀납적 방법론은 《사변록》, 《신주도덕경(新註道德經)》, 《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 등에 잘 나타나 있으며, 실용적 경향성은 농사 방법에 대해 논한 《색경(穡經)》에서 잘 드러난다. 주자성리학 이외의 학문을 이단시하던 당시 상황에서 《도덕경》, 《남화경》을 주석한 것은 그의 독자적인 학문 태도를 보여준다. 그는 《사변록》에서 사서(四書)에 대한 주자의 주석을 고쳐 쓰고, 《대학》과 《중용》의 장구(章句) 편차마저 뜯어 고치는 과감성을 보였다. 박세당은 고루하고 진부한 전통에 대항한 비판적 지식인이자 올곧은 선비였으며, 당대 최고의 학자 중 한 명이었다.[4]

3. 1. 학문적 태도

관직에서 물러난 뒤 그는 사서(四書)는 물론 노자도덕경, 장자의 연구를 통해 주자학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또한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훼손된 공맹(孔孟)의 본뜻을 밝힌다는 입장에서 《사변록》을 저술하였다. 이러한 학문 태도로 인해 그는 주자학에 경도된 당시의 지배세력으로부터 여러 차례 비난을 받았다.[4]

그의 학문적 태도는 귀납적 방법론(하학이상달, 下學而上達)과 실용적 경향성이 특징이다. 귀납적 방법론은 그의 저작인 《사변록》, 《신주도덕경(新註道德經)》, 《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 등에 잘 나타나 있으며, 실용적 경향성은 농사 방법에 대해 논한 《색경(穡經)》에서 잘 드러난다. 주자성리학 밖의 일체 학문에 대해 이단시하던 당시 상황에서 《도덕경》이나 《남화경》을 주석한 것에서부터 벌써 그의 학문의 독자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더욱이 그는 《사변록》에서 사서(四書)에 대한 주자의 주석을 고쳐 쓰며 특히 《대학》과 《중용》에 이르러서는 그 장구(章句)의 편차마저 뜯어 고치는 과감성을 보이고 있다. 한마디로 박세당은 고루하고 진부한 전통에 대항한 비판적 지식인이자 올곧은 선비였으며, 또한 당대 최고의 반열에 오를 만한 뛰어난 학자였다.[4]

4. 저서

5.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조부박동선(朴東善)1562년 ~ 1640년
조모이효옥(李孝玉)1566년 ~ ?[3]
부친박정(朴炡)1596년 ~ 1632년
모친양주 윤씨(楊州尹氏)윤안국(尹安國)의 딸
작은아버지박형(朴炯)1597년 ~ ?
고모박정이(朴貞伊)1598년 ~ ?
박세규(朴世圭)1613년 ~ ?, 요절
박세견(朴世堅)1619년 ~ 1683년
누나박지순(朴至順)1624년 ~ ?
박세후(朴世垕)1627년 ~ ?
정부인의령 남씨남일성(南一星)의 딸, 남구만의 누이
장남박태유(朴泰維)1648년 ~ 1698년
장자부경주 김씨김하진(金夏振)의 딸
손녀이덕부(李德孚)에게 출가
장자부해주 정씨정직(鄭)의 딸
손자박필기(朴弼基)
손자박필모(朴弼謨)차남 박태보(朴泰輔)에게 양자로 감
차남박태보(朴泰輔)1654년 ~ 1689년, 형 박세후(朴世垕)에게 양자로 출계
차자부전주 이씨완남부원군 이후원(李厚源)의 딸
계부인광주 정씨정시무(鄭時武)의 딸
3남박태한(朴泰翰)
자부황식(黃植)의 딸
손자박필규(朴弼逵)
장녀정랑 이렴(李濂)의 처
차녀김홍석(金弘錫)의 처
측실미상
서녀여필건(呂必建)의 처


6. 평가 및 영향

그의 학문과 행적에 대한 논란은 사후에도 계속되어 1722년에 문절(文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가 1723년(경종 3년) 문정(文貞)으로 개시되었다.[1] 서계박세당묘역은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에 있으며, 2002년 9월 16일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13호로 지정되었다.[1]

7. 대중 매체

1995년 SBS 드라마 《장희빈》에서 배우 장인한이 박세당 역을 연기했다.[1]

8. 기타

숙종 실록에는 박세당과 관련된 글이 115건, 사변록|사변록중국어 관련 글이 18건이나 실려 있으며, 1703년(숙종 29년)에만 10여 건이 실려 있을 정도로 박세당은 당대 주요 인물이었다.[1] 삭탈관직되어 유배형에 처해졌던 그는 이인엽이 상소를 올려 풀려나 석천동 정침에서 임종을 맞이했다.[1]

규장각에 있는 [남원부읍지]에 따르면, 박세당의 부친 박정은 1629년 10월에 남원 부사로 부임했으나 1년 후 부상으로 1630년 사직하고 한양으로 돌아왔다.[1] 1631년 1월 대사간으로 제수된 후 한 달여 만에 대사헌과 대사간을 오가다가 10월에 이조참판, 3개월여 후에는 홍문관 부제학을 제수받았다.[1] 이때 몸이 좋지 않아 면직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1632년 6월 27일에 세상을 떠났다.[1] 만약 박세당이 1629년 8월 10일에 태어난 것이 맞다면, 만삭의 부인이 남원까지 갈 수 없었다고 보아야 하므로 한양에서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

참조

[1] 뉴스 http://weekly.hankoo[...]
[2] 서적 실학의 발생 글로벌세계대백과
[3] 문서 익양군의 증손녀
[4] 웹사이트 사변록 http://zmanz.blog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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